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5화
“반응이 왜 그래? 너도 걔 좋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긴 한데…….”
“그럼 왜 미적거려? 엘퀴네스보다 네가 더 아름답다고 한 애는 걔가 처음이잖아.”
“정확히는 내가 더 사랑스럽게 생겼다고 했지.”
“하지만 그 정도의 반응이 나온 것도 처음이지 않아?”
“그것도 진심인지 아닌지 알 게 뭐야.”
“진심을 알고 싶어?”
묵묵히 듣고 있던 트로웰이 예쁘게 웃었다. 너무 예뻐서 불길한 기분마저 느껴지는 미소였다. 나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닌지 란타샤가 질색하며 몸을 뒤로 뺐다.
“됐어. 하나도 안 궁금해. 안 궁금하니까 절대 말하지 마.”
“좋은 자세네. 앞으로도 그렇게 해. 뭐든 적당히 모르는 게 나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그만둬줄래? 너 이럴 때마다 성격 진짜 나빠 보인다는 거 알아?”
“조언 고마워.”
달콤한 눈웃음이 더 짙어졌다. 타격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뻐하는 것 같다. 더 크게 질색하는 란타샤를 향해 이프리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넌 외모 경쟁에 그만 좀 집착해. 드래곤이 아무리 예쁜 걸 좋아한다지만 넌 정도가 지나쳐. 질리지도 않아? 이러다 나중에 네가 낳은 새끼도 외모로 차별할 것 같아.”
“그야 당연하지. 내 새끼는 최고로 예뻐야 해. 정령왕과 비교해도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말이야. 안 그러면 걔 용생이 좀 고달파질걸?”
“그게 자랑스레 대답할 말이냐.”
“뭐가 어때서? 내가 안 되면 내 자식을 통해서라도 숙원을 이루고 말 거야. 두고 보라고.”
축하합니다. 그 소원 결국 이루셨네요.
아니, 여기선 이뤄질 겁니다, 라고 해야 하는 건가. 이제 보니 라피스가 화려한 외형을 선호하던 것도 란타샤의 영향이 컸나 보다. 싱거운 웃음을 삼키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당연한 거겠지만 오늘따라 라피스가 너무 자주 생각난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뿐이라 감정이 조금 버거웠다. 애써 덮어놓고 있던 것을 누군가가 강제로 들추는 것만 같다. 숙원을 이뤄주는, 그 기특한 아이의 영혼이 지금 여기서 방황하고 있다는 걸 알면 란타샤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자꾸 이상하게 말 돌리지 마.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동반 모임 타령이야?”
“뭐,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진 않다 싶어서.”
뺨을 긁적인 이프리트가 조용히 앉아 있는 미네르바를 힐끔거렸다. 흠흠,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지나가는 듯한 어투로 말을 건넸다.
“미네르바. 그러니까 너도 다음엔 그 녀석 데려와.”
아마도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나 보다. 이름에 반응해 고개를 든 미네르바가 그 자세 그대로 멈췄다. 천천히 깜빡이는 눈동자는 명백히 놀란 채였다. 답할 말을 고르는 듯 방황하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번지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럴게.”
그 미소에 얼굴이 상기된 이프리트가 다시금 헛기침했다. 웃음을 가득 머금은 란타샤가 잘했다는 듯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 모습을 잔잔하게 지켜보는 트로웰의 눈빛도 평화로웠다. 엘뤼엔은 모든 걸 관망하고 있었지만 이 분위기를 나쁘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을 때 줄곧 나오는 표정이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이 상황 자체에 적응하지 못하고 섞여들지 못하는 건 나뿐인 것 같았다. 모두가 화목한 광경을 보고 있으니 오히려 속이 복잡해졌다. 여기가 어딘지는 이미 알고 있는데 불현듯 몰랐던 사실을 깨달은 기분이었다.
란타샤와 디아곤이 결혼하지 않았다. 아직 라피스는 태어나지도 않았고, 카류안이 변질하지 않았으며, 블레스터조차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일어나지 않은 평화로운 시대였다. 그래서 이 평화의 끝을 알고 있는 내가 이물질처럼 여겨졌다. 마치 있어선 안 되는 자리에 있는 것 같은, 재앙을 몰고 온 화근이 된 것만 같았다.
이 말도 안 되는 죄책감의 이유야 뻔하다. 아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건 돌이킬 기회가 있다는 소리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그걸 바꾸면 내가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많아질 테니까.
“너만 포기하면 되잖아.”
비웃는 듯한 음성이 속삭인다. 꿈에서 내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그래, 정말 그런 거였네. 반박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며 속으로 허탈한 웃음을 삼켰다. 꿈속의 나는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있었다. 이해했으면서 모르는 척한다는 말조차도 맞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처음부터 알아들었다. 그런데도 헛된 시도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리 필사적으로 외면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다. 가장 아픈 것이 결국 진실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그 견고한 사실 앞에 서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하찮고 초라한 미물일 뿐이었다.
옛 가족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이던 날도 이랬다.
나만 포기하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진다.
이번에도 이게 진실이었다.
“늦었으니 이만 자라.”
모두가 돌아간 후 고요가 찾아들었을 땐 이미 새벽에 훌쩍 다다른 시각이었다. 먹물에 삼켜진 듯한 하늘, 그 위에 흩뿌려진 별들을 멀거니 바라보는데 익숙한 기척이 다가와 창문을 닫았다. 커튼이 채워지는 것까지 지켜보다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조심스럽게 부르자 엘뤼엔이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아버지는 날 안 만났어도 잘 살았겠지?”
“……뭐?”
무슨 의도를 담은 거냐고 묻는 시선이라 배시시 웃었다. 내가 생각해도 참 뜬금없는 질문이긴 했다. 그러니 그냥 실없는 소리를 하는 거라고 생각하길 바랐다.
“그냥 갑자기 궁금해지네. 난 아버지를 만나지 않은 삶이 상상이 잘 안 가거든. 근데 아버지는 날 만나기 전에도 잘 살았으니까. 만나지 않아도 잘 살았겠지?”
당연하지 않냐는 대답을 예상하며 미리 상처받을 준비를 했다. 미래의 아버지에게는 확신이 있는데 솔직히 지금의 그는 아직 잘 모르겠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도 엘뤼엔은 이런 대답을 고민할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글쎄, 잘 모르겠군.”
“……모르겠다고?”
“그래, 모르겠다.”
“……왜 몰라?”
왜 그걸 모르지? 그럴 리가 없지 않나. 오늘 워낙 특이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서 그런가, 엘뤼엔까지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한다. 누가 봐도 잘 살았을 거잖아. 이미 정답이 정해져 있는데 그걸 고르지 않는 게 이상했다.
“물론 널 만나기 전에도 잘 살았던 건 사실이지.”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은 모양이다. 가볍게 긍정하는 엘뤼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상이 맞았음에 안도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 역시 그렇지?”
“그래도 널 만나서 더 재밌어진 것도 사실이니까.”
“…….”
“널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부분은 알지 못했겠지. 그걸 정말 잘 살아가는 거라고 할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군.”
꿈같은 말들을 마친 그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런 건 별로 가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하고.”
간신히 삼키고 있던 숨을 완전히 멈췄다. 호수처럼 잔잔한 눈동자에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얼굴이 고스란히 비쳤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더라? 뭔가 떠올린 생각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이미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고마워, 아버지.”
눈물이 날 것 같아 억지로 웃었다.
에이, 뭐가 이러지? 모처럼 각오했는데 그 모든 게 다 허물어졌다. 너무 간단히 끝나버려서 조금 어이가 없고 허탈하기도 했다. 왜 이렇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대는 내게 너무 매정하다. 원래 있어선 안 되는 사람이라 차별하는 건가 보다. 그래도 조금쯤은 내 사정도 봐주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매몰찰 필요는 없잖아.
사실은 당연하다는 대답을 들으면 그냥 이대로 있으려고 했다. 화나고 짜증 나고 오기가 생겨서라도. 어떻게든 나만 생각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런 대답을 들었잖아. 내 아버지가 날 만난 삶이 더 좋았다고 했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평생 살아갈 힘을 내줬다. 고작 억지로 아들 삼아 달라 졸라댄 내가 다 뭐라고. 속으론 무슨 궁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정말 바보 같을 정도로 좋은 사람이었다. 없던 염치를 깨우치고 당당하고 떳떳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싶을 만큼.
“정말 고마워.”
사랑해, 아버지. 두 번이나 날 아들로 삼아줘서 고마워. 나는 이거면 된 것 같아. 너무 넘칠 만큼 과분한 사랑을 받아서 자꾸만 욕심이 생기나 봐. 나도 보답하고 싶어. 내 소중한 사람들이 나보다 더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결심을 굳혔다. 미래를 바꾸기로.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는 대신…… 내가 그의 아들이 되지 않게 되더라도.
* * *
손에 닿지 못하고 떨어지는 서류에 수행 천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모시는 주인에게선 아주 드문 실수였다.
“엘뤼엔 님?”
조심스럽게 부르는 것에 조금 굳어 있던 얼굴이 반응했다. 빛이 돌아온 푸른 눈동자가 뒤늦게 상황을 인지하듯 느린 속도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 모습조차 평소답지 않아 수행 천사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다행히 돌아온 음성은 평소와 같았다. 그에 안심한 수행 천사가 다시 제 할 일에 시선을 돌리는 동안 엘뤼엔은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오늘 처리해야 할 일거리도 산더미였다. 잠시라도 나태해질 수 없는 분량이지만 다시 이어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기억에 없던 광경이 스쳤다.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 먼 여행을 떠난 후로는 간혹 겪는 현상이었다. 기분 좋은 장면도 있고 탄식이 나오는 장면도 있었으나 잃은 걸 되찾은 자체가 흡족했기에 늘 달갑게만 여겼다.
그런데 오늘 기억은 조금 이상했다. 여느 때처럼 웃고 있는 아들의 얼굴이 어디를 봐도 슬퍼 보였다. 이전에 나눈 대화 내용까진 알 수 없었지만 아들은 그날따라 유난히 자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이 순간을 기억해두려는 것처럼.
무언가 심경의 변화를 느낄 일이 있던 건가. 결심을 굳힌 듯한 표정은 체념한 것 같기도 하고 후련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가슴 안쪽에서 뻐근한 감각이 차올랐다. 익숙지 않은 통증이 어디서 기인하는 건지는 분명했다. 불안한 감정이었다.
“……엘?”
* * *
미래를 바꾸려면 뭘 해야 할까.
이왕 마음을 정한 김에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목록으로 적어 검토해봤다. 방관하고 있을 땐 너무 쉽게 바뀔 것 같아 걱정이었는데 막상 진심으로 끼어들 생각을 하니 여러모로 까다로운 부분이 많았다.
일단 아인 이드리스가 내게 경쟁심을 불태우는 거나, 왕녀에게 끌리는 것 따위의 감정적인 부분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 건드려도 큰 효과는 없을 거다. 뭔가 시도해본다면 몇 가지 상황을 바꾸는 정도일까. 트로웰이 예지한 시기보다 사건이 더 앞서 일어난다거나, 사건의 주최가 바뀐다거나. 그것만으로도 이미 내가 아는 미래는 아니게 된다. 하지만 그 변화가 좋게 풀릴 거란 자신은 없었다. 오히려 정말 나로 인해 그 일들이 벌어지는 거라면 간섭할수록 더 안 좋은 방향으로 심화하기만 할 가능성이 컸다.
다행히 그보다 건드리기 쉽고 결말이 보이는 쪽도 있었다. 카류안이 지금 여기서 죽으면 그가 악신이 되려는 미래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 내가 한국에서 잘못 태어날 일도, 아크아돈에 10년 가뭄이 일어날 일도 없다. 무고한 아이들이 제물로 희생되지 않을뿐더러 이사나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숙부에게 쫓기는 일도 사라지겠지. 라피스가 다쳐서 죽을 일도 없고, 카노스가 소멸하지도 않는다.
더욱 좋은 건 내가 이 시대에 오는 일도 사라진다는 거다. 이렇게 되면 아인 이드리스가 경쟁심을 느낄 대상도 없어진다. 날 만나지 않은 그는 굳이 검술에 욕심내지 않을 거다. 그의 변심은 어쩔 수 없더라도 최소한 블레스터가 만들어지는 건 막을 수 있다는 소리다. 그 정도만 돼도 트로웰이 인간을 전부 죽이고 싶다고 여길 만큼 분노하지는 않을 거다. 장점만 생각하니 이렇게도 많았다. 애초에 고민한 시간이 무색할 정도였다.
“후회하기 전에 그만둬.”
누군가 내게 경고하는 것 같았다. 그게 예의 환청인지, 내면의 내 목소리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어쨌든 내 대답은 같으니 누구의 말인들 아무런 의미는 없겠지만.
“후회 안 해.”
수첩을 덮으며 맹세하듯 중얼거렸다. 후회하지 않을 거다. 어차피 미래의 시벨리우스도 이 여행의 결말은 알지 못했다. 나는 끝내 라피스를 못 찾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거다. 그 끝에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바라보기만 한 채 흘려보내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이건 정말 의외로군.”
응접실로 걸어 나오는 남자의 얼굴엔 놀라움이 가득했다. 다른 일을 하던 중에 급하게 나온 참인지 옷매무새도 정돈되지 않은 상태였다. 함께 따라 나온 보좌관인지 기사인지가 눈을 부라렸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그냥 시선만 보냈다. 지켜보는 모두의 얼굴이 굳었으나 정작 당사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내 맞은편에 앉았다. 평소보다 앞머리를 편하게 내린 왕세자가 나를 향해 웃었다.
“설마 이렇게 빨리 연락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도 몰랐던 사실이다. 이것만은 후회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설마 내가 먼저 이 녀석을 찾을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어. 가능하면 평생 안 보고 살고 싶은 얼굴이고,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세상엔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여길 찾아왔다는 건 내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단 의미인가?”
“멋대로 해석하지 말지? 연락할 때부터 말했잖아. 그냥 물어볼 게 있다고.”
“아아,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도 같군. 질문이라. 궁금한 게 있다는 건 좋은 징후지. 좋아, 뭘 알고 싶지? 알려줄 수 있는 선에서 대답해주지.”
얜 이렇게 느끼하게 구는 것 좀 그만둘 수 없나? 용건은 꺼내보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 자리가 피곤해졌다.
“일단 이건 그냥 물어보는 건데, 왕녀가 대체 무슨 힘을 지닌 거야?”
“하하, 거기부터인가. 아닌 척해도 우리 쪽에 관심은 있었군. 이미 대강은 알려졌을 텐데?”
“언론에 푼 가짜 정보를 묻는 게 아니야. 마신이 인어에게 저주를 내렸다는 건 거짓말이지. 그러니 왕녀가 그 저주를 해결하는 열쇠라는 말도 믿지 않아. 그런데 마족이 왕녀를 집요하게 노린 점은 걸리더라고.”
음파를 쓸 수 있다는 건 알아냈지만 그 정도로 카류안이 주시하진 않을 거다. 마음먹기에 따라 대중을 선동할 수 있는 큰 힘이긴 한데 그런 거로 치면 왕세자가 지닌 미혹의 능력도 마찬가지였다. 저들 일가가 딸에 집착하는 이유로도 부족했다.
“단순히 인어의 호감을 얻는 수준은 아닌 것 같고.”
느긋하던 왕세자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점점 걷혀 갔다. 긴장한 듯 차가워진 얼굴이 한결 마음에 들었다. 계속 그렇게 있기를 바라며 경계심을 드리운 시선을 차분히 응시했다.
“인어를 지배할 수 있는 건가?”
한순간 주위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왕세자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으나 눈썹이 미세하게 움찔거리는 것만은 숨기지 못했다. 이거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 실세라고 할 수 있겠지.
어느 정도는 예상한 부분이라 크게 놀랍진 않았다. 인어는 창조될 때부터 몬스터였다고 했다. 영이 없으니 마신관의 성력으로 힘을 키워봤자 자아가 완벽하진 않을 거다. 사람들 앞에선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연기를 시킨 거겠지. 야수나 다름없는 걸 대체 어떻게 길들인 건가 했는데 통솔하는 힘이 있다면 이해가 갔다. 그 힘을 어떻게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멀쩡하게 태어나는 여아가 별로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