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2화
모든 것이 처참했던 순간이었다. 아무리 깨부수려고 해도 나를 밀어낸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와 비명, 필사적으로 만류하며 우짖는 소리들. 하지만 그것들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 속에서 홀로 평온하게 서 있던 단 한 사람.
짙은 흑발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 손에 들린 검은 창에서 눈부실 정도로 환한 빛이 일었다. 그 빛이 그의 전신을 집어삼키는 순간까지도 나는 지켜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시선을 맞춰온 얼굴이 빙긋 웃었다.
“엘뤼엔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전해줘.”
아마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목소리.
그리고 그가 그런 선택을 하게 된 이유.
머릿속이 온통 웅웅거렸다. 귓속에서 끊임없이 잡음이 들끓었다. 카류안이라니. 왜 여기서 그 이름을 듣게 되는 거지? 눈앞에서 멀쩡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건 살아 있으면 안 된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런데 죽이면, 그다음은……?’
여기서 카류안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퍼뜩 미친 생각에 정신이 조금 들었다. 잠시 이성을 잃었던가? 힐끔 돌아본 주위는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상황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사방이 온통 물바다였고, 엉망으로 부서진 잔해가 보였다. 카류안은 얼음 줄기에 포박된 채 벽 속에 처박힌 채였다. 그 목을 움켜쥔 내 손이 부러트리기 직전에서 멈춰 있었다. 쿨럭, 피를 토하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손을 떼어냈다.
“이제 다 했어요?”
입가를 훔친 카류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엉망으로 다친 중에도 빛을 잃지 않은 붉은 눈동자가 형형히 빛났다. 침묵하니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 안도감이 깃든 한숨이 흘렀다. 눈짓을 읽은 시큐엘이 결박하던 힘을 풀고 내 옆으로 돌아왔다. 성에로 뒤덮여 새하얗던 몸체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면서, 카류안을 옭아매고 있던 얼음덩어리도 물로 변해 흥건히 쏟아지기 시작했다.
“와, 진짜 아파.”
채 녹지 않은 얼음 잔해 속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선 카류안이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질린 듯한 시선이 내게 닿았다.
“언젠가 한 번은 붙어보고 싶었지만 이건 정말 기대 이상이네. 마족한테 무슨 원수진 거라도 있어요? 사정을 정말 조금도 안 봐주네요. 지금까지 변장하고 있었던 건 난데 왜 그쪽이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지?”
너스레를 떠는 카류안이라니, 우습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시선을 돌리니 구석에 기절해 있는 시몬이 보였다. 이성이 완전히 날아간 동안 그에게도 영향이 간 모양이었다. 다행히 의식만 잃었을 뿐 다치진 않은 것 같았다.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있는 건지 말해.”
“그걸 얘기하려는데 다짜고짜 공격부터 한 건 그쪽이거든요? 일단 진정해요. 난 적이 아니라고요.”
“네가 적이 아니라고?”
실소가 절로 흘러나갔다. 너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데. 무고한 사람이 몇이나 죽었는데. 엘뤼엔이 왜 다쳤고, 라피스가 왜 그렇게 죽었는데. 카노스가…… 왜 소멸을 택했는데. 그런데 적이 아니라고?
내가 알던 것보다 어린 모습이라 다행이다. 완전히 똑같았다면 분명 멈추지 못했을 테니까. 주먹을 꾹 움켜쥐니 용케도 눈치를 챘는지 카류안이 빠르게 한 발 물러나며 웃었다.
“원래 네브는 어떻게 한 거야.”
“그건 처음부터 나였어요.”
“시몬과 델라는 네브와 오랜 친구라고 들었어. 그럼 대체 언제부터 위장을…….”
“아, 그건 애초에 사실이 아니에요. 그렇게 여기도록 최면을 걸었죠.”
그러고 보니 카류안의 특기가 최면이었던가.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던 일들이 떠올라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위장한 시기 자체는 당신이 그들을 처음 만난 시기와 같아요. 일단 상황을 지켜보느라 모습을 보이진 않았지만요.”
“그럼 역시 그때 생긴 균열은…….”
“내가 넘어오면서 생긴 거예요. 아, 그땐 고의는 아니었어요.”
이후의 균열은 고의라는 소리였다. 황당한 기분으로 바라보니 카류안이 생긋 웃었다.
“인간들을 골탕 먹이려고 그런 건 아니에요. 아니, 뭐, 전혀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긴 한데, 어쨌든 그게 주목적은 아니란 소리죠.”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난 그저 뭘 조금 보호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그 과정에서 재미를 좀 더 가미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균열로 인해 일어나는 피해가 극심한데, 고작 재미라고? 지극히 마족다운 논리라 그런지 화조차 나지 않았다. 단지 급격하게 피로해졌을 뿐.
“보호한다는 게 마신관들을 말하는 거야?”
이어서 물은 말에 카류안은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속을 짐작할 수 없는 녀석이지만 긍정의 의미라는 건 분명했다. 누군가 일부러 균열을 일으킨다는 건 짐작했는데, 설마 그게 마신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니. 어디서부터 문제점을 파악하고 지적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속이 갑갑해졌다.
“눈 색은 어떻게 바꾼 거야. 너희 종족은 색을 바꿀 수 없잖아.”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직접 바꾼 건 아니고 마력으로 얇은 막 같은 걸 만들어서 눈동자에 덧씌운 거예요. 물론 이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요. 겨우 그거 하나 유지하는 데 내 모든 마력을 전부 다 쓰고 있었다면 믿을 수 있겠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당연히 내 알 바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방식으로 반칙을 쓸 수 있다는 게 불쾌하다면 모를까. 하지만 지금 당장 그보다 더 거슬리는 건 그의 말투를 비롯한 태도였다. 내가 알던 모습과 너무 다른 것도 있었지만, 장난스러운 표정이라든가 일부러 나른하게 말하는 듯한 말투가 누군가를 옮겨놓은 듯해서 자꾸만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러고 보니 아까 스승에 관한 언급을 했던 것 같은데, 누굴 말한 걸까. 설마 지금 내가 떠올리는 그인 건 아니겠지?
“……당신, 몇 살이야.”
“내 나이요? 그걸 왜 묻죠?”
“닥치고 대답이나 해. 지금 몇 살이냐고.”
“얼마 전에 카르텐을 졸업했다고 하면 이해하려나? 이제 백 살 조금 넘었죠.”
느긋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백 살이라니. 어려 보이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어렸다. 마족이 백 살이면 아직 이렇다 할 경험도 쌓지 못한 시기였다. 아스모델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타고난 힘이 아무리 강해도 그걸 제대로 다루려면 관록이 생겨야 하는 법이다. 공격하면서 지나치게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착각이 아니었다.
“고작 백 살이라고…….”
“고작이라니, 너무하네. 그 백 년도 살기 힘든 인간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어린 마족이라고 무시하지는 않는 게 좋을걸요? 앞으로 마왕이 될 존재라구요.”
“……마왕이 될? 그럼 지금은 마왕이 아니라는 거야?”
“와, 내가 이미 마왕으로 보여요? 마음에 드는 오해네요.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은 아니에요. 나중에 그렇게 될 예정이지만.”
마왕도 아니고 나이도 어린 카류안이라니. 억누르고 있던 충동이 다시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언제부터 악신이 될 계획을 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닐 것이다. 아직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애꿎은 아이들이 희생되지도 않았고 그를 돕는 유카르테 대공은 태어나지도 않았다. 카류안만 여기서 사라진다면,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또 살벌한 표정.”
난처하다는 듯 미소 지은 카류안이 한 발짝 더 뒤로 물러났다.
“적이 아니라고 말해도 안 믿는 거 같네요. 이러다 진짜 위험할 것 같으니 전언이나 하고 얼른 꺼질게요.”
“전언?”
“내 스승이 당신에게 전하라고 한 말이 있어요.”
“……뭐?”
“당신이 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우리 일에 엮이고 있어요. 그래서 그런지 스승이 눈여겨보더군요. 내 정체를 알아차리면 전하라고 했으니 지금이 딱 그 시점이네요.”
그 스승의 이름이 혹시 루카르엠이야? 입술 끝에 맴도는 말을 간신히 눌러 삼켰다. 이런 상황은 또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예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슨 전언인데?”
“함부로 개입하지 말라고 했어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시선을 맞춰온 붉은 눈동자가 나른하게 휘어졌다.
“그게 어느 쪽이든,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라고.”
움켜쥔 주먹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갔다.
후회한다고? 무엇을? 이곳의 당신은 날 모르잖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개입하지 말라는 건 정확히 뭘 말하는 거야? 그걸 왜 하필이면, 카류안의 입을 통해 전하는 건데?
“나도 경고 하나 해두죠.”
혼란한 와중에 목소리가 울렸다. 나를 빤히 훑어내린 카류안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우리 일을 너무 방해하지 말아요. 그럼 정말로 적이 될 수도 있으니까.”
어디선가 신음이 들려왔다. 시몬이 의식을 되찾았는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멍하니 돌아보는데 돌연 그를 향해 날카로운 기운이 쏘아지는 게 느껴졌다. 콰지지직! 콰앙! 황급히 검을 들어 기운을 막아내고 나니 뒤늦은 낭패감이 일었다. 곧바로 돌아봤지만 이미 그 자리에 있던 카류안의 모습은 홀연히 사라져버린 후였다.
“…….”
멈췄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똑바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든 기분이었다. 그대로 주저앉아 연거푸 마른 얼굴을 쓸었다. 시큐엘이 다가와 위로하듯 머리를 비벼 왔지만 기분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모르겠다. 모든 게 다 엉망진창이 된 기분이었다.
* * *
의식을 차린 시몬은 큰 충격을 받았다. 네브에 대해 실제로 아는 게 전혀 없었다는 걸 상기한 것이다. 인지하면 깨지는 최면이었는지, 그는 자신의 과거에 네브와 함께한 추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금세 인정했다. 그건 델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와,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냐.”
모든 사정을 다 들은 크리스가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는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길드원들을 돌아보았다. 시몬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는 중이었고, 델라 역시 연신 머리를 쓸어 넘기기에 바빴다. 그간 동고동락하면서 어울리던 고향 친구가 사실은 마족인 것도 당황스러울 텐데, 알고 보니 그간의 추억들도 전부 조작된 거였다. 쉽게 넘기기 힘들 정도로 충격적인 상황이긴 했다. 덕분에 늦은 밤까지 먹고 마시는 자리가 계속됐다. 적당히 자리를 지킨 나는 두 사람이 완전히 고주망태가 되어 뻗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뒷정리를 담당한 크리스가 나가는 걸 배웅했다.
“오늘 너무 고생했다. 조심히 들어가.”
“네, 그보다 사람 하나가 빠졌는데 길드 운영은 괜찮겠어요?”
“아, 그건 괜찮아. 요즘 신규 가입자가 좀 생겼거든.”
“앗, 그래요?”
“네가 요즘 매일같이 활약한 덕분이지. 너랑 아인 이드리스랑 친하다는 소문이 퍼져서 그런지 진혼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좀 줄어들었어.”
“그렇구나.”
다행히 당장 길드 운영에는 차질이 생기지 않을 모양이다. 장기 휴가에 특별대 임무로 바로 넘어가면서 여러모로 소홀해져서 걱정했는데 길드는 내가 없이도 알아서 잘 꾸려지고 있었다. 내심 안도하니 크리스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그만둬도 괜찮아, 엘.”
“네?”
“사실 넌 제도에 정착하려던 게 아니었잖아. 우리 생각하느라 억지로 골치 아픈 일 감당하고 있지는 말라는 소리야. 하기 싫으면 그냥 튀어. 뒷일 생각하지 말고.”
그간 크리스는 내가 특별대에 강제로 묶이게 된 걸 안쓰럽게 여기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의 다정한 마음 덕분인지 무겁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때 문득 미친 생각에 정신을 집중하고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또 정령왕들이 근처에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지켜보는 눈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조금 용기가 생겼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그냥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크리스는 만약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예전으로? 과거로 말이야?”
“네.”
“물론 가야지. 그리고 모든 상황을 다 바꾸겠지.”
마치 준비하기라도 한 것처럼 대답이 선뜻 이어졌다. 돌아보니 그가 싱긋 웃었다.
“딱히 새삼스러운 고민도 아니거든. 옛날엔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했던 거야.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면 모든 상황을 다 바꿀 수 있을 텐데. 소중한 사람들도 살리고, 안 좋았던 일들은 전부 다 일어나지 못하게 막아야지. 그럴 수만 있다면 내 전부를 다 줘도 아깝지 않을 거라고 말이야.”
“그렇군요.”
“다들 그러지 않겠어? 가볍든 무겁든 모두 한두 가지의 후회는 끌어안고 살기 마련이잖아. 없던 일로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법이지.”
“맞아요. 그건 그래요.”
“뭔가 후회하는 일이라도 생겼어?”
크리스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이것저것 생각이 좀 많아진 것 같아요.”
“하긴, 나도 머리가 복잡하긴 해. 네브가 마족일 줄 누가 알았겠어. 심지어 그 녀석이 균열을 일으키는 주범이었다니. 이게 세상에 알려지면 우리 길드는 완전 끝이야. 천하의 공적이 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정말로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질 것 같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크리스가 끌끌 혀를 찼다. 오늘 겪은 일이 그에게도 워낙 충격이었던 탓인지 내가 한 말 자체엔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았다.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깊게 숨을 삼키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마법 전등이 세워진 거리, 가판대에 올려진 잡지와 신문들. 기차역으로 향하는 정거장과 그 앞에 줄지어 세워진 마차들. 내가 살던 세상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분위기로 가득한 주위를 새삼스럽게 살폈다.
늘 궁금했었다. 내가 이 시대에서 무슨 짓을 해도 앞으로 이어질 결과는 그대로 고정되는 건지. 그게 아니면 영향을 미치는 대로 바뀔 수 있는 건지. 당연히 전자라고 생각해 왔었지만, 그래도 후자의 가능성이 신경 쓰이긴 했다. 미네르바의 일을 두고 늘 고심했던 것도, 조금쯤은 자책을 미뤄뒀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오늘 그 답을 알게 된 것 같았다.
‘함부로 개입하지 말라.’
카노스가 직접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가 내 존재를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이미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주술이 풀리지 않는 이유는 아직 모르겠지만.
물론 그 정답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앞에 있었다. 가볍게 한숨을 삼킨 후 문장이 새겨진 손등을 꾹 눌러 잡았다. 마신전에 가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