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514화 (514/608)

제514화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들풀이 바람과 춤을 추는 초원이었다. 고개를 드니 금가루 같은 햇살이 얼굴 위에 쏟아졌다. 수채화 물감을 개어 바른 듯한 하늘이 손만 뻗으면 닿을 듯이 가까웠다. 조금 걸어가자 지형의 끝이 다가왔다. 까마득한 절벽 밑으로 새파란 바다가 사납게 펼쳐져 있었다.

전부 아름답긴 한데, 기억에는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여기가 어딘지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직전까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 기억이 선명했으니까. 그러니 잠든 나를 누군가 들어다 옮겨둔 게 아닌 한, 이건 꿈이라는 소리였다. 뭐, 전자가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긴 하다만. 묘하게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역시 꿈이 맞는 것 같다.

이런 걸 자각몽이라고 하던가. 별일이 다 있다며 혀를 차려는데 마침 먼발치에 서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형태가 선명하진 않았지만 허리 아래까지 길게 늘어트린 머리칼이 절벽 아래 펼쳐진 바다와 같은 색을 지니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천천히 긴장이 풀리며 입술이 절로 올라갔다.

“이제 꿈에서도 그 모습으로 나오는구나, 아버지.”

그만큼 내가 이 세계에 적응했다는 거겠지. 뿌듯한 마음이 드는 한편으로 내심 아쉬웠다. 오랜만에 엘뤼엔의 원래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이곳에서의 그와도 잘 지내고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아는 모습과는 조금 차이가 있긴 하다. 그를 보면서도 종종 그리운 기분이 드는 것엔 그 탓도 있을 거다.

그는 내가 가까이 있는 걸 뻔히 느꼈을 텐데도 돌아보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성격까지 지금 그대로인 모양이었다. 그조차 이미 적응했건만 꿈이라 그런가, 괜히 더 서운해졌다.

“저기, 아버지. 나 아직도 라피스를 못 찾았어.”

실없는 넋두리를 시작한 건 그 때문이었다.

“그 녀석 대체 어디에 처박혀 있는 건지 모르겠어. 이렇다 할 단서가 전혀 없어. 힘들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막막해. 하지만 사실 아는 걸 모르는 척해야 하는 게 제일 힘들어. 차라리 아예 낯선 곳이었으면 더 나았을 것 같아. 아버지는 내가 과거로 가게 될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지? 각오라도 하게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지 그랬어.”

그래도 내심 후련하긴 했다. 이런 건 정령왕인 그에겐 절대 할 수 없는 말이었으니까. 꿈에서라도 대리만족하는 기분이었다. 이왕이면 반응이 돌아오면 더 좋을 텐데. 위로를 해주든 한심하다고 혀를 차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을 것 같은데. 그는 여전히 돌아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 말 듣고 있어?”

갑갑한 마음에 소리를 높여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한 장소에 있는 데도 전혀 다른 공간으로 나눠진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냥 이런 배경인 꿈인 모양이다. 목석처럼 서 있는 뒷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꿈. 이런 거야 흔하기는 한데 그래도 보통 자각몽이라면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할 수도 있지 않나? 왜 꿈에서조차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지 모르겠다. 적당히 체념하며 한숨을 내뱉었을 때였다.

“왜 먼 길을 빙빙 돌아가는지 모르겠네.”

“……!”

그저 무시하고 있었던 것뿐인가. 뜻밖에 무겁기만 하던 그의 입이 갑자기 열렸다. 그런데 기분 탓인 건지 말투가 좀 이상했다. 그치고는 너무 가벼운 데다가 왠지 음색도 좀 더 높은 것 같았다. 멈칫해서 가만히 살피려는데 때마침 그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덕분에 똑바로 볼 수 있게 된 얼굴에 급히 숨을 삼켰다.

그는 엘뤼엔이 아니었다. 그건 나였다. 물의 색을 지닌, 정령왕인 나.

“이건 또 무슨…….”

아니, 왜 여기서 내가 나와? 정령왕일 땐 인간 엘을 마주하더니, 이젠 정반대 상황이야? 황당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는데 눈앞의 내가 생긋 웃었다.

“왜 고민하는 거야?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뭐?”

“모르는 척하지 마. 넌 이미 답을 알고 있어.”

저건 분명 나인데,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조금도 모르겠다. 눈을 가늘게 뜨는데 내가 훌쩍 앞으로 다가왔다. 포옹하듯 가까워진 간격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귓가를 스치는 입술을 타고 나직한 음성이 속삭였다.

“너만 포기하면 되잖아.”

눈을 뜨자 화려한 그림이 보였다. 색색이 꽃으로 만발한 초원을 배경으로 한껏 행복한 얼굴을 한 연인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여관 안에서도 오로지 이 방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으로, 여관 주인이 유명한 화가를 어렵게 모셔와 거금을 주고 완성했다는 천장화였다. 귀족만 머물 수 있는 방이라면서 이 그림을 보기 위해 먼 나라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얼마나 자랑했는지 모른다. 아끼고 아끼는 방이라 행여 그림이 상하기라도 할까(대체 뭘 하면 천장의 그림을 훼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장기 계약도 받아주지 않는다고 엄포를 놨더랬다. 그래 봤자 돈에는 장사가 없었지만. 어쨌거나 이번엔 확실히 익숙한 장소였다.

“일어났어?”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동자만 굴려 시선을 옮기니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정체부터 알아차렸다. 내 주위에서 이런 색 눈동자를 지닌 존재는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이프리트.”

입 안이 모래라도 씹은 듯이 퍼석거렸다. 내가 듣기에도 거친 목소리에 얼굴을 찌푸리니 이마에 따뜻한 손길이 닿았다. 선명하고 분명한, 현실감이 넘치는 감촉이었다. 그제야 조금 숨이 트였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전신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억지로라도 움직이려니 눈치 빠른 이프리트가 얼른 부축해왔다.

“아, 고마워.”

“고맙긴. 악몽이라도 꾼 거야? 식은땀 좀 봐.”

순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부산스럽게 땀을 닦아주던 이프리트가 시선을 맞춰왔다.

“왜?”

“……이거 악몽이었나?”

“그야 나도 모르지?”

빙긋 웃는 얼굴에 물음표가 그려졌다. 그러고 보니 꿈 내용은 말하지도 않았구나. 아직도 잠에서 덜 깼는지 바보가 된 기분이다. 바로 설명하려는데 그의 뒤편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엘뤼엔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 얼굴을 보니 저절로 입이 닫혔다.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인 탓인가. 떠올리는 그 어떤 것도 적당한 언어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도련님?”

의아한 목소리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이프리트의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아까보다 걱정이 더 스며든 시선이었다.

“아, 미안. 그냥 별 꿈은 아니었어. 딱히 무서운 것도 없었고. 정말 별 내용 없었는데 왜 이런지 모르겠네.”

“흠, 몸이 허해졌나? 요즘 계속 영양가 없는 빵이랑 과자만 먹더라니.”

“아닌데. 나 고기랑 다른 것도 골고루 잘 먹고 있어. 바로 어제도 먹었잖아?”

“아, 그렇네. 그럼 그거로도 부족한 거 아냐? 그러고 보면 도련님은 성장기치곤 너무 안 자라긴 해.”

“그, 그런가.”

“그렇다니까. 지난번에 마신 술만 해도 그래. 그거 원래 성장기에 마시면 몸이 훅 크거든? 근데 어째 도련님은 변화가 거의 없단 말이지. 그 술로도 몸이 성장할 만큼의 양분이 안 채워졌다는 소리야. 내 생각엔 도련님의 저장고가 너무 큰 탓인 것 같아.”

“저장고?”

이프리트는 간단한 예시를 들어 설명했다. 평범한 인간의 신체가 항아리라면, 내 몸은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우물이라고 했다. 그래서 남들에겐 차고 넘칠 만큼의 물을 부어도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거였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 신의 주술로 만들어진 신체다 보니 남다른 것뿐이겠지만, 사실대로 말할 순 없었으므로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런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이프리트는 도전 의식에 불타올랐다.

“이렇게 되면 오기가 생기네. 보부로서 책임감이 무럭무럭 샘솟는걸? 내가 그 우물 안을 기필코 다 채워주고 말겠어.”

“아니, 그럴 필요는…….”

“걱정하지 말고 나만 믿어, 도련님. 어디 보자. 인간의 원기를 돋우는데 좋은 음식이 뭐가 있지? 평범한 음식으로는 될 리가 없고…… 아, 이럴 땐 역시 그거지. 잠깐 기다려 봐. 금방 얻어올게.”

대체 어디서 뭘 얻어오겠다는 건지는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그전에 이프리트가 사라지는 게 더 빨랐으니까. 이래도 괜찮은 건가. 나도 정령왕이긴 했지만 인외 존재의 기준에 들어가는 원기 좋은 음식이 뭔지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부디 무난하게 먹을 수 있는 거여야 할 텐데, 엘뤼엔의 표정이 미묘해진 걸 봐선 아무래도 각오를 좀 해야 할 것 같았다.

문득 침대맡에 놓인 종이 하나가 보였다. 가문의 연회에 참여해주길 바란다는 내용의 초대장이었다. 겉봉에 남아 있는 인주 자국이라든가 그 안에 적힌 유려한 글씨체만 봐도 발송인의 신분이 훤히 보였다. 그래 봤자 평소대로라면 아궁이에 던져지는 불쏘시개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번엔 차마 그렇게 처분할 수가 없었지만.

‘이런 걸 머리맡에 두고 잤으니 꿈자리가 뒤숭숭하지.’

카드 하단에 적혀 있는 발송처를 우울한 기분으로 내려다보았다. 델루시오 남작가. 라미아스가 참석을 부탁한 연회를 여는 가문이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초대장을 다시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았다. 바로 오늘이 그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 * *

연회에서는 별로 좋은 기억이 없다. 현대에서 참석해봤던 연회는 집단 납치라는 초유의 파국으로 끝났고, 여기서 참석한 연회에서도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만 깨달았다. 그러니 오늘 열리는 연회에 기대감 같은 게 생길 리가 없었다. 아니, 기대감 따위가 다 무언가. 참석자 명단만 봐도 이미 결말이 훤했다. 난 오늘 분명 병을 얻을 거다. 병명은 화병과 스트레스성 위장염일 거고.

“그러고 보니 셋 다 라피스 때문에 참석한 거잖아? 이 자식, 진짜 찾기만 해봐.”

“네?”

“하하,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색하게 웃으니 초대장을 확인하던 문지기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다가 내가 안으로 들어설 수 있도록 비켜섰다. 이번엔 낯간지러운 호명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입장한 후에는 안의 분위기부터 천천히 살폈다. 느지막이 온 참이라 이미 연회는 한창 무르익어 있었다. 꽤 많은 인원이 참석한 상태였지만 그 안에서 아인 이드리스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제국의 유명 인사답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에 있었으니까. 혹시 이번에도 미네르바를 만나게 될까 싶었는데, 오늘은 혼자 왔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행스러우면서도 내심 아쉽기도 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지만 서둘러 아는 척할 생각은 없었다. 바로 근처에 왕세자 놈의 뺀질거리는 얼굴이 보여서 더욱 그랬다. 저치만 없었어도 오늘 일정이 이렇게까지 짜증 나진 않았을 텐데. 치밀어오르는 한숨을 억지로 눌러 삼켰다.

그래 봤자 이번 연회의 목적인 아나이스 왕녀는 놈의 옆에 있었고, 그게 현실이었다. 오빠 옆에 딱 붙어 다른 사람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더니 왕녀는 정말 없는 사람처럼 조용했다. 맞은편에 있는 금발의 남자가 꾸준히 말을 거는 데도 짧게 웃기만 할 뿐 대답조차 잘 하지 않았다. 그게 더 애가 타는지 금발의 남자는 수선스럽게 대화를 유도하기 바빴다. 옷차림이 가장 화려한 데다가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는 걸 보니 아마 저 남자가 황태자인 것 같았다.

황태자는 시종일관 아나이스 왕녀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두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정도로 진득한 눈빛이었다. 그게 부담스러웠는지 왕녀는 시선을 바닥에 고정하고 있었지만 황태자에겐 그조차도 사랑스럽게 보이는 듯했다. 그걸 느끼는 건 나만이 아닌지 주위에서 작은 수군거림이 들렸다.

“전하 좀 보세요. 왕녀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시네요. 그 소문이 정말 사실이었나 봐요.”

“지금 비전하는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우셨다고 하던데. 정말 너무하시는군.”

“직접 봐도 믿어 지지가 않네요. 그렇게 금슬이 좋은 부부였는데. 비전하를 정말 아끼고 사랑하시던 분이셨잖아요.”

“그럼요. 저런 사랑이 현실에 있을 수 있나 싶었죠. 소설 속 주인공들 같다면서 두 분 전하를 부러워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어요? 사람 일은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네요.”

“비전하가 너무 가엾어요.”

진실을 알고 있는 만큼 속이 불편해졌다. 원래 황태자는 저런 뒷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저 미혹술은 깨트릴 방법이 없나? 이쪽 일엔 어지간하면 관여할 생각이 없지만, 꼴 보기 싫은 왕세자가 자기 맘대로 멀쩡한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꼴을 보려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미래를 바꾸는 것도 아닌데 저놈 하나 엿 먹이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아, 그래. 주술에 능통한 시벨리우스라면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돌아가면 바로 물어봐야지.

속으로 조용히 열의를 불태우고 있는데 마침 주위를 돌아보던 아인 이드리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발견하곤 잠시 멀뚱히 눈을 깜빡거리더니 곧 멍하니 입을 벌렸다. 잘못 봤다고 여겼는지 눈을 비비기까지 했다. 어색하게 웃어 주니 그가 급히 주위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곤 허둥지둥 내 쪽으로 다가왔다.

“엘? 정말 엘입니까?”

“안녕하세요, 아인. 여기서 만나네요.”

“정말 놀랐습니다. 엘도 이 연회에 참석하셨군요. 오시는 줄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요.”

시선이 점점 몰려드는 게 느껴졌다. 조용히 들어온 덕분인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아 좋았는데, 이제 평화로운 시간은 끝났다고 생각하니 조금 서글퍼졌다. 이런 내심을 알 리 없는 아인 이드리스는 내 차림새를 살피며 감탄했다.

“옷이 정말 잘 어울립니다.”

“고마워요.”

“진심입니다. 어느 의상점의 솜씨인지 몰라도 엘에게 어울리는 분위기를 아주 잘 살렸네요.”

머쓱한 기분으로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흰색 우단에 금색 자수가 은하수처럼 수 놓인 화려한 형태라 좀 과하지 않나 싶었는데 잘 어울린다고 하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사실 원래는 예전에 라미아스에게 받은 옷을 다시 입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프리트가 그럴 수는 없다며 펄쩍 뛰더니 이 옷을 억지로 떠안겼다. 누가 봐도 맞춤 정장인데 대체 언제부터 준비해 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사실 가장 궁금한 건 그와 함께 내밀었던 이상한 음료의 정체지만.

<자, 그리고 이것도 마셔.>

출발하기 전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컵을 내밀던 이프리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뭐냐고 물으니 일전에 구해온다고 한 보약이라고 했다. 별다른 냄새는 나지 않았고 색은 포도주처럼 붉었다. 하지만 단숨에 삼키라면서도 원료가 뭔지는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 미심쩍은 행동에 언젠가 명계에서의 일이 떠오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최악이었지.’

다행히 이프리트가 준 건 망각의 물처럼 끔찍한 맛은 아니었다. 워낙 수상해서 그렇지, 정체가 뭔지만 알면 대충 먹을 만하다고 여길 정도는 됐다. 뭔가의 발효액 같기도 하고 술 같기도 했는데, 그건 대체 뭐였을까.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닌데 생각이 자꾸만 그쪽으로 기울었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다. 이건 그냥 앞으로 이어질 상황에 대한 현실도피였다.

“엘, 소개해드리고 싶은 분들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그래, 바로 이 상황 말이다.

목구멍 안쪽까지 한숨이 가득 차올랐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더는 물러설 수 없겠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니 아인 이드리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나를 자신이 있었던 무리 쪽으로 이끌었다. 못 이기는 척 따라서니 사방에서 호기심 어린 시선이 쏟아졌다. 특히 왕세자의 눈빛이 작살처럼 꽂혔다. 굳이 눈을 마주치지 않았지만 얼마나 뚫어지게 바라보는지 뺨이 다 따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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