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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505화 (505/608)

제505화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넘어진 왕세자도 뒤늦게 수호부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하지만 큰 위협을 느끼진 않아서인지 곧 재밌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신기한 물건을 갖고 있군. 방금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이게 왜 발동했을까요?”

“무슨…….”

“이거 특정한 힘에만 반응하는 보호 주술이거든요. 보통은 발동할 일이 없는 거라서요.”

“…….”

허를 찔린 얼굴을 한 왕세자가 입을 다물었다. 여유롭던 시선에 사나운 기운이 흐르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그가 뭔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섬뜩한 기분이 들더니 또다시 주위에 파동이 일었다.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을 땐 이미 눈앞에 새로운 수호부가 빛나고 있었다. 왕세자가 또다시 흑주술을 쓴 거다. 시벨리우스에게 받은 두 개의 수호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얼굴을 굳히고 바라보자 왕세자의 입술이 비죽 올라갔다.

“과연 그렇군. 정말 이 힘에 반응하는 모양이야. 그건 몇 개나 가지고 있는 거지? 이왕이면 많이 준비해 두었길 바라지. 얼마나 버티는지 시험해보고 싶어졌거든.”

“…….”

이거 진짜 미친놈 아냐? 몸을 사리라고 운을 뗐더니 오히려 더 당당하게 덤벼들 기세다. 대체 예전부터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시큐엘.”

부름에 응한 물의 늑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왕세자는 오히려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내 정체를 확신함과 더불어 더는 수호부가 없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그가 웃는 만큼 나는 긴장했다. 조금 전 그가 시도한 두 번의 공격 다 먼저 알아차리지 못했다. 생각보다 시전 속도가 빠른데 막을 수 있을까.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왕세자의 기사들이 주위를 통제했는지 주변에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니, 없다고 생각했다. 이어지는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어디서 악취가 진동하네.”

“……!”

놀라서 고개를 드니 이쪽을 구경하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책장 앞에 놓인 사다리 위에 누군가가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부드럽게 흐르는 짙은 흑발 아래 화려한 금안이 홀리듯이 빛났다.

트로웰.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손을 흔드니 그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넌 뭐지?”

왕세자가 주춤거리며 물었다. 상급 정령 앞에서도 태연하던 놈이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해서인지 퍽 당황한 얼굴이었다. 질문을 받은 트로웰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다 내게 시선을 보냈다.

“쟤 형인데.”

이어진 말엔 내 심장이 다 멈추는 것 같았다. 헉, 하고 숨을 삼키고 있으려니 트로웰이 빙긋 웃으며 왕세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넌 내 동생한테 무슨 볼일이신지.”

가벼운 말투였으나 그걸 묻는 이의 존재감은 가볍지 않았다. 왕세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다. 자기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떨고 있다는 걸 인지했는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날 선 얼굴로 입술을 악물었다.

“오라버니, 어디 계세요? 오라버니가 여기에 계시는 거 맞아?”

그때 바깥에서 높은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움찔한 왕세자가 낭패감을 드러냈다. 아마도 이번엔 그가 아는 사람이 등장한 모양이었다. 그는 나와 트로웰을 번갈아 빠르게 노려보더니 옷자락을 털어내곤 그대로 몸을 돌렸다.

“난 여기에 있다, 아나이스.”

“앗, 오라버니! 말없이 어딜 가신 거예요? 한참 찾았잖아요.”

“그냥 거기에 있으면 내가 어련히 알아서 찾아갈까.”

설마 정말 물러난 건가 했는데 곧 소녀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척이 점점 흐려지는 걸 보면 물러난 게 맞는 모양이다. 바깥으로 나가자 벌써 꽤 멀어진 무리가 보였다. 둘러싼 기사들 사이에서 왕세자의 뒷모습이 비쳤다. 살구색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그와 팔짱을 낀 채 걷고 있었다. 서로 머리카락 색이 똑같은 걸 보니 유학을 왔다는 왕녀인 게 분명했다.

“넌 정말 지루할 틈이 없구나. 하루도 평범하게 그냥 지나가는 날이 없네.”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급히 정신을 차렸다. 트로웰 역시 멀어져가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그늘진 눈빛이 평소보다 더 서늘했다. 흑주술을 써서 그런가 싶었는데, 왠지 왕세자보다 왕녀 쪽을 더 유심히 바라보는 것 같았다.

“트로웰, 도와줘서 고마워.”

“……하필 이렇게 인연이 연결되는 것도 참 재밌단 말이지.”

“어?”

“네가 여러모로 특이하다는 소리였어. 하지만 앞으로 저거랑은 마주치지 않도록 해.”

시선을 뗀 트로웰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도 마주치고 싶어서 마주치는 건 아니다 보니 선뜻 그러겠다는 대답이 떨어지지 않았다.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얼버무리자 트로웰 역시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죽이지만 마.”

“으응?”

“넌 손속에 사정을 두잖아. 저런 종류는 쉽게 끝내면 재미없으니까 차라리 건드리지 말란 소리야.”

……뭘 어쩌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트로웰이 생각보다 더 화가 나 있다는 것만은 알겠다. 저 왕세자의 삶이 결코 평탄하게 마무리되진 않을 거라는 것도.

‘그보다 아까 트로웰이 형이라고 했던 거 맞지?’

게다가 날 향해 동생이라고도 했다. 그냥 동생도 아니고 무려 ‘내 동생’이었다. 별다른 의미 없이 한 말일 텐데 괜히 비실비실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런 나를 보던 트로웰이 다시금 고개를 저었을 때였다.

파지직!

“……!”

그 순간 갑자기 무언가가 날아오더니 전류를 내뿜으며 트로웰을 공격했다. 당황해서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트로웰이 손을 뻗어 자신의 몸에 달라붙으려는 걸 가볍게 움켜잡았다. 그의 손안에서 파르르 떨리던 것이 곧 하얀 연기와 함께 힘없이 바스러졌다.

“……이건 또 뭐야.”

“트로웰, 괜찮아?”

급히 다가서니 트로웰은 대답 대신 다른 곳에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이 향한 방향을 따라 돌아봤다가 나는 다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 네가 왜…….”

나타난 사람은 바로 시벨리우스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은데, 말을 섞을 겨를도 없이 그가 곧장 트로웰에게 달려들었다. 손에는 언제 꺼내 든 건지 모를 검이 들려 있었다. 재밌다는 듯 미소 지은 트로웰이 가볍게 그의 공격을 피하니 꿈틀거린 눈빛이 더욱 크게 사나워졌다. 상점가 거리에서 난데없이 벌어진 싸움에 근방에 있던 행인들만 우르르 피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 잠깐만 기다려! 시벨리우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현란하던 공방이 멈춘 건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내가 소리치고 나서였다. 움찔해서 공격을 중단한 시벨리우스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다 다시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받은 트로웰은 그저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그가 내게 성큼 다가와 물었다.

“너, 괜찮아?”

“무슨 소리야?”

“……수호부가 연달아 반응해서, 네게 무슨 일이 생긴 거라고 생각했어.”

이런, 수호부에 문제가 생기면 시벨리우스한테 신호가 가는 거였구나. 이제야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수호부가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 그가 놀라서 달려왔다가 마침 내 앞에 서 있는 트로웰을 적으로 오인하고 공격한 듯했다. 상황 자체는 황당한데 날 도와주려고 한 거라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게다가 아직 업무 시간 아닌가? 이제 보니 옷차림도 주방에서 입는 차림 그대로였다. 신호를 받자마자 앞뒤 생각 없이 그냥 무작정 달려 나온 모양이었다.

“미안, 내가 많이 놀라게 한 모양이네. 보다시피 난 괜찮아. 무슨 일이 없었던 건 아닌데, 다행히 잘 해결했어.”

“그럼 저 사람은…….”

“아, 그게, 내 형이야.”

답하면서 힐끔 눈치를 봤지만 다행히 트로웰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은 건지, 내가 어디까지 뻔뻔하게 구나 지켜보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오히려 움찔한 쪽은 시벨리우스였다.

“……형?”

크게 떠진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남의 표정을 잘 읽는 편은 아닌데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혈연 그 자체를 의심한다기보다는 동생이 아니라 형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어쨌든 겉보기로는 그가 나보다 어려 보이긴 하니 당황스럽게 여길 만했다. 그래도 금방 정신을 차린 시벨리우스가 곧 트로웰을 향해 딱딱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큰 실례를 범했어. 사과하겠다.”

어깨를 으쓱인 트로웰이 가볍게 인사를 받았다. 그의 입장에선 꽤 불쾌한 상황이었을 텐데 의외로 화가 나진 않은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던 시벨리우스가 다시 내 쪽에 시선을 보냈다.

“이런 곳에서 수호부를 왜 쓰게 된 거야? 혹시 그때의 주술사를 만난 거야?”

“으음, 어쩌다 보니.”

“두 장을 다 쓴 거지? 더 주고 싶은데 지금은 여분이 없어. 만들어둘 테니까 나중에 받으러 와.”

“어, 굳이 그렇게 안 해도 되는데.”

“받으러 와.”

묘하게 박력이 느껴지는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굳어 있던 시벨리우스의 얼굴이 풀어졌다. 해냈다는 듯 뿌듯해하는 표정을 보니 어쩔 수 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일하다 온 거란 자각이 뒤늦게 들었는지 그가 곧 몸을 돌렸다. 정신없는 등장만큼이나 재빠른 퇴장이었다.

“인간의 땅에 홀로 나온 룬이라…….”

멀어지는 모습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으려니 옆에서 나직한 트로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안과 투시의 정령왕답게 시벨리우스의 정체 정도는 단번에 알아본 듯했다. 그가 조금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넌 진짜 오만 것들을 다 끌어들이는구나. 제 명대로 살다 가고 싶으면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거야.”

“……나도 끌어들이고 싶어서 끌어들이는 게 아닌데.”

“글쎄, 네가 몸을 사릴 줄만 알아도 조금은 덜할걸.”

몸이라면 이미 충분히 사리고 있다. 오히려 너무 사려서 문제 아닌가. 여기서 뭘 더 사려야 한다는 건지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기울이고 있으려니 트로웰이 짧게 혀를 찼다.

“어쨌든 저거랑은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마.”

이어진 말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가 그가 말하는 ‘저거’가 누군지를 깨닫고 눈을 깜빡였다. 턱짓한 방향도 그렇고, 이 상황에서 그가 가리킬만한 대상이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시벨리우스 말이야? 왜?”

“이름은 알 바 아니고. 별로 마음에 안 들어.”

“아…… 너무 다짜고짜 공격해와서 첫인상이 별로였지? 날 걱정해서 그런 거야. 좋은 녀석이야. 잘 알지도 못하는 날 많이 도와줬어. 지금만 해도 먼저 챙겨주려고 하고.”

“바로 그래서야.”

그래서라니.

당황해서 바라보니 트로웰이 묘한 눈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저맘때의 유니콘은 경쟁심이 강해. 형제가 아닌 동성에겐 친절하지도 않고, 대가 없이 베풀지도 않아.”

“……음? 나한텐 그냥 줬는데.”

“왜 그랬겠어?”

“날 형제로 생각하는 건가?”

“……정말 못 알아듣는 거야, 현실도피를 하는 거야?”

한심해하는 말투에 조용히 두 손을 들고 마른 얼굴을 쓸었다. 그야 당연히 후자였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들어본 적 있었던 것 같다. 과거의 엘에 대해 언급했을 때, 잠시 여자로 착각한 적이 있었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그 엘에 나를 대입해볼 생각을 전혀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동성에게만 친절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 일족이 보통 이성과 짝을 맺기 때문이지. 연애 대상에겐 관대해지기 마련이잖아?”

오, 주여.

다시금 마른세수를 했다. 차라리 묻지를 말 걸 그랬다. 노골적인 단어를 들으니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게 건드린 게 알고 보니 무시무시한 벌집인 기분이었다.

“네게 호감을 보인 만큼 나중에 사실이 밝혀지면 자기를 속였다고 생각할걸.”

“지, 지금은 알지 않았을까? 아까 트로웰을 형이라고 대놓고 부르기도 했잖아.”

“그럼 애초에 내가 이런 말을 하지도 않았겠지? 원래 유니콘은 성별과 상관없이 손윗 형제를 다 형이라고 불러.”

“헐…….”

아니, 이게 말이 돼? 언니도 있는데 왜 하필 형이야? 어떻게든 오해하도록 짜 맞춘 듯한 이 전개는 뭐냐고! 티끌 같던 희망이 피어오르기도 전에 무너졌다. 머릿속이 오만가지 생각으로 복잡했다.

“……트로웰. 나 아무래도 머리카락을 잘라야겠어.”

하는 김에 염색도 해야겠다. 새카맣게 물들여서 이 외모에서 화사한 요소를 완전히 다 없애버리는 거야. 그렇게 하면 애초에 이런 오해도 안 생기지 않을까. 고요히 결심을 굳히니 트로웰이 어딘지 기막힌 눈으로 바라보다 짧게 혀를 찼다.

“왜 쓸데없는 수고를 하려는 건지 모르겠네.”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그냥 듣지 못한 척했다. 오늘따라 인생이 참 썼다.

“그보다 따라와. 네게 보여줄 게 있어.”

이어진 말에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고개를 들었다. 보여줄 게 있다고? 의아한 기분으로 바라보니 가볍게 눈짓을 보낸 트로웰이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얼마나 따라갔을까. 곧 보이는 광경에 조금 멈칫했다. 무리 진 기사들 사이에서 은회색 머리칼을 지닌 남성과 여성이 보였다. 이미 한참 전에 시야에서 사라졌던 루시엘 왕세자 일행이었다.

“트로웰?”

“일단 기다려.”

낮은 음성에 더는 묻지 못하고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왕세자 일행은 한창 광장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햇빛이 좋은 날이라 그들 외에도 놀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 근처에서 한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날리던 장난감 연이 나무에 걸려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된 것 같았다. 신경도 쓰지 않는 왕세자와는 달리 왕녀는 정이 많은 성격인지 아이에게 다가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그러더니 돌연 구두를 벗고 연이 걸려 있는 나무에 오르기 시작했다. 기겁한 호위 기사들이 얼른 만류하려 했지만 왕녀의 행동이 더 빨랐다.

“아나이스! 뭐하는 거냐! 당장 내려와!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말아라!”

“괜찮아요, 오라버니. 저 나무 잘 타는 거 아시잖아요.”

나무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왕녀는 기어코 나무 위에 올라가 가지에 걸린 연을 빼냈다. 경직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얼굴에 환한 웃음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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