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503화 (503/608)

제503화

카노스를 만난다.

피하려고만 할 때는 전전긍긍하기 바빴는데, 막상 저지르기로 하니 놀랍도록 마음이 평온해졌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물론 정말 연락하고자 한다면 그보다 더 간단한 방법이 있긴 하지만. 아직 거기까진 용기가 나지 않는 걸 보면 마지막 보루는 남겨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미처 생각지 못한 점이 하나 있었다. 내가 뒤통수를 잘 맞는다고 여기게 된 이유. 그 기저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이가 바로 카노스라는 사실을 말이다.

“도련님, 마신전에 간다고 했었지?”

다음 날 아침, 조식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가려는데 이프리트가 물었다. 어차피 다들 알아서 파악해두는 편이라 그동안엔 굳이 일정을 알리고 다니진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직접 말해둔 참이었다. 혹시나 가짜 문장 문제를 지적하면 어쩌나 했는데 엘뤼엔이나 이프리트나 그 부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일반적으로는 기도실만 들어가지 않으면 괜찮으니 내가 알아서 몸을 사릴 거라 여긴 듯했다. 하긴, 그러고 보면 이프리트는 아예 들어가 보라 권한 적도 있었더랬지. 이게 생각보다 더 큰 위험부담을 짊어진 일이라는 걸 그들이 몰랐으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씁쓸하긴 했다.

“이틀 후라고 했던가?”

“응, 맞아. 왜?”

“그거 일이 좀 꼬인 것 같던데, 괜찮은 건가 싶어서.”

“그게 무슨 말이야?”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어리둥절해져서 물었을 때였다.

“이봐, 그 사실 들었어?”

“뭐? 그게 정말이야?”

때마침 도착한 식당 층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한적했을 시간인데 오늘따라 사람이 많았다. 조간신문에 뭔가 엄청난 소식이라도 실린 건지 다들 큰 충격에 빠진 모습이었다.

“마신전이 사라졌대!”

곧 들려온 말엔 나도 같이 충격에 휩싸였다. 지금 뭐가 사라졌다고? 멍하니 이프리트를 돌아보니 그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내가 하려던 말이 저거였어.” 이어진 말이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그 길로 곧장 채비를 꾸려 마신전으로 향했다. 제도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이라 마차 같은 이동 수단을 이용해야 했지만 마음이 급해 시큐엘을 타고 질주했다. 그렇게 도착한 현장은 이미 소식을 듣고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근위대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며 주위를 통제하는 중이었다.

어떻게든 인파를 뚫고 앞으로 나가니 울창한 숲만 보였다. 빼곡하게 가득 찬 나무들만 봐서는 아무리 봐도 건물이 세워져 있을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근처의 사람 중 아무나 붙잡고 마신전이 있었던 곳이 맞냐고 물었더니, 하나같이 긍정의 대답이 떨어졌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건물이 하룻밤 사이에 증발했다는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기껏 결심을 굳힌 참에 목표가 사라지다니,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원래 이렇게 틀어지기로 되어 있는 건가. 그게 아니면 카노스가 날 피하는 거야? 망연한 심정으로 서 있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짚었다. 흠칫 놀라 돌아보니 시선이 마주친 이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리 오래 살피지 않아도 이제 그의 정체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다비안이었다.

“이쪽으로.”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인 후 그가 손짓하는 대로 엉거주춤 뒤를 따라 걸었다. 다비안이 안내한 곳은 숲 안쪽이었다. 으슥한 사잇길을 따라 들어서니 한구석에 세워져 있는 작은 목조 건물이 보였다. 창고로 쓰기 위해 만들어진 듯 단출하고 허름한 생김새였다. 근위대 기사들이 그 안에서 한창 의식이 없는 사람들을 싣고 나오는 중이었다.

“저 사람들은…….”

“실종자들일 겁니다.”

“실종자들?”

“전부 다는 아니지만, 제가 아는 얼굴들이 있습니다.”

나지막한 설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의식이 없는 이들 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저들 모두 지금까지 마신전에 잠입했던 요원들인 모양이었다.

‘살아 있었구나.’

그간 생포해두었다가 떠나면서 전부 버려두고 간 모양이다. 사라졌다는 요원들이 살아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해서 기분이 이상했다. 다비안도 여러모로 마음이 복잡한지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일단 저희는 돌아가서 경과를 지켜보는 게 낫겠습니다.”

조심스럽게 이어진 말에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선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없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며칠이 지난 지금, 나와 다비안은 세피온 공작과 함께 우중충한 분위기로 앉아 있었다. 사건 이후로 며칠 만에 만난 세피온 공작은 얼마나 시달렸는지 시커먼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듯한 모습이었다. 미리 양해를 구한 그가 두꺼운 궐련에 불을 지피곤 뻑뻑 피워댔다.

“환장할 노릇이지만 마신이 신전을 거둔 게 맞네. 정확히는 우리 제국에서만 말이지만.”

“그럼 다른 나라에 있는 마신전은 안 사라진 거예요?”

“일단 파악하기로는 그렇네. 아, 하나 더 있긴 하군. 에펜 왕국에서도 사라졌네.”

“에펜 왕국도요? 그럼 왕실에서 상주한다던 마신관들은…….”

“그건 지금 알아보는 중이네. 하지만 아무래도 결과는 뻔할 것 같군.”

한숨처럼 답한 세피온 공작이 피곤한 낯으로 미간을 꾹 문질렀다. 그날 창고에서 실려 나오던 사람들은 실종됐던 요원들이 맞았다. 움브라의 대장도 그들 중에 있었다. 하지만 전부 좋은 결과만 있는 건 아니었다. 몸 상태는 탈진한 것 말고는 비교적 멀쩡했으나 다들 무슨 일을 겪었는지 기억이 전부 사라진 상태라고 했다.

“모든 기억이요?”

“그래,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라네. 검진한 의원 말로는 강한 최면에 걸린 후유증 같은 거라고 하더군. 내버려 둬도 회복되긴 하겠지만 시간이 좀 걸릴 거라는 모양이야. 당장 업무 복귀는커녕 심문도 불가능하다는 소리지.”

설마 카류안이 한 일일까. 최면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게 그밖에 없었다.

“그러니 자네의 증언이 한층 더 중요해졌는데 말이야. 여전히 침묵을 고수할 텐가?”

세피온 공작의 시선이 고요히 앉아 있는 다비안을 향했다. 그는 임무에 관련된 일은 움브라에만 보고한다는 철칙을 여전히 지키는 중이라 세세한 사정까진 밝히지 않고 있었다. 입을 열 기세가 없는 그를 본 세피온 공작 역시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손을 휘휘 밖으로 내저었다.

“알았으니 이만 나가들 보게.”

“그럼 저흰 이제 어떻게 해요? 다시 본 임무에 복귀하면 되나요?”

“아니, 그냥 쭉 대기하게. 어차피 특별대도 그리 오래 가진 않을 것 같으니.”

이런 대답이 나올 거란 건 이미 예상하긴 했다. 지금 특별대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상태였다. 마신전이 사라진 이후로 그렇게 지긋지긋하던 균열이 완전히 멈췄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심증에 불과했던 관련성이 사실이었다는 게 드러난 셈이다. 그 때문에 제도가 발칵 뒤집힌 건 둘째치고, 마수가 나타나지 않으니 특별대도 더는 할 일이 없게 됐다. 혹시 몰라 아직 유지하고 있지만 조만간 해산 절차를 밟을 거라는 건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그놈만 신이 났지.”

“그놈?”

“루시엘 왕세자 말일세.”

듣기만 해도 불쾌해지는 이름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러고 보니 그 망할 놈의 왕세자가 지금 제국에 있었다. 아직 마주친 적은 없지만 같은 제도 하늘 아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거슬렸다.

“특별대가 해산되면 진혼 길드가 전력을 되찾아서요?”

“그것도 그렇지만 이 흐름 자체가 문제네. 그 왕세자가 제국 귀족들을 모아두고 마신전을 배척하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중이었거든. 이번 일로 그가 완전히 신임을 얻게 됐어.”

“에펜 왕국과 마신전은 서로 돕는 관계처럼 보인다고 하지 않았어요?”

“상황만 보면 분명 그래 보였는데 말이네.”

새 궐련을 입에 문 세피온 공작이 쓰게 웃었다. 그래, 랑시가 알려준 바로는 분명 왕실과 마신전의 사이가 나쁘다고 했었다. 세간의 이목을 속이려 일부러 잘못 퍼트린 소문인 건가 했는데 오히려 정보원들이 등잔 밑이 어두웠던 건지도 몰랐다. 다비안을 바라보니 그가 조금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겉으론 우호적인 관계로 보이긴 했습니다만…….”

“뭔가 걸리는 게 있었나요?”

다시금 망설이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는 침묵하던 다비안이 순순히 입을 여는 것에 세피온 공작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지만, 그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신관들은 식사할 때와 잠들 때만 제외하면 온종일 제례 의식만 하며 지냈습니다. 사적으로 사담을 나누거나 다른 일정을 보내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통제당하고 있었다는 건가요?”

“강제가 있었다기엔 감시자들은 따로 없었습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이 말을 걸어도 마신관들 쪽에서 무시로 일관했습니다. 정확히는, 그들이 제례 의식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친선 목적에 왕실의 평화를 기원하는 의식이었다. 그게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 해도 매일같이 똑같은 일과만 기계처럼 반복하며 산다는 건 좀 이상했다. 다비안 역시 그 점이 마음에 걸려 마신관들의 명단을 작성해둔 거라고 했다.

“그 제례 의식은 어떤 형식이었어요?”

“제단에 거대한 술식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온종일 기도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건 없었습니다.”

“……혹시 그 주술식이 문서에 들어 있던 그거예요?”

“네, 술식이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서 전부 다 옮겨 적지는 못하고 일부만 옮겨둔 겁니다.”

이거 예감이 너무 좋지 않은데. 그 주술식은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흑주술에 가까운 형식이었다. 그런데 그걸 제례 의식에 사용하고 있었다고? 떨떠름한 기분으로 돌아보니 세피온 공작 역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참, 내가 해독하지 못 하는 주술식이면 어지간하면 풀어낼 자가 없는데. 이거 곤란하게 됐군.”

“전 이만 가볼게요.”

“으응? 간다고?”

당황한 시선들을 모른 척하고 얼른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사정을 설명해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지금은 머릿속을 꽉 채운 것을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대로 향한 곳은 특별대 관사 쪽이었다. 익숙한 길을 따라 일전에 한 번 가봤던 장소로 거침없이 들어섰다. 안에서 한창 부지런하게 일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들어온 날 발견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십니까? 여긴 외부인이 들어오면 안 됩니다.”

몇 사람이 더 안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제지했다. 그제야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걸음을 멈춰 세웠다.

“죄송해요. 마음이 급해서 실례했네요. 지금 시벨리우스는 어디에 있어요?”

“누구요? 아, 혹시 주방장님을 찾으러 오신 겁니까?”

“네, 전 엘이라고 하는데요. 잠깐 시벨리우스 좀 불러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주방장님은 바쁘셔서…….”

대답하던 숙수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뭐야.”

문 안쪽에서 훤칠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오늘도 꼼꼼하게 요리사 복장을 갖춘 시벨리우스였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니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나와 본 듯했다.

“아, 주방장님! 갑자기 이분이 주방장님을 만나겠다고 들어오셔서…….”

반색한 숙수가 얼른 설명을 이었지만 그가 내 쪽을 발견하는 게 더 빨랐다. 싸늘하던 시선이 나를 확인하고 잠시 멈칫했다.

“앗, 혹시 정령사 엘 님 아니십니까?”

시벨리우스를 뒤따라 나오던 사람이 냉큼 내 앞으로 달려오며 물었다. 누군가 했는데 얼굴을 보고 나니 낯이 익었다. 일전에 물을 만들 수 있는지 물어봤던 숙수였다.

“아, 네. 저 맞아요.”

그러고 보니 얼굴을 가린 채였구나. 쓰고 있던 후드를 뒤로 젖히니 모두의 표정이 잠시 경직됐다. 내 얼굴을 몰랐던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고 전에 봤던 사람들도 왜 여전히 같은 반응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는 척해온 숙수도 잠시 굳어 있다가 황급히 말을 이어갔다.

“아이고, 정말 엘 님이셨구나. 다른 임무를 받으시고 떠나셨다 들었는데 다시 복귀하신 겁니까?”

“그냥 잠깐 들른 거예요.”

“그렇군요. 그래도 잘 오셨습니다. 주방장님이 그동안 엘 님이 언제 오시는지 얼마나 궁금해하셨는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산만하게 떠드는 말을 낮은 음성이 가로막았다. 급히 입을 다문 숙수가 냉큼 뒤로 물러서고 나자 그를 노려보던 시벨리우스의 눈길에 힘이 풀렸다. 다시 마주친 표정은 누가 봐도 머쓱해하는 얼굴이라 웃음이 나왔다.

“나 기다렸었어?”

“……여긴 또 무슨 일이야.”

“아참, 그렇지.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너한테 물어볼 게 있는데, 혹시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지금?”

“빠를수록 좋긴 하지만, 너무 바쁘면 기다릴게.”

그러자 잠시 고심하는 듯하던 그가 머리에 쓰고 있던 주방 모자를 벗었다. 모자와 함께 고정되어 있던 핀이 풀어지면서 결 좋은 은발이 부드럽게 흘러 내려왔다. “돌아올 때까지 네가 진행해.” 옆에 있던 숙수에게(그의 표정이 울상이 되는 건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시를 내린 후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일단 여기서 나가자.”

앞서 걷는 그를 따라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주방을 나온 우리는 아무도 없는 공터로 이동했다. 벤치가 놓여 있는 걸 보면 평소 주방에서 쓰는 휴게실인 듯했다. 그제야 걸음을 멈춘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이제 말해도 돼. 무슨 일인데?”

“아, 잠깐만 기다려.”

혹시 몰라 필기구를 가지고 다니길 다행이다. 서둘러 공책을 펼쳐 들고 그 앞에서 끄적끄적 적어 내렸다. 한동안 내가 하는 양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시벨리우스가 돌연 움찔하더니 급히 내 손을 붙잡아 멈추게 했다. 당황해서 고개를 드니 그가 무섭게 굳은 얼굴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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