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8화
“그게 무슨…….”
“거짓말한 거 아냐! 앞으로 그렇게 될 거니까!”
정령왕들의 얼굴에 황당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걸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어이없다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화를 내지 못한 건 엘이 다시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족이면 안 돼? 왜 안 되는데?”
“엘, 너…….”
“내가 인간이라서? 피를 나누지도 않았고 자격도 너무 부족해서? 나도 그런 건 잘 알아! 누구보다 잘 알아! 그치만 타고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려줬잖아! 기대하게 했잖아!”
“지금 무슨 말을…….”
“진짜! 다들 너무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분한 듯이 씩씩거리던 엘이 곧 앞으로 고꾸라졌다. 놀란 엘퀴네스가 다시 그를 받아냈다. 축 늘어진 몸에서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흘러나왔다.
“기절했어?”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트로웰이 그제야 입을 열 수 있게 된 것처럼 물었다. 힐끗 시선을 보낸 엘퀴네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가 고요해지면서 그들 사이에 잠시간 묘한 공기가 감돌았다.
“쭉 형이라고 하긴 했지.”
이프리트가 지나가는 듯한 말로 중얼거렸다. 무슨 뜻인지 모를 수가 없던 트로웰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 그 역시 엘이 어디서든 자신을 형으로 호칭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른 방식으로 둘러댈 수 있는 상황에서조차 마찬가지라는 것도.
그들을 잠시 응시한 뒤 엘퀴네스는 묵묵히 엘을 안아 들었다. 그대로 침대에 눕히는데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아버지, 나 너무 힘들어.”
“…….”
“내가 너무 욕심내서, 벌을 받는 걸까…….”
동요를 담은 푸른 눈동자가 가만히 누워 있는 이를 내려다보았다. 이 작은 머리통 속에 무슨 생각이 가득 차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가벼운 한숨을 삼킨 후 엘퀴네스는 이불을 끌어올려 웅크린 몸 위를 덮었다. 눈물이 맺힌 눈가를 훑어내리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잘 자라.”
* * *
눈을 뜨자마자 떠올린 건 망했다는 생각뿐이었다. 술에 취해 뻗다니. 게다가 설마 주정을 부린 건가? 기억나는 건 거의 없는데 드문드문 떠오르는 광경마다 하나같이 죄다 섬뜩한 것들만 가득했다. 뭔가 엄청난 짓을 저질렀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몸이 무사한 걸 보니 일단 내 정체를 밝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팔다리가 멀쩡히 붙어 있는 걸 확인하고 안도하다가 바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니, 그것만 안 하면 되는 게 아니잖아. 이 멍청아!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깼으면 일어나라.”
소리 없이 몸부림치는데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순간만큼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였다. 자는 척을 할까? 잠결에 뒤척였던 것처럼 위장하면 괜찮지 않을까? 헛된 저항인 걸 알면서도 망상이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물론 망상은 역시 망상일 뿐이었다.
“일어나.”
“넵.”
벌떡 몸을 일으키니 그림처럼 서 있던 엘뤼엔이 힐끗 시선을 보냈다. 어색하게 웃자마자 바로 다시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숙취는?”
“어, 없는 것 같은데요.”
“그렇겠지. 치유해뒀으니.”
그럼 대체 왜 물어본 건가요.
황당한 마음에 멀거니 바라보니 그가 불쑥 내 앞에 쟁반 하나를 내려놓았다.
“그래도 마셔라.”
“……?”
쟁반 위엔 여러 개의 잔이 놓여 있었다. 차갑게 한 레몬티랑 오렌지 주스, 채소즙, 또 하나는 꿀물인가? 이게 다 뭐지 싶어서 바라보자 간단한 설명이 돌아왔다.
“인간들은 술을 마신 후에 이런 걸 마시더군.”
아니, 그렇다고 이렇게 종류별로 가져올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어정쩡하게 살피고 있으려니 선호하는 걸 고르라는 말이 이어졌다. 어차피 진짜 숙취 해소용도 아니고, 뭐가 가장 좋은 건지도 알 수 없어서 그나마 가장 익숙하게 여겨지는 꿀물을 골랐다. 시선을 한 번 보낸 엘뤼엔이 나머지 음료를 다시 가져가 치웠다.
“내가 해도 되는데…….”
“됐다.”
그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잔 안에 들어 있던 내용물들이 솟구쳐 오르더니 증발하듯 사라졌다. 내가 엘퀴네스 출신이라 하는 말은 아니고, 솔직히 정령왕 중에선 물의 정령왕이 제일 멋있는 것 같다. 내심 뿌듯한 마음을 만끽하고 있는데 엘뤼엔이 눈길이 닿았다. 괜히 헤실거리는 걸 들킬까 봐 얼른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저기, 다른 사람들은?”
“내 알 바 아니지.”
음, 그것도 그렇습니다.
그에게 화려한 화술을 기대한 적은 없지만 오늘따라 대화가 더 뚝뚝 끊기는 것 같다. 다른 때라면 크게 신경 쓰진 않았을 텐데, 지은 죄가 있다 보니 식은땀만 흘렀다.
“어제 일은 어디까지 기억하지?”
본론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치고 들어왔다. 꿀물을 삼키다 뱉을 뻔한 위기를 간신히 넘기고 다시 힘겹게 웃었다.
“뭔가, 술주정을 한 것 같긴 한데…….”
“같은 게 아니라 했다.”
“……네, 주정했다는 느낌만 있습니다.”
“아무것도 기억하는 게 없다는 소리군.”
담담한 말투가 타박하는 것처럼 들리는 건 단지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술 취해 온갖 진상을 다 부려놓고 다음 날 혼자 속 편하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 당연히 황당할 수밖에. 솔직히 가장 황당한 건 나다. 마시기 전에 술이라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왜 확인도 하지 않고 무작정 마시기부터 했는지 모르겠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후회가 가슴을 찔렀다.
“어쨌든 지금은 정신이 멀쩡하니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겠지.”
“어, 그, 그렇지.”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네가 과거를 밝히길 꺼린다는 걸 알지만 이번엔 솔직하게 대답했으면 한다.”
“……뭔데?”
“육친 중에 살아 있는 이가 있나?”
……떠올려라, 어젯밤의 나. 대체 무슨 말을 했던 거냐.
아무래도 사고를 치긴 단단히 친 것 같다. 입술을 깨문 채 조금 주저하다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엘뤼엔이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단 하나도?”
“없어. 하나도.”
“네가 나를 비롯한 정령왕들을 가족으로 여기는 건 그래서인가? 육친이 없기 때문에?”
“……그 반대인 것 같아.”
시선을 맞춘 눈동자가 별다른 감정을 담지 않고 가만히 응시해왔다. 재촉하지 않고 내가 입을 열기를 기다려주는 모습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사실대로 말하면, 난 인간들 사이에선 가정의 정이라는 게 뭔지 모르고 자랐거든.”
“…….”
“아버지 같다거나, 형 같다거나. 이런 기분들을 알게 해준 건 당신들이 처음이야. 그러니 선후 관계를 따지자면 당신들 쪽이 먼저야.”
이것만은 둘러댈 필요가 없는 사실이라 망설일 게 없었다. 잠시 말이 없던 엘뤼엔이 다시 내게 시선을 보냈다.
“넌 처음부터 날 아버지라 불렀을 텐데. 그렇게 여겨질 만한 만남은 아니지 않았나?”
“음, 그런가. 근데 그것도 어쩔 수 없었어. 부름에 답해줬잖아.”
“……무슨 의미지?”
“소환 주문을 외울 때, 아버지를 그리면서 불렀거든.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향의 아버지.”
엘뤼엔을 생각하며 불렀으니까 이 역시 틀린 말은 아니다. 멈칫한 그가 어이없다는 시선을 보내오는 걸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역시 생각한 그대로였고. 그러니 나도 모르게 그렇게 부를 수밖에. 이건 내 탓만은 아니야.”
“기가 막히는군.”
멋쩍게 웃으니 엘뤼엔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뜻 모를 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그가 짧은 한숨을 내쉴 때까진 꽤 긴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태연한 낯으로 버티려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네가 가족이라 여기는 기준이 매우 낮다는 건 알겠다.”
“그렇지는 않은데…….”
“아니, 낮아.”
냉정하게 말한 뒤 엘뤼엔이 몸을 틀었다. 탁자 쪽으로 가서 신문을 집어 드는 걸 보니 대화를 이만 마무리 지으려는 듯했다.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라 어떤 쪽으로 결론을 내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기, 엘퀴네스. 난…….”
“왜 또 엘퀴네스지?”
“으응?”
“어젠 아버지라고 잘도 부르지 않았나?”
“하하, 그, 그랬……나?”
“아버지라 부르는 걸 그만두지 않았다고도 했었지.”
미치겠네, 진짜. 그런 적이 없다고 우기기엔 몇 안 되는 스치는 기억 속에 그런 장면이 분명히 있었다. 아주 당당하게 원망하며 투덜거리기까지 했었지. 그때 대꾸했던 몇 마디 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왜 그랬지. 정말 대체 왜 그런 거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부림이라도 치고 싶은데 엘뤼엔 앞이라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이래서 술은 마시면 안 된다고 하는 거구나. 그냥 얌전히 잠이나 잘 것이지, 뭐가 좋다고 나불나불 다 떠들어댄 건지 모르겠다. 얼굴이 불타오르다 못해 소멸할 것 같았다.
“미안해. 내가 정말 다시는……!”
“사과는 됐다. 어차피 진심이 아니라면 그게 무슨 의미지?”
어떻게든 수습해보려는 시도는 시작도 하기 전에 막혔다. 차마 반박할 말이 없어서 얌전히 입을 다물었을 때였다.
“그냥 하던 대로 해라.”
“……?”
“네가 원하면 아버지라 불러도 된다.”
잠시 머릿속이 멍해졌다.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멀거니 눈만 깜빡였다. 엘뤼엔의 시선은 그가 들고 있는 신문에 닿아 있었다. 어쩌면 정말 환청이었을지도 몰랐다. 괜한 오해가 생기기 전에 확인해야 했다.
“……정말로?”
“그래.”
“정말…… 아버지라고 불러도 된다고?”
“그래.”
이상한 일이다. 엘뤼엔이 계속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연달아 허락하는 저 사람이 정말 내가 아는 그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신문을 읽는 것에 집중하느라 질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싶었다.
“내가 아들이어도, 괜찮아?”
신문에 고정되어 있던 얼굴이 마침내 들렸다. 푸른 눈동자가 고요한 빛을 담고 나를 응시했다.
“그래.”
멈췄던 숨을 간신히 삼켰다. 이번엔 헷갈릴 수가 없었다. 정말이었다. 정말 아버지라고 불러도 된다고, 아들이어도 괜찮다고 한 거였다.
“……왜?”
“글쎄, 너와 같은 이유일까.”
“나와 같은……?”
“내게 아들이 있다면, 너 같은 아이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금 머리가 멍해졌다. 호칭을 허락한 것보다 지금 이 말이 더 꿈인 것 같았다. 엘뤼엔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스치듯 지나가는 미소였지만 이번에도 잘못 보거나 착각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말해두지. 내가 허락한 이상, 네가 제멋대로 부르던 때와는 여러모로 의미가 다르다. 인간인 네가 내 아들로 산다는 게 쉬운 길은 아닐 거다.”
이어진 말엔 허탈하게 웃었다. 엘뤼엔은 냉정한 현실을 일깨우려 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 그건 애초에 할 필요가 없는 경고였다.
“그런 건 처음부터 알았어.”
* * *
내가 마신 술은 이프리트가 가져다 놓은 거였다. 블루 드래곤이 만드는 비전 술인 모양인데, 약주라서 일부러 바로 해독하지 않고 놔둔 거라고 했다. 내 비극적인 술주정의 시간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이후로도 여러 설명이 이어졌지만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그저 조금 전의 일들뿐이었다.
엘뤼엔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됐다. 그가 다시 날 아들로 선택했다. 나중에 다시 마음이 바뀐다 해도 어쨌든 지금은 이게 현실이었다. 정작 엘뤼엔은 아무렇지 않게 평온하기만 한데 나만 계속 허공에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고작 하룻밤 만에 어제와 똑같은 공간이 완전히 달라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술을 마셔볼 걸 그랬나 싶다.
“아버지 호칭 허락받은 거야? 축하해.”
그런데 여운을 만끽할 겨를도 없이 발랄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열린 문 앞에 이프리트가 서 있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부담스러워서 슬쩍 피하니 그가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나도 삼촌이라고 불러도 돼.”
“어, 아니…… 그건 됐어.”
“아니, 왜? 네가 먼저 나한테 삼촌이라고 했는데?”
“으으, 창피하니까 놀리지 마.”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정말 그렇게 불러도 된다니까?”
정말인가 싶어서 빤히 바라보니 정직한 시선이 마주 응했다. 부드럽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정말 놀리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슬그머니 용기가 솟았다.
“그럼 삼…….”
“거기까지.”
하지만 엘뤼엔의 목소리가 가로막는 게 더 빨랐다. 당황해서 입을 다무니 이프리트가 뽀로통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왜 못하게 하고 그래?”
“쟬 내 아들로 삼을 생각은 있어도 너 따위와 형제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다.”
“헉, 그건 나도 그래. 맞아, 삼촌이란 뜻엔 그런 것도 포함이지? 어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부산스럽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 이프리트가 양손으로 내 어깨를 토닥였다.
“미안해, 도련님. 우린 그냥 친구로 지내자. 하지만 내 의향은 여전하니까 너무 서운해하지는 마. 쟬 버리고 오면 얼마든지 조카로 받아줄게.”
“아하하.”
인간은 허용해도 같은 정령왕은 안 된다니. 이 시대의 정령계, 정말 괜찮은 건가. 아무래도 평생 이프리트를 삼촌으로 부르게 될 수는 없을 모양이다. 다시금 시선을 회피하니 그는 서운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피식 웃었다.
“아참, 아까 멋대로 들었는데 말이야. 육친에게서 가족의 정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 것 같은데.”
“아, 으응…….”
“인간이 지닌 인과의 그물은 매우 복잡해서, 저마다 각자의 사연을 지니고 있지. 그걸 함부로 판단하는 실례를 저지르진 않을게. 하지만 적어도 신전과 관계있다는 형제만큼은 도련님을 위하긴 했을 거야.”
“어?”
“전에 도련님한테 축복이 걸려 있다고 했잖아. 위하는 마음이 없다면 절대 축복을 내릴 수 없거든. 이 말이 도련님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면 좋겠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식으로 핑계를 댄 적이 있었지. 가만히 바라보니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웃고 있는 얼굴 위로 그와 같은 색의 머리칼을 지닌 또 다른 존재의 모습이 겹쳐졌다.
“왜?”
“……아냐, 아무것도. 그 말이 맞아. 아마 지금까지 내가 잘 지낸 것도 그 축복 덕분인 것 같아.”
비록 실제 상황과는 다르고, 그가 기대한 방향 또한 아니겠지만 위안이 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고마워, 이프리트.”
이 말이 미래의 이프리트에게도 전해졌으면 좋겠다. 불은 역시 따뜻해서, 추워졌다 싶어도 온기가 스미는 건 그 덕분인 것 같다고. 그래서 나는 또 앞으로 걸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