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8화
사태가 진정한 건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빌고 빌고 또 빌어서 계약 파기를 간신히 막은 라미아스는 이후엔 몹시 기가 죽어서 얌전해졌다. 덕분에 그를 만나려고 한 목적을 밝히는 과정은 한결 수월했다. 모든 설명을 끝마쳤을 때, 그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영혼의 보석?”
“네, 그게 필요해요.”
“음, 혹시 영혼의 보석이라는 명칭이 붙은 장신구가 있나? 설마 네가 말하는 영혼의 보석이 라프네리아가 굳혀진 걸 말하는 건 아니지?”
“그거 맞을 거예요. 라미아스 님이 갖고 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그 말에 라미아스의 표정이 더 묘해졌다. 뭐라고 답할지 몰라 긴장하는데, 다음 순간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알겠다! 너 천사지?”
“……네?”
“어느 신의 천사야? 이거 탐문 수사 같은 거지? 역시 인간이 아닐 줄 알았어!”
아무래도 이 블루 드래곤의 몸엔 주체할 수 없는 푼수의 피가 흐르는 게 분명했다. 다행히 그는 바로 앞에 꽂힌 얼음 창에 금방 다시 얌전해졌다.
“……신계 쪽도 아니면 왜 영혼의 보석 같은 걸 찾는데? 그거 이름만 보석이지 실제로는 예쁘지도 않고, 그냥 흔히 굴러다니는 돌조각이랑 똑같아. 장식적인 가치 같은 건 하나도 없어.”
“그래서 찾는 거 아니에요.”
“그럼?”
“자세한 사정은 말할 수 없어요. 죄송해요.”
“흐응, 글쎄. 영혼의 보석이 흔한 게 아닌 건 알지? 설령 내가 갖고 있다 해도, 사정을 말할 수도 없는 사람한테 뭘 믿고 그걸 넘겨 줄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역시 요행으로 넘어가는 건 여기까지인 모양이다. 망설인 끝에 천천히 입을 벌렸다.
“……친구를 구하는 일에 필요해요.”
이 정도는 괜찮을 거다. 별거 아닌 대답인데도 긴장한 탓인지 목 안이 바짝 말랐다.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던 정령왕들이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여기까지 밝힌 건 처음인가. 다들 굳이 묻지 않아서 일부러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이유가 뜻밖이었나 보다. 라미아스도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그는 한층 경계심이 풀린 얼굴을 하면서도 떨떠름하게 물었다.
“친구를 구하다니? 친구가 어떤 문제에 처하면 영혼의 보석 같은 게 필요해?”
“저도 자세한 건 몰라요. 다만 꼭 필요한 재료라고 들었고, 그래서 구하는 거예요.”
“……혹시 시신을 살리려는 건 아니지?”
“아뇨, 그건 아니에요.”
“흠, 일단 충고해두겠는데, 영의 영역은 함부로 건드리는 거 아니야. 특히 라프네리아 같은 회수 대상 영혼은 잘못 건드리면 치러야 할 대가가 엄청나. 내세가 아주 고달파질걸? 무슨 계획이든 시작도 하지 않는 게 좋아.”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아?”
그때 트로웰의 단조로운 음성이 툭 내뱉듯이 끼어들었다.
“내가 뭐! 내가 그걸 갖고 흑주술에 쓴 것도 아니고! 에고 소드를 만들어서 세상에 별다른 영향을 준 것도 아니고! 그냥 수집 정도는 할 수 있지!”
발끈해서 소리치던 라미아스가 퍼뜩한 얼굴로 입술을 악물었다. 트로웰이 나를 향해 빙긋 웃었다.
“잘됐네. 갖고 있대.”
“아씨! 내가 이 단순한 수법에 넘어가다니!”
본의 아니게 수집했음을 인정한 가엾은 드래곤이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탄식했다. 그걸 지켜보는 정령왕들이 다들 동정할 가치도 없다는 표정이라 이 순간이 더 처절하게 느껴졌다. 그보다 정말 갖고 있었구나. 나도 모르게 바라보는 시선이 빛난 모양이다. 그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나도 몇 개 없어! 어떻게 모은 건데!”
“다 필요한 건 아니에요. 하나만 있으면 돼요. 게다가 아무거나 다 되는 것도 아니고 조건에 맞는 걸 찾아야 해서 그중에 없을 수도 있고요.”
“그, 그래?”
“네. 솔직히 말하면 없을 가능성이 더 커요. 그러니 일단 보여주시기라도 하면 안 될까요?”
“젠장! 만약 보여줬는데 네가 찾는 게 있으면? 그럼 넌 나한테 뭘 줄 건데?”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뭐든지요.”
“뭐든?”
“네, 시키는 건 전부 다 할게요.”
솔직히 다음 일을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일단 라피스만 찾으면 뭐든 어떻게든 되겠지 싶은 마음뿐이었으니까. 시벨리우스에게 들었던 과거 일들을 생각하면 아직 귀환할 시기는 아닌 것 같지만, 한동안 그를 돕게 된다 해도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다행히 라미아스에게도 꽤 솔깃한 제안이었던 모양이다. 내내 시큰둥하던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달라졌다. 무슨 엄청난 요구가 나올까 싶어서 내심 긴장하는데, 이어진 건 생각지 못한 제안이었다.
“그럼 너 내 후계자 할래?”
“후계자……요?”
“내 유희 신분도 슬슬 끝나갈 때가 되거든. 요즘 적당한 후계자를 물색 중이었어. 원래 아인 이드리스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같은 정령왕의 계약자라면 네가 더 낫지. 뭐, 덕분에 엘퀴네스를 자주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서 그런 건 아냐.”
“…….”
아무리 봐도 그 이유 같은데. 다들 같은 걸 느낀 건지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라미아스를 바라보았다. 이 와중에도 얼굴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는 그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어쨌든 이게 내가 제시하는 거래야. 어때? 차기 세피온 공작이 될 생각 없어?”
“당신의 양자가 되라는 말인가요?”
“그래. 영혼의 보석이 아무리 아까워도 양자에게라면 하나 정도쯤은 줄 수 있거든. 네가 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거지.”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건 나한테 좋기만 한 거래 아닌가? 이 제국에서 가장 부유하다고 알려진 공작 가문의 차기 가주라니. 내가 평범하게 이 시대를 사는 인간이었다면 받아들이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제안이었을 거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곳에서 말이 이어지는 게 더 빨랐다.
“기각.”
차갑게 떨어진 음성의 주인은 엘뤼엔이었다. 대답하려던 나도, 흐뭇한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던 라미아스도 떨떠름해져서 그를 돌아보았다.
“왜, 왜 엘퀴네스가 반대해?”
콰직,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얼음 창이 다시금 그의 발치에 내리꽂히는 소리였다. 라미아스를 똑바로 응시하는 눈동자에 새파란 한기가 일렁거렸다.
“기각.”
“…….”
주위가 고요해졌다. 마음만 먹으면 왕의 영역도 붕괴시킬 수 있는 정령왕이 작정하고 깽판을 놓는데 말릴 수 있는 존재가 있을 리 없었다. 슬쩍 눈길을 보내니 내게도 허튼 생각 하지 말라는 듯한 살벌한 시선이 돌아왔다. 라미아스랑 엮이는 게 그렇게까지 싫은 건가. 지금까지 상황들을 봐선 싫은 게 당연하긴 하지만.
하긴 후계자가 되면 거처부터 라미아스의 저택으로 옮겨야 한다. 내가 어디까지 하나 지켜볼 심사로 계약한 엘뤼엔 입장에선 자신의 통제를 빠져나간다고 여길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이 거래는 깨끗하게 접어야 할 모양이다. 마른침을 삼킨 라미아스 역시 단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알았어. 엘퀴네스가 반대한다면 어쩔 수 없지. 후계자 제안은 없던 거로 해. 내가 포기할게. 하지만 엘퀴네스, 이건 말해야겠어.”
“뭐지?”
“나도 독점해줘!”
“꺼져라.”
비장하게 외친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고 끝났다. 시무룩해진 얼굴로 돌아선 라미아스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불쌍한 모습이었지만 그를 동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에잉, 이게 제일 좋은 방법 같았는데.”
“말이 나온 김에 그 후계자 후보에서 아인 이드리스도 제외하는 게 나을걸.”
아쉬운 얼굴로 툴툴거리는 라미아스에게 말을 건넨 건 트로웰이었다. 라미아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엥? 왜?”
“그자는 3년 후엔 더는 미네르바의 계약자가 아니거든. 그래도 상관없다면 마음대로 하고.”
“엑!? 그게 정말이야? 당연히 상관있지! 어휴, 큰일 날 뻔했네. 아니지. 이미 큰일인가. 이렇게 되면 다시 처음부터 생각해야 하잖아. 아니, 근데 어쩌다가? 지금 미네르바랑 걔 사귀는 사이 아냐? 대체 계약을 파기할 일이 뭐가…… 설마 아인, 그 자식이 변심하는 거야?”
호들갑 떨던 라미아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물어보는 형식을 취하긴 했지만 애초에 대답을 듣는 게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정령왕이 먼저 배신하는 일은 없으니까.
“와! 미친 거 아냐? 걔 그렇게 안 봤는데 되게 끔찍한 놈이었네? 아니, 어떻게 미네르바를 두고 다른 마음을 가져? 다른 놈이 그래도 열 받을 판에 심지어 정령사라는 놈이! 그 녀석이 먼저 미네르바한테 연정을 품었던 거 아니었어? 그런데 그 결말이 변심이라고? 정말이지 인간이란 것들은!”
“인간의 문제라고 생각해?”
“솔직히 그렇지 않아? 걔넨 일관성이 없잖아. 너무 쉽게 타락하는 데다가 한번 탐욕을 품기 시작하면 정도가 없어. 너희가 인간 정령사에 특히 관심을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잖아? 그만큼 혼이 정결한 애가 드물고 귀하니까. 그런데 그런 정령사조차 배신한다면 볼 장 다 본 거 아냐?”
“모처럼 나와 의견이 맞네. 그래서 난 이만 인간의 문명을 끝낼까 해.”
“오, 그래! 그거 좋다! 그것참 화끈한 결정……뭐?”
열렬히 맞장구치던 라미아스가 곧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트로웰이 빙긋 웃었다.
“후계자를 정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을지도 모르겠네. 어차피 3년 후엔 전부 사라질 테니.”
“하하, 농담치고는 좀 살벌하지 않아?”
“내가 농담하는 거로 보여?”
“……아니.”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저은 후 라미아스는 연신 마른세수를 했다. 흥분해서 길길이 날뛰긴 했는데, 일단 머리가 식으니 반갑게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인간을 싫어하는 것과 멸망해서 사라지길 바라는 건 다르긴 하니까. 게다가 그 자신도 싫기만 했다면 인간들 세상을 유람하며 살지도 않았을 거다.
“다른 왕들도 다 같은 생각이야?”
“어차피 저 녀석은 반대해도 저지를걸?”
난처한 표정으로 웃던 이프리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 근데 아직 단정하지 마. 그렇게 안 될 수도 있으니까.”
“그건 또 뭔 소리야?”
“어쨌든 3년 후에 벌어지는 일이잖아. 트로웰이 저렇게 뿔난 건 미네르바가 인간에게 상처받기 때문이니, 발단만 일어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니겠어? 그래서 여기 있는 도련님이 상황을 바꿔보기로 했어. 그치?”
“아, 으응…….”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니 라미아스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트로웰 역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초조해하고 있는데 그의 목소리가 닿았다.
“너 왜 그래?”
“어, 어?”
“아까부터 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잖아. 당돌할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게 유일한 장점인 녀석이.”
“…….”
아, 역시 이상했던 건가. 평소와 똑같이 행동한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만큼 능숙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지금이라도 시선을 맞춰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는데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노골적인 어색함을 트로웰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미네르바를 만나고 나니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어?”
“그게…….”
“이상하네. 지금 미네르바는 가장 행복한 시기야. 불행한 얼굴도 아니고 행복한 얼굴을 봤는데 왜 의욕이 떨어졌지? 난 네가 신나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거든. 내가 네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한 거야?”
입을 벌렸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전부 거짓말이 될 테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을 수 있던 말들이 가시처럼 목에 걸려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재미없네.”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으니 그가 기대있던 벽에서 몸을 떼어냈다. 머리 위에 따가운 시선이 닿았다.
“어중간한 마음으로 임할 거면 그만둬. 나도 시간 낭비하고 싶진 않으니까.”
싸늘한 말을 끝으로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황급히 고개를 들었지만 더는 트로웰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대로 사라져 버린 듯했다.
“저거, 저거, 말 못되게 하는 거 봐라.”
쯧쯧 혀를 찬 이프리트가 내 표정을 살폈다.
“괜찮아, 도련님?”
“……미안.”
“뭘 도련님이 사과해. 저게 성격이 나쁜 건데. 눈앞에서 대놓고 멸망 운운하고 있는데 기죽을 수도 있고 새삼 겁먹을 수도 있지. 애초에 저 녀석은 애먼 애한테 무리한 일을 떠맡겨놓고 왜 심술까지 부리는 거래?”
“아, 아냐, 이프리트. 내가 잘못한 거야.”
“도련님이 잘못하긴? 누가 봐도 저 녀석이 혼자 제 성질 못 이겨서 화풀이한 거구만.”
고개를 저으며 옷자락을 바짝 움켜잡았다. 식은땀 때문에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차라리 매몰차면 괜찮을 것 같은데, 위로하는 이프리트의 말이 다정해서 더 가슴이 시렸다.
어떡하지, 이프리트? 난 네게 다정한 대우를 받을 가치가 없을지도 몰라. 내가 여기에 와도 되는 거였는지 의심이 들었어. 생각이 자꾸만 나쁜 쪽으로 흘러가. 내가 있던 시대가 정해진 결과라면 여기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상황이 변하지 않는 거겠지. 그러니 방관해도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변명해왔어. 어차피 일어날 일이 일어나는 것뿐이라고.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라면. 그 모든 일이 사실은 나로 인해 시작된 거라면. 내가 여기 오는 바람에 이런 일이 생긴 거면 난 어떡하지? 앞으로 무슨 얼굴로 모두를 봐야 하는 걸까.
“왜 그러지?”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나를 가만히 응시하는 물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여느 때처럼 잔잔한 눈빛이 약간의 의아함을 담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 혐오감과 경멸이 스미는 걸 상상했다.
“엘?”
강지훈.
“내 말 들리는 건가?”
우리 가족이 불행한 건 너 때문이야.
“……아버지.”
무심코 뱉은 말에 엘뤼엔이 멈칫하다 곧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건 날 부른 게 아니군.”
아.
어깨가 절로 움찔했다. 스스로 저지른 일을 믿을 수가 없어서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가라앉은 눈동자가 시리게 빛나며 나를 장악해갔다.
“너, 지금 감히 누구를 나와 겹쳐보는 거지?”
몸이 덜덜 떨렸다. 온몸을 타고 소름이 돋았다. 맙소사. 내가 정말 무슨 짓을 한 거지? 엘뤼엔을 보면서 말도 안 되는 사람을 떠올리다니. 절대 그와 겹쳐 봐서는 안 되는 사람을.
“미, 미안…….”
“그건 대답이 될 수 없다. 내가 물어본 건 그게 아닐 텐데?”
“미안해요. 미안해요.”
“제대로 대답해라. 내가 화내길 바라나?”
“미친놈아! 지금 뭘 하는 거야?”
다급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당황한 얼굴을 한 이프리트가 내 팔을 움켜잡고 있는 엘뤼엔의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
“관여하지 마라.”
“이걸 어쩌지, 그러지는 못하겠는데? 잊었어? 네가 날 얘 보부로 정했잖아.”
“죽고 싶나?”
“애 얼굴 하얗게 질린 거 안 보여? 척 봐도 상태가 나빠 보이는데 다그친다고 대답을 할 수 있겠냐? 일단 안정부터 시켜!”
엘뤼엔이 짜증 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곤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곧 피부를 간지럽히는 감각과 함께 차가운 기운이 머릿속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그제야 어지럽기만 하던 머릿속이 진정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지만.
“정말 미안해.”
이번엔 엘뤼엔도 이프리트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을 뿐.
“저기요, 여러분? 여기 나도 있거든? 나도 알아들을 수 있는 대화를 해주지 않을래?”
서러워하는 라미아스의 목소리만 공허하게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