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5화
회장 밖으로 나오니 캄캄한 어둠이 반겼다. 도착했을 때만 해도 어슴푸레 했던 하늘이 어느새 완전히 먹물에 잠겨 있었다. 한층 낮아진 공기가 뺨에 닿으니 정신이 조금 들었다. 숨을 크게 내쉬고 들이쉬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다가 입술을 악물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가 짙은 그림자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아무도 나를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아지니 겨우 진정되는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잘 모르겠다. 오히려 더 괴로운 것도 같았다.
“하…….”
치솟는 게 분노인지 눈물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당장 여길 떠나고 싶었다. 집에 가고 싶다. 엘뤼엔이, 내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움켜쥔 손이 쉴 새 없이 떨렸다. 이대로 입을 벌리면 넘어오는 모든 걸 다 게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최악이야…….”
* * *
연회장 안으로 다시 돌아갔을 땐 시간이 꽤 흘러 있었다. 막 시작되어 어수선하던 분위기는 이제 본격적으로 춤을 추고 즐기는 완연한 친교의 장으로 무르익은 상태였다. 그사이 인원은 더 늘었고, 그만큼 내부도 더 번잡했다.
수많은 사람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크리스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삼삼오오 모여 떠들고 있는 이들 사이에서 아무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홀로 구석에 고립되어 있었으니까.
“왜 여기서 혼자 이러고 있어요?”
가까이 다가가서 물으니 움찔해서 경계하던 크리스가 곧 천천히 나를 살폈다. 마도구 때문에 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엘?”
조심스럽게 묻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바로 울상을 지었다.
“으아~ 얀마, 너 어떻게 된 거야? 나 버리고 그냥 가버린 줄 알았잖아.”
“미안해요. 갑자기 속이 좀 안 좋았어요.”
“헉, 체한 거야? 아까 음료를 급하게 마셔서 그런가? 지금은 괜찮은 거야?”
“네, 좀 나아졌어요.”
고개를 끄덕이니 요리조리 살피던 크리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망할 마도구 때문에 안색을 전혀 못 읽겠어.”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던 그가 한층 근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입을 열어야 할지 말지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할 얘기 있어요?”
“으음, 이걸 알려주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속도 안 좋은 애를 괜히 더 고생하게 할까 봐 걱정이네.”
“괜찮아요. 뭔데요?”
“실은 아까 세피온 공작이 널 찾았었어.”
“아……. 그랬어요?”
알고 있다. 그걸 피해 달아난 거였으니까. 꽤 형편없는 꼴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렇게 보이진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대부분은 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 소리를 듣지 못할 만한 거리였다.
“정확히는 아인 이드리스가 찾은 거지만. 공작이랑 다 같이 우르르 몰려와서 너 어딨냐고 묻더라고. 하필 네가 딱 연회장을 떠난 그 순간에 말이야. 잠시 바람 쐬러 갔다고 변명해두긴 했는데, 세피온 공작은 네가 언제쯤 돌아오는지 물어보지, 네가 진짜 돌아올지는 알 수 없지. 변명하느라 진땀 흘렸다.”
“혼자 고생했네요.”
“호강한 거지 뭐. 내가 또 언제 대귀족이랑 말을 다 섞어보겠냐. 나 바로 코앞에서 정령왕도 뵀잖아. 와, 정령왕이라니. 진짜 심장 터지는 줄 알았다.”
“뭘 새삼.”
“어? 방금 뭐라고 했어?”
“아뇨, 별말 안 했어요.”
문득 엘뤼엔과 트로웰의 정체를 알고 나면 그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이프리트와도 절친인 것처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중이던가. 자다가 걷어찰 이불이 족히 한 트럭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전에 심장마비에 걸리지 않도록 진정제부터 미리 먹여야겠지만.
그래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걸 보니 확실히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씁쓸한 기분을 삼키며 연회장 안쪽을 돌아보았다. 중심부에 있는 세피온 공작과 아인 이드리스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아인 이드리스 곁에 있는 미네르바 역시.
미소 짓고 있는 그를 보니 간신히 가라앉혔던 속이 다시 울렁거렸다. 아인 이드리스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난 이 시대에서 일어난 모든 일의 결과일 뿐이었으니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알지만 외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역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그가 검을 배우기로 한 이유가, 블레스터가 검의 형태를 하게 된 이유가, 왜 하필이면 나 때문이었을까.
<우리 가족이 불행한 건 너 때문이야.>
날카로운 가시를 품은 거머리가 스멀스멀 온몸을 타고 오른다. 그 가시들이 한목소리로 소리쳤다. 이제는 완전히 떨쳐냈다고 생각했던, 한때 내 모든 걸 지배한 자들의 목소리였다.
<너만 태어나지 않았어도 우리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거야.>
<네가 우리 가족을 다 망친 거라고!>
“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급히 시선을 돌리니 심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크리스가 보였다.
“너 정말 괜찮은 거야? 몸이 안 좋은 거면 무리할 거 없어. 눈도장은 대강 찍었으니 그만 돌아가자.”
“아, 아니에요. 미안해요, 크리스. 그냥 잠깐 다른 생각을 했어요.”
서둘러 웃으니 크리스의 표정이 좀 더 묘해졌다. 머쓱한 듯이 뒷머리를 긁던 그가 작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저기 말이야. 엘, 내가 좀 못 미덥겠지만…….”
“그렇지 않은데요.”
“그렇게 생각해주면 다행이고. 여하튼 도움이 필요할 땐 뭐든 말해. 너무 혼자 다 끌어안고 있지 마.”
“…….”
“네가 너무 의젓해서 아직 한창 자랄 나이라는 걸 자주 잊는단 말이지. 내가 그래도 길드 마스터잖냐. 길드원이 의지하라고 있는 존재니까 가끔은 맘 편히 기대줘.”
“갑자기 너무 진지해지는 거 아니에요?”
“하하, 좀 그렇지?”
스스로 민망한 듯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는 크리스를 향해 나는 담담히 미소 지었다.
“그래도 나쁘진 않네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그러나 따라서 웃는 크리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라 그런가. 내가 여전히 벽을 두고 있다는 걸 그 한마디로도 느낀 모양이었다.
“아, 그나저나 저 윗분들은 이제 이쪽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네. 어떡할래, 엘? 너 세피온 공작을 만나보고 싶어 했잖아.”
더 파고들지 않고 능숙하게 받아넘기는 것 역시 그다웠다. 밀려드는 자괴감을 애써 외면하며 그가 만들어준 상황에 편승했다. 그래, 지금은 세피온 공작을 만나는 게 먼저였다. 그를 만나서 영혼의 보석을, 라피스의 행방을 찾아야 한다. 본래의 목적을 상기하고 나니 차라리 숨이 트였다.
“물론 만나야죠. 꼭 만날 거예요.”
“어떻게 하려고? 우리 쪽에선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할 텐데. 사람들이 길을 터주지도 않을걸?”
“알아서 터줄 만한 상황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요.”
“말이 쉽지 그게 가능하겠어? 아, 혹시 여기서 정령을 소환하려고? 그럼 확실히 눈에 띄긴 하겠다만.”
“정령을 구경거리 삼을 생각은 없어요.”
“그러면?”
“내가 이번에 왜 유명해졌는지 잊었어요?”
의아한 듯이 바라보던 그가 곧 입을 멍하니 벌렸다. 설명하는 대신 내가 걸고 있던 마도구를 풀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눈동자에 경악이 차오르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으아, 미친. 오랜만에 정면에서 봤더니 파괴력 엄청나.”
“효과 있을 것 같죠?”
“그걸 말이라고…… 너 지금 옷도 화려한 거 입고 있어서 더 심해졌어. 네 형님들과 같이 있어도 네가 제일 눈에 띌 것 같아.”
“잘됐네요.”
“아, 아니, 잠깐. 잠깐 기다려, 엘. 솔직히 난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지금 되게 복잡한 기분이야. 네가 외모를 이용할 줄 알게 되다니. 호랑이한테 날개가 달린 걸 보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이건 마치 인류 최강 병기가 각성하는 걸 목격한 듯한 그런 기분……?”
“그럼 다녀올게요.”
망연한 얼굴로 헛소리를 중얼거리는 그를 버려두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몰려 있는 인파를 향해 다가서자 기척을 느끼고 무심코 돌아보던 이들이 그대로 굳었다. 조금 전의 크리스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마주친 시선에 빙긋 미소를 지어 주니 얼어붙은 사람들 사이에서 짧은 숨이 터져 나왔다.
“실례지만 지나가도 될까요?”
그 말에 멍하니 있던 사람들이 홀린 듯이 뒤로 물러섰다. 양옆으로 우르르 갈라지는 무리 사이로 빠르게 길이 트였다.
“고마워요.”
짧게 눈인사를 건네준 다음 중심부까지 곧장 걸어갔다. 누구냐고 저들끼리 묻는 소리로 등 뒤가 소란스러워졌다. 일단 길이 트이고 나니 세피온 공작이 있는 곳에 이르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창 대화 중이던 공작이 이쪽을 돌아보았다가 멈칫했다. 그 반응에 의아해져서 고개를 돌린 아인 이드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방에서 찌를 듯한 시선이 쏟아졌다. 나는 탐색하듯 강렬히 눈을 빛내고 있는 세피온 공작을 향해 미소 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세피온 공작님.”
“……자네는?”
“동행인에게 절 찾으셨다고 들었어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여명의 길드 소속 헌터이자 물의 정령사인 엘 입니다.”
주위의 술렁임이 더 커졌다. 연회 초반부의 날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이 말도 안 된다며 혼란스러워하는 소리였다. 세피온 공작 역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음, 자네가 그 정령사라고?”
“네, 명망 높으신 공작님을 뵙게 되어 기쁩니다. 연회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나야말로 와줘서 고맙군.”
반 박자 늦게 대답하는 공작의 표정은 조금 복잡해 보였다. 그게 호의인지 반감에 의한 건지 구분할 수가 없어 우선 시선을 거두었다. 당장 이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워낙 명백해서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몸이 저절로 긴장하려는 걸 억지로 견디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를 이채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미네르바에게로.
“…….”
각오는 했지만 막상 바로 앞에 서니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와 시선을 맞추지 않기 위해 눈을 급히 내리깔았다. 제국에선 인사를 하거나 대화를 걸 때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는 게 예의다. 눈을 피하는 건 떳떳지 못한 내심을 품은 거라 여겨서 체면을 차리기 위해서라도 지양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내 태도를 탓하거나 이상하게 여기는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지간한 담력이 아니고서야 인간이 정령왕 앞에서 태연하기란 어려우니까. 다들 크게 다르지 않은 처지이다 보니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부디 미네르바에게도 그렇게 보였으면 했다. 입을 열기 전에 한 번 크게 심호흡하는 것도, 그저 긴장한 것으로만 비치기를.
“자연의 인도를 받는 자가 존귀한 바람을 뵙습니다. 물의 길을 걷는 엘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구나, 물의 아이야.”
화답하는 음성은 잔잔한 바람처럼 고요하고 간결했다. 눈길이 조금 오래 머물긴 했지만 약간의 흥미 정도에 불과할 뿐이라,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재간이 없었다. 다만 내가 엘퀴네스의 계약자라는 걸 당연히 알아봤을 텐데도 그에 대한 내색 또한 보이지 않았다. 말 없는 배려가 느껴져서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미안해, 미네르바. 나는 전혀 반갑지 않아. 이렇게 널 보고 싶지 않았어. 이런 식으로 너와 얽힐 생각은 전혀 없었어. 이런 일들, 난 하나도 알고 싶지 않았는데.
얼굴을 일그러트리지 않기 위해 억지로 미소 지으려니 입가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덕분에 아인 이드리스에게 인사를 건넬 땐 마라톤을 완주한 것처럼 지친 기분이었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어요?”
“아. 네, 네, 엘. 오, 오랜만입니다.”
날 발견한 순간부터 얼빠져 있던 그는 대답하면서도 계속 허둥거렸다. 내 외양은 이미 알고 있을 텐데도 제대로 차려입으니 새삼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를 보면 화가 날 것 같았는데, 순진할 정도로 동요를 감추지 못하는 걸 보니 머리가 더 복잡해지기만 했다.
“하하, 여기서 엘 님을 뵙다니 감회가 새롭군요. 원래 아름다운 분이시라는 건 알았습니다만, 이렇게 차려입으신 모습을 보니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다행히 곧장 들려온 목소리 덕분에 한없이 추락하기만 하던 머릿속이 간신히 멈췄다. 경박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온 이는 진혼 길드의 마스터였다. 어떻게든 눈에 띄어보겠다는 심상을 고스란히 드러낸 얼굴을 보니 한결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당신도 도움이 될 때가 있긴 하네요.”
“네? 지금 뭐라고 하신 겁니까?”
“칭찬 고맙다고요.”
아무렇지 않게 둘러댄 말에 진혼의 마스터는 찜찜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웃었다.
“어쨌든 잘 오셨습니다. 드디어 이 지지부진하던 대화의 결말이 나겠군요. 자,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제 저희 얘기를 믿으시겠지요?”
그가 좌중을 돌아보며 하는 말에 사람들이 모두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린가 싶어서 바라보는데 피식 웃은 세피온 공작이 입을 열었다.
“실은 자네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네.”
“……제 이야기요?”
“최근 신문마다 자네 얘기로 떠들썩하지 않았나. 그중에서도 단연 주목받은 내용이 자네 외모에 대한 것이었고 말이야.”
그다음 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여기서 날 본 사람들이 떠들어 댈 말들이야 뻔했으니까. 소문과는 다르게 막상 실제로 보니 평범했다고 평가했겠지. 그런 중에 아인 이드리스와 진혼의 마스터만 그렇지 않다고 한 모양이다. 역시나 이어진 세피온 공작의 설명은 예상한 그대로였다.
“목격했다는 사람들끼리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바람에 대립이 좀처럼 끝나질 않았다네.”
“그랬군요.”
상류층이랍시고 중심부에 똘똘 뭉쳐서 한다는 짓이 그런 쓸모없는 토론이었나. 떨떠름한 기분으로 진혼의 마스터를 돌아보니 그가 뿌듯한 얼굴로 어깨를 폈다. 그 한심한 대립의 결과가 자기들 승리로 끝난 게 퍽이나 자랑스러운 듯했다. 왜 내 외모를 갖고 우리 길드 마스터도 아닌 엄한 놈이 득을 보는지 모를 일이다. 정작 크리스는 구석에 박혀 이쪽엔 다가올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데. 황당해하고 있자니 세피온 공작이 진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