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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511화 (511/608)

제511화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그 주인이 시벨리우스인지 조금 전까지 멋대로 입을 나불거렸던 놈인지는 알 수 없었다. 대답하라는 뜻으로 바라보니 시벨리우스가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내가 여기서 더 곤란해질 건 없어.”

“그래? 다행이네.”

사실 곤란해진다고 해도 죽일 생각이긴 했다. 그래도 이왕이면 곤란해지지 않는 쪽이 더 낫긴 하지.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돌아보니 주춤거리며 일어난 남자가 급히 방어 자세를 취했다. 동요를 가득 드러낸 주제에 억지로 태연한 척하는 기색이 가상할 정도였다.

“하하, 설마 정말 날 죽일 수 있다고 여기는 건가? 상황을 너무 만만히 여기는군. 난 일족 안에서도 손꼽히는 전사다. 조금 전엔 내가 방심했을 뿐이다.”

“응, 그럼 이제 방심하지 마.”

손가락을 가볍게 맞부딪히니 출렁이는 물줄기가 내 주위를 감싸고 돌기 시작했다. “저, 정령사?” 헛숨을 삼킨 남자가 급히 뭔가 주술을 외우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시큐엘이 그를 덮치는 게 더 빨랐다.

“컥!”

휘몰아친 물에 갇힌 남자가 허공에 떠오른 채 마구 버둥거렸다. 경악한 남자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게 방심하지 말라니까.”

미리 방어해도 막기 어려운 게 정령인데 한번 붙잡히면 이미 끝났다고 봐야 한다. 상급 정령이라면 더욱 그렇다. 인간보다는 잘 버티는 편이었지만 그래 봤자 폐로 호흡하는 생물. 동작이 점차 굼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끝내버려.”

가볍게 도약한 시큐엘이 하늘 위를 크게 회전했다. 일어난 물보라에 한기가 일더니 빠르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공중에 결박되어 있던 남자의 몸도 함께 얼어붙었다. 경직된 남자가 점점 굳어져 가는 자신의 몸을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무서운 속도로 차오르는 성에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점차 공포가 실렸다. 물론 그 눈동자도 곧 하얗게 뒤덮였지만.

이제 눈앞엔 거대한 얼음 덩어리만이 남게 됐다. 그대로 확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진짜 오랜만에 개소리를 들었네. 안 그래도 짜증 나는 거 많은데 열 받게 하고 있어.”

―혈압 상승은 건강에 좋지 않다.

내 옆에 내려앉은 시큐엘이 담담히 말했다. 누가 그걸 모르나, 입술을 삐죽이니 날카로운 눈매가 웃는 듯이 휘어졌다.

―나머진 어떻게 하길 원하나?

“으음, 몬스터랑은 경우가 달라서 시신을 이대로 방치하는 건 안 될 것 같은데. 깨끗하게 처분할 수 있겠어?”

―안 될 건 없지.

늑대의 모습인 주제에 피식거린 시큐엘이 다시 얼음 덩어리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땅이 쑥 꺼지더니, 얼음 덩어리가 그대로 바닥에 삼켜졌다. 커다랗게 남은 구덩이엔 물이 차올라 있었다. 아마도 수로와 연결해서 그대로 흘려버린 듯했다. 본의 아니게 예약한 진혼 길드 마스터보다 수로 탐험을 먼저 하게 된 셈이었다.

―틀을 잡아놨으니 바다까지 그대로 흘러갈 거다.

“잘했어. 고마워.”

―별말씀을.

의기양양하게 답하는 말을 듣고 나니 머리가 좀 식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저 구덩이는 어떻게 처리한다? 일단 시큐엘을 돌려보낸 다음 궁리하고 있자니 시선이 느껴졌다. 몸을 돌리니 멍하니 굳어져 있는 시벨리우스가 보였다. 숨을 쉬고 있기는 한 건지, 꼭 귀신이라도 본듯한 표정이었다.

그때쯤 지글거리는 소리가 울리면서 그의 목에 새겨져 있던 글자가 증발하듯 사라졌다. 그의 피로 만든 주술이긴 해도 다행히 시전자가 죽으면 그대로 사라지는 듯했다. 주위를 감싸고 있던 무형의 진법 같은 것도 같이 사라지며 다시 원래의 느낌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움직일 수 있게 된 시벨리우스가 허둥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

가까이 다가가 상태를 살피니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혼란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흔들리는 시선이 나를 뚫어질 듯이 응시했다.

“너…….”

“알아. 내가 좀 과하게 대응했지. 미안한데 탓해도 어쩔 수 없어. 그자가 날 먼저 죽이려고 했어. 상대는 죽이려고 하는데 내가 봐줄 이유는 없잖아.”

“아니, 그걸 뭐라고 하려던 게 아냐. 그냥…… 의외라서.”

“내가 생각보다 강해서?”

피식 웃으니 그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동족을 신경 쓰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그럴 만큼 정이 있는 관계는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그자가 대하는 태도만 해도 존중은커녕 동정하는 마음조차 한 톨도 없어 보이긴 했다. 그간 시벨리우스가 어떤 취급을 받아왔는지가 뻔히 보여서 속이 다시 울컥했다.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해. 미리 사정을 말하지 않은 내 잘못이야.”

그는 자책감 가득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은 몰랐어.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올 줄도 몰랐고. 성별을 밝히면 그냥 보내줄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안이했어.”

“애초에 그런 말도 안 되는 규정이 있다는 게 더 문제인 것 같은데?”

“선대 룬들이 전부 연정에 얽힌 일로 좋지 않게 끝났거든. 그래서 다들 그 부분에 많이 예민한 편이야. 하지만 이번엔 아마 에드윈이라 더 그랬을 거야. 그는 예전부터 내게 감정이 좋지 않았거든.”

“왜? 그놈한테 뭘 잘못하기라도 했어?”

“……룬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가 있어. 그런데 내가 힘을 제대로 각성하지 못해서 그걸 지키지 못했어.”

“그리고?”

다음 말을 기다리니 시벨리우스가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설마 그게 전부인 건가 싶었는데, 반응을 보니 짐작이 맞은 모양이었다.

“그냥 각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렇게 싫어한다고?”

“그게, 일족에게 꽤 중요한 일이라…….”

“하지만 힘을 각성하지 못한 게 네 잘못은 아니잖아.”

그 말에 그의 표정이 더 묘해졌다. 마치 들어선 안 되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어딘가 고장 난 듯한 얼굴이었다.

“……어?”

“네가 각성할 수 있었으면 진작 했겠지. 안 되는 걸 어쩌란 말이야. 솔직히 가장 답답한 사람은 본인이지 않아? 아니, 그전에 일단 묻자. 네가 그 의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해서 일족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데? 전염병 같은 게 돌고 누가 죽어 나가기라도 해? 가뭄 같은 자연재해나 병충해가 들었어?”

“아, 그, 그렇진 않아. 간단히 말하면, 루세프 님과 소통하는 게 어려워졌어. 룬은 제사장이기도 해서 신과 소통하는 창구와 다름없거든. 그런데 그 창구가 막힌 거지.”

“그리고?”

“…….”

“뭐야, 또 그게 전부야?”

“……룬은 그걸 위해 있는 존재니까.”

시큐엘의 당부가 무색하게도 또 혈압이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뻐근해진 뒷목을 문지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지적해야 할지 모를 문제들이 눈앞에 와르르 쏟아진 기분이었다.

“루세프 신이 그래? 룬은 그걸 위해서만 존재하는 거라고?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쓸모없다고 그랬어?”

“어? 아니, 그런 건…….”

“그럼 누구 마음대로 그런 걸 정했는데?”

이번에도 시벨리우스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부분인지 눈빛에 동요가 고스란히 비쳤다. 대체 애를 얼마나 오랫동안 들들 볶아놨으면 이런 당연한 사실에조차 놀라는 건지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어두운 이면은 있다고 생각한다. 마족이 전부 문제아는 아닌 것처럼 엘프에게도 부조리한 면이 있고, 그래서 종족 전체에 편견이 생긴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부터 유니콘은 정말 정말 싫어질 것 같았다.

“시벨리우스.”

끓어오르는 화를 억지로 다스리려니 목소리가 떨렸다. 고개를 드는 시벨리우스의 시선도 떨리고 있었다.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그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가 곧 다시 닫혔다. 조금 전보다 더 크게 떨리기 시작한 눈동자가 더는 나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아래로 떨궈졌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건 조금 시간이 흐른 후였다.

“날 도와줘서 고마워. 너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다정한 사람으로 기억될 거야. 이번 일은 내가 알아서 수습할게. 넌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해. 여기서 날 만나지도 않은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앞으로도 계속 추격자가 있을 거야. 에드윈이 사라졌으니 그의 행방을 중심으로 수색이 이뤄질 거고, 규모도 점점 늘어나겠지. 나 때문에 애꿎은 사람들이 다치게 될지도 몰라.”

“그래서, 설마 마을로 돌아가겠다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이 상황에서 침묵은 누가 해석해도 긍정이었다. 속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한숨을 삼키고 애써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마을에서 나온 건 잘한 결정이었어. 좀 과장해서 말하면 네 일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해. 난 사실 네가 이대로 제도를 떠난다고 해도 반대할 작정이었거든? 그런데 마을이라니. 거길 제 발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봤으니 알잖아. 난 발각되면 막아내지 못해. 어차피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그건 네가 혼자일 때의 경우고.”

당연한 지적인데 시벨리우스는 허점을 찔린 것처럼 몸을 굳혔다. 다음 말을 이미 예감한 얼굴이라 시간을 끌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내가 도와줄게.”

“……그럴 수는 없어.”

답하는 어조는 몹시 침울했다. 그는 초조한 듯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뭐야, 사실은 돌아가고 싶은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거절하지 마. 먼저 도와달라고 해도 부족할 상황에 무슨 배짱이야?”

“너무 무모하고 위험해.”

“괜찮아. 다 감당할 만하니까 이런 말도 하는 거지.”

“네가 강한 건 충분히 알겠어. 하지만 정말 가볍게 결정할 일이 아니야. 지금은 한 명이지만 나중엔 수십 수백 명이 한 번에 몰려들 수도 있어.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날 죽이진 않아. 하지만 넌 아니야. 아무리 상급 정령사라도 그만한 숫자를 감당할 수는 없어.”

“누가 상급 정령사래?”

웃으며 되물으니 이해하지 못한 시벨리우스가 잠시 눈을 깜빡였다.

“아, 검술도 강하지.”

“그거 말고.”

“……?”

“넌 왜 내가 다른 정령사보다 정령의 향기를 더 강하게 풍기는 것 같아?”

그 말에 의아해하던 시벨리우스가 곧 숨을 크게 삼켰다. 푸른 눈동자에 서서히 경악이 차올랐다. 드디어 내가 하려는 말이 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설마 너…… 정령왕을……?”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하는 걸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끄덕여주니 숨을 삼키는 소리가 노골적으로 울렸다.

“이래저래 귀찮아질 것 같아서 공개적으로 밝힐 생각은 없지만. 너한테까지 감춰서 뭐하겠어.”

다시금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시벨리우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날 도우려는 거야?”

“친구잖아.”

이번에야말로 그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이 기묘하게 일그러진 얼굴. 마치 처음으로 감정을 표출해보는 것처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운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곳에 와서 본 그의 얼굴 중에서 가장 역동적인 표정인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당황할 대답이야?”

“……나를 친구라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럼 지금 생겼네. 생애 첫 친구.”

우리 악수나 할까? 웃으며 손을 내미니 시벨리우스의 눈동자가 멍하니 따라왔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이내 천천히 손을 잡아 왔다. 닿은 손은 처음엔 몹시 차가웠지만, 맞잡고 있는 동안 점차 따뜻해져 갔다. 뭉클한 기분이 솟아올라 그리움이 한가득 들어찼다. 내가 알던 그의 온기였다.

* * *

“일단 발각되지 않는 게 우선이야.”

상황이 정리된 후 가장 먼저 궁리하기 시작한 건 시벨리우스의 거취 문제였다. 그의 말대로 추격자는 언제든 다시 올 거고, 누구든 에드윈의 행방을 수색하기 시작한다면 노출이 더 빨라질 거다. 유니콘 일족 전부를 상대할 생각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 일을 키우지 않으려면 최대한 들키지 않는 게 서로 편한 길이었다. 시벨리우스도 당연하다는 얼굴로 동의했다.

“환영진을 걸고 안에 숨어서 지낼까?”

“추격은 계속 있을 텐데 언제까지? 그럼 마을에서 갇혀 지내는 거랑 뭐가 달라.”

“으음.”

“원래 하고 싶었던 대로 해. 요리사 하고 싶어 했잖아. 단지 제과점이나 상점가의 식당처럼 눈에 띄고 누구나 접근하기 쉬운 장소는 피하자는 거지.”

마음 같아선 같이 지내자고 하고 싶었지만 나도 엘뤼엔한테 신세 지는 주제에 선뜻 제안할 수가 없었다. 시벨리우스도 여전히 날 끌어들이는 걸 미안해하는 상태이기도 해서, 우선은 최대한 그가 안전하게 머무를 곳을 찾아보는 중이었다.

“치안대 주방으로 다시 돌아가는 게 좋을까?”

“거긴 단조롭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긴 하지만, 그것도 딱히 나쁘진 않아.”

시벨리우스는 상관없다는 얼굴이었으나 그만둔 일을 다시 하게 하려니 마음이 영 내키지 않았다. 좀 더 특별한 장소가 필요했다. 이왕이면 숙식이 가능하며, 다양한 요리를 마음껏 만들어 볼 기회가 있고, 설령 그곳에 있다는 의심이 들더라도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데다가, 강대한 병력이 상주하고 있는 곳 말이다. 그리고 모든 사정을 솔직히 밝힐 수 있어서 만일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나 대신 잠깐이라도 보호해줄 수 있고, 즉시 내게 소식까지 보내줄 수 있다면 더욱 금상첨화일 터였다.

“그런 곳이 어딨어.”

시벨리우스가 황당해하며 물었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특히 후자의 조건들은 거의 말도 안 되는 부분들이긴 했다. 그런데 이거 참 공교롭다고 해야 할지. 마침 내가 아는 곳 중에 그런 장소가 하나 있었다.

“뜬금없이 찾아와선 요리사 고용할 생각 없냐고?”

그리고 지금, 우리는 바로 그 장소에 와 있었다. 화려한 카펫이 깔린 방안, 큼직한 가죽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피우던 라미아스가 도도하게 코웃음을 쳤다. 그의 시선이 내 옆의 시벨리우스를 노골적으로 훑어내렸다.

“요리사 유니콘이라니, 좀 재밌긴 하네.”

누가 노련한 드래곤 아니랄까 봐 정체를 알아보는 거 하나는 빨랐다. 그냥 일방적으로 끌고 온 탓에 아무것도 모르는 시벨리우스는 몸을 굳혔지만 나는 태연하게 웃는 얼굴로 맞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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