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3화
델루시오 남작가는 대대로 대표적인 친황파 가문이었다. 암행 중인 황제의 목숨을 우연히 구한 공으로 작위를 받은 선조의 시작이 그러했고, 시종으로 입관해 황궁의 내실에 평생을 바친 후예의 업적이 그러했으며, 그 뒤를 충실히 이어가는 지난 가주들의 삶이 그러했다.
대륙에서 가장 큰 부강한 제국이라곤 하나 4백 년을 넘게 이어온 황실의 역사가 매번 굳건하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한심할 만큼 유약하고 무능한 황제도 있었고, 인간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성정을 지닌 폭군도 있었다. 황제가 신임하는 황자보다 귀족원이 추대하는 황자가 후계자에 더 걸맞은 경우는 너무 흔했으며, 반기를 들고 일어선 자들의 명분이 합당한 적도 있었다.
역대 황제가 모두 제 사람에게 잘하는 것도 아니라서, 폭언을 듣는다거나 폭행을 당하는 등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억울하게 파면당하거나 일방적인 화풀이로 죽은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도 델루시오 남작가는 한결같이 친황파 목록에 선두로 이름을 올리는 가문이었다.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는 맹목적인 충성심에 황제의 개라고 불리기까지 했으나 딱히 그 호칭을 모욕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가문의 자부심이자 자긍심으로 삼았다.
현 델루시오 남작가의 가주인 벤자민 유바 델루시오는 자신 또한 그 명맥을 이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끝맺음이 현재 진행형이 아니라 과거형인 이유는 근래 들어 자신의 행동이 황제의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불현듯이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황제를 바로 곁에서 보필하는 상급 시종이었다. 황궁의 시종은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결코 외부로 유출해선 안 됐다. 그게 아무리 사소하고 별거 아닌 부분일지라도 엄중히 지켜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었다. 하지만 그는 최근에 벌써 몇 차례나 황제의 일과를 다른 사람에게 알렸다. 그뿐만 아니라 황제의 의중이나 최측근들과 주고받은 사담을 전달하기까지 했다. 말실수로 가볍게 흘린 정도가 아니라 명백한 정보 유출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면직 정도가 아니라 참형을 당할 터였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면서도 지금까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거기까진 그렇다 쳐도, 왜 그런 일들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마땅한 계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딱히 황실에 불만을 가진 적도 없고, 협박을 당하거나 회유를 받은 적도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뭔가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내가 왜 이러는 거지?
“델루시오 남작?”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그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달빛을 닮은 은회색 머리칼을 단정히 넘겨 올린 남자는 옅은 금색의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군더더기 없이 훤칠한 체구에 각이 잡힌 검은색 정장이 아주 잘 어울렸다.
남자는 바다 너머에 있는 에펜 왕국의 젊은 왕세자였다. 동생인 왕녀의 유학길을 배웅할 겸 함께 제국으로 건너왔는데, 마침 델루시오 남작의 딸도 왕녀와 같은 학교를 지원한 참이라 그 인연으로 남작가에서 지내게 됐다. 그가 꾸준히 황실의 정보를 물어다 바치는 당사자이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예?”
“아까부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잖나.”
가만히 응시해오는 시선에 델루시오 남작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준수한 왕세자는 어느 하나 눈에 띄지 않는 부분이 없었지만, 특히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금빛으로 신비롭게 반짝이는 눈동자를 볼 때면 심연을 들여다본다는 트로웰의 혜안이 이러할까 싶었다. 그래서일까. 왕세자와 눈이 마주치면 왠지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하염없이 멀거니 왕세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차오르던 의구심은 어느새 스멀스멀 밀려 나가 완전히 사그라졌다. 대체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던 건지 모르겠다. 왕세자 저하만큼 훌륭한 분을 위해선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건데 말이야. 델루시오 남작은 본인의 생각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 채로 미소 지었다.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멍해졌나 봅니다.”
그 모습을 살피듯 가만히 지켜보던 왕세자의 얼굴에도 곧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보니 얼굴에 피로가 가득하군. 연회 준비로 바빠 보이더니 너무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닌가?”
“아닙니다. 근래 이렇게 좋았던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즐겁기만 합니다.”
“그렇다니 다행이다만, 너무 무리하진 말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송한 어조로 대답하는 남작의 얼굴엔 이제 더는 멍해 보이는 기색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모습을 다시금 확인한 왕세자가 곁에 있던 기사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델루시오 남작은 그 시선에서 오가는 무언의 교류를 읽어내지 못했다.
“자, 그럼 계속하지. 내가 어제 지시한 건 가져왔나?”
“예, 저하. 여기 있습니다.”
왕세자의 맞은편에서 대기하던 이가 한 발 앞으로 나와 조심스럽게 서류를 건넸다. 받아든 후 읽어내리는 왕세자의 표정이 점점 가라앉았다. 사방이 고요해지면서 한동안 종이를 넘기는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기나긴 침묵이 끝난 건 왕세자, 루시엘이 서류를 던지듯 내려놓은 순간이었다.
“소득이 정말 이것뿐인가?”
“면목이 없습니다.”
“최소한의 할당량조차 채우지 못했군. 시기가 시기이니 어느 정도 감소할 건 예상했지만 이건 차이가 너무 큰데.”
“제국의 영향력을 너무 간과한 것 같습니다. 변방까지 경계가 심해져서 기회를 엿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강한 건 다루기 어렵고 연약한 건 구하기가 쉽지 않으니 여러모로 속을 썩이는군.”
혀를 찬 루시엘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싸늘하게 식은 공기엔 폭발 직전의 예민한 기류가 흘렀다. 이럴 땐 누구 하나 다쳐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라 사람들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오라버니.”
하지만 다행히도 이번엔 그들 사이에 축복의 신이 함께하는 듯했다. 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한 소녀가 얼굴을 내밀었다. 제비꽃을 닮은 드레스를 입은 소녀는 루시엘과 똑같은 은회색 머리칼에 금안을 지니고 있었다. 에펜 왕국의 왕녀이자 이번 제국 여정의 주인공인 아나이스였다.
팽팽한 실처럼 당겨졌던 공기가 한순간에 풀렸다. 왕실의 장자로 태어나 첫돌 때부터 왕세자였던 루시엘은 하나뿐인 동생을 끔찍이 아꼈다. 냉혹한 성정인 본인과 달리 동정심 많고 마음 착한 동생이 놀랄까 봐 그 앞에서는 결코 화를 내지 않았다. 아니, 아무리 화가 나도 동생을 보면 화가 풀리는 것 같았다. 국왕은 제왕이 될 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면모라고 걱정했지만, 주군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늘 긴장하는 수하들에게 왕녀의 존재는 마른 땅의 단비나 다름없었다.
예상대로 루시엘의 얼굴에 가득하던 냉기가 서서히 누그러졌다. 일그러진 미간이 펴지고 흉흉한 눈빛이 차분해지더니, 종국엔 엷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 됐다. 수하들에겐 안전한 시간으로 접어들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들어와라, 아나이스.”
가볍게 떨어진 허락에 문가에 붙어 눈치만 보던 아나이스가 헤헤 웃으며 들어섰다. 그 모습을 본 루시엘이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 남작님도 여기에 계셨군요? 방해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편히 대화하십시오.”
엄밀히 말하면 남작의 집무실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이 장소의 주인을 으레 루시엘로 여기고 있었다. 남작 본인조차도 그랬다. 정중한 대답에 미소로 화답한 아나이스는 방 안에 있던 기사들과도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은 후에야 자신의 손위 형제를 돌아보았다. 빙긋 웃은 루시엘이 단호하게 말했다.
“외출은 안 된다.”
“치, 오라버니는 왜 저만 보면 그 말만 하세요?”
“네가 날 찾아오는 용건이 항상 그것뿐이니까.”
“제가 언제 항상 그랬어요. 죄송하지만 이번엔 틀리셨거든요? 오라버니께 서신이 와서 전해드리려고 온 거예요.”
“서신?”
그거야말로 새삼스러운 용건이라 루시엘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제국에 온 이후로 활발한 인맥을 쌓아가는 그에겐 하루에도 수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렇게 도착한 편지들은 남작가의 집사가 따로 모아뒀다가 저녁에 전해주는 편이었다. 하지만 동생이 내미는 편지를 보는 순간 그는 왜 직접 가져왔는지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겉봉에 붉은 태양의 문양이 찍혀 있었으니까. 황실의 문장이었다. 루시엘은 곧장 봉투를 열고 내용물을 꺼내 들었다. 그가 긴 문장을 빠르게 읽어내리는 것을 지켜본 아나이스가 이미 짐작한 발송인을 물었다.
“태자 전하께서 보내신 건가요?”
“그래, 내일 오찬을 함께 하고 싶다고 하시는구나. 입궁할 준비를 해두거라.”
“저도 같이 가요?”
황실의 초대는 개인적으로 이뤄질 때도 있지만 루시엘이 얼마나 동생을 아끼는지 아는 황족들은 보통 남매를 함께 초대했다. 특히 황태자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아나이스 역시 알면서도 물은 것이었다. 말투에서 내키지 않아 하는 기색을 읽은 루시엘이 고개를 들었다. 가만히 응시해오는 시선에 아나이스는 입술을 작게 삐죽거렸다.
“황태자 전하는 부담스러워요.”
“……아나이스.”
루시엘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동생의 부탁은 어지간하면 다 들어주는 그였지만, 아무리 그라도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었다.
“이미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니. 우리 일가가 제대로 된 기반을 다지려면 제국의 힘이 필요해. 태자 전하가 네게 호감을 갖게 된 건 우리에게 아주 큰 행운이다.”
“하지만 전하는 이미 혼인하셨잖아요.”
“곧 파혼하실 거다. 둘 사이에 아이도 없으니 네가 곤란해질 일도 없어.”
“그래도 전 불안해요. 솔직히 말하면 태자 전하의 마음을 믿지 못하겠어요. 지금이야 아주 다정하시지만, 이미 한번 변심하신 분이 두 번 그러라는 법은 없겠어요?”
“변심이라니.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구나, 아나이스. 태자 전하가 연정을 품게 된 이는 네가 유일하다 하셨다. 황실의 혼사가 어디 제 의사에 따른 것이더냐? 정략혼에 큰 의미를 담지 말아라.”
“그래도 나중에 또 다른 이를 연모하게 되시면요?”
“절대 그럴 일은 없다.”
세상에 무조건 확신할 수 있는 일이 어디 있던가. 말도 안 되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루시엘의 표정이 너무 단호해서 아나이스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보다 네가 그런 부분을 신경 쓰는지는 미처 몰랐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인 이드리스.”
뜬금없이 뱉어진 이름에 아나이스의 얼굴이 움찔했다.
“갑자기 그분은 왜요?”
“그 유명한 바람의 정령사가 이름을 알린 것엔 미네르바의 연인이라는 배경도 무시할 수 없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저와 아인 님은 친구예요. 그분께 그런 감정은 없어요.”
“그 말을 믿을 수 있다면 좋겠구나.”
“당연히 믿으셔야죠!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왜 남녀는 친하게만 지내도 이런 오해를 받아야 하는 거예요? 전 그냥 아인 님을 존경하는 것뿐이에요. 절 구해 주신 분이잖아요. 정령왕의 계약자 정도 되면 거만할 만도 한데 성품도 얼마나 겸손하고 좋아요? 그런 분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느끼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그래, 바로 그런 감정이 커져서 연정이 되는 거란다.”
“어휴, 정말! 아니라니까요!”
아나이스는 불퉁한 얼굴로 루시엘을 노려보았다. 그제야 말꼬리 잡는 걸 그만둔 루시엘이 빙글빙글 웃었다.
“우리 공주님이 토라지셨나?”
“몰라요. 오라버니는 바보예요. 전 이만 갈래요.”
“오늘은 일찍 자렴. 내일 입궁할 때 입을 드레스는 지난번에 태자 전하께서 선물해주신 드레스가 좋겠구나. 누구보다 아름다울 거다.”
아나이스는 할 말이 많은 얼굴을 했지만 이내 체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떠나는 동생을 지켜보는 루시엘의 얼굴은 시종일관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표정은 동생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순간 서늘하게 식었다. 평화롭던 공기에도 다시 긴장감이 차올랐다.
“제사는 얼마나 진행됐지?”
“어제 두 번 의식을 치렀습니다만,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끌어올리진 못했습니다.”
“역시 머리가 굵은 건 꽤 끈질기군.”
“보통 독한 게 아닙니다.”
“오늘은 내가 참관하겠다.”
루시엘이 몸을 일으킨 것과 동시에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던 델루시오 남작이 벽면의 책장 쪽으로 이동했다. 몇 가지 장치를 건드리자 책장이 이동하면서 안쪽에 숨겨져 있던 공간이 나타났다. 바닥에 깔린 붉은 융단을 치우니 지하로 향하는 문이 있었다. 한때는 델루시오의 가주만 알고 있는 비밀 통로였으나, 이제는 루시엘과 그 가신들의 근거지가 된 공간이었다. 그들은 문 아래로 뻗어진 계단을 거침없이 내려갔다.
지하는 매우 넓은 동공으로 이뤄져 있었다. 본 용도는 몇 달을 은신해도 버틸 수 있도록 설계된 은신처이자 탈출구였다. 가주가 된 이후로 델루시오 남작은 이 안에 식량 저장고 외에 별다른 구조물은 들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자잘한 물건들이 많았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한가운데 깔린 거대한 마법진이었다. 그 위에 몸을 웅크린 사람이 눕혀져 있다는 점도 그러했다.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손과 발이 묶여 있는 이는 10대 후반의 소녀로 보였다. 소녀는 한눈에 보기에도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옷은 넝마에 가까웠고, 몸은 몇 날 며칠은 굶은 듯이 삐쩍 말랐다. 머리칼은 정체 모를 오물로 범벅이 되어 본래의 색을 알 수 없었다. 그나마 희끗희끗 드러난 부분을 통해 분홍색일 거라고 간신히 유추할 수 있는 정도였다.
저벅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지자 소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소리가 울리는 건 지옥 같은 시간이 도래할 때뿐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소녀에게 닿은 손길은 그녀를 억지로 잡아 끌어올렸다. 몸부림을 쳤으나 저항은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소녀는 억지로 고개가 들린 채 눈앞에 있는 이를 바라봐야 했다. 물기 어린 연두색 눈동자가 공포에 질린 것을 빤히 들여다보며 루시엘이 나른하게 웃었다.
“자, 오늘은 얼마나 버티는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