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2화
“그래, 뭘 할 줄 아는데?”
“시벨은 뭐든 다 잘해요.”
“쯧쯧, 그런 말은 오히려 전문성을 떨어트릴 뿐이야. 넌 왜 제과사 제빵사 요리사가 다 나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어중간하게 말할 거면 최소한의 경력은 밝혀야지. 대회에 입상한 경력이라든가, 그동안 일해본 곳이라든가.”
“특별대 주방이요.”
“특별대 주방? ……설마 이번에 단기 고용한 그 주우방?”
“네.”
고개를 끄덕이니 라미아스가 가볍게 이마를 짚었다.
“너 말이야. 내 입맛이 얼마나 까다로운 줄 알아? 내 주방은 그냥 평범한 주방이 아냐. 황궁에서 몇 년간 경력을 쌓은 이들로만 엄선해서 꾸린 아주 특별한 주방이라고!”
“시벨도 잘해요.”
“넌 경력이란 게 무슨 말인지 몰라?”
“요리를 잘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후, 이래서 촌뜨기는……. 잘 들어, 애송아. 귀족이란 생물이란 말이지. 그런 단순한 것으로만 움직이지 않아. 우리는 품위도 생각하거든.”
“와, 그것참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품위네요. 그렇게까지 애쓰는데 왜 이렇게 사세요?”
“너 지금 그거 무슨 뜻이야? 어?”
무슨 뜻이긴. 너한테 품위 같은 게 어딨냐는 뜻이다.
이를 질끈 악문 라미아스의 눈동자에서 전류가 튀었다. 나도 지지 않고 웃으며 노려봐줬다.
“왕궁에서 일한 경력도 있어.”
그때 묵묵히 듣고 있던 시벨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헉, 맞아.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예전에 이사나와 알리사한테 왕궁에서 일한 경력을 자랑한 적이 있었다. 마을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제국으로 건너온 줄 알았는데 언제 그런 경력을 쌓았지? 놀라서 바라보니 라미아스의 표정도 흥미롭게 변했다.
“그래? 어디에서 얼마나?”
“로젠 왕국에서.”
담담히 답한 시벨리우스가 힐끔 내 눈치를 살폈다.
“……일주일.”
“……지금 나랑 장난하니?”
일주일 경력으로 자랑했던 거였냐.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니 시벨리우스의 귓불이 붉게 물들었다.
“계속 일할 수 있었는데, 누가 날 알아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어.”
“추격자?”
“아니, 친선 사절로 온 블루 엘프. 예전에 우리 마을에도 온 적 있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어.”
설명을 들어보니 로젠 왕국은 블루 엘프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나라였다. 그래서 왕국 행을 택한 거였는데 하필이면 그를 아는 사람을 만나다니, 어지간히도 운이 나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왕궁에서 일한 경력이긴 하잖아.”
“고작 일주일로 경력은 무슨. 거기서 요리를 해보기나 했어? 허드렛일이랑 재료 손질만 할 때 아니야?”
“했어. 난 첫날부터 주방에 투입됐어. 하루뿐이긴 하지만 모든 식단을 총괄하기도 했어.”
“갓 들어온 애한테 그런 막중한 일을 맡겼다고?”
“요리사들이 집단 식중독으로 전부 쓰러져서 나밖에 없었거든.”
“…….”
“폐기하려고 놔둔 굴이 아까워서 나눠 먹었다가 탈이 났던 모양이야. 들키면 모두 파면이라 은밀히 수습하려고 했고. 내게 레시피를 주고 몇 가지 요리를 만들어보게 했는데 마음에 들었는지 그날 주방을 맡겼어. 그리고 아무런 문제 없이 넘어갔어. 오히려 그날 식단이 특히 호평을 받았다고 들었어.”
“으음, 그래. 로젠 왕궁 주방이 개판이라는 걸 알려줘서 고마워. 그건 내 정보원들도 미처 몰랐던 사실이네.”
라미아스가 황당함을 금치 못하는 얼굴로 답했다. 그래도 솔깃하긴 했는지 처음만큼 무시하는 시선은 아니었다.
“식단을 총괄할 정도면 뭐든 다 잘한다는 건 사실인 모양이네. 하긴, 내가 너무 인간 기준으로 생각했어. 너 요리하기 시작한 건 얼마나 됐어?”
“3백 년쯤……?”
생각지도 못한 숫자에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아, 그래, 그러고 보니 시벨리우스 나이가 천 살이 넘었지? 그쯤이면 뭘 배워도 못하는 게 더 이상하긴 했다.
“나쁘지 않네.”
라미아스의 표정도 조금 더 누그러졌다. 진짜 정체가 유니콘이니 경력을 인정해주는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예전에 엘프 중에서 요리사라는 이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식사를 대접한다면서 과일만 채 썰어서 내왔다는 모양이었다.
“생식을 주로 즐기는 종족에겐 몇백 년의 경력도 큰 의미가 없다는 걸 그때 깨달았지.”
비통한 표정으로 당시의 기분을 표현한 라미아스는 유니콘은 조리한 음식을 즐길 줄 아는 종족이라 다행이라는 점을 연거푸 강조했다. 그때 일이 어지간히 충격이 크긴 했나 보다.
“그럼 자격은 되는 거죠?”
“뭐, 일단은……?”
시벨리우스가 한결 밝아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근데 좀 의외인걸. 유니콘에게 요리 같은 건 전력이 되지 못하는 약한 애들이나 맡는 일이잖아. 룬이 요리를 배우는 걸 다들 그냥 내버려 뒀어?”
비록 이어진 말에 금방 다시 굳어지긴 했지만. 날개를 보인 것도 아닌데 룬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설마 거기까지 알아볼 거라는 건 나도 생각지 못해서 몸이 절로 긴장했다.
“시벨리우스를 본 적 있어요?”
“아니. 하지만 룬이 은발에 벽안이라는 건 알지. 루세프 신의 상징색이잖아? 굳이 블루 엘프로 변한 이유가 색을 가리려고 한 건가 싶었거든.”
등받이에 몸을 기댄 라미아스가 느긋하게 웃었다. 대체 이렇게 상황을 잘 파악하는 사람이 왜 엘퀴네스와 관련되기만 하면 정신을 못 차리는 건지. 다시금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근데 룬은 꽁꽁 숨겨 놓고 감추기 바쁜 존재 아니었나? 인간 사회에 나와 있어도 돼?”
“거기까지 아시면 왜 고용해달라고 한 건지도 알겠네요.”
“지금 내 집을 보호소로 쓰시겠다?”
“상부상조하자는 거죠. 공작님은 훌륭한 요리사를 채용할 수 있고, 시벨리우스는 편히 지낼 수 있는 장소를 얻고, 서로 좋잖아요.”
“글쎄, 그건 내 주방에 인력이 부족할 때의 얘기겠지? 난 지금도 충분히 내 집 요리에 만족하고 있거든.”
“아, 그래요? 그럼 이런 거래는 어때요? 다비안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거든요.”
능청스럽게 빙글거리던 공작의 얼굴에서 빠르게 웃음기가 사라졌다. 꼬고 있던 다리까지 내려놓은 채로 화를 다스리는 게 제법 결정타이긴 한 모양이었다.
“야, 너 진짜 치사하게!”
“누가 먼저 치사하게 나왔는데요?”
“네가 구하는 물건 찾아주는 대신에 나한테 협력하기로 한 거 잊었어?”
“그래서 특별대 소집도 안 튀고 얌전히 받아들였죠. 그런데 간 게 있는데도 오는 건 없네요?”
“아오, 진짜 한 마디도 안 지네! 넌 어떻게 된 애가 귀여운 맛이 없냐?”
“제가 공작님한테 귀여워 보여서 뭘 해요.”
굳이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싶은 모양인데, 진짜 고약한 취미다. 같은 생각을 한 건지 시벨리우스도 불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엘은 귀엽다기보다는 예쁜 외모지.” ……아니다. 완전히 다른 맥락에 빠져 있었구나. 요점을 헛짚은 녀석이 헛소리하는 걸 모르는 척 넘기고 웃었다. 그제야 쓸데없는 오기를 부리는 걸 포기했는지 라미아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알았어. 나야말로 너랑 다퉈서 뭘 하겠냐. 주방에 자리 하나 마련하는 게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마음대로 해.”
됐다. 뿌듯한 마음으로 시벨리우스를 돌아보니 그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어쨌든 이제 얘기해 봐. 너한테만 충성하는 걔가 뭘 알려줬어?”
한발 물러섰다고 여겨서인지 라미아스의 표정은 뚱했다. 나중에 시벨리우스 요리를 직접 맛보고 나면 생각이 완전히 달라질 텐데. 행운을 거머쥐고도 모르는 어리석은 남자를 보려니 혀가 절로 차였다. 어쨌든 원래 말해 주려고 했던 이야기라 순순히 설명을 시작했다. 왕세자가 지닌 미혹의 힘부터 왕녀에게 있을지도 모를 모종의 능력에 대한 것까지. 내친김에 왕실에서 쓰던 주술의 정체와 내가 왕세자와 얽히면서 경험한 일들에 대한 것까지 알려주니 라미아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특히 왕세자가 흑주술을 쓴다는 건 전혀 몰랐던 일인 듯했다.
“야, 너, 이런 걸 지금 말하면 어떡해?”
“묻지도 않았잖아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원래는 개인적으로 해결하려고 했거든요. 근데 생각보다 상황이 가볍지 않은 것 같더라구요.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말해두는 게 좋겠다 싶었어요.”
노예 상단에서는 특별한 상황이라 대범하게 흑주술을 쓴 건 줄 알았다. 설령 들키더라도 무마하기 쉽고, 문제가 되지 않을 자리라서. 그런데 설마 평범한 상가에서도 남발할 줄 누가 알았겠어. 주변 사람을 다 물려두긴 했지만, 아마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흑주술이 금기라는 건 누구나 다 알지만 그것도 구분할 수 있을 때의 일이다. 일단 겉으로 보기엔 마법이나 주술이나 다 비슷해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미혹의 힘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흑주술까지. 이래서 소용이 없었구만.”
“무슨 말이에요?”
이어진 설명은 이랬다. 미혹하는 것까진 몰랐지만, 왕세자한테 타인의 환심을 사는 종류의 능력이 있을 거라는 건 아이기스 쪽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그래서 그가 제국에 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황제와 황태자에게 그와 눈을 맞추지 않도록 당부하고, 정신을 맑게 하는 마도구를 착용하게 했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전혀 소용이 없었는지 최근 황태자가 지나치게 왕세자를 가까이하고 있다고. 뭔가 다른 수를 가미했다는 것까진 알았는데 그게 설마 흑주술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 가장 뜻밖인 건 그다음 말이었다.
“……황태자가 왕녀한테 반했다구요?”
“그래, 지금 그거 외부로 알려지지 않게 막느라 계속 비상 상황이야. 미치고 환장하겠는 건 이 정신 나간 놈이 태자비와 이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거지. 이게 말이나 돼? 둘이 서로 죽고 못 사는 잉꼬부부였단 말이야. 더욱이 왕녀는 원래 태자의 취향도 아니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내용이었다. 얹힌 것처럼 속이 갑갑해져서 한숨이 절로 흘러나갔다. 다른 건 몰라도 아일브라 백작가가 에펜 왕실과 같은 수법으로 이번엔 제국을 삼키려 든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그럼 왕녀가 아인 이드리스에게 반한 건 아무도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겠구나.’
기분이 상당히 이상했다. 이 복잡하게 꼬인 실타래에 내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엉켜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는 기분. 그리고 그걸 벗어날 방법이 있는 건지조차 모르겠다. 끊어내려 할수록 오히려 더 진득하게 얽혀드는 것 같았다.
“일단 왕녀가 뭘 숨기고 있는 건지 알아내야 해. 그래서 말인데, 네가 좀 알아볼래?”
“제가 무슨 수로요.”
“최근 그 왕족 남매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하나 더 있어. 마침 조만간 남작가에서 열리는 연회에 다 같이 참석한다지 뭐야?”
“설마…….”
“맞아, 너도 아주 잘 아는 사람.”
그래, 바로 이런 식으로 말이다. 떨떠름해져서 바라보는 것에 라미아스는 그 어느 때보다 화사한 미소로 화답했다.
“친구란 참 좋은 거지.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하면서 자연스럽게 합류할 수도 있는 관계잖아? 마침 소개해주고 싶었던 사람들이 있는 자리라면 더더욱. 다른 목적이 있어 다가왔다는 의심을 살 일도 거의 없고 말이야.”
“……나한테 정말 왜 그래요.”
이마를 짚으며 이를 악무니 영문을 알지 못하는 시벨리우스가 당황한 시선을 보내왔다. 괜찮다는 뜻으로 웃어준 다음 라미아스를 노려보았다. 그래 봤자 그는 아랑곳하지도 않았지만.
“딱히 알찬 정보를 바라는 건 아냐. 그냥 분위기 정도만 파악해줘. 그 왕녀는 오라비 옆에만 딱 붙어 있어서 직접 대화해 본 사람도 거의 없거든.”
“한다고 한 적 없는데요.”
“전에 주기로 했다가 무산된 거, 그대로 둘 거야?”
“…….”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황급히 바라보자 그가 느긋하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자신감에 가득 찬 얼굴만 봐도 뻔했지만 굳이 입을 열어 확인했다.
“진짜 있기는 해요?”
“그럼 내가 이런 거로 거짓말을 할까.”
얄미운 짓만 골라 하는 건 드래곤의 종족 특성인가. 유니콘에 이어 이제 드래곤에게도 편견이 생길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연이 닿은 드래곤마다 다 이렇게 사람의 복장을 뒤집을 리가 없다.
“이러니까 차이고 다니지.”
그냥 넘어가자니 울컥해서 치밀어오른 말을 툭 내뱉었다. 여유롭던 그의 표정이 단숨에 변했다.
“야, 너 그거 누구한테 들었어? 릴이지? 그 녀석이 말한 거지?”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엘퀴네스를 말한 건데.”
“어? 에, 엘퀴네스?”
“맨날 차이잖아요. 아니면 또 차인 사람이 있나 봐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아오!”
차마 화를 내지도 못하고 뒷목만 잡는 모습을 보니 속이 조금은 후련했다. 그제야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다음, 왠지 나만큼이나 후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벨리우스를 돌아보았다.
“그럼 시벨, 넌 여기서 지내고 있어. 종종 만나러 올게.”
“아, 엘. 이거 가져가.”
고개를 끄덕인 그가 품속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내밀었다. 전에 준 적이 있던 수호부였다. 왕세자가 흑주술을 써도 적어도 열 번은 막을 수 있을 양이었다.
“이걸 다 줘도 돼?”
“원래 너 주려고 만들어뒀던 거야.”
이런 건 어떤 방식으로 만드는 걸까. 왠지 제작 과정이 수월하지는 않을 것 같다. 값을 매길 수도 없을 만큼 귀한 거겠지. 그건 라미아스의 눈이 휘둥그레져 있는 것만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걸 공짜로 받자니 미안했지만 앞으로 마주할 일들을 생각하면 차마 사양할 수가 없어서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때 우리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라미아스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쟤 성별이 뭔지는 알아?”
본인 딴에는 나를 골탕 먹일 절호의 기회라 여긴 모양이었다. 물론 시기를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은 시도였다. 그를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돌아본 시벨리우스가 뚱하게 대꾸했다.
“알아. 남자잖아.”
“……엥? 알아? 남자인 걸 아는데 이렇게 잘해준다고? 유니콘이? 저 수호부 한 장 만드는 데 한 시량도 넘게 걸리는 거잖아. 영력도 엄청 소모하는 거라고 알고 있는데. 그걸 남자애한테 저렇게 막 퍼 준다고?”
“무슨 상관이야.”
한심해하는 시선이 더 짙어졌다. 그에게 내가 보내는 시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머쓱해한 라미아스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넌 뭔데 공략하기 어려운 애들하고만 친해지냐?”
이어진 질문은 당연히 그냥 무시했다. 내가 잘 풀리는 게 아니라, 본인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 * *
어디선가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기분 좋은 감각에 얼핏 잠이 깼다. 무언가가 몸을 흔든 것 같기도, 차가운 물방울이 닿은 것 같기도 했다.
꽤 깊이 잠들어 있었던가. 왠지 생각이라는 걸 해보는 게 아주 오랜만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의식이 깨어난 것과는 다르게 몸은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좁고 답답한 공간 안에 억지로 구겨져 있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잠들어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나마 떠오르는 건 의식이 남아 있던 마지막 순간의 절박한 잔상들이었다. 거대한 폭발이 일면서 강렬한 바람이 불었다. 사방에서 모래의 잔재들이 휘몰아치듯 쏟아졌다. 그리고…….
<지금 뭘 하는 거야!>
자신을 향해 외쳤던 누군가의 목소리.
그게 누구였지? 선명치 못한 기억을 억지로 헤집어 얼굴을 떠올려 보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거뭇거뭇하게 가려진 광경들만 연이어질 뿐. 제대로 보이는 건 거의 없었다. 오히려 답답한 기분만 더 강해져 괴로워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여긴 대체 어디지?’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았다. 자신은 이미 죽었다. 그 마지막 폭발이 아니었더라도 회복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가 없었다.
아, 그렇다면 여긴 명계인가. 조금은 수긍할 만한 판단이 내려졌다. 알아봤던 사후의 세계와는 조금 다른 것 같았지만, 더는 생각하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집중하려 할수록 떠올리는 것들이 깨진 조각처럼 흩어졌다. 아무래도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탓에 머리가 단단히 굳어버린 모양이다. 이대로 다시 깊은 잠에 빠지고 싶다는 마음만 들었다. 자꾸만 머릿속을 파고드는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터였다.
<……!>
<…스…!>
누구지? 뭐라고 말하는 거야. 하나도 들리지 않잖아. 내가 널 알아보길 원하는 거라면 좀 더 들리도록 크게 말해. 낮게 투덜거리면서도 이대로 목소리를 놓칠까 봐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분명 아는 이의 목소리인데…….
<라피스!>
“……!”
뿌옇던 시야가 한순간에 확 트였다. 환해진 공간 속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당혹감을 담은 채 자신을 돌아보는 물의 눈동자.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파도가 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생기 없이 희게 질린 얼굴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얼음 같은 그 모습조차 그와 잘 어울린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아, 그렇군. 너였구나. 날 찾고 있던 게 너였어?
흘러나오는 웃음을 가만히 삼켰다. 이미 많은 걸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또 알게 되는 기분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깨닫고 나니 자신의 상황이 좀 더 분명하게 보였다. 그에 비해 그는 아직 자신의 존재를 느끼지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주제에 무작정 헤매고만 있는 게 참 미련스러울 만큼 그다웠다.
덕분에 정신은 완전히 또렷해진 듯했다. 긴 시간 안락하게 즐겨온 깊은 잠이 다시 함께하자며 손짓해왔지만 더는 얌전히 그 속에 의식을 맡길 기분이 들지 않았다.
누가 부르시는데, 그럼 이만 일어나야지. 그의 부탁엔 늘 약했다. 애타게 찾는 걸 무시하면 미움받을 텐데, 그런 건 바라지 않았다. 그러니 너도 좀 더 분발해 봐. 아직 전해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굳이 말을 걸었다.
난 여기에 있어, 엘.
너와 아주 가까운 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