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500화 (500/608)

제500화

가져온 마목의 수액은 곧바로 대장에게 보고하고 제출했다. 창단 이후 수많은 전투가 있었지만 특별대를 대놓고 노린 정황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놀란 대장은 일의 시작점부터 마무리된 부분까지 모든 상황을 자세하게 캐물었고 황급히 수액을 챙겨 자리를 비웠다. 한동안 여러모로 내부가 시끄러워질 것 같았다.

물론 내 속은 이미 한참 전부터 시끄러웠다. 차라리 평범한 독이었다면 그냥 그러려니 했을 텐데 하필이면 마목이라니. 도저히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한 사람의 모습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존재감을 주장했다.

‘제발 좀 봐줘라.’

여기서 일을 더 꼬고 싶진 않단 말이야. 알아도 모르는 척, 봐도 못 본 척하려는 중이건만 돌아가는 상황은 내 처지를 봐줄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복잡해져서 한숨만 푹푹 내쉬는데 누군가가 조용히 옆으로 다가왔다. 함께 있던 죄로 내내 같이 끌려다닌 슐츠였다.

“저희는 이만 복귀하면 된다고 합니다.”

“네, 고생 많으셨어요.”

“엘도 고생하셨습니다.”

담담히 답한 후 그가 조금 머뭇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라 돌아보려니 의식한 행동은 아니었던 듯 곧바로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저한테 뭐 물어볼 거 있으세요?”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그냥 편하게 물어봐도 괜찮아요. 무슨 일인데요?”

물러서지 않고 캐물으니 슐츠는 조금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용건이 있었다고 느꼈던 게 맞긴 했는지 곧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화 말입니다만. 보통은 어디까지 가능한 겁니까?”

“어디까지라니요?”

“일반적으로 독은 종류에 따라 해독이 어려운 것도 있으니까요. 아무리 정령이라도 한계는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늘처럼 독만 추출할 수 있다면 해독하지 못할 범위가 없을 것 같더군요. 그게 당신이 상급 정령사라서 가능한 건지, 모든 정령사가 다 가능한 건지 궁금했습니다. 수질만이 아니라 다른 것의 정화도 가능한 건지도요.”

이어진 말은 오히려 내가 더 신기했다. 세간의 일반적인 인식으로 정령은 강력하고 영험한 살아 있는 무기 같은 존재였다. 물의 정령사인 내게 물을 구할 수 있는지조차 굳이 확인받는 것처럼, 정령이 오염을 정화할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슐츠는 그 사실 자체는 당연한 전제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건 나도 보고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애초에 주방에서 날 찾게 된 것도 우연히 지나가던 길에 상황을 알게 된 슐츠가 그들에게 조언한 덕분이었다. 어쩐지 심부름꾼도 따로 없이 그가 곧장 길을 안내하더라니. 계속 같이 끌려다닌 것도 나름의 책임감이었는지 모르겠다.

“정령술에 관심 있어요?”

“그냥 조금, 관련 책을 읽어본 정도입니다.”

“관심 있는 거 맞네요. 다른 것의 정화라는 건 뭘 말하는 거예요?”

“사람이라거나…….”

사람이라, 중독된 사람을 말하는 건가?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기 위해 그를 돌아보다 퍼뜩 멈춰섰다. 가만히 응시하니 답을 기다리던 슐츠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러십니까?”

“잠깐만 가까이 와 보세요.”

“예?”

뜬금없는 요구가 당황스러웠는지 그는 오히려 더 뒤로 물러섰다. 내 쪽에서 다가섰더니 안절부절못하는 게 한눈에도 느껴졌다. 개의치 않고 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전신을 천천히 훑어내렸다. 머리 색은 진한 갈색이었고, 눈동자 색도 거의 같았다. 덥수룩하게 얼굴을 덮어 내린 머리 모양 때문에 조금 음침해 보이긴 해도 인상 자체는 두드러지는 부분 없이 평범한 편이었다.

“음, 이거였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아, 별거 아니에요. 제가 뒤통수를 좀 자주 맞는 편이라서요. 덕분에 조금만 마음에 걸리면 우선 의심해보는 버릇이 있어요. 그런데 이건 또 의외의 결과네요.”

곧바로 손을 뻗어 그의 목 부근에 있는 걸 잡아냈다. 손가락 끝에 걸려 나온 사슬을 따라 동그란 메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김새며 새겨진 문양까지, 어디서 많이 본 형태였다. 기습을 허용한 슐츠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하지만 솔직히 얼떨떨하기는 내가 더 했다. 설마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냐는 게 이런 의미였을 줄이야.

“안전한 장소에서 잘 보호하겠다고 했는데, 왜 당신이 여기에 있어요?”

이렇게 가까이에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두 달 가까이 매일 같이 마주하던 사람 중에 있을 거라곤 더더욱 생각지도 못했고.

“다비안.”

그에게만 들리도록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슐츠, 아니, 다비안의 표정이 조금 더 경직됐다. 뒤로 물러서는 걸 내버려 두고 손을 떼어내니 그가 급히 다시 옷 속에 목걸이를 갈무리해 넣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든 얼굴은 복잡한 빛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건 세피온 공작이 준 거예요?”

처음엔 이프리트 걸 빌린 건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이프리트를 통해 부탁했다던 게 같은 마도구의 제작이었던 모양이다. 머뭇거리던 다비안이 예상대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아신 겁니까?”

“그 마도구가 효과는 감쪽같은 게 맞는데, 자세히 의식하기 시작하면 이질감이 들긴 하거든요.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수상하게 여겨진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도 보통은 알아차리기 어려울 겁니다. 역시 대단하시군요.”

허탈하게 중얼거린 다비안이 가벼운 한숨을 삼켰다. 역시라는 말을 들을 만큼 내가 대단한 활약을 했었나 싶다가 지난 균열 처리 작업을 내내 함께 해왔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상기했다. 바로 직전까지 가장 존재감 없는 조원일 뿐이었는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어가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보다 말투가 좀 달라졌네요. 전에는 좀 더 편하게 말하지 않았어요?”

“……은인이시니까요.”

그런 걸 신경 쓰는 성격이었구나. 열차에서 만났을 땐 너무 제멋대로라서 몰랐고, 세공에서 풀려난 후엔 대화할 겨를이 없어서 이런 사람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재밌어서 바라보니 그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공작한테 무슨 지시를 받은 거예요?”

“딱히 그런 건 없었습니다. 제가 여기 있는 건 제 쪽에서 요청한 겁니다.”

“당신 쪽에서요?”

“필요할 때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었습니다.”

올곧은 시선이 나를 향했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나를 돕고 싶었다는 소리였나 보다. 가만히 숨어 있기보다는 뭐든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조차 라미아스가 의도한 거겠지. 내 기억에 의하면 이프리트가 그의 부탁을 받고 자리를 비웠던 건 분명 다비안을 구출하러 가기 전이었다. 이런 상황을 안배하지 않고서야 미리 마도구를 마련해 둘 리가 없었다.

“크리스한테 연락은 왜 안 해요? 걱정하던데.”

“……지켜보는 눈이 있어서 어렵습니다.”

“아직도요? 꽤 집요하네요.”

감옥에서 탈출했으니 한동안은 다비안의 인맥 주위에 감시가 붙을 거라는 건 예상했다. 하지만 시간이 제법 흘렀는데도 여전하다니. 움브라 쪽의 일 처리가 꼼꼼한 이유만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 할 얘기가 많을 것 같네요. 이제 와서 선 긋기엔 너무 늦은 거 알죠?”

멈칫한 다비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그도 설명할 마음은 충분한 듯했다. 때마침 순찰 시간을 맞이한 다른 조원들이 우리를 찾으러 나오면서 대화는 그쯤에서 마무리됐다.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빠르게 건넨 말을 용케 알아들은 다비안이 이번에도 고갯짓으로 의사를 표현했다. 다시 존재감 없는 슐츠로 돌아간 그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복잡한 기분을 삼켰다. 시벨리우스에 이어 다비안까지, 아무래도 오늘은 재회의 인연이 깃든 날인 모양이었다.

* * *

나와 다비안이 대화할 기회는 생각보다 더 빨리 찾아왔다. 그날 저녁 세피온 공작으로부터 호출이 왔기 때문이었다. 주방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직접 들어보고 싶다는 이유였는데, 지정한 장소를 찾아가니 이미 문 앞에 먼저 도착한 다비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들 오게.”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세피온 공작이 손을 들어 맞이했다. 소파에 삐딱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모습이 한눈에도 몹시 불량한 자세였다. 저거 반쯤은 라미아스구만. 속으로 고개를 저은 후에 모르는 척 인사를 건넸다.

“공작님을 뵙습니다.”

“아아, 거추장스러운 예의는 생략해도 좋네. 자리에 와서 앉기나 하게.”

……그러는 당신은 너무 생략하는 거 아니야? 귀찮다는 태도로 대충 손을 휘젓는 그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 그 사이에 존재하는 복잡한 사정을 모르는 다비안은 덕분에 영문도 모르고 긴장한 상태였다.

지시대로 맞은편 소파에 앉으니 세피온 공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정체를 감출 생각이 개미의 더듬이 털만큼도 없는 듯한 행동에 나 역시 웃으며 맞받아쳐 주었다. 눈을 부릅뜬 그가 얼굴 근육을 마구 실룩거렸다. 그래도 아직 이성의 끈을 놓지는 않았는지 다시 태연히 말을 건네 오기는 했다.

“그래, 오늘 하루는 어땠나? 늘 있던 보고는 없는 것 같던데 말이야.”

“오늘은 조용했습니다.”

눈치를 보던 다비안이 차분히 대답했다. 그 말대로 매일같이 발생하던 균열이 오늘은 일어나지 않았다. 주방에서의 일은 함구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상황을 모르는 조원들은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시간을 즐겼지만, 우연치고는 상당히 공교로운 시점이었다. 같은 생각이었는지 세피온 공작의 표정도 겨우 진지해졌다.

“내가 자네들을 왜 불렀을 것 같나?”

“액체의 성분이 확인되었습니까?”

이번에도 다비안이 입을 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애초에 세피온 공작이 그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날 보면 평정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나 역시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이느니 차라리 그편이 더 나았다. 이럴 바엔 아예 안 부르는 쪽이 훨씬 더 좋았겠지만.

“자네들이 보고한 그대로일세. 수조에 들어 있던 액체는 분석 결과 마목의 수액이 맞았다네. 언제 누가 어떤 방법으로 수조에 접근했는지 조사 중이지만, 현재까진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한 상태지.”

설명하는 그의 얼굴에선 숨기지 못한 짜증이 묻어나왔다. 아인 이드리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만들었던 특별대가 예상치 못하게 활약하게 된 건 그에게도 좋은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책임지는 척을 하는 것과 정말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은 여러모로 의미가 다를 테니까. 그의 계획에 맞춰 누군가가 판을 더 넓힌 것이기도 하니 기분이 유쾌할 리도 없었다.

“상황이 또 달라졌네. 이제 더는 균열을 수습하는 선으로만 끝낼 일이 아니라는 소리지. 그래서 말인데, 두 사람에게 따로 임무를 부여하고 싶네.”

“저희 두 사람에게요?”

당황해서 다비안을 돌아보니 세피온 공작이 씩 웃었다. 이 와중에도 날 약 올리는 건 즐거워 죽을 모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제국에 오는 게 아니었다. 조금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드래곤부터 찾아갔어야 했다. 역시 아버지의 말씀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거였다.

“이미 그가 누군지 알게 됐다는 건 알고 있네. 솔직히 더 일찍 알아차릴 줄 알았는데 말이야. 의외로 꽤 늦더군?”

“……일말의 언질도 안 해주신 분께 듣고 싶진 않은 말이네요.”

“어허, 예의를 생략하라고 했지 방만하게 굴라 하진 않았네.”

“그런 뜻인지는 또 몰랐네요.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지긋이 바라보며 웃었다. 노려보는 강도로 전류를 흘려보낼 수 있다면 지금쯤 우리 사이엔 번개가 내리쳤을 게 분명했다. 애꿎은 다비안만 끼어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서 무슨 임무를 내리시려고요?”

“마신전에 잠입해주게.”

“……뭘 해요?”

당황한 나머지 반문이 절로 튀어나갔다. 본인이 생각해도 그럴 만했는지 세피온 공작은 이번엔 꼬투리를 잡지 않았다. 그저 똑같이 웃는 얼굴로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줬을 뿐.

“마신전에 잠입해 달라고 했네.”

물론 두 번 듣는다고 해서 그 말이 제대로 와 닿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이 자리에 있는 게 세피온 공작이 아니었다면, 아니, 하다못해 옆자리에 다비안만 없었어도 당장 멱살을 움켜쥐었을 거다. 어쩌면 이래서 다비안이랑 같이 부른 건지도 모르겠다. 애써 차분히 대응하는 나를 향해 그는 뻔뻔한 얼굴로 웃었다.

“균열은 마계와 관계된 것이지. 마목 역시 마찬가지고. 유일하게 이 상황을 분석할 수 있는 마신전은 봉문 상태이며, 거기에 잠입한 요원들은 족족 실종되고 있네. 더는 좌시할 문제가 아니라는 점도, 뭘 해야 하는지도 이미 알고 있지 않나?”

“그야 물론 알지만요. 왜 저희인가요?”

“당연히 자네들만 한 적임자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네.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고, 누구보다 이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깊게 관여한 사람들 아닌가.”

그야 맞는 말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 마신전엔 결계가 있고, 그 결계에 마신이 직접 관여했다는 것 역시 나도 알고 그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상급신이 작정하고 가리고 있는 걸 알아내려면 그 결계에 직접 갇히는 도리밖에 없다. 골탕 먹이는 방법이 너무 치사한 거 아닌가 싶었지만 세피온 공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입이라면 저보단 아인 이드리스를 보내시는 게 더 나을 텐데요.”

“원한다면 그도 같이 붙여주지.”

“……제 마른 그언 뜨시 아니라요…….”

이가 악물어지니 말이 제대로 발음되지도 않았다. 마침내 만족했는지 세피온 공작이 피식 웃었다.

“솔직히 말하겠네. 아인 이드리스는 온전히 신뢰할 수가 없네.”

“언제는 온전히 신뢰하셨는지?”

“상황이 또 달라졌다고 하지 않았나. 혹시 그가 스승으로 삼은 검술 교관이 누군지는 알고 있나?”

“근위대 기사단장 중 하나라고…….”

“맞네. 제 3기사단 단장이지. 그의 딸이 얼마 전 에펜 왕국의 귀족과 약혼했다네.”

“…….”

“이제 무슨 말인지 이해했겠군.”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건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기껏 진혼에서 빼냈더니 이번엔 스승 쪽이야? 차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질 않아 그저 신음만 삼켰다. 어차피 안 될 상황이라 이렇게 꼬이기만 하는 건가. 어쨌든 온 사방이 구멍투성이가 따로 없었다.

“다녀오면 자네가 찾고 있던 것이 또 준비되어 있을 걸세.”

“……!”

나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마주친 세피온 공작의 눈동자가 얄미울 정도로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제 더는 물러설 수가 없네. 마신전을 조사해주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아내기만 하면 되네.”

다시금 이어진 목소리가 사형 선고처럼 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대는 날 환영하지 않는다. 그것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