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7화
일단 결박부터 풀려는데 닿는 순간 손이 따끔했다. 반사적으로 거두고 보니 다비안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일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다시 손을 뻗자 마치 거부하는 것처럼 강한 반발력이 느껴졌다.
‘뭐지?’
“흐으…….”
그 순간 얕게 신음을 내뱉은 다비안이 두 눈을 번쩍 떴다. 의식을 차린 건가 싶어 말을 걸려다 형형히 쏟아지는 안광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의 표정이 평소와 완전히 다른 느낌이기도 했지만, 눈동자의 형태가 조금 이상했다. 흰자가 완전히 사라진 데다가 악어의 눈처럼 동공이 세로로 가늘게 세워져 있었다.
“음, 다비안?”
“크아악!”
대답 대신 돌아오는 건 이상한 괴성이었다. 요동치는 쇳소리와 함께 그가 크게 버둥거렸다. 내게 덤벼들려 했지만 묶여 있는 탓에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침착하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선 다음 차분히 그의 상태를 관찰했다. 이성이 없는 건 확실했고, 상당히 포악한 상태 같았다. 사납게 벌어진 입 안엔 흉기 못지않게 날카로운 이빨들이 날을 세우고 있었다. 손톱이 저렇게나 길었던가? 이제 보니 피부에도 비늘처럼 번들거리는 부분이 눈에 띄었다. 누가 봐도 인간에게선 보이지 않는 형태였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일인지 모르겠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저 존재가 다비안이 맞기는 한 건가? 돌아가는 상황이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차례 생각을 정리한 끝에 일단 다시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저기, 다비안? 다비안인 거 맞아요? 내 말 들려요?”
“크르륵! 크으!”
“으음, 네. 안 들릴 줄 알았어요.”
아무래도 당사자에게 정황을 물어보는 건 아직 이른 모양이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해보다가 조금 전에 반발력이 느껴졌다는 걸 상기하고 다시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기함한 다비안이 마구 몸부림쳤지만 묶여 있다는 점만 믿고 무시했다. 손을 뻗자 역시나 이번에도 뚜렷하게 밀어내는 기운이 느껴졌다. 손바닥 안쪽에 아플 정도로 따끔한 감각이 파고들었다. 꾹 참고 그대로 있어 봤더니 곧 다비안의 피부에 검은 반점 같은 것들이 꿈틀거렸다. 처음엔 벌레인 줄 알고 흠칫했는데 자세히 보니 무늬에 더 가까웠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글자인 것 같았다.
‘저주……인가?’
흑주술까진 아닌 것 같은데 상당한 원념이 담긴 저주인 것 같았다. 정령사인 내게 반발한다는 건 그만큼 더러운 기운을 근본으로 삼고 있다는 뜻이라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정화 말입니다만. 보통은 어디까지 가능한 겁니까?”
얼마 전에 그가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그냥 정령술에 관심이 있어서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설마 그게 이런 의미였던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묶여 있는 그의 상태가 다시금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도 크리스가 그를 묶었던 적이 있었다. 주기적으로 발작을 일으켜서 그때마다 제압해야 한다고 했었지.
“설마…….”
당황스럽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해서 잠시 숨을 골랐다. 일단은 이 상황을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 원래의 나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는 간단한 문제일 텐데 아무래도 지금은 인간의 몸이다 보니 완전히 없앨 자신은 없었다.
‘그래도 밀어내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뭐든 시도는 해보자 싶어 다비안의 손을 붙잡고 강하게 기운을 불어넣었다. 저항이 거세긴 했지만 강제로 누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힘을 더 세게 밀어 넣으니 곧 그를 덮고 있는 저주가 조금씩 밀려나는 게 느껴졌다. 변화는 겉모습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손톱이 빠르게 짧아지고 비늘이 점차 사라지면서, 눈동자의 형태가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톱니바퀴처럼 날카롭던 이빨도 점차 평평해지고 있었다.
“허억, 헉!”
그러는 동안 내내 몸부림치던 다비안이 곧 사람다운 신음을 내뱉었다. 기운을 주입하는 걸 계속 유지한 채로, 식은땀이 흥건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 멍해 보이긴 했지만 정신이 돌아오긴 하는지 조금씩 눈빛이 선명해지는 게 느껴졌다.
“정신이 들어요?”
말을 걸어보니 가만히 허공을 훑고 있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주변을 빠르게 두리번거리다 곧 내 쪽을 발견한 그의 얼굴에 천천히 경악이 차올랐다. 힘겹게 마른침을 삼킨 그의 입에서 지독하게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엘……?”
“네, 맞아요. 힘들어도 조금만 버텨요.”
“무슨…… 당신이 어떻게……윽!”
때마침 내 기운이 완전히 그의 몸을 덮으면서, 그를 장악하던 저주가 사그라졌다. 크게 신음한 다비안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나는 그를 결박하던 것들을 하나씩 풀어나갔다. 가장 먼저 수갑을 부순 다음 무릎을 동여맨 밧줄을 풀어내려는데, 뒤늦게 고개를 든 그가 당황한 얼굴로 나를 붙잡았다.
“오늘, 오늘이 며칠입니까? 특별대 해산식이 끝난 지 얼마나 된 겁니까?”
“아직 당일인데요.”
그 말에 다비안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사람의 얼굴이 이렇게까지 하얗게 될 수도 있구나 신기할 정도였다. 그가 내 팔을 더 강하게 붙잡았다.
“풀면 안 됩니다.”
“네? 아, 괜찮아요. 안심해도…….”
“아뇨, 절대 괜찮지 않습니다. 여긴 어떻게 온 겁니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저한테서 멀리 떨어지세요. 위험합니다.”
허둥지둥 대답한 그가 거의 풀어놓은 밧줄을 다시 휘감아 동여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니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스스로 자신을 묶어둔 거였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씁쓸한 마음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다급하게 움직이는 팔을 억지로 붙잡아 멈추게 하니 그가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초조함이 묻어나는 얼굴을 한 그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정말 괜찮으니까 진정해요. 저주는 일단 사라졌어요.”
“……예?”
“급한 대로 정화 비슷한 걸 했거든요. 완전히 해주한 건 아니지만 당분간은 괜찮을 거예요.”
숨을 멈춘 다비안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내가 한 말을 이해하기는 한 건지 생각을 짐작할 수 없는 멍한 얼굴이었다. 그는 잠시간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정화요……?”
“네, 평소보다 몸이 좀 가뿐하지 않아요?”
멈칫한 다비안이 잠시 주위를 돌아보았다. 오물로 범벅된 공간을 확인한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는 다시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변이가 시작됐는데.”
“네?”
“……혹시 제가 어떤 상태였습니까? 평소와 모습이 다르진 않았습니까?”
“아, 그거요. 좀 다르긴 했어요. 눈동자가 악어랑 비슷해지고, 이빨과 손톱이 길어진 정도? 비늘도 좀 있었던 것 같네요.”
솔직하게 답하니 다비안이 낮게 신음했다.
“이미 변이가 일어났는데…… 돌아왔다고.”
중얼거리는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다시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게…… 정화가 되는 거였군요. 정말로…….”
“말했다시피 완전히 해주한 건 아니에요. 임시로 밀어낸 정도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장악할 거예요.”
“그렇군요.”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었는데도 담담히 답하는 얼굴은 별로 어둡지 않았다. 일단은 저주를 정화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편해진 것 같았다.
“설마 하긴 했는데…… 정령술은 정말 굉장하군요. 변이가 일어나기 전이라면 몰라도, 일단 변화하기 시작하면 다음날 알아서 끝날 때까지 묶어두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거든요. 중간에 정화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크리스가 지병이라고 표현했던 걸 보면 꽤 오래된 저주였다. 누가 그런 몹쓸 저주를 걸었는지, 무슨 이유로 그런 건지 궁금한 점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물으니 그가 잠시간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이어진 말엔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요?”
어떤 미친놈이 갓난아기한테 저주를 걸었단 말이야? 황당해하는 내게 다비안은 지난 사연을 대강 설명했다. 부친이 젊은 시절 한 주술사의 원한을 샀는데, 그로 인해 저주에 걸렸다고. 술사의 증오심이 얼마나 깊었는지 스스로 목숨을 살라 완성한 저주였는데, 하필이면 혈통에 내린 거여서 당사자가 아닌 후대가 고통을 받는 형태였다는 게 문제였다.
<네가 얻은 첫 아이가 네 죗값을 대신 치를 것이다!>
그렇게 새겨진 건 밤이 되면 괴물로 변하는 저주였다. 당시 다비안의 부친은 대를 이를 장손이었다. 아마도 주술사는 그런 저주를 내리면 그가 계승권도 빼앗기고 평생 고독해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자식을 낳았고, 그를 향했던 원념은 첫 아이로 태어난 다비안이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어머니는, 그걸 알고 혼인하신 건가요?”
기막힌 기분으로 물으니 다비안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혼인은 치르지도 못하셨습니다.”
“그 말은…….”
“전 사생아입니다.”
와, 오랜만에 상욕이 나올 뻔했다. 자신에게 무슨 저주가 있는지 뻔히 아는 인간이 혼인도 치르지 않고 아이부터 얻다니. 굳이 해석할 필요도 없이 돌아가는 사정이 뻔히 읽혔다. 그 인간말종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남자가 본처에게서 자식을 얻기 전에 저주를 받게 하려고 일부러 다비안을 낳은 게 분명했다.
“어머니는 절 위해 저주를 없앨 온갖 방법을 다 알아보셨습니다. 덕분에 원래는 밤이 될 때마다 포악한 괴물이 되어야 하지만, 만월이 될 때만 변하도록 조절할 수 있었죠. 하지만 완전히 정화할 수는 없었습니다.”
담담히 설명하는 다비안은 이미 초탈한 것처럼 보였다. 당장 떠오르는 말들은 많았으나 그걸 건네는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처지에 용케 그림자 병기 같은 걸 하고 있네요.”
“대장님이 제 사정을 알고 계십니다. 첩보 임무도 휴일만 잘 조정하면 돼서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습니다. 게다가 오히려 이런 처지라 하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무슨 뜻이에요?”
“사념이라고 하던가요. 음기가 강한 곳에 적을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저주를 완화할 수 있습니다. 그 조건을 지킬 만한 곳이 별로 없었습니다.”
황제가 운영하는 특수 조직이 한순간에 사념 덩어리가 됐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보니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세공 당했을 땐 어떻게 숨겼어요?”
“숨기지 못했습니다. 아마 변하는 게 신기해서 살려뒀던 것 같습니다. ……취조받던 과정에서 발작이 일어난 게 마지막 기억이거든요.”
살다 보니 저주가 도움이 될 때도 있다며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차라리 괴로운 표정이었다면 나았을까. 울어야 할 사람이 웃고 있으니 괜히 내가 더 심란해졌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입이 멋대로 열린 건 그 탓이었다.
“정령술 배워볼래요?”
불쑥 건넨 말에 다비안이 눈을 크게 떴다. 막상 뱉고 보니 속이 시원해져서 내친김에 그냥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정령과 계약하면 정순한 기운이 몸에 자리 잡을 거예요. 그럼 저주도 영향을 미치지 못할 거고요.”
“으음,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재능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타고난 친화력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저주 때문에 시도하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역시 정령술에 관심이 있긴 했었구나. 게다가 이미 꽤 본격적으로 알아봤던 모양이다. 하긴 저주를 없앨 수단이라면 정령술이야 말로 가장 먼저 알아볼 방법이긴 했다. 힘없이 웃는 얼굴에 떠오른 체념의 빛을 보다가 아직 낙담할 때가 아니라는 뜻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반적으로는 그렇긴 하죠. 하지만 때로는 좋은 인연이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하지 않겠어요?”
“그 말씀은……?”
“자랑이 될까 봐 말을 아끼긴 했는데요. 일반적으론 당신의 저주를 임시로 정화하는 것도 어려워요.”
함의된 뜻을 알아차렸는지 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피식 웃어주니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기운 없던 눈동자에 빛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이런 모습을 봤으니 이제 정말로 무를 수 없게 됐다. 마음을 굳게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도와줄게요.”
“정말 제가 정령술을 익힐 수 있습니까?”
“당장 계약할 수도 있어요.”
“저, 정말입니까?”
“뭐하면 당장 시도해볼래요?”
손을 내밀자 그가 얼결에 붙잡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상태에서 정령 계약 주문을 외우게 했더니 더듬더듬 열심히 따라 하기 시작했다.
“태초의 지배자께 허락을 구하노니. 땅과 바람과 물과 태양, 4대 기운을 증인으로 계약의 증거를 제시하노라. 여기 자격을 갖춘 이가 물의 유지를 이어 가길 감히 바라나이다. ……이거 거짓말 아닙니까?”
“오늘날 이 세계의 진정한 주인을 경배하며, 그의 일부를 청하고자 하오니. 허락된 숙명 안에서 고귀한 뜻을 품은 자는 의당 그 합당한 소원을 이룰 것이라. ……정말 제가 이렇게 말해도 되는 겁니까?”
쓸데없는 사족이 자꾸 붙긴 했지만. 어쨌든 주문은 착실히 이어져갔다. 시전하는 이가 영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인데도 이미 완성에 가까워진 주문은 정령계와 연결된 소환진을 순조롭게 발동하고 있었다. 저주를 밀어내기 위해 불어넣은 기운이 아직 그의 몸에 가득한 데다가, 내가 친히 정령 소환을 이끌어주기까지 하니 여러모로 순조로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꾸만 되묻는 다비안 역시 불안해하면서도 정작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감각만은 분명히 느끼고 있는 듯했다.
“이제 마지막이에요. 강과 호수를 다스리는 운디네여, 내 부름에 응답하소서.”
“강과 호수를 다스리는 운디네……예? 운디네요? 운디네는 중급 정령 아닙니까? 지금 저한테 중급 정령을 소환하라고요?”
“다비안.”
“네, 네?”
“한 번만 더 딴지 걸면 그만둘 거예요.”
웃으며 말하니 다비안이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두 눈을 질끈 감고 마지막 말을 외쳤다.
“우, 운디네여, 내 부름에 응답하소서!”
그로서는 아마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소환진은 완전히 힘을 얻었다. 숨을 삼킨 다비안이 몸을 크게 휘청이는 순간, 눈앞에 푸른 마법진이 떠오르더니 여러 물줄기가 뻗어 나와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기 시작했다. 그 물줄기는 곧 하나로 합쳐져 허공에 높이 솟구쳐 오르더니 급속도로 하강했다. 그러나 바닥에 닿기도 전에 다시 위로 솟구치면서 무언가 형태를 이루어가기 시작했다. 완성되어가는 형태는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이었다.
“헉.”
설마 정말로 소환이 이뤄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듯, 경악한 다비안이 다시금 숨을 삼켰다. 그사이 완전히 선명해진 운디네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뻣뻣하게 굳은 다비안을 발견한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