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528화 (528/608)

제528화

“진짜 싫어요.”

한동안 나를 관찰하듯 바라보던 카노스가 피식 웃었다. 뻗어진 손길이 내 눈가를 가만히 쓸었다. 얼굴이 젖어 있다는 걸 조금 뒤에야 깨달았다.

“귀여운 후배님. 내 마음에 점점 더 들어서 어쩌려고. 생각해주는 건 기특한데, 이러면 오히려 역효과야.”

“……네?”

“난 이기적이라 내 만족이 더 우선이거든.”

한층 다정해진 얼굴로 할 말은 아니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아서 더더욱. 서럽고 기가 막힌 기분에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았다. 아마도 엉망으로 흐트러졌을 내 얼굴을 본 카노스는 난처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하지만 후배님의 고집도 만만치 않을 것 같네. 엘퀴네스답지 않게 순해 보여서 방심했는데, 생각해 보니 애초에 육신까지 포기하고 훌쩍 떠나온 것만 봐도 보통은 아니란 말이지. 뭘 어떻게 해도 포기할 것 같지 않으니 특단의 조치를 해볼까?”

특단의 조치? 어감에서부터 느껴지는 불길함에 얼굴이 절로 굳었다. 그게 뭐든 하지 말라고 고개를 저으려 했다. 하지만 카노스의 반응이 더 빨랐다. 어느덧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부터 재밌는 경험을 하게 해줄게.”

주위를 돌아보기 무섭게 어디선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동시에 불이 꺼진 것처럼 사방이 캄캄해졌다.

“……카노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이름을 불러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먹물 같은 암흑에 잠긴 공간이 다시 밝아질 것 같지도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돌아가는 상황을 조금도 모르겠다. 혹시 날 어딘가에 가둬둔 건가? 아무 짓도 못 하게 하려고?

황당했지만 계속 이렇게 있을 순 없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파이어 버스터를 지팡이 삼아 보이지 않는 공간을 더듬어가면서 걸어갔다. 갇혀 있다면 어딘가에는 끝이 있을 테니까. 정 안 되면 엘뤼엔에게 구출을 요청해야겠지만, 카노스 성격에 그런 틈을 뒀을까 싶어서 좀 불안해졌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빛이 훅 들어왔다. 시린 눈을 깜빡이다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광경에 다시 황당해졌다.

두 사람이 검을 들고 싸우고 있었다. 검날이 뭉툭한 걸 보니 아마도 대련 중인 것 같았다. 다소 여유로운 한쪽과는 달리 다른 한쪽은 막아내기에만 급급했다. 아니 사실 상대가 봐주고 있는 거지 제대로 막아내는 것도 거의 없었다. 턱 끝까지 숨이 차오른 얼굴로 헉헉거리는 것도 한 사람뿐이었다. 문제는 그 사람의 얼굴이 매우 낯익다는 점이었다.

“아인 이드리스?”

환상일까. 한창 대련에 집중하고 있는 그들은 나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곧 자세가 무너진 아인 이드리스가 바닥에 엎어졌다. 거의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던 상대가 혀를 차며 검을 거두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 수고하셨습니다…….”

일어나지도 못한 채 간신히 답하는 그를 대련한 상대가 복잡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정령술에 더 집중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이드리스 님은 검술에 재능이 없습니다. 호신술로 배워두는 정도라면 몰라도 이대로는 몸만 크게 상할 겁니다.”

“……충고 감사합니다.”

대답하는 아인 이드리스는 누가 봐도 억지로 웃는 얼굴이었다. 대련 상대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부르는 법인데. 무슨 입검을 하겠다고.”

지나치며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아인 이드리스는 그 말을 들었는지 입술을 악물었다.

“아인.”

이윽고 대련장에 혼자 남겨진 그에게 다른 이가 다가왔다. 미네르바였다. 그가 훈련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는지 표정이 흐렸다. 그 기척을 느낀 아인 이드리스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요, 미네르바.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말아주세요.”

“…….”

“압니다. 제가 지금 억지를 부리고 있죠. 그건 누구보다 제가 제일 잘 압니다. 그래도 꿈은 꿀 수 있는 거잖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엘은 정령술에도 검술에도 능숙합니다. 저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잘못된 겁니까?”

“사람은 저마다 주어진 것들이 다르단다. 남과 비교할 필요는 없어.”

“그래요. 다들 다르죠. 많이 가진 쪽이 있다면 적게 가진 쪽도 있습니다. 그래서 억울한 겁니다. 많이 가진 쪽이 왜 제가 될 수는 없는 겁니까? 왜 그게 제가 아닙니까?”

서러워하는 표정에 미네르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대신 그를 가만히 끌어안고 다독였다.

“아인, 그걸 내려놓아야 한다. 내려놓고 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을 거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그렇겠지. 아무것도 불안해할 것도 없다. 다 거쳐 가는 과정이란다.”

눈을 질끈 감은 아인 이드리스는 미네르바의 품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걸 지켜보는 내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카노스가 왜 이런 환상을 보여주는 걸까. 이미 지나간 일인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여주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는 건지 초조한 기분을 느끼고 있으려니 다음 순간 장면이 훅 바뀌었다.

“아인 님!”

이번에 등장한 건 아나이스 왕녀였다. 맑은 웃음을 지은 왕녀가 아인 이드리스를 향해 칭찬의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아인 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매일 일정만으로도 바쁘실 텐데 하루도 빠짐없이 몸을 단련하시고. 전술도 공부하신다면서요?”

“그래 봤자 보잘것없는 수준입니다.”

“겸손하기까지 하시니 더 굉장해요. 두 가지 능력을 같이 익히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저도 잘 알아요. 남들이 엄두도 내지 못하는 걸 시도하시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고요.”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래도 저보다 대단한 사람들이 더 많으니까요. 엘만 해도 정령검사이니…….”

“하지만 그분은 상급 정령사잖아요. 아인 님은 정령왕의 계약자고요. 더 큰 힘을 지닌 만큼 다른 능력을 익히는 게 더 어려워질 수밖에요. 전 아인 님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아인 님의 재능과 열정이면 분명 해내실 거예요!”

반짝이는 눈동자가 열기를 담고 응시했다. 동경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에 아인 이드리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고맙습니다.”

환상이 또 바뀌었다. 이번 등장인물도 아나이스 왕녀와 아인 이드리스였다. 하지만 조금 전의 화목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이번엔 왕녀가 서럽게 울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나이스 님? 저한테 말씀해보세요.”

“아인 님…….”

눈물을 가득 머금은 왕녀가 아인 이드리스에게 매달리듯 흐느꼈다.

“어떡하죠? 전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인어를 지배할 수 있대요. 우리 일가에서 여성에게 이어지는 힘이래요.”

“예…?”

“성인식에서 세례를 받고 나면 능력을 완전히 각성할 수 있대요. 그런데 그 능력을 각성하면 제가 다른 인격으로 변한대요. 세이렌의 혼이 강림해서 제 몸을 장악한대요.”

“그게 무슨…….”

“오라버니가 어머니와 나눈 서신에서 읽었어요. 제가 눈치채면 세례를 거부하고 도망갈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요. 저는 너무 무서워요. 제가 아니게 되면 어떻게 하죠?”

혼란스럽게 일렁이던 아인 이드리스의 표정이 차츰 차분해졌다. 그가 우는 왕녀를 억지로 일으켜 똑바로 마주 보게 했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정말이요?”

“예, 왕녀님. 전 당신의 기사잖습니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 모든 힘을 다해서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이후로 왕녀는 왕세자와 반목하기 시작했다. 왕세자가 협조하지 않는 동생을 강제로 끌어가려고 나서자 아인 이드리스는 아예 아나이스를 자신의 저택에 머물게 하고 밤낮으로 항시 붙어 다녔다. 반복되는 납치 시도는 거의 실패했지만 성공할 때도 있었다. 그 대부분은 아인 이드리스가 정령술을 시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벌어졌다.

그럴 때마다 아인 이드리스는 악착같이 추적하여 왕녀를 구했다. 두 사람의 사이는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왕녀가 아인 이드리스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순수하게 존경하던 시선에 점차 다른 열기가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그런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아인 이드리스는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싫어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왕녀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히는 것 같았다. 그는 점점 더 강한 힘에 집착했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풀리진 않았다.

“대체 왜 안 되는 거야!”

대련에 연거푸 참패한 이드리스가 바닥에 엎드린 채 절망하며 꺽꺽 울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미네르바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또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엔 나도 잘 아는 장소였다. 찬란한 강휘로 채워진 하늘, 새하얀 구름을 카펫으로 삼은 듯한 바람의 영역이었다. 그 한가운데 초연하게 서 있는 미네르바가 이프리트와 트로웰을 마주하고 있었다.

“지금 뭘 해?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아?”

이프리트가 다그치듯 소리쳤다. 분노, 경멸, 탄식.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 그에게선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감정들만 드러났다.

“고작 인간 따위에게 네 능력을 나눠 주겠다고? 너 미쳤어, 미네르바?”

이어진 말에 숨을 삼켰다. 아, 설마…… 이거 그 상황인가?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봤지만 이 공간을 벗어날 방법 따윈 찾을 수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도 나를 알아보는 시선 역시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지켜보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았다.

“젠장!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그놈을 잠깐이라도 좋게 생각하려고 했던 내가 미친놈이지!”

“이건 내 만족일 뿐, 아인의 잘못이 아니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널 그렇게 만든 게 그놈인데 왜 그놈 잘못이 아니야! 트로웰! 너도 뭐라고 말 좀 해 봐! 저 미친 짓거리를 말려보라고!”

답답해 죽겠다는 듯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린 이프리트가 트로웰을 돌아보았다. 미네르바 역시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트로웰은 그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심한 표정이었으나 눈동자에 가득 차오른 슬픔이 선명했다. 한참 만에 그가 쓴 것을 삼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는 널 사랑하지 않아.”

“트로웰…….”

“하지만 네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차분한 음성에 물기가 느껴진다고 생각한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다시 머리를 쓸어넘긴 이프리트가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가여운 미네르바. 지금의 너를 내가 무슨 말로 설득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것만은 명심해 둬. 너는, 분명히 다치게 될 거야.”

미네르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선을 먼저 피한 건 트로웰이었다. 더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삼키듯 입술을 악물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한숨을 삼켰다.

“이만 갈게. 널 보는 게 너무 힘들어.”

그리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그대로 사라졌다. 이프리트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바람의 영역을 떠났다. 홀로 남은 미네르바를 위로한 건 모든 상황을 함께 지켜보고 있던 진이었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왕이시여. 제가 왕을 위해 그를 돕겠습니다.

“……고마워, 진.”

―왕의 행복이 저의 기쁨이자 사명입니다.

잔잔하게 웃는 그의 이마에 미네르바가 입을 맞췄다. 마치 작별인사를 하는 것처럼. 애달프고 경건하게.

다음 순간 미네르바가 양팔을 뻗었다. 진의 모습이 허물어지듯 녹아가기 시작하며, 두 팔 안에 거대한 회오리가 일기 시작했다. 고이는 힘이 강해질수록 미네르바의 힘은 약해져 갔다.

안 돼, 미네르바! 그만둬!

도저히 지켜볼 수가 없어서 소리쳤지만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잡으려는 순간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이게 뭔가요, 아인 님?”

얼굴을 굳힌 아나이스 왕녀가 아인 이드리스에게 신문을 내밀었다. 그걸 힐끗 바라본 아인 이드리스가 무심한 어조로 답했다.

“어제 기자 회견 내용이군요.”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왜 이런 대답을 하셨어요?”

“기사에 적힌 그대로입니다. 전 다른 여인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제겐 오직 미네르바뿐입니다.”

“거짓말.”

아인 이드리스가 숨을 잠시 멈췄다. 왕녀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건 거짓말이잖아요, 아인 님.”

확신을 담고 말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미네르바는 제가 하는 말을 늘 인형처럼 의심 없이 믿는데, 당신은 단숨에 거짓말이라고 말하는군요, 신기하게도. 아인 이드리스가 자조하듯이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 시선을 내렸다. 아인 이드리스의 허리춤에 전에는 보지 못한 검 한 자루가 걸려 있었다. 그가 차고 있는 모습은 처음 봤지만 검의 형태 자체는 익숙해서 몰라볼 수가 없었다.

블레스터.

조금 전 막아내지 못한 바람이 결국 검이 되어 그의 곁에 자리 잡고 있었다. 속이 바짝 마르다 못해 버석거렸다. 아무래도 이 환상은 시간별로 이어지고 있는 듯했다.

“……전 미네르바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

“그건 그를 사랑한다는 말과는 달라요, 아인 님. 알고는 계시죠?”

“저는…….”

“제게 끌리는 감정을 숨기지 마세요. 그는 정령이고 우린 인간이에요. 인간은 인간과 맺어져야 하고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아인 님도 사실은 알고 계시잖아요.”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간 아나이스 왕녀가 두 손으로 아인 이드리스의 손을 잡았다. 아인 이드리스는 움찔했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저도 이러는 제가 싫어요. 하지만 그렇게 해서 아인 님이 제 곁에 올 수 있다면 기꺼이 악역을 맡겠어요. 전 아인 님만 있으면 돼요.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아나이스 님.”

“그냥 아나이스라고 부르세요.”

“…….”

“아인은, 제가 아니어도 괜찮으신 건가요? 정말 그래요?”

입을 달싹이던 아인 이드리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상체를 기울인 그가 이내 성급한 동작으로 왕녀에게 입을 맞췄다.

분노인지 배신감인지, 그것도 아니면 슬픔인지. 한마디로 정의하지 못할 참혹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카노스가 왜 이런 환상들을 보여주는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다음 장면이 뭐가 될지는 알 것 같았다.

“미네르바. 아무래도 제가 이상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아인?”

혼란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아인 이드리스를 미네르바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나이스 왕녀에게 이상한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게 주술을 거는 것 같아요. 그녀를 만나는 게 너무 두렵습니다. 요즘은 불안해서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 헌신한 연인을 배신한 죄책감을 감당할 수 없어서일까. 아인 이드리스는 정말로 공포에 질린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이어진 상황들을 전부 지켜본 나조차도 동정하는 마음이 일 만큼 가여워 보였다. 그러니 그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는 이의 심정은 헤아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미네르바가 그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아인, 괜찮다. 네게 주술이 걸린 흔적은 없어.”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분명히 주술이에요. 이상한 힘이 있어요. 저는 이대로는 살 수 없습니다. 매일 매일 너무 고통스러워요. 미네르바, 절 가엾게 여긴다면 제발 도와주세요.”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지, 아인?”

아인 이드리스가 일렁이는 눈으로 미네르바를 바라보았다. 애타게 갈망하는 시선이다. 무언가에 희망을 느끼는 얼굴인 것 같기도 했다. 아무 대답도 하지 마! 차라리 그 입을 닫으라고! 하지만 이번에도 내 말은 닿지 않았다.

“저는, 저는…… 왕녀가 제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거면 되는 건가?”

“아니, 아뇨, 잘 모르겠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 주술이 풀릴까요? 그건 아닐 것 같습니다.”

아인 이드리스가 고통스러워하며 눈을 감았다. 미네르바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어린아이처럼 품에 파고드는 얼굴은 이미 서럽게 젖은 지 오래였다.

“이건 그녀가 죽어야 끝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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