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9화
“내가 가진 건 이게 전부야.”
덜컥, 묵직한 소리와 함께 눈앞에 상자 하나가 놓였다. 짙은 먹색을 띤 단단한 재질, 초승달 모양으로 장식된 은빛의 고리, 표면엔 작은 다이아몬드들이 별처럼 박혀 있었다. 밤하늘을 연상시키는 석함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높아 보였다. 물론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가치겠지만.
뚜껑을 열자 안을 가득 채운 붉은 벨벳이 보였다. 그 위에 동전 크기만 한 돌조각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얼마 없다더니 한눈에 헤아린 숫자만 열 개가 가뿐히 넘었다. 황당해져서 바라보니 라미아스가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이게 다 실종된 영혼인 걸 알면서도 이렇게 많이 꿍쳐두다니. 아무것도 몰랐다면 그저 대단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그 실종된 영혼을 찾아 막막한 여행을 하는 처지다 보니 아무리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라도 이 순간엔 좀 얄밉게 보였다.
“왜, 왜 그렇게 보는데?”
“아무것도 아니에요.”
찝찝한 표정을 짓는 드래곤을 향해 빙긋 웃어주고 다시 함으로 시선을 돌렸다. 얄미운 건 얄미운 거고, 생각보다 많은 보석을 보게 된 건 기뻤다. 숫자가 많다면 그만큼 찾을 확률이 더 높아질 테니까.
실물을 보고 나니 왜 모두가 영혼의 보석을 찾기 힘들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걸 대체 어떻게 구분해서 찾아낸 건지 신기하게 여겨질 만큼,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집중하면 사념과 비슷한 기운이 엉겨있는 걸 느낄 수 있기는 한데 너무 희미해서 제대로 감지한 게 맞는지조차 긴가민가한 수준이었다. 그밖에 색에서나 모양에서나 특별한 점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그 무엇 하나도.
“어때? 찾는 게 있어?”
기대심을 담아 물어오는 말에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설렜던 기분은 이미 완전히 식어버린 후였다. 나를 이곳으로 보내면서 엘뤼엔은 내가 한눈에 라피스를 알아볼 거라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보석들은 아무리 봐도 그저 평범한 돌멩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몰라 하나하나 들고 유심히 살펴봐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엔 없는 것 같아요.”
품고 있던 희망 하나가 허무하게 사그라졌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었다.
쌓아 올리는 건 어려워도 무너지기는 쉽다고 하던가.
지난 일 이후로 트로웰은 다시 숙소에 돌아오지 않았다. 엘뤼엔 역시 기분이 단단히 상한 듯 한동안 정령계로 가 있기로 했다. 달리 할 일이 없어 길드에 연락해 봤지만 여전히 복귀할 만한 때가 아니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헌터 일도, 라피스를 찾는 것도, 모두와의 관계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라미아스가 나를 자신의 레어로 초대한 건 그때쯤이었다.
“영혼의 보석을 보여줄게.”
양자 제안이 무산되면서 당장 대가로 삼을 만한 것을 떠올리지 못한 상황이었다. 날 미심쩍어 한 만큼 한없이 미룰 줄 알았는데 라미아스 쪽에서 먼저 연락을 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아마도 자신이 소유한 것 중에 내가 찾는 게 있을지 호기심이 든 모양이었다. 대신 거래 방식은 나중에 정하겠다는 조건이 붙었으나 나로선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멀쩡한 제국의 저택을 놔두고 왜 굳이 레어에서 만나야 하나 싶긴 했지만 보안상의 이유라니 이해는 됐다. 공작저엔 잔소리 많은 부관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어서 편히 다닐 수가 없다는 모양이었다.
물 속성인 블루 드래곤은 주로 깊은 바닷속에 둥지를 튼다. 그건 라미아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장소만 바닷속일 뿐 내부엔 물이 없는 구조였고, 가는 것 자체도 직접 공간이동으로 데려가 줘서 곤란한 일은 없었다. 다만 이프리트는 바다 자체가 질색이라는 이유로 동행하지 않기로 했다. 덕분에 어쩌다 보니 라미아스와 단둘이서만 만나는 일정이 됐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그 결과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네가 찾는 건 없다고?”
“네, 없네요.”
무려 열 개가 넘는 영혼의 보석이 눈앞에 있는데, 그중에 라피스는 없었다. 어쩐지 일이 너무 잘 풀린다 싶더니 마지막에 꼬일 거라 그랬던 건가 보다. 내심 이럴 줄 알았던 건지, 아니면 너무 기대하지 말자고 미리 각오해서 그런 건지. 까마득한 실망이 밀어닥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덤덤했다. 오히려 나보다 라미아스가 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이중에 없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너 정말 제대로 본 거 맞아?”
“네, 없는 거 맞아요.”
“다시 한번 차근차근 제대로 봐봐! 너 이런 기회는 다시 없다? 나중엔 보여달라고 해도 소용없는 거 알지? 이만한 영혼의 보석을 보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 자랑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 영혼의 보석을 나만큼 많이 갖고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을걸?”
“정말 자랑이 아니시네요.”
한심한 기분으로 응시하니 그가 요란하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이윽고 석함의 뚜껑이 빠르게 닫히더니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라미아스가 자신의 아공간에 집어넣은 듯했다. 부리나케 감추는 걸 보니 내 눈빛에서 뭔가 불길한 기운을 느낀 모양이었다.
“너 설마 신계에 신고할 거 아니지?”
“안 해요.”
“정말이지? 추적 들어오기만 해봐. 드래곤의 복수가 뭔지 온몸으로 깨닫게 될 거야.”
“안 한다니까요.”
물론 지금은 말이다.
당장은 후환이 있을 테니 안 되고, 돌아가기 직전에 신고해야지. 내가 여기서 한 일들은 다 지워질 테니 밀고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낼 방법도 없을 거고, 답답해서 죽을 거다. 분통이 터져서 가슴을 칠 그를 상상하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돌아가서도 드래곤들을 전부 탈탈 털어야지. 앞으로 이 땅에선 영혼의 보석은 감히 건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해주고 말 테다.
조용히 의욕을 불태우고 있자니 의심스러운 시선을 거두지 못하던 라미아스가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곧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킨 그가 은쟁반 하나를 들고 와 내밀었다. 안에는 차를 비롯한 과자와 케이크가 종류별로 담겨 있었다.
“먹어.”
“아, 감사합니다.”
……그래도 그렇게 나쁜 드래곤인 것만은 아닌가. 일단 고맙게 받아들이고 가장 앞에 있는 과자부터 입에 넣었다. 단 걸 먹으니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덕분에 내가 평소보다 꽤 가라앉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나름대로 상심하긴 했었나 보다.
“드래곤을 전부 만나볼 예정이었다며? 그럼 이제 여길 떠나는 거야?”
“음, 아직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다니?”
“아인 이드리스가 이곳에 살고 있으니까요.”
이미 대강의 사정을 알고 있다 보니 설명은 그 한마디로도 충분했다. 알 만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라미아스가 복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난 솔직히 네가 엘퀴네스 계약자인 건 여전히 마음에 안 들거든? 차라리 모자란 놈이면 우습게 여기기나 할 텐데, 내가 봐도 호감형인 데다가 흠잡을 군데가 없어서 더 짜증 나.”
“아, 네…….”
“근데 사감을 제하고 보면 안됐다고 생각해. 한 시대에 정령왕의 계약자가 둘이나 나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데 나머지 한 명이 그런 놈일 건 뭐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으면 차라리 편하기라도 하지, 넌 그냥 같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남이 싼 똥을 다 떠맡게 된 거잖아.”
“딱히 그런 건…….”
“아니긴 뭐가 아니야? 하필 심보도 제일 고약한 트로웰과 얽히다니. 이건 뭐 불쌍해서 마음 놓고 미워할 수가 있나.”
한숨을 내쉰 그는 진심으로 나를 안쓰러워하는 듯했다. 동정하는 시선이 딱히 싫지는 않았다. 미움받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낫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정정해야 했다.
“트로웰 착한데요. 심보 안 고약해요.”
“3년 후에 인류를 멸망시킨다는 정령왕이 착하다고?”
“……화나면 이성을 좀 잃을 수도 있죠.”
좋아하는 사람을 상처입힌 자가 있다면 누구라도 원수로 여기게 될 거다. 다만 그런 마음을 품은 이가 하필 정령왕이다 보니 복수의 스케일이 너무 커진 것뿐이지.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입을 다문 라미아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보고 부정적이라더니, 넌 되게 세상을 긍정적으로 사는구나? 내 살다 살다 트로웰을 두둔하는 애는 또 처음이네. 예지를 바꾸지 못하면 널 가장 먼저 죽인다고 했다며. 그런데도 걜 위하는 말이 나와?”
“그건 제가 도발해서 그래요. 믿어도 되는 인간이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인다고 했거든요.”
“허, 그 용기가 가상한 건 둘째치고…… 보통은 그런 말을 협박으로 돌려주지도 않거든?”
“지금 한창 예민한 시기잖아요. 어쩔 수 없죠.”
“……거참, 이런 애라 정령왕들이 붙어 있는 건가.”
황당해하며 중얼거리던 라미아스는 아까 전보다 더 복잡한 표정이었다. 혼자서 뭔가 생각하는 듯하던 그가 곧 고개를 들고 나를 응시했다.
“너 헌터라고 했지? 길드 이름이 여명이라고 했던가? 지난번 서부 제레미 백작령에서 일어난 실종 사건을 해결한 길드가 너희 길드였던 것 같은데.”
“네, 맞아요.”
“흠, 좋아. 그럼 우리 이렇게 할까? 내가 다른 드래곤들을 족쳐……아니, 얘기를 좀 해봐서 영혼의 보석을 전부 찾아봐 줄게.”
“헉, 정말요?”
“그래. 그편이 네가 일일이 드래곤들을 다 찾아다니는 것보다 백배는 더 빠를 거야. 넌 대신 내 일을 좀 도와줘. 진짜 내 쪽 말고, 유희 쪽 일을 말하는 거야.”
“후계자를 찾는 거요?”
“그것도 그렇고. 그 외에도 이것저것.”
느긋한 태도를 봐선 즉흥적으로 준비한 제안은 아닌 것 같았다. 아마도 영혼의 보석과 거래하려고 한 조건인 모양이었다. 헌터를 언급한 걸 봐선 길드가 필요한 일인가? 세피온 공작가가 우리 길드와 전속 계약을 해준다면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굳이 영혼의 보석을 찾아준다는 말이 없더라도 흔쾌히 응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질문이 이어졌다.
“너희가 불법 노예시장을 적발했을 때 말이야. 혹시 그때 조사관한테 말하지 않은 거 없어? 예를 들어 관련자를 빼돌렸다든지, 거기서 목격한 인물의 정보를 일부러 누락했다든지.”
……아니 어떻게 딱 저지른 짓만 골라서 짚지? 당황해서 고개를 드니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씩 웃었다.
“뭔가 있구만?”
“음, 무슨 말씀이신지.”
이미 감을 잡았다는 표정을 지은 그에게 모르는 척 웃어 보이는 건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라미아스는 오히려 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태연한 척하려니 얼굴 근육이 아플 지경이었다.
“아직 도와드린다고 말하진 않은 것 같은데요.”
“그래서 안 할 거야?”
“…….”
“이 대륙에 드래곤이 전부 몇인 줄은 알아? 그중에서 영혼의 보석을 가진 애들은 몇인 것 같고? 내가 아니면 온 대륙을 다 돌아다녀야 할 텐데? 늙어 죽기 전에 다 끝낼 수나 있을까? 정말 괜찮겠어?”
당연히 괜찮지 않았다. 조용히 입을 다무는 걸 항복의 표시로 받아들였는지 라미아스의 기세가 더 의기양양해졌다. 이어지는 말엔 이번에도 몸이 움찔했다.
“움브라가 뭔지 알아?”
“……움브라요?”
“너 제국 태생 아니지? 이 제국엔 비밀 기관이 두 개 있어. 하나는 그림자 병기라고 불리는 ‘움브라’. 범죄 수사는 물론 암살과 정보 수집까지, 황제와 황실을 위해 잡다한 것들은 전부 다 하는 곳이지.”
대충은 알고 있다. 크리스가 바로 그 움브라 출신이라고 했으니까. 심지어 지금 그의 집에 있는 다비안은 현역이었다. 물론 당장 라미아스의 의도를 알 수 없는 만큼 대놓고 사정을 아는 척을 할 순 없었다. 조심스럽게 경계하니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정보국인 ‘아이기스’. 여긴 말 그대로 정보를 다루는 첩보기관이야. 제국 내부는 물론 국가 단위로 모든 정보를 다 취급한다고 보면 돼. 둘 다 황제 직속 산하 기관인데, 별로 사이는 안 좋아. 뭐, 필요할 때 협력이야 하지만.”
“네에. 그런데요?”
“내가 그중에서 아이기스의 국장이야.”
“……!”
이건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는지 라미아스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빙고’라고 외치는 듯한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몇 년 전에 우리와 움브라가 협동 작전을 펼친 게 있어. 그런데 그 임무를 맡은 요원 하나가 얼마 전에 행방이 묘연해졌거든. 발 빠르게 추적했는데 마침 딱 그 노예시장에서 행적이 끊겼더라고.”
다비안 얘기다.
목이 타는 기분에 차를 마시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찻잔에 닿기도 전에 그 앞을 먼저 덮는 손이 있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굳은 채 고개를 들으니 눈이 마주친 라미아스가 우아하게 웃었다.
“아는지 모르겠는데, 너희 길드 마스터가 움브라 출신이더라.”
“아, 그게…….”
“어이쿠, 이미 아는 모양이네. 그럼 그냥 조언이나 하나 해줄게. 제국 요원 납치 구금은 최소 종신형이야. 방조에도 예외는 없어.”
“……구금이 아니라 보호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까지 왔으면 변명하는 게 의미가 없었다. 한숨과 함께 대답하니 그가 그제야 찻잔을 덮고 있던 손을 치웠다. 그래 봤자 이미 마시고 싶은 생각은 완전히 사라진 후였지만.
아니 왜 일이 이렇게 얽히지? 복잡한 기분으로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으려니 라미아스가 뭐든 설명해보라는 듯이 턱짓했다. 어차피 지금은 세피온 공작인 것도 아니면서 심문하는 분위기였다. “아, 편하게 말해도 돼. 난 지금 라미아스니까.” 그러면서도 눈치 빠르게 덧붙이는 것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신뢰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그 현장에서 발견한 거 맞고, 크리스의 친구라서 데려온 것뿐이에요. 지금 그 사람이 온전한 상태가 아니거든요. 세공인지 뭔지를 당했어요.”
“아아, 그럴 것 같더라니. 라케인 크리스가 요즘 뒷골목을 자주 서성거리는 이유가 연금술사를 찾으려는 거였구만?”
그것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구나. 이제 보니 연회 초대장을 보낸 게 단순히 나에 대한 흥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의 입장에선 오히려 이것저것 떠보려다가 내가 정령왕의 계약자인 덕분에 뒤통수를 맞은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상황이 유쾌해지는 건 아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