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490화 (490/608)

제490화

“왜 그 녀석을 움브라에 돌려보내지 않은 거야? 라케인 크리스가 직접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텐데.”

“떠보는 거예요,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어차피 지금 드래곤 라미아스로 묻는 거라면 제게도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

“그럼 말할게요. 믿을 수가 없어서예요.”

“엥?”

황당해하는 라미아스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내심 안심하며 본격적으로 지난 일들을 설명했다. 이번 일을 겪기 전에 다비안과 에펜 왕국에서 우연히 마주쳤다는 것. 그때 그가 전해달라 한 정보가 있었고, 그래서 크리스가 움브라와 접선을 시도했었다는 것. 그런데 그 현장에서 정체 모를 이들에게 습격을 당했다는 것까지. 남의 이야기처럼 흥미진진하게 듣던 라미아스는 상대가 접선 암호까지 알고 있었다는 말엔 얼굴을 찌푸렸다.

“움브라 내에 문제가 있는 것 같긴 하네. 게다가 마신의 교단도 관련된 것 같다 이거지…….”

“지금 생각해 보니 세공된 다비안이 암호를 알려준 건지도 모르겠어요.”

“아니, 그건 아닐걸. 이쪽 애들이 얼마나 독하게 교육받는데. 금제까지 걸려 있어서 세공돼도 기밀은 절대 발설하지 않게 되어 있어. 게다가 요원마다 접선 암호가 다 달라. 설령 다비안이 암호를 발설했다 해도 그걸 그대로 써먹었다면 라케인 크리스가 바로 눈치챘을 거야.”

“그렇다는 건…….”

“라케인 크리스가 접선한 게 움브라가 맞긴 하단 소리지.”

역시 다비안을 일단 보호하기로 한 건 잘한 결정이었던 모양이다. 안도하는 나와는 달리 라미아스는 꽤 머리가 복잡해진 듯했다. 고심하듯 가볍게 턱을 쓸던 그가 곧 나를 돌아보았다.

“이건 좀 더 알아봐야겠다. 다비안이랬나? 암호명이 아마 흑표범이었을 텐데. 일단 그 녀석은 그대로 데리고 있어. 조만간 그쪽으로 쓸 만한 연금술사를 보내줄게.”

“아, 고맙습니다.”

“고맙긴. 너희가 보호해 줘서 오히려 내가 더 고맙지. 이번 협동 작전으로 파견한 첩보원 중에 생존한 녀석이 그놈 하나뿐이거든. 덕분에 그쪽 상황을 드디어 파악할 수 있게 됐어.”

싱긋 웃는 라미아스의 얼굴은 무척 밝았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이라 조금 얼떨떨했다.

“유희인데 진지하시네요.”

“그야 당연하지. 난 이 삶도 또 다른 나라고 생각해. 연극 내용이 허구라고 해서 그 극에 오르는 배우가 건성으로 역할에 임하지는 않잖아?”

“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이해해준다니 기쁘네. 사실 이번 유희는 좀 더 특별하게 시작하기도 해서 더 애착이 있거든.”

그렇게 시작된 얘기는 조금 놀라웠다. 원래 테이론 이스 세피온은 다른 사람이었다. 어느 날 계곡 밑에서 죽어 있는 어린아이를 우연히 발견했는데 바로 그 아이의 이름이었다고 했다. 마침 할 일이 없어 심심했던 라미아스가 아이의 모습으로 변장해서 그 신분을 그대로 가져다 쓴 거였다. 별다른 이유가 있던 건 아니고, 그저 죽은 아이의 머리 색이 그와 비슷한 남색이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알고 보니까 애가 삶이 아주 기구했더라고. 유산을 독차지하려는 이복형제들이 사주해서 살해당한 거였더라니까? 그래서 이 이름으로 아주 작정하고 잘 살아주기로 했지. 성장하면서 얼굴은 차츰 내 걸로 바꿨고. 어때? 한편의 서사극 같지 않아?”

“어린애로 변해서 돌아다니다 범죄조직에 납치되었다는 얘기보다는 낫네요.”

“하하, 어느 드래곤이 그런 덜떨어진 짓을 하겠어.”

들었어, 라피스? 너더러 덜떨어졌대.

그 영혼의 보석 중에 라피스가 있었다면 이참에 놀릴 수 있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물론 돌이 된 상태니 소통할 수는 없겠지만.

“얘기가 잠시 딴 데로 샜네. 내가 이 삶에도 그만큼 진심이라는 소리였어. 그런 의미에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올까? 말하지 않은 건 그게 다야? 내가 알아야 할 건 또 없어?”

“어디까지 파악하고 계시는데요?”

“너희가 진혼과 아주 사이가 나쁘다는 건 알지. 진혼 쪽에서 협회에 압력을 넣어 너희가 서부의 의뢰를 맡도록 유도했던 것도 알아. 정황상 진혼에서는 노예 상단의 존재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고, 그쪽에 너희를 팔아넘기려 한 건 아닌가 추측하는 정도?”

“그 정도면 다 아시는 거네요. 추측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습격당했을 때 상단에서 이미 우리 정보를 갖고 있었어요.”

“하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지?”

그야 그렇긴 하다. 그래서 대놓고 고발하지 못한 거니까. 증언이라고 해봤자 릴에게서 들은 것밖에 없는데 이프리트를 피의자 신분으로 법정에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어차피 릴의 외모를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어서 그가 하는 증언은 큰 힘을 얻지도 못할 게 뻔했다. 할 말이 없어서 얼굴을 찌푸리니 라미아스가 피식 웃었다.

“관련자 한두 명 정도는 남겨두지 그랬어. 살아남은 게 아무것도 모르는 잔챙이들뿐이라 별다른 증언도 확보하지 못하잖아. 아직 어려서 그런지 일 처리가 미숙하네.”

“제가 한 게 아닌데요. 엘퀴네스가 그런 거지.”

“와, 역시 내 엘퀴네스! 일 처리 한번 시원시원하고 멋지기도 하지! 증언이 다 무슨 소용이야? 범죄자 놈들은 일단 다 죽어야지, 암 그렇고말고! 크으, 그 황홀한 광경을 내가 직접 봤어야 했는데!”

“…….”

한순간에 싹 돌변하는 태도가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게다가 아무래도 잘못 건드린 것 같다. 대답 대신 식은 차만 얌전히 홀짝이려니 라미아스가 탄식하는 소리가 구구절절 이어졌다.

“생각해 보면 상급 정령사가 수백 명을 한꺼번에 얼려 죽였다고 했을 때부터 느낌이 싸했는데 말이야. 그게 아무리 상급 정령사라도 절대 쉬운 일은 아니잖아? 그때 바로 깨달았어야 했는데! 아니, 사실 네가 다른 속성의 정령사였다면 알아차렸을 거거든? 하지만 설마 인간이 엘퀴네스를 소환할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는 바람에……어이, 내 말 듣고 있어?”

“네네. 듣고 있어요.”

“그래, 바로 너! 너 말이야! 대체 인간인 주제에 네가 어떻게 엘퀴네스를 소환한 거냐고! 왜 엘퀴네스가 네 옆을 지키는 데다가 널 위해 능력까지 써주는 거야! 넌 이런 차별적인 계약자 복지가 합당하다고 생각해? 물론 너야 혜택을 받는 쪽이니 당연히 그러시겠지!”

……대체 왜 이 드래곤은 엘퀴네스만 연관되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걸까. 다른 일에선 제법 멀쩡한 것 같은데 말이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그를 보자니 깊은 한숨만 흘러나왔다. 이러다 본격적으로 시비를 걸기 전에 어떻게든 화제를 돌려야 할 것 같았다.

“아까 말했던 비밀 기관들의 공동 작전이라는 것 말인데요. 에펜 왕국과 관련된 일이죠?”

다행히 그는 금방 세피온 공작으로 돌아왔다. 스스로 민망했는지 몇 번 헛기침을 한 후에야 멀쩡한 얼굴로 돌아온 그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몇 년 전부터 그쪽 움직임이 좀 수상했거든. 근데 눈치가 얼마나 빠른지 첩보원을 보내는 족족 다 잡아내더라고.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진혼 길드가 에펜 왕국의 후원을 받는다는 건 사실이에요?”

“그럴걸? 아, 혹시 그놈들도 관련된 것 같아서? 물론 우리도 주시는 하고 있어. 하지만 진혼 같은 대형 길드는 원래 여러 국가와 계약하는 편이야. 후원 자체는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냐. 에펜 왕국의 후원을 받는 길드가 진혼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음, 그럼 노예 상단에서 왕세자를 봤다면요?”

그 순간 라미아스의 웃는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그 상태로 잠시 굳어 있던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누굴 봤다고?”

“에펜 왕국의 왕세자요. 이름이 루시엘인지 뭔지 하던데.”

“네가 본 놈이 왕세자인 건 확실해?”

“은회색 머리에 금안을 지닌 젊은 남자가 정말 왕세자가 맞다면요. 일단 제 앞에선 왕세자라고 소개하던데요.”

바로 코앞에서 봤기 때문에 외모를 착각했을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라미아스의 얼굴에 서린 미소가 더 짙어졌다.

“……영혼의 보석 말고 더 필요한 건 없어?”

“네?”

“내가 얻는 이득에 비해 네가 수지타산이 안 맞는 것 같아서 그래. 그 왕세자 놈한테도 사람 붙여놨거든. 근데 최근까지 국내를 벗어났다는 보고를 받은 적은 없었어.”

“……아.”

그 말이 내포한 의미는 하나였다. 정보원들이 다 헛발질을 했든, 누군가가 정보에 혼선을 준 거든. 아이기스 안에서도 문제가 있다는 소리였다.

“와, 오랜만에 빡치는데? 이걸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족치지?”

활짝 웃는 얼굴과는 달리 라미아스의 눈동자는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단단히 혈압이 오른 그가 진정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분이나 좋아지라고 케이크 하나를 내밀었더니 사양하지 않고 받아먹은 그가 그제야 한결 나아진 얼굴로 투덜거렸다.

“젠장, 이렇게 되면 진혼도 연관된 게 확실하네. 아씨, 이러면 안 되는데. 아인 이드리스를 괜히 붙여줬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원래 걔를 내 후계자로 점찍었다고 했잖아. 곁에 두고 살피면서 나중에 진혼을 견제하고 주시하는 카드로도 쓸 겸, 걔가 진혼에 들어가도록 주선한 게 나거든.”

그의 뜬금없는 헌터 전향에 그런 뒷사정이 있었던 거구나. 복잡한 기분으로 신음하니 나만큼이나 복잡한 표정을 한 라미아스도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인류를 멸망시킬 애를 반역자랑 붙여줬네. 이거 완전 최강의 조합이잖아. 그걸 다시 어떻게 빼내지? 아주 미치고 환장하겠네. 어쩐지 왕세자 놈이 갑자기 움직인다 했더니.”

“움직이다뇨?”

“아, 그놈 곧 우리 제국으로 올 거야.”

“……네?”

“공식 방문이야. 그놈 여동생인 왕녀가 제국 아카데미로 유학 오거든. 걱정돼서 배웅할 겸, 얼마 후에 있을 황태자의 생일 연회에 참석할 겸 같이 온다나 봐. 학기가 시작되는 세 달 후까지 주야장천 머무를 예정이라더라.”

목격자인 내가 제도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지.

기가 막히니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불법 노예 상단 건은 아직 수사가 종결되지 않았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달아난 고위직들의 신상을 터느라 혈안이 되어 있다고 들었다. 이런 때에 당당한 공식 방문이라니. 거론되지 않아 안심한 건지, 문제가 되기 전에 막으려는 목적인지는 몰라도, 그자가 날 우습게 여긴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내가 어떻게 나오든 판세를 뒤집을 자신이 있는 거다. 그래도 설마 흑주술을 알아볼 거라는 건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좀 열 받네요?”

“조금? 난 엄청 열 받는다.”

“다비안이 가져왔던 기밀 내용, 궁금하지 않으세요?”

“물론 궁금하지. 근데 잃어버렸다며. 세공이 풀린 후에 그 녀석이 얼마나 자세히 기억하고 있느냐가 관건이긴 하네.”

분을 삭이지 못하던 라미아스가 한숨을 내쉬며 탄식했다. 세공을 치료할 순 있지만 아무래도 머리를 건드린 것이다 보니 후유증으로 기억에 혼선을 겪는 경우가 많은 모양이었다. 꿈보다 해몽이라지만 이런 걸 두고 선견지명이라 해도 좋은 거겠지. 나는 근심하는 라미아스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제가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고 말했던가요?”

* * *

숙소에 돌아왔을 땐 아무도 없었다. 이프리트도 매번 내 옆에 붙어 있을 순 없으니 다른 용건을 보러 간 듯했다. 온기 없이 캄캄한 실내를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전등을 밝히고 나이아스의 도움을 받아 가볍게 씻었다. 침대에 드러눕고 나니 잊고 있던 피로가 한 번에 몰려드는 것 같았다. 딱 잠들면 좋을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막상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지 않았다.

“일단 아인 이드리스를 진혼에서 빼내야겠어.”

귀가하기 직전 라미아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훗날 어떻게 되든 간에 현재의 아인 이드리스는 공고한 미네르바의 계약자였다. 다른 왕국에 넘어가면 여러모로 곤란해지는 존재라는 소리였다. 그러니 그에 대한 대처를 최우선으로 고심하는 것도 이해는 됐다. 이해가 되기는 하지만…….

“한동안 그놈이 딴생각하지 못하도록 이리저리 굴릴 거야. 너도 수고 좀 해라.”

……이왕이면 나는 거기서 빼준다면 참 좋았을 텐데.

물론 지금까지 얽힌 것만으로도 이미 발을 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영혼의 보석을 좀 더 수월히 찾기 위해서라도 라미아스가 하는 일을 도와야 하기도 했고. 그래도 이왕이면 외면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예지를 바꿀 거랬지? 네게도 도움이 될 거야.”

“……도움이 되기는.”

그 자리에서는 차마 뱉지 못한 대꾸가 이제야 흘러나왔다. 내가 그놈의 예지를 정말 바꿀 생각이었다면 물론 그렇겠지. 누가 부추기기도 전에 내가 먼저 발 벗고 나섰을 거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더니, 정말 쓸데없는 친절이었다.

‘대체 뭘 생각하는 건지.’

아직 정확한 계획은 듣지 못했지만 그게 뭐든 내게 좋은 일이 아닐 거라는 점만은 확실했다. 내일이 오는 게 무섭게 느껴졌다. 이대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3년 후면 좋겠다. 그럼 전부 다 끝나 있을 텐데. 그게 어떤 결말이든.

‘후회하지 마.’

조금 거칠어지려는 숨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천장을 응시하는 눈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후회하면 안 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이럴 때 좋은 방법은 이미 알고 있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에만 온전히 집중하는 거다. 그래,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라피스를 찾는 거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영혼의 보석을 봤었지. 설령 찾지 못하더라도 직접 실물을 보고 나면 뭔가 좀 달라질 줄 알았다. 희망을 볼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마음이 어땠더라?

‘……별로 좋진 않았어.’

솔직히 말하면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보석의 생김새가 좀 더 예뻤다면 괜찮았을까? 제멋대로일 만큼 자유롭고, 그래서 더 눈부셨던 녀석이었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강렬하고 화려해서 어디에 던져놔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런 녀석이 그런 볼품없는 돌조각이 되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모습으로 이 땅을 배회하는 라피스라니. 상상하는 것만으로 심장이 조여들었다.

왜 라피스였을까. 원래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그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는다. 설령 사실이라 해도 그만큼 짧은 삶이었던 건 아니었겠지. 그 녀석이 그때 목숨을 버렸던 건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할 삶에 미련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난 후회할 수 없다. 시간을 돌려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져도 또 같은 결정을 내릴 거다. 정말로 나 때문에 그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게 맞다고 해도. 잘난 척하면서 정작 실속은 하나도 얻지 못하는, 그 불쌍한 녀석을 구해올 건 나밖에 없으니까. 내가 해야 하는,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러니까…… 미안해, 아버지.”

미안해, 트로웰. 미안해, 미네르바.

날 너무 미워하지 말아줘. 가족한테 미움받는 건 익숙한데 이번엔 너무 많이 아플 것 같아. 모두가 날 놓는다고 해도 나는 놓을 수가 없어. 원하는 만큼 용서를 빌 테니까, 조금만 용서해주지 않을래? 이기적이어서 정말 미안해.

몸이 피곤하긴 했나 보다. 잠들 수 없을 것만 같았는데 침대의 온기가 스미니 눈앞이 점점 가물가물했다. 어느 순간 까무룩 잠들었던 것 같다. 꿈결의 착각이었을까. 누군가가 내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것 같았다. 따뜻하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꿈인 줄 알면서도 울고 싶어질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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