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1화
“그 경호 작전 말인데. 그때 작전 조장이 누구였나?”
“원래는 저였지만, 제때에 합류하지 못했으니 부조장인 검은 매가 맡았을 겁니다.”
“검은 매라…… 이름이 파벨이었던 것 같군. 새 움브라 대장이 된 그 파벨의 동생?”
“네, 형제가 맞을 겁니다.”
“아, 그래?”
그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다비안의 눈동자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럴 리 없습니다. 파벨 님은 넥시아 님을 배신할 사람이 아닙니다.”
“뭐,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수 있을 테지.”
느긋하게 답한 그의 시선이 이번엔 아이라를 향했다.
“파벨이 습격당하기 전에 특이 행동을 하진 않았나?”
“글쎄요. 각자 머무는 방이 다르기도 했고, 서로 아는 사이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항해 중엔 교류하지 않았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파벨이 몇 번 밖에서 문을 두드리긴 했던 것 같군요. 하지만 느낌이 좋지 않아 나가보지 않았습니다.”
“그게 정확히 파벨이었나?”
“목소리가 그이긴 했습니다.”
담담한 답변에 라미아스는 이번에도 픽 웃었다. 다비안의 얼굴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
“요원 중에 누가 파벨인지 알고 있었다는 말이군. 그가 본명을 알려주던가?”
“네? 아, 네, 그렇습니다만…….”
“언제?”
“처음 경호를 맡았을 때부터 밝혔습니다. 부조장이라고, 편하게 지내자면서 인사를 해왔습니다. 그 덕분에 다들 스스럼없이 친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때문인지 대답하는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라미아스가 다비안을 돌아보았다.
“자네는 언제 이들과 통성명했지?”
“……여기서 재회했을 때 했습니다.”
“그래, 옳아. 제대로 된 요원이라면 그래야지. 본명을 알려주는 게 딱히 금기는 아니라지만, 작전 중에는 밝히지 않는 게 원칙이니까. 당연히 직분도 언급해선 안 되고 말이네. 하지만 파벨은 방심한 모양이군. 하긴 대상을 곧 죽을 상대라 여겼다면 방심할 만도 해.”
다비안의 눈동자가 다시 크게 흔들렸다.
“자네 동선이 발각된 것도 우연은 아니었겠어.”
쐐기를 박는 듯한 말이었다. 탁자 아래 놓인 다비안의 주먹은 이미 뼈마디가 새하얗게 일어난 상태였다. 움브라 내부에 문제가 있을 거라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던 일이긴 했다. 하지만 실태를 바로 앞에서 확인하는 건 또 다른 기분이었다. 본의 아니게 남의 나라 비리 상황을 알게 된 것 같아 이 자리에 있는 게 매우 민망해졌다. 아이라와 에디스도 덩달아 위축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새 움브라 대장은 에펜 왕국 왕세자와 꽤 친밀한 사이인 것 같더군.”
심지어 또 그놈의 왕세자다.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표정이 비슷해졌다. 제국에 존재하는 두 개의 비밀 기관 중 하나가 쓸모를 다했다는 소리였다. 정보국인 아이기스가 더 유용했겠지만, 차마 천재 마검사이자 수호신이라 불리는 세피온 공작은 건드릴 엄두가 안 났겠지. 카류안이 아무리 짜증 났어도 나서지 말 걸 그랬나. 한숨이 푹 터져 나왔다.
“갇혀 있는 동안 환상을 보여줬다고 했던가?”
“네, 주로 비슷한 종류의 환각이었어요.”
질문을 받은 에디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종류인지 말해줄 수 있겠나?”
“……지인들이 죽거나 고문받는 것을 계속 지켜봐야 했어요. 때론 절 죽이려 들기도 했고요.”
“왜 그런 환상을 보여준 건지는 알고 있나?”
“아뇨, 이유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환상을 보고 나면 반드시 탈진했어요. 기력이 돌아오면 다시 환상을 보여줬고요.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제가 성력을 쓰기를 유도했던 것 같아요.”
“좀 더 자세히 말해보게.”
진지한 채근에 에디스는 가볍게 심호흡했다. 당시 일을 언급하기엔 아직 후유증에서 다 벗어나지도 못했을 시기였다. 너무 무리하게 하는 것 같아 말리려는데 이어지는 대답이 더 빨랐다.
“환상이 보여주는 상황은 늘 달랐지만, 한 가지 배경만은 항상 같았어요.”
“그게 뭐였나?”
“환상 속에서 제 친우들을 고통에 빠트린 건 마신이었어요. 그리고 전 그걸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죠. 제 성력으로 마신을 공격하면 상황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어요. 신을 원망할수록, 그분께 대항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더 괜찮아졌어요. ……마치 제가 신을 원망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죠.”
내가 알고 있는 그 주술의 원리 그대로였다. 신을 배신한 사제의 타락한 성력을 끌어내는 거라고 했었지. 에디스는 떨리는 손을 꾹 움켜쥐었다.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걸 알고 있는데도,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너무 힘들어서…… 상황이 시키는 대로 따라갔어요. 지금도 저를 용서할 수 없어요.”
“에디스 님…….”
아이라가 에디스의 손을 움켜잡았다. 이미 에디스의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미안해요, 아이라, 하지만 계속 이런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요. 몇 번이나 계속 마신을 원망하고 공격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분의 사제인 제가 어떻게…….”
“괜찮습니다. 사제도 인간이잖습니까. 그런 상황이면 에디스 님만이 아니라 누구나 다 그럴 겁니다.”
“아뇨, 전 사제의 자격이 없어요.”
“인장 사라졌어요?”
불쑥 끼어들어 질문하니 움찔한 에디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소매를 걷자 팔에 새겨진 신의 문장이 훤히 보였다. 생각보다 고위 신관이었구나. 감탄을 내색하지 않으며 미소 지었다.
“규율은 어기지 않는 선까지 잘 버텼네요. 고생했어요.”
“저, 저는, 하지만…….”
“아이라의 말을 믿어 봐요. 마신은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래도…….”
“생각해봐요. 마신은 정말 대단한 신이잖아요. 마족의 창조신이기도 하죠. 그 제멋대로인 마족들을 지켜보면서 못 볼 꼴도 얼마나 많이 봤겠어요. 그 정도 원망은 간지럽지도 않을걸요. 오히려 에디스가 무사한 걸 다행스럽게 여기겠죠.”
아무렴, 적어도 도와주라고 보냈더니 깽판을 치고 있는 카류안보다는 백배는 기특하게 여길 게 분명하다.
“정말 다행이에요. 당신을 잃었다면 마신은 슬퍼했을 거예요.”
나름대로 진실을 전한 건데 에디스는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당황해서 바라보자 아이라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으니 내버려 둬도 된다는 의미 같았다.
그 뒤로는 에디스를 진정시키며 사소한 잡담을 나누는 시간이 이어졌다. 라미아스는 더 묻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지만 눈치를 주니 이내 체념한 듯 얌전해졌다.
“여기서 우연히 다비안을 만났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날 합류하지 못하셔서 다시는 뵐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운이 좋아 목숨을 건졌죠. 엘 덕분이었습니다.”
“에이, 뭘 또 내 덕분이에요.”
“아닙니다. 엘이 아니었다면 전 절대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만 해도 그렇던걸요? 덕분에 에디스 님도 무사히 구출할 수 있었으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신탁의 사도님은 따로 계시지만 저희에겐 두 분이야말로 마신이 내리신 분들이신 것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에디스님?”
“맞아요, 아이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민망한 공치사가 가볍게 이어지고,
“근데 사제님은 전엔 아이라한테 반말하지 않았어요?”
“네? 아, 그, 그땐 제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꿈인지 아닌지 헷갈려서…….”
“실은 어릴 땐 편하게 말 하셨거든요. 성인식을 치른 후엔 어른다워야 한다며 말투를 바꾸셨죠. 전 원래 말투를 더 좋아합니다만.”
“아, 아이라!”
장난치며 농담하는 시간도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무거운 공기는 어느덧 사그라졌다. 그때까지 아무 관여도 하지 않은 채 자리만 지켜온 라미아스가 내 어깨를 툭 찔렀다. 의아해하며 돌아보는 내게 턱짓으로 따라 나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남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라미아스를 따라 집 밖으로 나왔다. 그는 주위에 방음 마법까지 펼친 후에야 나를 돌아보았다.
“너 아까 주술 이야기할 때 하나도 안 놀라더라? 아니, 아예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던데?”
“……내가 언제요.”
내가 에디스에게 집중하는 동안 이 능구렁이는 날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피해자는 에디스인데 왜 나를 살피는 거야. 황당한 기분을 삼키고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는 척하지 마. 안 그래도 이미 내 훌륭한 주방장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어. 다비안이 가져왔던 주술식, 너도 그 주술에 대해 물어봤다더라? 핵심어만 설명해줬는데도 넌 곧바로 이해하던데, 왜 난 멍청한 표정만 짓냐고 화냈단 말이야.”
……그 훌륭한 주방장이 혹시 시벨리우스인가. 그렇게 비꼬더니 언제부터 <내> 주방장이 됐는지 모르겠다. 결국 이렇게 될 걸 왜 안 받겠다고 버텼어? 어이없어하며 바라보자 그가 슬그머니 눈길을 피했다.
“야, 말은 안 했지만 마족이 널 주시한 것도 사실 범상치 않게 보고 있거든? 그것도 그냥 우연은 아니지?”
“…….”
“솔직히 말해. 너 뭘 알고 있어?”
그가 화를 내거나 의심하는 식이었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협조할 마음이 없었을 거다. 하지만 침울하게 묻는 얼굴은 누가 봐도 서운한 티가 역력해서, 어쩔 수 없이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래서 미운 정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는 모양이다.
“정보국에선 어디까지 파악했는데요?”
“허어, 이것 봐라. 정보국보다 네가 더 많이 안다는 말투다?”
“그런 것 같으니까 캐묻는 거 아니었어요?”
“……마신관의 성력을 뽑아내서 어딘가에 활용한다고 추측하는 중이야.”
뭐, 그 정도면 다 파악하긴 했네. 고개를 끄덕이니 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걸 어디에 쓰는 건데? 폭탄이라도 만드는 건가? 인공 신성 무기 제작?”
“아뇨, 인어요.”
“인어?”
“이건 정확한 건 아닌데…….”
정확한 거지만.
“타락한 성력이 인어의 힘을 키우는 양분이 된다는 것 같아요. 그걸로 인어를 성장시키려는 목적인 거겠죠.”
“그거, 연회에서 왕녀가 한 말과 연관된 건가?”
누가 정보국 수장 아니랄까 봐 이미 그 정도는 파악하고 있구나. “그런 것 같아요.” 고개를 끄덕이니 라미아스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그때 피이이― 하늘 위에서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든 라미아스가 팔을 들어 올리자 그 위에 매와 비슷한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새라고 지칭할 수 없는 건 그게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한눈에도 마법으로 만든 인공체라는 걸 알 만큼, 몸 전체가 반짝거리는 황금색 글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법 전령이야.”
“전령으로는 너무 눈에 띄지 않아요?”
“저택 안에서만 쓰는 거야. 내가 집무실 안에 없는데 급한 보고가 있을 때만.”
즉, 급보가 왔다는 소리였다. 라미아스는 팔에 앉아서 부리를 고르는 마법 새를 다른 손으로 쥐었다. 그러자 새의 형체가 곧바로 흐트러지면서 빼곡한 글자가 적힌 여러 장의 종이로 변했다. 내용을 훑어내리는 라미아스의 표정이 시시각각 빠르게 변해갔다. 종래엔 거의 참담한 얼굴이었다.
“……아주 제정신들이 아니네.”
“왜요? 무슨 일인데요?”
“왕세자가 황제를 만났어. 에펜 왕국이 이번 마신전 정벌에 참전한다는 모양이야.”
기밀이랍시고 숨길 줄 알았더니 나도 알아야 하는 내용이라 여겼는지 그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 정도야 이미 짐작한 부분이긴 했다. 해주의 열쇠로 왕녀가 거론된 이상, 에펜 왕국은 제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참전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로 인해 얻을 게 더 많을 테니 그들로선 오히려 쾌재를 부르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마족이 왜 왕녀를 공격하려 한 건지 숨겨진 이유를 밝혔어. 연회에서 한 말의 연장선인데 인어 일족은 저주에 걸려 몬스터가 된 거고, 저주를 내린 게 마신이라는 거야. 그 해결 열쇠를 왕녀가 지니고 있어서 제거하려는 거라네?”
“……뭐요?”
“저주라는 걸 증명한다면서 기사 하나를 소개했는데, 그자가 인어였어. 행동거지고 지능이고 평범한 성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는군. 왕녀가 저주를 풀어줘서 멀쩡해졌다는 거지. 그런데 저주를 해결하려면 마신관이 필요하대.”
“그게 무슨……. 저기, 잠깐만요.”
“일단 끝까지 들어봐. 더 가관인 게 마지막 부분인데. 마신을 정벌하려면 잊혀진 신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어. 국교를 정하고 잊혀진 신의 신성제국으로 천명하자고 했나 봐. 그럼 정벌군이 큰 힘을 얻을 거라고. 여기서 그 잊혀진 신이라는 게 인어의 창조신인 세이렌이야.”
“대체…….”
“근데 그걸 황제가 수락해버렸네?”
이건 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왜 라미아스와 대화할 때마다 이러는 것 같지? 들을수록 넋이 나가는 기분에 그대로 멍해졌다. 카류안이 선을 넘었다고 한 말이 뭔지, 카노스가 왜 굳이 인어란 존재를 없애버리기까지 했는지 단숨에 모든 정황이 다 이해됐다.
잊혀진 신의 부활이라니, 이건 규모가 커도 너무 크잖아. 게다가 그 신이 어디 그냥 평범한 신인가. 한때 악신이 되려 시도하는 바람에 신적에서 박탈된 존재였다. 더 짜증나는 건 지금 이 사건이 미래의 카류안과도 연결되어 있을 거라는 점이다. 그때 사용한 주술들도, 아이들을 납치한 방식들도 전부. 지금과 거울처럼 닮아 있는 게 결코 우연일 리가 없으니까.
“나라가 망하는 방법도 가지가지이긴 한데, 이건 좀 참신하네.”
황당한 어조로 중얼거린 라미아스 역시 피곤하다는 얼굴로 미간을 문질렀다.
“그리고 또 하나, 아주 유감스러운 일인데.”
여기서 더 유감스러울 게 있어? 그냥 말하지 않으면 안 되냐는 의미를 담아 라미아스를 바라보았다. 그걸 오히려 반대로 해석했는지(아니면 그냥 무시한 건지도 모른다) 라미아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왕녀가 지난 일로 극심한 공포에 떨고 있어서 평범한 일상이 불가능할 정도인가 봐. 자체 경호만으로는 안심할 수가 없으니 수호 기사를 붙여달라고 요청했대.”
“그게 왜요?”
뭐야,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네. 무심코 안도하다 얼굴을 굳혔다.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불길함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해줘. 간절한 시선을 보내는 것에 라미아스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 수호 기사로 아인 이드리스를 지목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합이 잘 맞는 관계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