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9화
“그런데 지금 뭘 하시는 겁니까?”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걸 처절하게 실감하는 중이요.”
“그게 무슨…….”
“마침 잘됐네요. 나한테 고마운 김에 반성문에 어울리는 문장 좀 생각해봐요.”
“……예?”
다비안은 당황했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벌써 몇 시간 째 한 차례도 쉬지 않고 계속 매달려서 반성문을 썼는데 아직도 반절밖에 못 채웠다. 아무튼 죄송합니다. 어쨌든 잘못했습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제 더는 할 말도 없어서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덕분에 다비안은 영문도 모른 채 반성문 제작(?)에 합류했다. 직접 쓰는 건 당연히 안 되니 옆에서 이러저러한 문구들을 제안해주는 정도였지만 의외로 상당한 도움이 됐다. 놀랍게도 그는 같은 내용도 여러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자였다. 한 줄로 끝낼 말을 열 줄 넘게 장황하게 늘려 쓸 수 있는 귀재이기도 했다.
“평소에 반성문 많이 써봤나 봐요.”
“원래 공직자는 경위서를 쓰는 게 일이라서요…….”
“아하…….”
지구나 아크아돈이나 공무원은 다들 서류 전쟁이구나. 짠한 마음으로 바라봐 주니 다비안이 머쓱하게 웃었다.
“참, 그러고 보니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요.”
“예, 말씀하십시오.”
“에펜 왕국에 있을 때 왕실을 전반적으로 조사했던 거죠? 왕녀에 대해서도 뭔가 아는 거 있어요?”
“아나이스 왕녀 말이십니까?”
고개를 끄덕이니 다비안은 고민하지 않고 자신이 아는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나이는 스물셋. 천진하고 구김살 없는 성격으로 왕국이 사랑하는 왕녀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한 편이라 주위에서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오라비인 왕세자가 특히 끔찍이 아끼는 것으로 유명한 모양이었다. 다 큰 여동생의 유학길을 배웅한답시고 굳이 여행길을 따라온 것만 봐도 알 만했다. 처음엔 제국으로 넘어오려는 핑계인 줄 알았는데 서점에서 여동생이 부르자마자 급히 나간 걸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진짜 목적이 있든 없든, 팔불출인 건 맞는 것 같았다.
“출생의 비밀 같은 건 없는 거죠?”
사실 별다른 기대를 하고 물은 건 아니었다. 그날 봤던 왕녀는 남매가 아닌 게 이상할 만큼 왕세자와 닮았으니까.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비밀은 아닙니다만, 국왕의 친딸은 아닙니다.”
“……네?”
“아나이스 왕녀는 열두 살쯤에 입양된 양녀입니다.”
아니, 이게 다 무슨 말이야. 진짜로 친딸이 아니라고? 당황해서 고개를 드니 다비안이 설명을 이어갔다.
“왕비가 딸을 간절히 바랐습니다. 하지만 왕세자를 얻은 후로 더는 아이를 잉태하지 못했죠. 그래서 본가에서 조카를 데려와 양녀로 들였습니다.”
“조카요? 아, 그래서 왕세자와도 외모가 닮은 거군요.”
“네, 왕세자가 외탁한 편입니다. 그 은발이나 눈동자 색도 외가에서 주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혹시 그 외가가 백작 가문인가요?”
혹시나 물은 말에 다비안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이렇게 연결되는 거구나, 생각보다 해답이 가까이에 있었다는 점에 일단 안도의 한숨부터 삼켰다. 다행히 과거의 일이 틀어진 건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왜 왕녀라고 하지 않았을까.’
입양된 거라 해도 왕녀는 왕녀다. 그런데도 트로웰이 굳이 백작가의 딸이라고 부른 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냥 평범한 가문이었다면 몰라도 왕비의 친정이 세이렌을 섬긴 신관들의 후예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 남매는 조심하십시오.”
그때 다비안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지 못한 경고에 당황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왕비의 본가인 아일브라 백작 가문은 오래전부터 기묘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제가 건넸던 자료를 보셨다면 그 가문에서 내려지는 유전병에 대한 것도 읽어보셨을 겁니다.”
물론 기억한다. 가문에 특이한 유전병이 있고, 그걸 타고난 아이들은 죽여서 은폐하는 것 같다고 했었지. 고개를 끄덕이니 다비안이 설명을 덧붙였다. 정말 살해하는 건지는 확실치 않지만 유전병을 타고난 아이가 오래 살지 못하고 죽는 것만은 맞는 것 같다고 했다.
“그걸 조사하게 된 건 그 혈통에 특별한 힘이 흐르고 있다고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특이한 힘이요?”
“일단 남성에겐 타인을 미혹하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얼굴을 굳히는 동안에도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아르카 백작 가문은 대대로 평판이 좋은 편이라고 한다. 딱히 이렇다 할 공적을 세운 것도 아닌데 주위의 신임을 받았고, 과분한 인맥도 아무렇지 않게 쌓는 편이었다.
왕비만 해도 국왕과 혼인하게 된 과정이 여러모로 석연치 않았다. 당시 왕세자였던 국왕은 정혼자가 따로 있었다. 그런데 아일브라 백작과 어울리고 나더니 백작의 동생과 혼인하겠다는 억지를 부리며 파혼을 강했다. 심지어 정혼자와 상당히 다정한 관계였음에도.
단순한 변심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 후부터 국왕의 행실이 이상해졌다. 성실하고 인내심도 강하던 그가 변덕을 부리는 일이 늘기 시작했다. 평소엔 왕비를 지극히 사랑하는 남편이었다가도 돌연 냉대하며 발작하는 것처럼 신경질을 내곤 했다.
“그런 날엔 꼭 아일브라 백작이 국왕을 알현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다시 평소의 국왕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상황이 한동안 반복되다가 왕세자가 태어난 후로는 태도가 돌변하는 일이 완전히 사라졌다. 왕실에선 후계자가 생긴 국왕이 안정된 것으로 여겼지만 제국에서 바라본 시선은 달랐다.
“왕세자에게 백작과 같은 힘이 있다고 본 거군요.”
다비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할 때까지만 해도 추측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왕세자에게 잡힌 후에 확신하게 됐습니다.”
“뭔가 알아냈어요?”
“얼굴을 보는 순간 몸에서 저절로 힘이 빠지더군요. 그를 따르고 싶다는 마음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아마도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면 홀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일전에 왕세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반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었지. 그냥 왕자병이 절정에 다다른 자의 헛소리라고 여기고 넘겼는데 그게 이런 의미였나 보다. 황당한 마음에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왜 그자가 이상할 정도로 내게 집착하는 건지도 이제야 알겠다. 자신의 능력이 통하지 않으니 호기심이 들 수밖에.
그리고 이제 그 호기심 대상은 둘로 늘었을 거다. 아인 이드리스에게도 통하지 않았을 테니까. 정령왕의 계약자쯤 되면 그런 종류의 정신술엔 잘 홀리지 않는다. 그저 환심을 사려는 목적인 줄 알았는데, 그 왕세자가 최근 아인 이드리스와 자주 어울리는 건 그 이유가 더 큰 건지 모르겠다. 나로선 정말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인 이드리스가 미혹되어 왕녀에게 반하는 거라는 가정을 지울 수 없었을 거다. 그럼 정말 최악이었겠지. 지금도 충분히 피곤한데 여기서 더 피곤해지고 싶진 않았다.
“남성에게 미혹하는 힘이 있다면, 그럼 왕녀는요?”
“아직 여성 쪽이 지닌 능력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더 위험한 힘일 거라 보고 있습니다. 우선 그들 가문의 유전병은 여성에게서만 발현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요?”
“네, 죽은 아이들 전부 여아였습니다. 그런데도 백작 가문은 딸에 집착하는 경향이 상당히 컸습니다. 땋을 낳지 못하면 가주가 될 수 없고, 데릴사위만 얻습니다. 이 전례를 깬 건 왕비가 처음입니다.”
그 정도면 확실히 수상하긴 했다. 딸에게만 발현되는 유전병이 있는데도 오히려 집착한다는 건 그 병이 능력과 관계된 거겠지. 그게 뭔지는 몰라도 여성에게만 물려줄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굳이 친정에서 양녀를 데려온 걸 보면 틀린 짐작만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백작 가문이 이미 왕실을 장악했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백작가의 딸인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기분으로 입만 달싹이다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알아갈수록 일이 점점 더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 * *
밤샘 혈투 끝에 반성문은 기어이 백 장을 다 채웠다. 내가 생각해도 가히 인간 승리라고 할 만한 결과였다. 함께 퀭한 눈으로 아침 해를 맞이한 다비안이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네 왔다.
“해내셨군요.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다비안도요.”
그가 요령을 알려준 덕분에 수월히 마무리에 다다를 수 있었다. 우리는 푸석한 얼굴로 웃으며 악수했다. 같은 고난을 견뎌낸 동지애가 무럭무럭 싹트는 순간이었다.
엘뤼엔이 나타난 건 다비안이 더는 신세 질 수 없다며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후였다. 완성한 분량을 자랑스럽게 내밀었더니 그가 떨떠름한 얼굴로 받아들었다. 이걸 기어이 해내다니, 간식을 그렇게나 사수하고 싶었냐는 시선이 와 닿았다. 당연하지 않냐는 뜻으로 맞받아치니 고개를 저은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잘했다.”
그런데 그냥 받아들기만 했을 뿐이었다. 당장 분량부터 확인하려 들 줄 알았는데 그는 정작 읽어보기는커녕 종이를 들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설마 확인하지도 않고 퇴짜를 놓으려는 건가 싶어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지켰으니까 된 거지? 간식 금지 안 할 거지?”
“그래.”
다행히 우려하던 결말은 아닌 모양이다. 기쁜 마음으로 안심하다가 다시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내용 확인은 안 해?”
“네 양심에 맡기겠다.”
“……헐.”
“그 반응은 뭐지?”
“아하하하! ……아무것도 아냐.”
그래, 형벌의 신이 괜히 형벌의 신이겠나. 우리 아버지는 사람 뒷목 잡게 하는 방법을 너무 잘 안다. 실제로 백 장을 다 채운 건 맞으니 양심에 거리낄 건 없긴 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억울하고 허탈한 기분이 드는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일단 이럴 때 할 일이 하나뿐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맛있는 걸 먹자.’
달콤한 건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법이다. 결심을 굳힌 즉시 제도에서 가장 유명한 제과점을 찾아갔다. 진열된 것들을 모두 종류별로 다 쓸어담으니 직원들이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전부 포장해주세요.”
“이거 전부…… 말씀이시죠?”
“네.”
고개를 끄덕이니 당황한 직원들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양이 제법 있다 보니 여럿이 매달려도 시간이 좀 걸리는 것 같았다. 평소라면 굳이 포장할 거 없이 그냥 가게 안에서 해결했겠지만 이번엔 갈 곳이 있었다. 오늘도 간식을 무사히 즐길 수 있는 건 반성문 백 장을 완성한 덕분인 만큼, 지대한 공헌자인 다비안과 이 영광을 함께 누릴 생각이었다. 그를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새벽에 들었던 말도 같이 떠올랐다.
‘왕세자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라미아스는 알고 있으려나.’
다비안은 아직 그에겐 자신이 알아낸 것들을 밝히지 않았다. 애초에 뭔가 있다고 의심했으니 두 비밀 기관이 합심해서 첩자를 보낸 거겠지만 확신하는 것과 유추만 하는 것엔 아무래도 차이가 있을 터였다. 설마 드래곤인 그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리는 없겠지만, 아무래도 당부는 해둬야 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영혼의 보석도 더 찾았던 것 같은데. 그것도 물어봐야지.’
마신전 정탐을 다녀오면 기다리던 소식을 들을 거라고 했으니 분명 영혼의 보석에 관련된 일일 거다. 정작 정탐할 마신전이 사라지는 바람에 그대로 무산되긴 했지만, 어쨌든 약속한 건 약속한 거니 다른 방법으로라도 얻어내야 했다. 문제는 그가 아직도 내게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는 거다. 어떤 치사한 수를 써서 괴롭히려나 싶으니 벌써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딸랑.
속으로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는데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가게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였다. 아무 생각 없이 돌아보다가 그대로 멈칫했다. 푸른빛이 감도는 피부에 길게 묶어 내린 은발, 스쳐 지나봐도 몰라볼 수가 없는 특징을 지닌 사람이 보였다. 시벨리우스였다.
“어…….”
그 역시 나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재회라 그런지 매우 얼빠진 표정이었다.
“우연이네.”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하니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가 뻣뻣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내 앞에 산더미처럼 포장되고 있는 케이크며 빵들을 발견하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한 사람이 사가기엔 누가 봐도 많은 양이라 괜히 민망해졌다.
“아하하, 너도 빵 사러 온 거야?”
“구인 공고를 보고 왔어.”
머뭇거리던 시벨리우스가 나직하게 답했다. 구인이라니. 그러고 보니 특별대가 해산했으니 추가로 보충한 주방의 계약 기간도 종료됐을 거다. 그래도 그만한 실력이면 정식으로 고용됐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냥 끝났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거기서 안 붙잡았어?”
“잡긴 했는데, 내가 거절했어.”
역시 붙잡긴 했구나. 그럼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인 후 거절한 이유를 물으니 시벨리우스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병영 쪽은 식대에 투자하는 비용이 너무 적어. 식단 선정부터 제한이 커서 내가 생각하는 느낌이 아니었어.”
“아, 그럼 어쩔 수 없었겠네.”
요리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식재료는 좋은 걸로 풍족하게 쓰고 싶을 거다. 시벨리우스는 한 끼를 차려도 다양하게 종류별로 만드는 걸 즐기는 데다가 새로운 식단을 개발하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었다. 당연히 그만한 투자도 필요한 법. 여러모로 조건이 맞을 수가 없었다.
“그럼 이제 여기서 일하는 거야?”
“그 전에 면접부터 붙어야 해.”
“너라면 당연히 붙지.”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며 웃었더니 포장하던 직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이 닿자 시벨리우스의 얼굴이 살짝 상기됐다.
“그런데 그때 만나려고 했던 사람은 만났어?”
“아, 응! 그러고 보니 인사가 너무 늦었네. 덕분에 무사히 만났어. 정말 고마워.”
“그렇구나.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야.”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는데. 널 여기서 또 보게 될 줄은 몰랐어.”
가볍게 한숨을 삼킨 시벨리우스는 조금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깊어진 시선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느껴졌다. 아, 왠지 불길한 기분이 든다. 여기서 처신을 잘못하면 아름답지 않은 미래가 닥칠 거라는 아주 아주 강렬한 기분이.
그건 절대 안 되지. 손을 뻗어 팔을 붙잡으니 시벨리우스의 몸이 움찔 떨렸다. 당황한 시선이 닿는 걸 무시하며 크게 심호흡했다.
“시벨리우스. 뜬금없겠지만 네게 말할 게 있어.”
“어?”
의아하게 바라보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가 이 말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지 알아. 하지만 그래도 말해야겠어.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좀 생뚱맞고 당황스러운 고백이겠지만, 그래도 들어줘.”
“아니, 잠깐만……. 나는…….”
시벨리우스의 얼굴이 경직되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주위에 있던 제과점 직원들도 덩달아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일단 데리고 나가서 얘기할 걸 그랬나? 후회가 됐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뚫어질 듯한 시선 속에서 나는 그를 붙잡은 손에 더 힘을 꾹 쥐었다. 그래, 창피한 순간은 잠깐뿐이다. 서로 어두운 과거를 늘리지 않으려면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말해야 했다.
“난 남자야.”
어디선가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시간이 흘러가는 게 이렇게까지 느리게 느껴진 적도 없는 것 같다. 주위의 온도가 전체적으로 내려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 있던 시벨리우스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어?”
넋 나간 목소리가 허무하게 흩어졌다. 앞으로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