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7화
“자, 잠깐 기다려. 내가 지금 되게 정신 나간, 아니,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쟤, 쟤가 엘퀴네스의…… 계약자라고? 계약할 가능성이 있는 유력 후보가 아니라 이미 계약자?”
“그래.”
허둥거리는 질문에 비해 돌아온 대답은 짧았지만, 그래서 더 강렬했다. 숨을 크게 들이켠 라미아스가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귀신이라도 본듯한 얼굴이었다.
“……언제 인간이 엘퀴네스를 소환했어?”
“네 생각보다는 오래됐지.”
“…….”
“넌 감히 내 계약자를 건드렸고.”
“……!”
“이제 상황 파악이 되나?”
콰직!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대한 얼음 창이 그의 가랑이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내리꽂힌 소리였다. 라미아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 잠깐만! 난 몰랐어! 그리고 나도 네 계약자……!”
뒤늦은 항변이 이어지려 했지만 그보다 그가 다시 바닥에 처박히는 게 더 빨랐다. 물론 제대로 발언했더라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버둥거리는 라미아스를 한 발로 지그시 밟고 선 엘뤼엔이 싸늘하게 웃었다.
“내 계약자는 라미아스지. 네가 아니라.”
“내, 내가 라미아스……!”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군, 세피온 공작.”
“으아아아!”
의도를 파악한 라미아스가 절망했다. 유희 중엔 철저히 유희 신분에 따른다는 룰이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
그 뒤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한때 카노스와 이프리트가 있었던 위치에 이번엔 라미아스가 있다는 차이만 존재할 뿐. 셋 다 나와 관련되었다는 게 엘뤼엔의 불운인지 내 불운인지 모르겠다.
그보다 지금 새벽인데 이 난리를 쳐도 되는 건가. 뒤늦게 미친 염려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새 주위에 물의 장벽이 세워져 있었다. 잡음 하나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미리 방어해 둔 거다. 아무래도 이런 철두철미한 점이 그를 형벌의 신으로 만든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련님, 괜찮아?”
무자비한 징벌의 현장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옆에서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곳엔 이프리트와 트로웰이 서 있었다.
“내가 쟤 언제 한번 사고 칠 줄 알았다. 엘퀴네스만 언급하면 눈부터 돌아가서는. 앗! 도련님 목에 멍들었잖아? 저 자식! 할 말이 있으면 나부터 찾아올 것이지, 왜 엄한 애를 괴롭히고 그래?”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아?”
다급히 나를 살피는 이프리트를 향해 트로웰이 한마디 던졌다. 그 말을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운 이프리트가 안주머니 속에서 웬 유리병을 꺼내곤 내용물을 부산스럽게 내 목에 발랐다. 쓰린 통증이 사라지는 걸 보니 회복제인 모양이었다.
“아…… 고마워.”
“어휴, 많이 놀랐지? 블루 일족 놈들이 좀 포악하고 무식해. 엘퀴네스 차례가 끝나면 나도 저거 손봐줄게.”
“아, 아냐. 그렇게까진 안 해도 돼. 근데 회복제를 왜 갖고 있어?”
“음? 비상용이지.”
“비상용이 왜 필요…….”
“나랑만 있을 때 네가 다칠 수도 있잖아. 난 치료 능력은 없으니까.”
잠시 숨이 막혔다. 멀거니 굳어 버린 내가 이상했는지 이프리트가 의아해하는 시선을 보내왔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던 것 같다. 멈칫한 이프리트의 표정이 빠르게 심각해졌다.
“엘? 아직 아파?”
“아니, 아니야. ……아프지 않아.”
“하지만 얼굴색이 나쁜데.”
“정말 괜찮아.”
“흠, 라미아스 놈 때문에 너무 놀라서 그런가? 일단 이거 진정 효과도 있으니까 마셔봐.”
“아니, 정말 괜찮은데…….”
거듭 사양하는데도 이프리트는 억지로 내 손에 회복제를 쥐여주었다. 단호한 표정만 봐도 다 마시기 전까진 절대 물러날 생각이 없는듯했다. 어쩔 수 없이 병을 들고 마시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트로웰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별다른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시선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삼킨 회복제는 지독하게 쓴 맛이었다.
“미안해.”
아낌없이 쏟아진 정령왕의 진노는 라미아스가 내게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맨바닥에 스스럼없이 무릎까지 꿇은 그는 처연한 자세로 참회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물기를 담은 음성, 얻어맞은 탓에 몰골은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누구라도 절로 안쓰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활활 불타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내가 잘못했다.”
아니, 전혀 미안한 얼굴이 아닌데요.
어쩔까 싶어서 엘뤼엔에게 시선을 보내니 눈치 빠른 그가 바로 뒤통수를 가격했다. “……내가 정말 잘못했어.” 그제야 라미아스의 눈에서 살기가 사라졌다. 적어도 다음에 두고 보자는 계획이 통하지 않을 거라는 것만은 확실히 인지한 모양이었다.
“젠장, 믿을 수가 없어. 인간이 엘퀴네스를 소환하다니. 그게 하필 내가 살아 숨 쉬는 이 시대에서 벌어지다니! 어떻게 이렇게 참혹한 일이 있을 수 있지?”
‘그 참혹한 일,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한 번 더 일어나는데.’
분통을 터트리는 그를 보며 차마 말할 수 없는 사실을 속으로 삼켰다. 훗날 그가 수면기에서 깨어나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거란 확신이 들었다. 역시 트로웰이 괜히 말린 게 아니었다.
“게다가 너희는 왜 또 여기에 있는데?”
그의 시선이 멀뚱히 서 있는 이프리트와 트로웰을 향했다.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는 이프리트와 달리 트로웰의 표정은 무미건조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아니! 그치만! 이건 좀 그렇잖아? 인간 하나에 정령왕이 셋이나 붙어 있다는 게 말이 돼? 설마 다 쟤랑 계약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 그건 제발 아니라고 해줘!”
“시끄러워. 아니니까 입 다물어.”
“정말? 정말 아니지?”
“애초에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인간이 여러 정령왕의 기운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나한텐 인간이 엘퀴네스를 소환한 거 자체가 이미 말이 안 되거든?”
그때쯤엔 이미 동이 트기 시작한 시각이었다. 곧 기상한 주민들이 활동할 시간이다 보니 우리는 일단 장소를 옮겨 가까운 숙소로 이동했다. “뭐야? 정령왕들이 이런 코딱지 같은 방에서 지내는 거야?” 방 안을 둘러본 라미아스가 지극히 라피스 과다운 감상을 내뱉은 건 그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당장 내 집으로 오라며(그 와중에 나를 버려두고 오라는 어필은 잊지 않았다) 호들갑 떠는 그를 향해 엘뤼엔의 서슬푸른 시선이 쏟아졌다.
“닥치고 처박혀 있어.”
“넵.”
그제야 산만하던 분위기가 조금 나아졌다. 요란한 태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듯한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하다가 일단 차라도 끓일까 싶어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손님을 들일 계획이 전혀 없던 공간이다 보니 내갈 만한 게 딱히 없었다.
얌전히 소파에 걸터앉은 라미아스는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문제는 치료해줄 생각이 조금도 없는 엘뤼엔 덕분에 그가 여전히 얻어맞은 흔적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는 거다. 드래곤은 자체 치유력이 좋으니 내버려 둬도 곧 아물긴 하겠지만 아직까진 퉁퉁 부은 채였다. 그런 얼굴로 히죽거리는 모습은 한눈에도 멀쩡해 보이지 않았다. 다른 이가 보기에도 이상하긴 했는지 이프리트가 황당해하며 물었다.
“뭐가 좋다고 실실거리고 있어? 드디어 미친 거야?”
“미안하지만 방해하지 말아 줄래? 본심이란 무의식중에 나온다는 걸 새삼 만끽하는 중이거든.”
“얼씨구?”
“아까 엘퀴네스가 한 말 들었어? 내 계약자는 라미아스래.”
“그게 뭐?”
“내 계약자래. 엘퀴네스가 날 내 계약자라고 해줬어.”
아, 그거였나.
당황해서 차를 쏟을 뻔한 걸 가까스로 수습했다. 감동하는 포인트가 너무 낮은 것 같은데, 그동안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프리트 역시 짠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근데 넌 세피온 공작이잖아.”
“아, 좀!”
발끈한 라미아스가 할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그의 모습이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원래도 젊은 얼굴이긴 했지만 한층 더 젊어지고 피부색도 더 짙어졌다. 반면에 머리카락 색은 좀 더 맑은 푸른색으로 변했다.
“자, 이제 완벽하게 라미아스지?”
저게 진짜 모습이구나.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걸 불만스럽게 응시하던 라미아스가 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손님 대접이라. 네가 이 공간의 주인이다 이거지? 나보다 우월하다는 걸 과시하고 싶다 이거지?”
“……용생을 참 부정적으로 사시네요.”
“지금 실컷 즐겨라. 어차피 인간은 백 년도 못 살아. 네가 아무리 승승장구해 봤자 고작 백 년이라는 거지! 결국 엘퀴네스 곁에 남는 건 나라고!”
“하아, 네, 좋으시겠어요.”
“알면 됐어. 그보다 너도 이만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네?”
“서로 다 밝혀진 처지에 언제까지 가짜 얼굴로 위장하고 있을 거야? 내게 호감을 사려는 목적이라면 오히려 역효과니까 이제 그만 본판을 드러내라고.”
무슨 소린가 싶어서 어리둥절해하고 있으려니 나만큼이나 어리둥절해하던 이프리트가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얜 이게 원래 모습인데?”
“엥?”
“하긴 오해할 만도 해. 우리 도련님이 좀 인간처럼 안 생기긴 했지. 나도 처음엔 놀랐으니까.”
“마, 말도 안 돼. 저게 진짜라고?”
황급히 몸을 일으킨 라미아스가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붙잡았다. 마구 더듬거리는 손길에 당황하려니 기겁한 이프리트가 그를 강제로 떼어냈다. 떠밀린 그는 황당한 얼굴로 굳어 있었다.
“헐, 진짜네?”
“그렇다고 했잖아.”
“이건 진짜 말도 안 돼. 란타샤의 메달을 갖고 있었잖아? 당연히 외형을 바꾼 건 줄…….”
“그건 인상을 흐리게 해주는 기능밖에 없어. 효과도 착용해야만 발동하고.”
“그게 정말이야?”
“넌 드래곤이면서 마법이랑 진짜도 구분 못 하면 어떡하냐.”
“아냐! 구분할 줄 알거든? 란타샤의 마법이라고 생각해서 예외로 본 거지!”
“하긴 란타샤의 위장 계열 마법이 예술이긴 하지.”
냉큼 고개를 끄덕이는 이프리트는 마치 자기 자랑을 들은 것처럼 흐뭇한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사나가 모습을 바꿨을 때도 거의 티가 안 나긴 했지. 라피스의 재능이 어머니 쪽에서 온 모양이다.
“어디 다치진 않았어, 도련님? 저 자식 남의 얼굴을 마음대로 만지고 말이야.”
“난 괜찮아.”
“어휴, 우리 도련님은 마음씨가 참 곱기도 하지. 그치만 쟨 좋게 대해줄 필요가 전혀 없어. 다음에 또 저러면 봐주지 말고 발로 걷어차 버려.”
신신당부하는 이프리트에게 알겠다는 뜻으로 웃어줬다. 그런 우리를 뚱한 얼굴로 바라본 라미아스가 불만스럽게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보다 이제 말해줘.”
“뭘 말이야?”
“지금 이 상황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쟤가 내 엘퀴네스와 계약한 건 그렇다 쳐! 그런데 왜 내 엘퀴네스가 쟤랑 같이 다니는 거야? 왜 릴이랑 로웰까지 여기에 있고?”
그로서는 충분히 궁금해할 만한 부분이었다. 비록 정령왕들이 반응한 건 다른 쪽이었지만.
“한 번만 더 내 이름 앞에 소유격을 붙이면 계약을 파기해주지.”
“너한테 내 애칭 허락한 기억 없는데.”
“내 이름 줄여서 부르지 마.”
냉정한 말들이 한마디씩 쏟아졌다. 잠시 입을 다문 라미아스가 울컥해서 소리쳤다.
“다 같은 엘퀴네스 계약자인데 이 차별은 대체 뭐야?”
“도련님은 인간이잖아. 시커먼 드래곤과는 차원이 다르게 귀엽지.”
“젠장, 정령들은 인간만 예뻐해!”
“억울하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든가. 근데 엘한테는 너도 약할 것 같은데?”
“내가 왜?”
“너 이렇게 생긴 외모 좋아하잖아.”
라미아스는 이번에도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부정해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침묵하니 오히려 불길했다. 아니, 잠깐. 그러고 보니 날 습격했을 때 취향의 얼굴이니 뭐니 했었던가? 떨떠름한 기분을 느끼고 있으려니 다음 순간 라미아스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생각을 정리한 듯한 표정이었다. 나도 모르게 한 발짝 그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그가 얼굴을 바짝 들이미는 게 더 빨랐다. 이어진 말은 너무 뜬금없어서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너 말이야. 머리랑 눈동자 푸른색으로 바꿀 생각 없어?”
“……네?”
“사실 연회에서 봤을 때부터 이 말을 하고 싶었어. 내가 달리 사심이 있는 건 아니고. 푸른색이 완전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래. 내가 보기엔 넌 인간으로 태어나야 할 게 아니야. 아무리 봐도 그 외모는 물의 정령으로 태어났어야…….”
아니, 이 드래곤, 감이 너무 좋은 거 아닌가?
등허리에 식은땀이 흘렀다. 다행히 동요를 내보이기 전에 이프리트가 끼어들어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사심이 없기는. 헛수작 부리지 마.”
“쳇.”
“그보다 너 지금 되게 위험한 발언 한 건 알아? 고유 외모를 갖는 건 정령왕뿐인데. 얘가 물의 정령으로 태어났어야 했으면 지금 엘퀴네스더러 소멸하라는 말이야?”
“……어?”
얼굴을 굳힌 라미아스가 황급히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그와 시선이 맞은 엘뤼엔이 피식 웃었다. 입꼬리는 올라갔으나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그렇군.”
“억? 어? 자, 잠깐만! 난 그런 뜻으로 한 말이……!”
“본심은 무의식중에 나온다고 했던가? 네 본심 잘 들었다.”
“으헉! 아냐!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내 엘퀴네스는 영원히 너뿐이야!”
“닥쳐. 계약은 파기다.”
“아아! 안 돼! 그것만은 제발! 용서해줘, 엘퀴네스! 잘못했어! 내가 죽을 죄를 지었어! 용서해줘! 제발 용서해 줘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라미아스가 엘뤼엔의 다리에 매달리려 했다. 물론 그걸 그대로 내버려 둘 엘뤼엔이 아니라 닿기도 전에 무참히 걷어차였다.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라미아스는 비련의 주인공처럼 쓰러져 흐느꼈다.
“기회를! 제발 만회할 기회를 줘!”
“그럼 죽는 것과 계약을 파기하는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해주지.”
“그건 선택이 아냐! 나한텐 똑같은 거라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젠장! 가혹한 모습도 멋있어!”
간신히 진정했던 공간이 다시 부산스러워진 건 당연했다. 공작일 땐 점잖아서 몰랐는데, 정말 정신없는 드래곤이구나. 지켜만 보고 있어도 진이 다 빠졌다.
“내가 왜 쟤랑 만나는 걸 염려했는지 알겠지?”
이프리트의 말엔 긍정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팔이 안으로 굽어서 그런가. 솔직히 라피스가 훨씬 더 나은 것 같다. 그 녀석은 적어도 푼수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