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5화
“엘.”
못 보던 광경이 눈에 들어온 건 그다음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아인 이드리스가 서 있었다. 어색하게 굳어져 있는 그는 의식이 없는 누군가를 부축하고 있는 채였다. 정신을 다잡고 급히 다가가니 그가 살피기 편하도록 상대를 눕혔다.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낯익은 이목구비가 보였다. 고문이라도 당했는지 얼굴에 상처가 가득했지만 다비안이 분명했다.
“이 사람이 맞습니까?”
“맞아요. 어떻게 된 거예요?”
“맞다니 다행입니다. 찾아서 데리고 나오는 중에 그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미네르바를 불렀다는 소리구나.
당황스럽기는 여전했지만 대충 어떻게 돌아간 상황인지는 알겠다. 일단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그의 얼굴이었다. 들어갈 땐 복면을 쓰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였다.
“정체를 들키진 않았어요?”
“아, 괜찮습니다. 그땐 복면을 쓰고 있었습니다. 미네르바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요.”
하긴 그랬다면 소란이 이 정도가 아니었겠지.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잡힐 뻔해서 그런지 찾던 사람을 무사히 데리고 나왔는데도 아인 이드리스는 그다지 얼굴이 밝지 않았다. 조금 분한 표정 같기도 했다.
어찌 됐든 결과가 좋으니 된 건가. 늘어져 있는 다비안을 바라보다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 순간만은 그가 미네르바의 계약자인 게 다행이다 싶었다. 은신의 정령왕이 나섰으니 이제 들키거나 잡힐 염려는 전혀 없는 셈이었다. 태연하게 병사들 눈앞을 걸어서 빠져나가도 아무도 그걸 알아보지 못할 테니까.
“죄수 하나가 사라졌다!”
“죄수가 탈출했다!”
이런 중에도 소음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병사들이 비추는 전등 빛이 온 사방을 환히 밝혀나갔다. 때마침 분주히 달리던 병사 하나가 우리가 있는 쪽을 비췄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금방 다른 쪽으로 흩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쓰게 웃었다.
“이만 돌아가죠.”
* * *
구출한 다비안은 기다리고 있던 라미아스가 인계해갔다. 상황이 수습될 때까지 안전한 장소에 숨겨두고 보호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 뒤에는 바로 헤어졌기 때문에 아인 이드리스와 얽히는 것도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너무 쉽게 여긴 판단이었다.
며칠 후 길드 사무실에 헌터 협회와 황실에서 보낸 공문 하나가 도착했다. 최근 마수의 잦은 출몰 때문에 제도 방위 균열 대책 본부가 개설되었으며, 헌터로 구성된 전담 특별부대를 편성한다는 내용이었다. 특별부대에 선별된 헌터는 소속 길드가 어디든 상관없이 무조건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는데, 그 명단에 나와 아인 이드리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누구의 작품인지는 너무도 뻔했다. 크리스가 건네준 공문 하단에 낯익은 이름이 아주 보란 듯이 박혀 있었으니까.
“본부장이 세피온 공작이에요?”
“어, 그렇다더라. 그가 직접 발의하고 편성한 거래.”
하하, 이 망할 드래곤을 정말 어떻게 해야 하지?
이쯤 되면 날 골탕 먹이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닌가 싶다. 혈압이 올라 절로 주먹이 꽉 쥐어졌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대만 때렸으면 좋겠다.
“이거 거부하면 어떻게 돼요?”
“감옥에 가거나 추방이지.”
크리스가 뭘 당연한 걸 묻냐는 얼굴로 답했다. 제국의 모든 거주민은 세금을 내야 할 의무와 부역의 의무를 진다. 갑자기 편성된 군대에 차출돼도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전제정치에선 위에서 하라면 해야겠지만.
“길드 마스터만 제외하고 마키나급 이상 헌터는 거의 다 포함됐어. 요즘 워낙 균열이 잦긴 했잖냐. 치안대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전담반을 구성할 만도 하지.”
“……진짜 좋은 핑계이긴 하네요.”
“어? 뭐라고?”
“앞으로 피곤해지겠다고요.”
크리스의 얼굴에 안쓰럽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말이 좋아 특별조지 상시 대기조나 다름없으니 한동안 여유로운 생활은 물 건너간 셈이었다. 다른 곳에 정신 팔 겨를이 없는 최적의 환경이긴 했다.
“내일 4시량 첫 조각에 소집이니 늦지 않게 가.”
“하아, 알겠어요. 아참, 다비안한테서 연락 온 건 있어요?”
“아니, 감감무소식이야. 원래 시시콜콜하게 연락하는 녀석은 아니긴 한데 아무런 기별도 없으니 걱정이네. 설마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괜찮을 거예요. 이제 막 복귀했으니 아직 여러 가지로 바쁘겠죠.”
걱정할까 봐 크리스에겐 일부러 다비안이 처한 상황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간 따로 연락받은 건 없었으니 별다른 일은 없을 터였다. “역시 그렇겠지?” 크리스도 걱정을 털어내며 웃었다.
다음날 찾아간 소집 장소는 한 군영 건물이었다. 원래 치안대가 쓰는 연무장 중 하나인데 특별부대를 운영하는 동안 임시로 쓰게 된 거라고 했다. 짙은 잿빛으로 이뤄진 우중충한 색감이 앞으로 이어질 내 앞날을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엘.”
막 문턱을 건너려는데 뒤에서 부르는 음성이 들렸다.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은 아인 이드리스였다. 그는 함께 출발한 듯한 진혼 길드의 동료들을 대동한 채였다. 고작 한 명만 차출된 우리 길드와는 다르게 진혼은 대형 길드 아니랄까 봐 뽑힌 인원도 많았다.
“안녕하세요, 아인. 우리 자주 보네요.”
웃으며 인사하니 긴장한 듯하던 그가 맑게 웃었다.
“역시 엘도 차출되었군요. 갑자기 이런 부대가 편성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가볍게 악수를 마친 후에 나와 그는 잡담을 나누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문 앞에서 신분 확인을 하고 통행증을 발급받고 나니 연무장으로 가라는 안내 말이 이어졌다. 그곳엔 먼저 도착한 사람들로 이미 어수선한 상태였다. 질서 없이 아무렇게나 흩어진 분위기였기에 대충 아무 곳에나 자리를 잡으면 될 것 같았다.
“참, 여기에 아인 이드리스도 온다며?”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선명해졌다. 아인 이드리스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 정령왕의 계약자 말이야? 진짜 그 사람도 온대?”
“마키아 급 이상 헌터는 다 차출이잖아. 아무리 정령왕의 계약자라도 예외는 없겠지. 세피온 공작님은 그런 거 일절 안 봐주기로 유명한 분이니.”
“하긴, 그렇지. 그런 유명 인사랑 같이 일한다니 뭔가 좀 신기하네.”
“나 전에 멀리서 본 적 있는데 바람의 정령 소환하는 거 되게 멋있더라.”
“이참에 친분 좀 다질 수 있으려나?”
여기까진 그럭저럭 무난한 대화였다. 자신이 거론되는 것이 민망한지 아인 이드리스는 얼굴이 조금 상기된 채였다. 그런데 화제가 돌연 생각지 못한 곳으로 옮겨졌다.
“그러고 보니 정령사라면 또 있잖아. 여명 길드의 정령사.”
다시 걸음이 멈췄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말로 끝나면 좋을 텐데 이번에도 사람들의 관심이 바로 몰려들었다. 게다가 더 곤란한 방향이었다.
“아, 누군지 알아. 이번에 난리였던 그 물의 정령사 말이지? 아인 이드리스가 못 잡은 마물을 그 정령사는 한 방에 잡았다며? 그럼 아인 이드리스보다 더 강한 건가?”
“멍청아, 그럴 리가 있냐? 아인 이드리스는 정령왕의 계약자잖아. 그땐 그냥 방심한 거겠지.”
“아니, 꼭 그렇게만 볼 순 없을걸? 나도 그때 상황 대충 알아봤거든. 아인 이드리스는 속수무책으로 버거워하기만 했는데 여명의 정령사는 진짜 가볍게 잡았다고 하더라고.”
“그 정령사는 검술도 하잖아. 아인 이드리스는 어지간하면 미네르바를 부르지도 않던데, 그럼 현실적으로는 여명의 정령사 쪽이 더 강한 거 아닌가?”
“아니, 그래도 내 생각에는…….”
가볍게 시작한 대화가 어느새 본격적인 토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차피 둘 다 정령사인데 왜 중요하지도 않은 걸 가지고 경쟁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나 혼자라면 모른 척하면 그만인데 하필 당사자랑 같이 듣고 있으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인 이드리스 역시 어색한 얼굴로 날 돌아보았다.
“음, 들어가죠.”
“아하하, 네.”
멋대로 떠드는 건 다른 사람들인데 왜 내가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다행히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고 나니 사람들이 하나둘씩 입을 다물었다. “진혼이다.” “아인 이드리스야.” 몇 마디 말과 함께 소음이 잦아들면서 주위가 빠르게 고요해졌다. 막상 본인 앞에서까지 떠들 염치는 없는 듯했다. 그들을 한번 스치듯 돌아본 아인 이드리스가 내게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
“엘, 아직 시간이 있는 것 같은데, 그동안 저희와 함께 계시겠습니까?”
“아뇨, 전 혼자가 더 편해서요.”
습관적으로 거절부터 하고 낭패감을 삼켰다. 라미아스가 이 망할 작전을 펼치는 건 진혼 길드와 아인 이드리스의 사이를 떨어트리기 위해서다. 진혼을 방해하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그와 친분을 다져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마음이 따라주질 않았다.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죠.”
아쉬운 얼굴을 하면서도 아인 이드리스는 순순히 물러섰다. 진혼과 우리 길드의 사이가 좋지 않다 보니 강권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와 적당히 거리가 벌어지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사람들의 관심도 아인 이드리스 쪽에만 쏠려 있어서, 홀로 떨어진 나에게까지 시선을 두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관심을 보여도 누군지 궁금해하는 정도라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자 곧 사그라졌다. 습관적으로 쓴 후드가 쓸데없이 이목이 모이는 걸 일차적으로 가려준 덕분도 있긴 했다.
“모두 정렬하시오.”
곧 제복을 입은 기사가 나타나 외치면서 분위기가 정리되기 시작했다. 엉거주춤 대형에 맞춰 서던 사람들이 무언가를 발견하곤 술렁거렸다. 안쪽에서 한 남자가 기사들을 대동한 채 걸어 나오고 있었다. 세피온 공작으로 분한 라미아스였다.
“헉, 세피온 공작이다.”
“정말 세피온 공작이야.”
제국을 호령하는 대귀족의 등장에 장내의 공기가 완전히 경직됐다. 누가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다들 기합이 단단히 들어간 얼굴로 자세를 똑바로 하기 바빴다.
그 뒤로는 형식적인 시간이 이어졌다. 행렬이 완전히 정비되면서 본격적인 창단식이 시작됐다. 단상에 오른 세피온 공작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창단 취지를 밝히며 분위기를 달궜다. 그밖에 자질구레한 설명은 특별부대 대장을 맡은 이의 몫이었다.
“여러분은 앞으로 조를 나누어 3교대로 직무를 맡을 예정이다. 이 특별부대는 균열의 원인을 밝혀내어 제도가 안정될 때까지 유지된다. 여러분의 어깨에 시민의 안전이 달려 있다. 수많은 생명을 책임지고 있다는 각별한 사명감을 가지시길 바란다.”
말이야 번듯하지, 그냥 고급 인력을 마음껏 부려먹겠다는 소리였다. 자부심으로 눈을 반짝이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흐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3교대면 길드 활동을 아예 단념하라는 소리인데 운영 기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니 암담할 만도 했다. 황실에서 급여를 준다 해도 몬스터를 사냥해서 얻는 이득에 비할 리가 없으니까.
“그럼 이제 편성된 조를 발표하겠다. 게시판에 붙일 테니 명단을 보고 본인 소속을 확인하도록.”
지시를 받은 병사들이 거대한 벽보를 내걸었다. 제도의 모든 헌터를 대상으로 한 소집이었지만 마키나 이상의 등급을 지닌 헌터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다 합쳐도 백 명을 조금 넘기는 수준이다 보니 한 조당 인원은 삼사십 명 정도. 그 안에서도 다시 조를 나누어 순찰 구역을 분담하는 구조라 최종적으로는 대여섯 명씩 묶어져 있었다.
순서대로 앞으로 나가 내용물을 확인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들 제각각이었다. 떠드는 소리를 들어보니 소속 길드와 상관없이 묶은 것 같았다. 아인 이드리스와 진혼 길드원이 전부 다른 조가 된 건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곧 내 차례가 돌아왔지만 같은 이유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왠지 보지 않아도 결과를 뻔히 알 것 같았다. 용케도 날 발견한 라미아스가 의미심장하게 한쪽 눈을 찡긋하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예상은 어김없이 맞아떨어졌다.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벽보를 확인한 끝에 첫 번째 조 명단 안에서 내 이름을 발견했다. 바로 근처에 박혀 있는 낯익은 이름과 함께.
아인 이드리스
엘
“……죽일까.”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소리를 들었는지 바로 옆에 있던 사람들이 흠칫하며 돌아보았다.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거리를 벌리는 이들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주었다. 세상 사는 게 참 쉽지가 않았다.
* * *
콰직, 우람한 앞발이 벽돌이 깔린 바닥을 과자처럼 으깼다. 온 땅이 흔들리며 사방에 돌가루가 튀었다. 피하는 게 늦었는지 균형을 잃은 누군가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는 곧바로 일어나려 했지만 이미 마수의 붉은 시선에 갇힌 후였다. 목표를 고정한 마수가 입을 크게 벌리고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머리부터 보호한 채 비명을 지르던 남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가 나동그라져 있는 마수를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그 목에 박혀 있던 검을 다시 뽑아 들고 그를 향해 소리쳤다.
“물러나요!”
“헉! 네!”
상황 판단을 마친 남자가 뒤로 빠져나갔다. 검에 찔린 덕분에 잠시 주춤했던 마수가 다시 몸부림쳤다. 신호와 동시에 시큐엘이 재빠르게 마수의 몸을 타고 올랐다. 그 궤적을 따라 길게 늘어진 물줄기가 마수의 몸을 밧줄처럼 동여맸다.
“아인!”
대기하고 있던 아인이 두 팔을 벌렸다. 바닥에서부터 소용돌이치는 바람을 타고 그의 소매와 망토가 크게 펄럭거렸다.
“섬멸의 바람이여! 눈앞의 적을 징벌하라!”
이윽고 하늘에서부터 강림하듯 내려선 진이 들고 있던 바람의 창을 괴수를 향해 내리꽂았다. 쏴아아, 쏟아지는 바람이 온 사방을 단숨에 씻어내렸다.
키에엑!
부르르 몸을 떤 괴수가 애처롭게 울부짖었다. 곧 사그라질 단말마의 비명이었다. 정령을 돌려보낸 아인이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인도요.”
나 역시 가볍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