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0화
그로부터 얼마 후, 우리는 광장 벤치에 아주 어색한 분위기로 앉아 있었다. 마침 포장이 다 끝난 김에 사방에서 쏟아지는 눈길이 부담스러웠던 내가 먼저 나가자는 눈짓을 보냈고, 시벨리우스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한 결과였다.
먹구름이 가득한 흐린 날씨였다. 그래선지 오늘따라 주위에 지나가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물론 사람이 있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민망했을 테니 차라리 이편이 나은 것 같았지만.
“이거 먹을래?”
봉투에서 빵 하나를 꺼내 내미니 멍하니 받아든 시벨리우스가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여전히 혼이 나가 있는 얼굴이라 지금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너무 그렇게 충격받으면 나도 좀 슬픈데.”
“……미안.”
“아니, 오해하게 했다면 나야말로 미안하지. 헷갈리는 외모로 태어난 게 내 잘못은 아니지만. ……근데 그렇게 착각할 정도야?”
“그…… 외모도 그렇지만 향이 좀…….”
아, 그러고 보니 유니콘은 상대의 기운을 향기로 느낀댔지. 여성이 풍기는 향을 좋게 느낀다고 했던가. 그런데 정령의 향기도 좋은 편이다 보니 내 성별을 착각했었다고 고백했던 것 같다. 아주 잠깐 오해한 거라더니, 그건 아니었던 같지만.
하긴 나라도 창피해서 솔직하게 다 말하진 못했을 것 같긴 하다. 당사자가 그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더더욱. 설마 과거로 돌아가 직접 확인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지금 다시 보니 정령의 향기이긴 해. 하지만 아무리 정령사라도 보통 이렇게까지 강하게 풍기는 일은 흔치 않아서 성별의 영향이 더 크다고 생각했어. 그게, 나만이 아니라 그때 널 봤던 애들은 다 널 여자로 알아.”
마지막 말은 그냥 변명처럼 들렸다. 본인도 그렇게 느끼긴 했는지 들고 있는 빵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에서 초조함이 묻어났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정말 여자라고 생각해서 그동안 도와줬던 거였어?”
“그런 건 아냐.”
그제야 좀 정신을 차린 듯 그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미심쩍은 기분에 눈길을 흘리니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좀 재밌었다. 이런 걸 보면 나도 참 성격이 나쁜 것 같다.
“아니, 아주 아닌 것만은 아니긴 한 것 같지만…… 그게 딱히 다른 의도가 있던 건 아니라…….”
“아니라는 거야, 맞다는 거야.”
“……정말 미안.”
결국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그를 보고 피식 웃었다. 더 건드렸다가는 울지도 모르겠다. 놀리는 건 이쯤에서 그만둬야 할 것 같았다.
“뭐, 여성을 돕는 걸 긍지로 여긴다는 일족이니 어쩔 수 없지. 나한테 배신감을 느낀다거나 원망하는 것만 아니라면 상관없어.”
“그, 그렇진 않아. 좀 놀라긴 했지만, 내가 일방적으로 오해한 거고. 네 잘못이라 생각하진 않아.”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나마 분별력을 잃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냥 하는 말인지 진심인지까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덕분에 나도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러자 망설이는 표정을 짓던 시벨리우스가 한숨을 내쉬듯이 말했다.
“차라리 남자라서 다행이야.”
“그건 그것대로 좀 이상한 말인데…….”
“아, 아니. 별다른 뜻은 아냐. 그냥, 지금 내 상황이 조금 좋지 않아서 그래.”
상황? 무슨 상황? 가출한 걸 말하는 건가? 의아해져서 바라보니 머뭇거리는 답이 돌아왔다.
“규칙상 난 원래 다른 종족과 교류하면 안 되거든. 네가 여자면 일이 더 복잡해졌을 거야.”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다른 종족과 교류하면 안 된다고? 그런 게 규칙으로 정해져 있어?”
황당한 기분으로 물으니 시벨리우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더 황당해졌다. 만났을 때의 상황이 워낙 좋지 않았다 보니 그저 경계심을 강하게 보이는 거라 생각했는데, 아예 어울려서는 안 된다는 규정까지 있는 건 줄은 몰랐다. 게다가 자신으로 한정해서 말하는 걸 보면 유니콘 일족 전체의 규칙인 것도 아니었다. 시벨리우스에게만 유독 엄격한 제한이 있다는 소리였다. 더 자세히 설명해보라는 뜻으로 바라보자 그가 머쓱해하며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돌연 얼굴을 굳히더니 팔을 뻗어 나를 밀쳐냈다.
“떨어져!”
“……!”
워낙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미처 방어할 틈도 없었다. 그러나 당황해서 돌아봤을 땐 더 당황스러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밀쳐진 건 나인데 정작 바닥에 넘어진 건 시벨리우스였다.
“젠장, 결국…….”
탄식하는 그는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시도는 하는 것 같은데 손가락을 꿈틀거리는 게 전부였다.
“시벨? 너 왜 그래?”
“다, 다가오지 마. 넌 여길 벗어나. 어서!”
얼굴을 일그러트린 그가 힘겹게 소리쳤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그 말을 들을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무시하고 가까이 다가가 상태를 살피니 한눈에 보이는 것이 있었다. 그의 목에 조금 전만 해도 없던 끈이 채워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진짜 끈이 아니라 글자로 이뤄진 문신이 새겨진 것처럼 보였다.
“이건…….”
“포박술이야.”
“뭐?”
“요즘 아슬아슬했는데 결국 내 위치가 발각된 것 같아. 곧 추격자가 올 거야. 그러니 넌 여기에 있으면 안 돼. 어서 가.”
“이미 늦었습니다.”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드니 바로 조금 떨어진 곳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길쭉한 귀에 비치듯이 새하얀 피부가 인간과는 확연히 다른 생김새를 지닌 남자였다. 언뜻 엘프처럼 보였지만 정황상 엘프일 리가 없었다.
“에드윈.”
낮게 신음한 시벨리우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급속도로 표정이 흐려지는 걸 보니 별로 좋은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그 모습에 힐끔 시선을 준 남자가 손을 뻗쳐 사방에 무언가를 뿌렸다. 그러자 무언가에 감싸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주변의 광경에 이질감이 들었다. 아마 이곳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진법 같은 걸 펼친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아무도 이 장소를 벗어나 도망치지 못하도록 막은 것에 더 가까울 것이다. 입술을 깨문 시벨리우스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남자가 힐난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일탈은 여기까지입니다, 시벨리우스 님. 당신 때문에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는 거 아십니까? 당신 하나를 찾기 위해 일족의 모든 전력이 전 대륙으로 흩어졌습니다. 얌전한 토끼가 제일 음흉하다더니. 설마 당신까지 이런 짓을 벌일 줄은 몰랐습니다. 왜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드십니까? 장로께서 화가 많이 나셨습니다.”
“알았어. 내 발로 돌아갈게. 일단 이거부터 풀어.”
“제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습니까? 저한테 발견된 걸 다행으로 여기기나 하십시오. 다른 이였다면 당장 다리부터 부러트려 놨을 겁니다.”
“…….”
“일단 그대로 계십시오. 저 여성부터 처리한 후에 다시 얘기하죠.”
그렇게 말한 남자의 시선이 향한 건 바로 나였다. 처리한다니? 여자로 오해한 것보다 그다음 말이 더 당황스러워서 눈을 깜빡였다. 아니, 그전에 이 상황 자체가 전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벨리우스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아냐, 잠깐 기다려! 엘은 건드리지 마! 그냥 보내줘!”
“안 된다는 건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염려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 그 앤 여자도 아니야!”
“그 말을 믿으라고요?”
“정말이야. 본인이 남자라고 말했어! 확인해 보면 되잖아!”
역시 아무리 들어도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그때 어깨를 으쓱한 남자가 내 앞에 성큼 다가와 섰다.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 내 위아래를 빤히 훑어내리는가 싶더니, 피식 비웃음이 서렸다. 어디서 빤히 보이는 수작을 부리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남자라고요?”
“……그런데요?”
“흠, 그렇습니까. 그럼 옷을 벗어보십시오.”
아니, 이게 미쳤나?
어이없어서 바라봤더니 남자의 비웃음이 더 짙어졌다.
“겉모습으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서 말입니다. 증거를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왜 확인해야 하는데요?”
“당신이 여자면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잠깐의 수치심보다는 목숨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정말 남자라면 말이죠.”
“……지금 상황이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요.”
“저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까? 저 사람은 그냥 평범한 블루 엘프가 아닙니다. 유니콘, 그중에서도 고결한 핏줄을 계승한 룬이지요.”
이걸 순순히 밝히는 의도야 뻔했다. 이미 날 살려서 보내겠다는 생각이 조금도 없는 거다. 모르는 척 더 자세히 설명해보라 하니 그가 말을 이어갔다.
“룬은 다른 종족과 교류하면 안 됩니다. 이성의 경우엔 특히 더 그렇죠. 교류가 발각되면 전부 죽여서 처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허?”
“혹시 모를 불미스러운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원래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만, 선대 룬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규정이 좀 더 강화되었죠.”
……내가 남자라서 다행이라고 한 게 이래서였어? 차분히 돌아보니 시벨리우스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움켜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게 선명히 보였다. 내 시선이 그에게 향한 걸 본 남자도 시벨리우스를 돌아보았다.
“이런 걸 하나도 설명해주지 않으셨다니 너무하셨군요. 그래서 애초에 룬은 허가 없이는 마을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허가 없이는 외출도 못 한다구요?”
“외출이 안 되다 뿐입니까. 마을 안에서도 어느 부근에 있는지 주기적으로 위치를 알려야 합니다. 막중한 책임을 어깨에 지고 있는 자의 당연한 의무죠.”
“…….”
“그런데 그 의무를 저버리고 가출을 하시다니. 심지어 장로의 하나뿐인 손녀인 웰디 님께 수면술까지 걸고 말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일이지 않습니까, 시벨리우스 님? 알 만하신 분이 이러시니 정말 당황스럽습니다. 그 나이가 되도록 룬의 힘을 제대로 각성도 하지 못하셨으면서, 하다못해 조용히 지내 주시는 것도 못하시는 겁니까?”
움찔한 시벨리우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참았다 내뱉은 듯한 숨에서도 떨림이 전해지긴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긴 숨을 내뱉었다. 남자가 오만한 시선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제 이해했습니까?”
“아니, 전혀 안 되는데요.”
빙긋 웃으며 답하니 그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아까 고결한 룬이라고 했어요? 그건 가장 신분이 높다는 뜻이죠?”
“그렇습니다. 일족 모두를 위하는, 엄중한 의무와 책임감을 지닌 자리죠.”
“와, 몰랐는데 유니콘은 되게 불공평한 종족인가 보네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보통 의무와 책임감이 따르는 자리는 그만한 대접도 따르는 법이거든요. 적어도 우리 인간들 사회에선 그게 상식이에요. 그런 게 없으면 누가 의무와 책임 같은 걸 짊어지겠어요?”
“당연히 우리도 그렇습니다.”
“와, 그쪽은 대접해준다는 게 목을 묶는 건가 봐요. 우리 사회에선 그건 짐승한테나 하는 짓인데.”
“……그건, 도주하지 못하시게 막으려다 보니.”
“보통은 아무리 그래도 몸을 묶죠. 본체가 말의 모습이니 더 잘 알지 않아요? 목에 거는 결박이 무슨 의미인지.”
변명하려던 남자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보기엔 룬이란 건 여러모로 의미가 잘못됐어요. 외출하는 데도 허가가 필요하고 위치를 계속 보고해야 하는 게 무슨 가장 높은 신분이에요. 하물며 진짜 높은 신분이면 누가 모멸감을 주거나 비꼬지도 못하죠. 그런 걸 하는 사람을 보통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요?”
“뭐라고 하죠?”
“반역자요.”
뭘 뻔한 걸 묻냐는 의미로 웃었더니 크게 움찔한 남자의 눈빛이 흉흉해졌다. 무겁게 입을 뗀 남자가 이를 바득 갈았다.
“이제 당신의 성별이 뭐든 상관없을 것 같군요.”
“아, 그래요? 되게 새삼스럽게 말하네요. 처음부터 그런 생각이었으면서.”
“……뭘 믿고 그리 방종하게 구는지 모르겠습니다. 설마 저기 쓰러져 있는 시벨리우스 님을 믿는 겁니까? 안됐지만 저분이 스스로 결박을 풀어낼 리는 없을 겁니다. 저 주술은 그의 피로 완성한 거거든요.”
“피?”
“그렇습니다. 제아무리 강한 룬이라도 자신의 피로 만든 주술은 스스로 파괴하지 못합니다.”
아, 그래서 시벨리우스가 전혀 방어도 하지 못하고 당한 건가. 흑주술도 막아내는 주술을 쓰는 녀석이 너무 쉽게 당했다 했더니 그런 사정이 있었다. 더 마음에 걸리는 건 따로 있었지만.
“시벨리우스의 피를 왜 그쪽이 갖고 있는데요?”
“룬의 피는 강한 주술을 거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공급해둡니다.”
“그것도 의무예요?”
“그렇습니다.”
도대체 시벨리우스는 왜 루세프를 만났을 때 그를 한 대라도 패주지 않은 걸까. 하다 못 해 이런 걸 미리 알았더라면 나라도 팼을 텐데.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될까 봐 그의 과거를 한 번도 자세히 물어보지 않았던 게 이제 와 너무 후회됐다. 속이 부글부글 끓다 보니 웃는 낯을 유지하는 것도 슬슬 힘들었다. 억지로 올리고 있던 입꼬리를 내리자 남자는 겁먹은 거라 생각했는지 피식 웃었다.
“이제 좀 정신이 들었습니까? 하지만 이젠 후회해도 늦었습니다. 이미 난 당신을 용서하기 힘드니까요.”
“하하, 누가 할 소리를…….”
“정말이지 반성하는 기색이 전혀 없군요. 똑똑히 보십시오, 시벨리우스 님. 오늘 제대로 확인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의 이기적인 행동이 어떤 결과를 일으켰는지 말입니다.”
스르릉, 남자의 검집에서 쇳소리가 울렸다. 다급해진 시벨리우스가 눈을 부릅떴다.
“안 돼! 그만둬!”
“그런 말을 하시기 전에 처음부터 이런 사태를 만들지 않으셨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찬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뻗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울리면서, 그의 검날이 바로 눈앞에 다다랐다. 물론 완전히 닿기도 전에 튕겨 나가지긴 했지만.
콰직! 쿠웅!
“커억!”
나동그라진 남자가 바닥에 걸쭉한 피를 내뱉었다. 고개를 든 얼굴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시벨리우스 역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나는 뽑아 든 블레스터를 가볍게 털어내고 한숨을 내쉬었다.
“시벨리우스.”
“……어? 어?”
“내가 지금 너무 화나서 머리가 돌았거든. 이럴 땐 손속이 좀 많이 과해져. 그래서 일단 하나만 확인해 둘게.”
“무슨…….”
“저거 죽이면 네가 곤란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