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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526화 (526/608)

제526화

내심 후련해진 나와는 달리 왕세자의 얼굴에선 이제 여유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사나운 시선이 와 닿았다.

“왜 마신의 저주가 거짓말이라 생각하지?”

“거짓말이니까.”

“…….”

“마신은 사소한 분풀이 같은 거 안 해. 그럴 바엔 확실히 끝내고 말지. 저주 같은 관대한 처분은 애정이 있을 때나 내리는 건데 인어를 그렇게 여길 리가 없잖아.”

억지웃음을 가장하던 왕세자의 입매가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마신에 대해 그렇게 잘 아는 줄은 미처 몰랐군.”

“당신보단 잘 알지.”

솔직히 말하면 이런 표현조차 아깝다. 왕세자 쪽은 마신에 대해 아는 것이 아예 없다. 아무것도 모르니 감히 그와 척을 지고 이용할 생각도 하는 거다. 왕세자는 한동안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면서도 주도권을 잃고 싶지는 않았는지 느긋한 척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괜찮겠나? 내가 지금 이걸 인정하면 그대가 몸 성히 돌아갈 길은 내 사람이 되는 것뿐일 텐데. 난 고급 정보는 아무하고 공유하지 않거든.”

“그럼 대답하지 마. 어차피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게 중요하지 않다라……. 그대에겐 뭐가 더 중요한 건지 궁금해지는군.”

“당신이 빼돌린 소지품.”

질질 끌 생각은 없어서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멈칫한 왕세자는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말장난이라 여겼는지 재밌다는 표정까지 지었다.

“내가 뭘 빼돌렸지?”

“마신관을 납치하면서 수거한 소지품들을 말하는 거야. 그 소지품 중에 호각이 있을 거야. 그게 필요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상호 알 거 다 아는 처지에 시간 끌지 마.”

너 연회에서 마신관 빼돌린 게 나라는 거 이미 알고 있잖아. 왜 모르는 척하고 그래? 빙긋 웃으니 의미를 알아들은 왕세자 역시 비스듬히 웃었다.

“그래. 그것도 맞다 치고, 그건 왜 필요하지?”

“그 호각은 마족을 호출하는 도구야. 어떤 마족인지는 당신도 잘 알 테니 설명은 생략할게.”

“……그래서?”

“그 마족을 처리할 거야.”

나라고 왕세자와 이런 시간을 마련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어디에 숨었는지 모를 카류안을 끌어내려면 이게 제일 쉬운 방법이었다. 에디스와 아이라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카류안은 호각의 호출엔 성실히 응했다. 나타나서 제 마음대로 굴어서 그렇지 일단 부르면 나오기는 한다는 소리였다. 지금은 그 찰나의 순간이라도 필요했다. 당황하는 왕세자는 이번 대답도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잔뜩 경계하고 있던 얼굴이 빠른 속도로 허물어졌다.

“그건 내 사람이 되겠다는 뜻인가?”

“아니. 그 마족과 개인적으로 풀어야 할 게 있는 것뿐이야.”

꿈 깨라는 시선을 보내니 왕세자는 잠시 침묵했다. 손바닥으로 문지르듯 얼굴을 쓸어 낸 그가 나를 유심히 응시해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이라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한테도 나쁠 건 없는 제안이잖아. 그 마족은 당신 일에도 방해될 테니까.”

“지금 한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내 일을 방해하고 있는 건 그대도 마찬가지다. 그런 그대가 마족을 처리하겠다고 하는 말을 어떻게 믿지?”

“믿기 싫으면 할 수 없고. 호각을 넘길지 아닐지나 결정해. 나도 시간 낭비하긴 싫으니까.”

“……과실인가 싶으면 독인 것 같고, 독인가 싶으면 과실처럼 구니 도통 그대를 모르겠군.”

모두에게 독이겠지. 대꾸하고 싶은 말을 혀끝으로만 굴렸다. 자학하는 게 나쁜 습관이라는 건 아는데 돌아가는 처지가 도와주질 않으니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이게 내 팔자인가 보다 하는 수밖에.

“내가 보는 앞에서 마족을 처리하는 조건이라면…….”

“그 현장에서 목숨을 부지할 자신이 있다면 그렇게 해. 내가 당신까지 보호하며 상대할 여력이 없다는 점은 알아두고.”

물론 여력이 있어도 안 할 거다. 할 말을 잃은 표정이 된 왕세자는 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괜찮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정말 마족을 처리한다는 목적뿐인가?”

“그래.”

다른 계획이 없다곤 못하지만, 오늘 여길 찾아온 용건은 그뿐이긴 했다. 생략된 앞말을 알지 못하는 왕세자는 심각하게 고심하는 얼굴이었다.

“……일단 생각은 해보지.”

그날의 대화는 거기서 마무리됐다. 심기가 불편해진 왕세자가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즉각 자리를 떠났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게 유일한 대안인 것도 아니라 나도 그냥 미련 없이 돌아 나왔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왕세자가 유연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날 시험해 보려는 의도였을까. 며칠 후 머무는 여관으로 발송자 불명의 종이봉투 하나가 배달됐다. 안에 들어 있는 건 금속으로 만든 작은 호각 하나였다. 그 외에는 이렇다 할 전언 하나 없었지만 호각의 정체야 뻔했다.

아무런 문양도 새겨져 있지 않은 표면을 가만히 살피다 손에 가볍게 쥐었다. 처음부터 일이 술술 풀리는 걸 보니 이 길이 맞다는 걸 확인받는 것 같다. 결의를 다지는 의미로 숨을 크게 한번 내쉬었다. 이걸로 시작이었다.

* * *

“도련님 어디 가?”

이른 아침부터 외출할 준비를 하는 내게 이프리트가 물었다. 간단하게 꾸린 가방을 들다 말고 그를 돌아보았다.

“잠시 용건이 있어서.”

“아, 혹시 그거야? 전에 마족이랑 싸울 거라고 했잖아.”

“……응.”

“나도 같이 갈까?”

“아냐, 나 혼자 처리할 일이야.”

“그래? 뭐, 하긴 그 마족 아직 애송이더라. 도련님 실력이면 가뿐히 이길 거야. 그래도 위험할 것 같으면 무모한 행동 하지 말고 엘퀴네스 불러. 든든한 정령왕 아버지 뒀다 뭐해. 나중에 수프 끓여 먹을 거야?”

“응, 알았어.”

장난스러운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이프리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주 응시한 그가 웃는 얼굴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냥.”

“싱겁기는.”

피식 웃으며 머리칼을 흩트리는 손길에 억지로 따라 웃었다. 내 시대의 이프리트는 그가 아니다. 오늘 계획을 실행하면 그와는 여기서 헤어지게 된다. 이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이 되겠지. 괜히 마음만 싱숭생숭할 것 같아서 크리스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도 별다른 작별의 시간은 보내지 않았다. 이것만은 두고두고 아쉬울 것 같다. 아니, 사실 이후의 내가 어떻게 될지도 잘 모르겠다. 모든 것이 없던 일이 되면 지금의 나와 전생을 갖지 않은 내 기억이 서로 섞이게 될까. 어쩌면 지금의 기억은 전부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프리트, 고마워.”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어울리지 않는 감사 인사가 뜻밖이었는지 이프리트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갑자기. 그러니까 꼭 마지막 인사 같잖아.”

“그러게. 연극 같은 거 보면 결전을 앞둘 때 하는 전용 대사더라. 지금 잠깐 철렁했지?”

“어휴, 알면서 그러지 마. 나 이래 봬도 섬세한 정령이거든?”

두 팔로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은 이프리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일부러 호들갑스럽게 대응하는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니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프리트가 다시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 묻지는 않겠는데. 도련님 요즘 생각이 너무 많아 보여. 엘퀴네스도 별말은 안 하지만 계속 신경 쓰고 있는 거 알지?”

“……알고 있어.”

“그래, 알면 괜찮아. 무슨 일을 감당하고 있는 건지 몰라도 힘든 건 그만둬도 돼. 혼자서 너무 애쓰지 마, 도련님.”

애써 유지하고 있던 표정이 흐트러질 뻔했다. 늘 다정한 이프리트. 햇살과 설탕이 되어주던 말이 오늘은 조금 괴롭다. 조금이라도 무너지면 수상하게 여길 게 분명해서 일부러 더 환하게 웃었다.

“그럼 갈게.”

다녀오겠다는 말은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이 시대의 문명이 아무리 발전했어도 온 지역이 다 개발된 건 아니다. 도심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천연 지대가 널려 있었다. 내가 찾은 건 그중에서도 가장 외진 숲 안에 있는 평원이었다. 혹시 모를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려면 아무래도 인적이 없는 곳이 나을 테니까.

‘이쯤이면 되겠지.’

적당한 위치를 잡은 다음 가방 안에서 호각을 꺼내 들었다. 입구를 입에 물고 최대한 크게 불었다. 꽤 큰 소음을 예상했는데 의외로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그 대신 기묘한 공기가 퍼지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혹시나 호각이 불량품이거나 호출 대상을 알아차리고 피하지 않을까 싶은 우려는 오래가지 않았다. 금세 미세한 기류가 일렁이기 시작했으니까. 곧 허공에 새카만 금이 그어지더니 공간이 갈라지듯 벌어지면서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이뤄진 것 같은 카류안이었다.

“어?”

나를 발견한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가 의아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평원임을 확인한 후에 다시 나를 응시했다.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했네. 구출 신호를 받고 온 건데 왜 당신이 있어요?”

훑어내리는 시선이 내가 들고 있는 호각에 닿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이 상황을 못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혹시 그걸 일부러 구한 거예요? 날 만나려고?”

“너한테 용건이 있긴 하지.”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맑은 쇳소리가 울리며 오랜만에 파이어 버스터의 몸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사라지면 파이어 버스터는 어떻게 되려나. 누군가에게 우연히 발견될 때까지 여기에 혼자 남겨지는 걸까. 너무 외진 곳은 피할 걸 그랬나 잠깐 뒤늦은 후회가 스쳤다.

“뭐야, 싸우려는 것 같네? 날 죽이기라도 하려고요?”

내 의도를 알아차린 카류안의 표정이 변했다. 긍정의 뜻으로 침묵하니 황당해하는 시선이 돌아왔다.

“진짜 죽이겠다고요?”

“그래.”

“왜지? 이해가 잘 안 되네요. 하긴, 처음부터 나한테 적의가 있었죠? 단순히 마족이라 이러는 것 같진 않은데. 내가 당신을 좀 속이긴 했어도 뭐 딱히 나쁘게 한 건 없지 않나? 날 왜 그렇게 싫어해요?”

“네 관상이 별로 안 좋거든. 나중에 적으로 만날 상이라 미리 싹을 없애려고.”

“푸핫! 뭐야, 그건. 알고 봤더니 물의 정령사가 아니라 땅의 정령사였어요? 예언가는 아니지 않나?”

예언가는 아니지만 미래에서 왔지. 사실을 말한 건데 믿지 않으니 할 수 없다. 긴장감 없이 웃는 카류안은 이 상황 자체를 재밌어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가 이 자리를 피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족은 싸우는 걸 좋아하는 종족이다. 답지 않게 나와 싸우고 싶지 않다곤 했어도 걸어오는 도발까지 무시할 리는 없었다. 예상대로 카류안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요. 이런 것도 나쁘진 않아요. 솔직히 말하면 얼마나 강할지 확인해 보고 싶긴 했거든요. 시작하면 죽이기 전엔 끝내지 못할 것 같아서 자제한 건데, 알아서 기회를 준다면야.”

그의 손에서 새카만 전류가 일더니 검은 장검이 나타났다. 일전 왕세자를 농락할 때 쥐여준 것과 같은 검이었다.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붉은 눈동자가 강렬한 빛을 품으며 번들거렸다.

“여기서 죽어도 날 원망하지 말아요.”

누가 할 소리를.

“너야말로.”

준비해 두었던 힘을 풀었다. 내 주위로 물결이 일어나며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낸 물의 늑대들이 우아하게 착지했다. 잠시 움찔한 카류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와, 이건 반칙.”

나를 보호하듯 둘러서 있는 시큐엘들을 돌아보는 그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정령사인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러나 했더니 생각지 못한 질문이 돌아왔다.

“정령왕의 계약자였어요?”

“뭐?”

“허, 이건 진짜 말도 안 돼. 그럼 설마 같이 다니던 푸른색 머리칼의 그 겁나게 잘생긴 남자가 정령왕이었어요? 엘퀴네스?”

그걸 이제껏 몰랐다는 게 더 이상했다. 경험이 부족해서 정령왕을 한눈에 알아보는 눈은 없더라도, 엘뤼엔이 노예 상단에서 대놓고 구해 주기도 하지 않았나? 온 사방을 겨울로 만들었는데 그걸 보고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니 카류안이 변명하듯 대꾸했다.

“아니, 그건 당신이 한 건 줄 알았죠. 당신만 봐도 인간 같진 않거든요? 그 사람도 범상치는 않아 보였지만 친족이라길래 뭔가 특별한 혈통인가보다 했죠. 어쩐지 조금만 염탐하려고 해도 금방 가로막히더라니!”

“이제 사실을 알았으니 됐네.”

“와, 이건 진짜 반칙이에요. 내가 정령왕을 어떻게 이겨요? 너무 치사해. 이 승부는 무효…….”

“아버지는 안 부를 거야.”

“진짜죠?”

“그래.”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니 미심쩍어하며 바라보던 얼굴에 다시금 여유가 돌아왔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표정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래 봤자 별로 크게 다를 건 없을 텐데. 사실은 나도 정령왕이거든.

“그리고 어차피 넌 못 도망가.”

“무슨…….”

의아해하던 카류안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어느새 얼음 덩어리에 갇혀 있는 자신의 두 다리를 내려다보곤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이것 봐. 이러니 인간으로 보여?”

우드득! 얼음 결박이 부서짐과 동시에 해방된 카류안이 나를 향해 빠르게 쏘아져 왔다. 붉은 눈동자가 순식간에 가까워지면서 내 검에도 검기가 실렸다. 콰직! 콰아앙! 맞닿은 두 검 사이에 팽창한 공기가 퍼져 나가며 온 사방이 진동했다. 코앞에 대치한 얼굴이 히죽 웃었다.

“어디 한번 즐겨 보자구요.”

이후는 본격적인 전투였다. 가뿐할 거라는 이프리트의 말대로 갓 성인이 된 마족은 내 상대가 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카류안의 꼴은 점점 성치 않아졌다. 처음엔 팔에, 그다음은 다리에, 이후엔 복부에서 피를 쏟았다. 카류안은 상처가 늘어나는 데도 즐거워 보였다. 본인이 불리하다는 걸 실감했을 텐데도 이를 드러내며 웃는 얼굴에선 한껏 고양된 흥분만 느껴졌다. 다칠수록 기뻐하니 꼭 고통을 즐기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덕분에 불쌍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었다.

지루한 공방이 마침내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다. 시큐엘에게 사로잡혀 끌려간 카류안이 지면에 요란하게 처박혔다. 그가 다시 몸을 일으키기 전에 그대로 검을 내리꽂아 가슴을 꿰뚫었다. 크게 꿈틀거린 카류안이 검붉은 피를 울컥 토해내고 그대로 축 늘어졌다.

“……하, 정령왕을 소환하지 않아도 이 정도라고? 진짜 어이가 없네.”

대자로 뻗은 그가 가래가 끓는 숨을 헐떡였다. 이 순간에조차 나를 응시하는 시선은 여전히 또렷했다. 마족에게도 이 정도면 치명상일 텐데 생명력 하나는 끈질겼다.

“이렇게 돼서 나도 유감이야.”

“개소리 말고 죽일 거면 얼른 죽여요.”

검에 꽂힌 상태에서도 비실거리며 웃는 얼굴을 보니 그의 마지막 모습이 생각났다. 심판관에 꽂힌 채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카류안. 결국 완전한 소멸로 끝나버린 카류안. 멈출 시기를 알았다면 이 녀석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다. 수많은 생명을 죄과로 쌓기 전에 여기서 죽는 게 이 녀석의 영혼을 위해서도 나을 터였다.

“잘 가.”

이걸로 우리 악연은 다 끝내자. 부디 다음 생에선 조금도 얽히지 않길 바랐다. 검을 뽑아낸 후 망설임 없이 그의 목을 내리그었다. 아무리 재생력이 뛰어난 마족이라도 목이 잘리면 숨이 끊어질 수밖에 없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었다. 콰직, 검이 단단한 것을 파고드는 감각이 손 안에 선명히 와 닿았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와 닿아야 할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애먼 맨땅을 긁어낸 검을 확인하고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바로 앞에 있던 카류안의 모습이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흥건한 핏자국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카류안의 심장을 찌른 게 착각이었나 싶었을 거다. 전신에 소름이 돋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곧바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스치는 시야에 직전에는 없던 광경 하나가 걸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카류안을 안고 서 있었다.

“…….”

“…….”

내가 지금 눈을 뜬 채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득해지는 머릿속으로 간신히 중얼거렸다. 카류안은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엉망으로 다친 상처는 온데간데없이 멀끔해진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는 한 가지 생각만 가득했다. 왜 저 사람이 여기에 있지? 이런 곳, 이런 상황에서 마주할 거라고 생각도 해보지 못한 존재였다. 아니, 그냥 그를 본다는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설마 얠 죽이려 할 줄은 몰랐네.”

환상처럼 서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흥얼거리는 듯한 그 목소리마저 익숙해서 나도 모르게 탄식했다. 모든 빛을 삼킬 듯한 암흑의 눈동자가 나를 응시해왔다. 건드리기만 해도 묻어날 것처럼 새카만 머리칼이 바람을 타고 흔들렸다. 그를 본 마지막 순간에서도 이랬었다.

카노스.

“윽.”

순간 눈앞이 핑글 돌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잠깐 균형을 잃었던 것 같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추락하는 것처럼 아찔한 감각이 몰아닥쳤다. 착각인지 실제인지 어렴풋이 어디선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자세가 무너져 있는 나를 누군가가 부축하고 있었다. 바로 앞에서 보이는 얼굴에 숨을 삼켰다. 시선을 맞춰온 카노스가 웃었다. 정말이다. 정말 카노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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