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515화 (515/608)

제515화

“태자 전하, 그리고 친애하는 여러분. 이쪽이 제가 일전에 말씀드렸던 물의 정령사 엘입니다.”

어쨌거나 아인 이드리스의 주도하에 단란한 소개 시간이 이어졌다. 연회를 주최한 델루시오 남작과 더불어, 이 자리엔 지난 라미아스의 연회 땐 보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내 신원을 알게 된 사람들이 서로 놀란 눈길을 주고받았다.

“오, 저 사람이 그 여명 길드의 헌터…….”

“생각보다 더 어린 분이네요.”

“듣던 대로……아니, 생각보다 더…….”

일반인보다 청력이 뛰어난 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아무리 작은 소리로 수군거려봤자 바로 옆에서 떠드는 것처럼 고스란히 들리니까. 개중엔 외모에 대한 평가도 있어서 안 들리는 척하려니 진땀이 흘렀다. 하지만 역시 가장 문제는 왕세자 놈이었다.

“이렇게 정식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던가?”

이 제정신이 아닌 놈이 불쑥 말을 건네 왔다. 심지어 누가 들어도 구면을 대하는 방식으로. 피차 아는 척해서 좋을 거 없는 사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나만 그렇게 여긴 모양이다.

“왕세자께선 이미 저이를 알고 계셨습니까?”

다시금 놀란 시선이 쏟아졌다. 아인 이드리스도 당황한 시선을 보내왔다. 기가 막혀 바라보니 왕세자가 느끼하게 웃었다. 중지를 들어주고 싶은 충동을 눌러 참으며 억지로 미소 지었다.

“전 처음 뵙습니다만.”

“그런가? 난 왜 그대가 낯익은지 모르겠군. 도저히 잘못 볼 수가 없는 얼굴 같은데.”

“음, 저 역시 저하를 뵈었다면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 최근에 조금 비슷한 용모를 보긴 했던 것 같은데요. 하지만 그럴 리가 없죠.”

“그럴 리가 없다?”

“네, 그자는 인간으로 치부하고 싶지도 않은 오물 쓰레기라서요. 저하이실 리가 없습니다.”

헉, 어디선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일순 정적이 흐르며 주변의 온도가 한층 내려갔다. 입을 다문 사람들이 놀란 토끼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왕세자도 한 방 먹은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왜 가만히 있겠다는 사람을 건드려. 우리 좋게좋게 모르는 사이로 하자, 오케이? 빙긋 입꼬리를 들어 올리니 그가 꿈틀거리는 얼굴로 사납게 웃었다.

“……그래, 자네 말대로 처음 보는 게 맞는 것 같군.”

“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태연하게 받아치자 왕세자가 기가 막힌 듯이 웃었다. “하하, 재밌는 친구로군.” 이후엔 인상 좋은 황태자가 대충 수습해준 덕분에 다시 원래의 분위기로 돌아왔다. 다만 조금 전과는 와 닿는 시선이 사뭇 달랐다. 아무래도 건드리면 안 된다고 여기게 된 모양이었다.

덕분에 말을 걸어오는 이가 줄어들어 나로선 오히려 더 편했다. 이참에 원래 목적대로 아나이스 왕녀나 차분히 관찰하기로 했다. 왕녀 역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경계할 거라 예상했던 왕녀의 시선엔 의외로 호기심만 가득했다. 제 오빠가 대놓고 면박을 당한 상황인데도 오히려 재밌어하는 것 같았다.

가까이서 마주한 왕녀는 멀찍이서 볼 때보다 더 어려 보였다. 부드럽고 단아한 선을 지닌 이목구비. 맑은 꿀 색의 눈동자는 깨끗하고 선하기만 해서, 이 소녀가 머지않은 미래에 아인 이드리스와 치정으로 얽힌다는 게 조금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외에 딱히 특별한 구석은 느껴지지 않았다. 색다른 기운도 없었고, 존재감도 평범했다. 정말 힘을 지닌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겉으론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돌아가서 라미아스에게 전할 게 있으려면 일단 자세히 살펴보긴 해야 했다. 뭐든 아무 말이라도 걸어볼까 고심할 때였다.

“저어……. 아인 님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물의 정령사라고 하셨죠?”

뜻밖에 아나이스 왕녀 쪽에서 내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왕녀에 대해 알려진 부분도 그렇고, 지금까지 황태자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매우 드문 상황인 것만은 분명했다. 각자 떠들고 있던 무리가 다들 놀라서 이쪽을 바라봤다. 나도 당황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왕녀님. 그렇습니다.”

“실은 그동안 궁금했던 게 있거든요. 물의 정령 중에는 인어의 형태를 한 정령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게 정말인가요?”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질문이었다. 그 당사자가 인어와 관계있는 왕녀가 아니었다면 좀 더 순수하게 여길 수 있었겠지만. 덕분에 왜 라미아스가 굳이 내게 잠입을 부탁한 건지는 알 것 같았다. 바로 이런 상황을 노렸던 거다. 확실히 이건 물의 정령사만이 끌어낼 수 있는 반응이었다.

“정령사님?”

“……아아, 네, 맞습니다. 나이아스가 인간의 상체에 물고기 꼬리를 갖고 있어요.”

“정말 그렇구나. 그 정령을 보여주실 수 있나요?”

뜻밖의 요청에 잠시 멈칫하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왕녀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모두 기대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령술은 마법과는 결이 달라요, 왕녀님. 실력을 뽐내는 식으로 구경거리 삼아 정령을 보여드릴 순 없습니다.”

“아…….”

왕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기대하던 다른 이들 역시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할 줄은 몰랐는지 아인 이드리스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물론 내 말은 거기서 다 끝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제 친구를 소개해드리는 쪽이라면, 자리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

실망한 표정이 다시 급격히 밝아졌다. 왕녀는 자세를 곧게 세운 후 드레스 자락을 들어 보이며 우아하게 인사했다.

“제가 실례를 했네요. 정령사님의 친구를 만나보고 싶어요.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왕녀님.”

대답을 마치면서 앞으로 손을 뻗었다. 허공을 훑는 궤적을 따라 한줄기 물줄기가 뻗어 나오며 주위를 크게 선회했다. 그 물줄기를 타고 반투명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내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윽고 물고기의 꼬리를 지닌 사랑스러운 요정이 내 손바닥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오, 저게 물의 정령…….”

“정말 아름답네요.”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조금 전 내 발언에 불편한 기색을 비치던 사람들도 감탄하기 바쁜 모습이었다. 다만 아인 이드리스만은 미간을 살짝 모으고 있었다. 어차피 보여줄 거면서 왜 굳이 불편한 상황을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모르는 소리였다. 정령사가 이런 요구에 쉽게 응하면 다른 이들도 정령을 결국 그 정도로 여길 거 아냐.

“정말이네요. 정말 인어 같네요.”

왕녀는 나이아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물기가 어린 것 같아 돌아보았다가 당황했다. 어느새 왕녀가 두 눈 가득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황태자 역시 깜짝 놀라 왕녀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시오, 왕녀?”

“아, 죄송해요. 갑자기 조금 슬퍼져서요.”

“슬프다니? 뭐가 그대를 슬프게 하는 거지?”

“정령은 다들 인정하는 고귀하고 성스러운 존재잖아요. 누구라도 이 나이아스를 보면 아름답다는 걸 부정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런데 그와 같은 모습을 한 인어는 흉악한 몬스터로 알려져 있으니까요.”

듣고 있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왕녀님은 인어가 몬스터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누군가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러자 왕녀의 눈빛이 한층 차분해졌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온 것 같은 결연한 얼굴이었다.

“네, 맞아요.”

주위가 본격적으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아나이스 왕녀는 여전히 차분한 태도로 당황한 사람들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낯선 이야기라 지금은 다들 이해하기 어려우실 거예요. 하지만 인간들은 인어족을 오해하고 있어요. 인어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대화하고 사고(思考)할 줄 아는 존재예요.”

“하지만 왕녀님, 인어는 사람을 해칩니다. 그게 몬스터가 아니면 뭐겠습니까? 오크와 고블린도 간단한 말은 할 수 있습니다.”

“아뇨, 엄연히 결이 달라요. 인어의 지능은 처음부터 낮지 않았어요. 인간과 더불어 축복받은 인류 중 하나였죠. 지금은 저주를 받아서 원치 않는 행동을 하는 것뿐이에요. 저주만 해결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어요.”

“저주라니…….”

“전에 말한 그 얘기군.”

다들 어리둥절해하는 가운데, 황태자만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곧장 그에게 몰려들었다.

“전하께서도 알고 계신 내용입니까?”

“이게 다 무슨 말입니까?”

그 순간 와장창,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돌아보았다가 바닥의 참사를 확인하고 기겁했다. 누군가가 지나가는 고용인이 들고 있는 쟁반을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벌어진 돌발 사고였다. 그 누군가는 바로 나였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목이 말라서 마시려다 실수했네요.”

얼떨떨하게 바라보는 시선들을 향해 급히 사과를 건넸다. 사실 일부러 그런 거지만. 곧 상황을 파악한 고용인들이 청소할 도구를 갖고 몰려들기 시작했다. 반대로 손님들은 엉망으로 깨진 유리 조각과 흥건한 포도주를 피해 멀찍이 물러섰다. 오가던 대화는 자연스레 중단됐다.

“어쩜 좋아. 옷에 포도주 자국이…….”

“아, 포도주가 거기까지 튀었나요? 죄송해요. 제가 깨끗하게 지워드릴게요.”

“그런 게 되나요?”

“그럼요.”

나이아스에게 부탁해 사람들의 옷자락에 튄 자국들을 지우게 했다. 빠르게 깨끗해지는 옷을 보고 사람들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만하면 중심 화제는 완전히 돌린 것 같았다. 잠시간 분위기를 살피다 아나이스 왕녀 쪽을 확인했다. 그녀는 황태자와 단둘이 대화하는 중이었다.

“죄송해요, 전하. 제가 너무 두서가 없었죠? 모두 절 이상하게 생각하실 것 같아요.”

“아니오, 왕녀. 전혀 이상하지 않았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요.”

애틋한 얼굴을 한 황태자가 왕녀의 두 손을 붙잡으며 다독였다. 울상을 지으면서도 안도하는 왕녀는 처음과 여전히 똑같았지만, 이제 더는 그 모습이 평범하게 보이지 않았다.

‘저 사람…….’

아직도 주변의 공기가 술렁거리고 있었다. 대부분은 느끼지 못할 미약한 수준이지만 내 눈엔 선명히 보였다. 왕녀가 발언할 때, 자연체의 실프들이 출렁이는 파도를 타는 것처럼 크게 둥실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강제로 끊어내야 했다.

‘음파를 쓸 수 있구나.’

* * *

<인어>

반인반어의 모습을 지닌 지능형 수중 몬스터(상급).

평균 크기는 5라오~6라오 정도. 상체는 인간, 하체는 어류의 형태를 지닌 모습이다. 난생과 몬스터로 집단생활을 하며, 수컷보다 암컷이 더 강하다. 주로 물속에서 활동하지만 뭍에서도 활동할 수 있다.

신체의 물기를 제거하면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데, 이때는 육안으로는 보통의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우므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다만 인간의 모습은 3시간 이상 유지하진 못하며, 물에 젖으면 원래의 형태로 돌아온다.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는 있으나 지능이 낮고 몹시 포악한 편.

주공격 유형은 현혹술이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이 노랫소리를 들으면 정신이 흐트러지고 환상에 빠지게 된다.

일각에선 이 노랫소리 자체를 환상이라고 보고 있다.

특정한 음파를 일으켜 공격할 수 있다.

특정한 음파를 일으켜 공격할 수 있다.

들이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배워서 남 주지 않는다더니. 팔자에도 없던 헌터 자격증 시험 때문에 한때 달달 외우고 다녔던 몬스터 도감이 여기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왕녀가 인어일 리는 없다. 조금 전 쓴 음파가 위험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가벼운 파장이 미치는 정도라 내버려 둬도 감정을 조금 고조시키는 수준에서 그쳤을 거다. 박자가 빠른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급해지고 잔잔한 노래를 들으면 편안해지는 식의 효과다.

하지만 어떻게 인어의 능력을 갖고 있는 걸까. 그러고 보면 왕세자가 쓰는 미혹술도 인어의 능력이긴 했다. 아무리 세이렌을 섬긴 신관의 후예라지만 인간인 그들이 인어의 능력을 사이좋게 물려받을 수가 있나? 신적이 박탈된 신의 성력이 설마 아직까지 남아 있을 리는 없는데 말이다. 왕녀가 음파를 어디까지 다룰 수 있는지, 제 능력을 알고 쓴 건지 모르고 쓴 건지도 지금으로선 판단이 어려웠다.

“대강 수습은 된 것 같네요, 엘.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

복잡한 기분을 애써 털어내는 동안 아인 이드리스가 다가와 물었다. 사람 좋게 웃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사람의 호흡도 구분할 줄 아는 바람의 정령사였다. 왕녀가 일으킨 음파를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을 텐데, 어떻게 보고 있을까?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아뇨, 모처럼 귀한 분들 앞에 소개해주셨는데 소란을 일으킨 게 죄송해서요. 저 때문에 왕녀님 말씀이 끊겨서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왕녀님도 신경 쓰지 않으실 겁니다. 매우 소탈하신 분입니다.”

“그러시면 다행이네요. 그냥 뵙기에도 왕녀님은 좋으신 분인 것 같아요. 특히 목소리가 너무 좋으셔서 놀랐어요.”

“아, 엘도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목소리도 좋지만 발성이 특히 좋으시죠. 사람마다 일으키는 소릿결이 있는데 왕녀님이 지닌 소릿결은 그중에서도 탁월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청중을 이끌죠.”

역시 알고 있긴 했구나. 하지만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는 것 같았다. 하긴 나도 인어와 결부해서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경계심을 갖지는 않았을 거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시오?”

그때 황태자와 아니아스 왕녀를 비롯한 무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회장 안이 어느 정도 정리되니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모이는 분위기였다. 아인 이드리스가 대답했다.

“실은 왕녀님의 목소리가 좋으시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앗, 저요?”

왕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이 왕녀에게 몰려들었다.

“오, 맞아요. 아나이스 님의 목소리는 정말 고우시죠.”

“아무리 시끄러운 곳에 있어도 왕녀님의 목소리만은 똑바로 들린다니까요.”

“정말요? 실은 어릴 때부터 그런 칭찬 많이 들었어요. 제가 말하는 건 왠지 집중해서 듣게 된다고요.”

왕녀는 순수하게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일부러 능력을 쓴 거라면 조금쯤은 경계가 비칠 텐데, 자신이 가진 능력을 아직 자각하지 못한 건지도 모르겠다. 조심스럽게 표정을 살피는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방향만 봐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왕세자였다.

늘 그렇듯이 도발하려는 시선이 아니었다. 내가 왕녀를 살핀다는 걸 알아보고 주시하는 거다. 아무래도 본인도 모르는 능력을 오빠 쪽은 알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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