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3화
친황파의 수장이자 제국 5대 가문 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꼽히는 세피온 공작가. 건국 공신으로서 제국과 역사를 함께한 가문이지만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그저 평범한 귀족가 중 하나였을 뿐, 위세가 대단하진 못했다. 그런 가문이 지금과 같은 눈부신 성장을 이룩한 건 전적으로 현 가주인 테이론 이스 세피온 공작의 공이었다.
백전백승 철혈의 지휘관. 대 마법사이면서 검성의 반열에까지 오른 전무후무한 천재! 명석한 머리에 사업 수완까지 뛰어나 건드리는 것마다 성공하는 황금의 손을 가진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축복을 그러쥐고 태어난 듯한 타고난 지배자!
그 대단한 위명답게 세피온 공작을 만날 수 있는 이들은 극도로 적었다. 제국에선 그를 볼 수만 있다면 억만금을 주고서도 기꺼이 달려올 사람들이 넘치고 넘쳤다.
올해로 삼 년 차. 세피온 공작의 부관인 앨빈은 가끔 그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얼떨떨해지곤 했다. 선대 부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부터 자주 공작을 접하던 편이다 보니 더욱 그랬다. 이 깨달음의 이유는 조만간 공작가에서 열리는 연회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극성이군.’
세피온 공작가에서 연회가 열리면 뒷세계의 시장이 아주 활발해진다는 건 아주 유명하다. 초대장을 구하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이 몰려들기 때문이었다. 동반자 자리조차 금보다 더 비싼 값으로 거래될 정도인데, 그마저도 구하지 못해 속을 태우는 이가 많다고 했다. 직접 공작가로 편지를 보내어 초대장을 받고 싶다 문의하는 이들도 넘쳐났다. 그들 중에선 이름만 들으면 알 정도로 저명한 외국 인사들도 있었다. 이럴 땐 아무리 익숙한 자리라도 자신의 위치를 다시 돌아볼 수밖에 없긴 했다. 괜히 긴장한 앨빈은 새삼스레 기합을 넣고 눈앞의 문을 정중히 두드렸다.
“각하, 저 앨빈입니다.”
“어, 들어와.”
앨빈은 지체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눈에 익은 화려한 광경이 그를 반겼다. 황금과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웅장한 조각상과 섬세한 벽화가 새겨진 벽면, 지붕 안쪽을 가득 채운 야명주와 투명한 백수정으로 만들어진 마법 등. 검은 대리석이 깔린 바닥은 금실로 수놓아진 양탄자가, 창문엔 오색의 판유리들이 빈틈없이 장식된 채였다. 그 한가운데, 거대한 검은 원목 책상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이 있었다.
거의 7라오에 육박하는 훤칠한 체구와 다소 사납게 보이는 선이 짙은 얼굴. 시린 하늘을 닮은 눈동자와 깊은 바닷속을 떠올리게 하는 군청색 머리칼. 시선이 마주치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만큼 위압감이 대단한 사내는 배부른 맹수를 연상시켰다. 누가 저 모습을 보고 70대 노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앨빈은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한 남자의 피부를 보며 이번에야말로 새삼스러운 감상을 중얼거렸다.
“연회 참석 명단입니다.”
전원 참석이라(비록 실제 참석하는 사람은 다르다 해도) 기실 작성하는 게 의미가 없는 명단이긴 했지만 보고는 해야 했다. 넘겨받는 공작의 태도 역시 다분히 형식적이었다. 다만 이번엔 조금 이례적인 부분도 있었기에 앨빈은 내심 돌아올 반응을 기대했다. 예상대로 명단을 시큰둥하게 넘겨보던 공작이 다음 순간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혹시 내가 노안이 온 건가? 왠지 생각지 못한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 같은데.”
“각하의 시력은 정상이십니다. 보시는 그대로가 맞습니다.”
“아냐, 나 요즘 눈 나빠졌어. 아까 창문에서 정원에 있는 나무를 살펴봤는데 개미가 몇 마리 오르는지 아무리 봐도 잘 안 보였단 말이야. 역시 노안이 온 게 분명해.”
“……그건 원래 안 보이는 게 정상입니다.”
“흐음. 그럼 이 명단에 적힌 이름이 진짜라고? 앨빈, 네가 사기 치는 건 아니지?”
“제가 이런 거로 왜 사기를 치겠습니까.”
또 이런 식이었다. 모처럼 다잡은 기합이 푸시시 식는 걸 느끼며 앨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매번 상관의 위명에 새삼스럽게 놀라는 게 바로 이런 가벼운 성격 때문이었다. 피곤한 낯을 숨기지 못하는 어린 부관을 향해 공작은 피식 웃었다.
“뭐, 어쨌든 흥미롭군. 이번 연회는 꽤 재밌겠어. 준비는 잘 되어가지?”
“예, 오랜만에 저택에서 열리는 대규모 연회라 다들 기합이 단단히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 그래. 성의껏 잘 준비하라고 해. 아무렴 내 후계자를 찾아보는 연회인데 평범하면 곤란하니까.”
“예, 그런 연회이니 더더욱……네?”
기계적으로 답하던 앨빈이 다음 순간 고개를 치켜들었다. 눈을 부릅뜬 그와는 달리 마주한 공작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래서 더욱 상황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각하, 실례지만 제가 지금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습니다. 방금, 각하께서 후계자를 찾아보는 연회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어, 그거 맞아.”
“각하!”
앨빈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앨빈, 시끄러.” 공작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지만 그의 귀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후계자라니!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거참, 뭘 그렇게 놀라? 내가 아무리 그래도 이미 70대인데 계속 현역으로 있을 순 없잖아. 후계자가 있어야지.”
지극히 맞는 말이었다. 오히려 늦어도 한참이나 늦었다. 본래라면 그는 이미 진작 은퇴했을 시기였다. 실제로 가신들을 비롯한 저택의 식솔들은 이미 거의 세대교체가 된 참이었다. 가주인 공작이 평생 후계를 둘 생각 없이 독신을 유지하고 있어서 그간 다들 얼마나 속이 탔던가. 그런 그의 입에서 드디어 후계자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가 만천하에 외쳐도 아깝지 않을 경이로운 소식이었다. 연회에서 찾겠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앨빈은 펄떡이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다분히 애썼다. 억지로 들어올린 입꼬리가 경련하듯 푸들거렸다.
“드디어 후계자를 두실 마음이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 다들 크게 기뻐할 겁니다. 하지만 각하, 후계자라면 혼인을 하셔서…….”
“이 나이에 나더러 혼인해서 애를 낳으라고? 내 나잇대의 여자가 애를 낳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렇다고 설마 까마득하게 나이 차이 나는 어린 여자랑 혼인하란 건 아니지?”
“구, 굳이 나이를 생각하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각하의 외모나 신체 능력은 젊으시니…….”
“얘가 큰일 날 소리를 하네. 신체가 젊다고 먹은 나이가 없어져? 장인 장모가 나보다 어릴 텐데 그게 무슨 추태야?”
“그러게 모두가 권할 때 진작에 혼인을 하셨으면…….”
“어허, 이미 끝난 일엔 미련을 두지 마. 시간을 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뒤를 돌아봐서 무슨 소용이야?”
말은 참으로 청산유수였다. 앨빈은 뒷목을 잡고 싶은 기분을 꾹꾹 눌러 참았다.
“하지만 각하, 생판 타인을 후계자로 세우신다고 하면 반발이 심할 겁니다. 직접 후사를 보시는 게 꺼려지시면 방계 중에서 들이시는 방법도 있습니다.”
“방계 누구? 내 뒤통수만 열심히 노리고 있는 놈들과 그들의 자식들 말인가?”
앨빈은 잠시간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대대로 세피온 공작가는 황실 못지않게 후계자 싸움이 치열한 가문이었다. 모친이 전부 다른 경우도 많아 형제들끼리 사이가 전혀 좋지 않았고, 암투가 끊이지 않았다. 실제로 공작은 경지에 올라 스스로 몸을 지킬 수 있게 될 때까지 수차례 사선을 넘었다. 어릴 땐 절벽에 떨어져 행방불명이 된 적도 있었다. 그때야말로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후 멀쩡히 생환해서 다들 놀라워했단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잘 알려진 이야기였다. 그 모두가 형제를 비롯한 친인척들의 술수였다는 것도.
“내가 말이야. 그때 맹세했거든. 어떻게든 잘 먹고 잘살아서 테이론 이스 세피온의 이름을 아무도 감히 건드릴 생각도 하지 못하게 하겠다. 그리고 형제와 친척이라는 괴물들에겐 절대 이 자리를 넘겨주지 않을 거라고 말이야.”
“그런 결심까지 하셨으면서 대체 왜 혼인은 안 하신 건지. 자녀에게 물려주시는 게 가장 평화롭고 쉬운 방법인데 말입니다.”
“어허, 주인의 자세한 사정은 알려고 하는 거 아니야.”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에 앨빈은 다시 꺼질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혼인하지 않는 공작을 두고 평생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지독한 첫사랑을 잊지 못한 순애보라는 둥, 고된 신체 훈련의 부작용으로 고자가 됐다는 둥, 사실은 남색가라는 둥. 정말 그런가 싶을 만큼 그럴듯한 내용에서부터 누가 들어도 허무맹랑한 것까지, 그 종류도 갖가지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공작을 보필해온 가신들조차 명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내 피는 너무 대단해서 함부로 이어지면 안 되거든.”
하필 대외적으로 공작이 내세운 이유가 이런 식이기도 해서 어디 가서 말할 수도 없었다. 앨빈은 내심 그가 혈육에 대한 혐오증이 있다고 짐작했다. 굳이 피 한 방울 안 섞인 이를 후계로 삼으려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 생각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애초에 혈통으로 가문이 이어지는 거 너무 고리타분하지 않아? 무능한 애가 가주가 되면 어쩌려고 그래? 물론 내 피를 이어받은 애가 무능할 리는 없지만.”
“하아, 네, 물론 그렇겠지요.”
“알았으면 자네도 쓸 만한 호구, 아니 괜찮은 애 좀 없는지 유심히 좀 살펴봐.”
방금 호구라고 했던 건 잘못 들은 게 아니겠지. 앨빈은 이제 더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너무 나이가 많거나 어린 건 안 돼. 머리가 너무 굵은 건 다루기 골치 아프고 어린 건 키우기 막막하니까. 적당히 십 대에서 이십 대 사이로. 가급적이면 배경이 별거 없는 애 중에서 추려봐. 괜히 다른 가문이 이득을 보는 꼴이 되면 안 되니까. 그래서 후계자를 찾는다는 것도 일부러 공표하지 않는 거야.”
“그런 자각이라도 있으시다니 다행이긴 합니다. 절 과로로 죽이실 생각인 것 같아 유감이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이미 대충 추리고 있는 거 아냐?”
다 안다는 듯한 공작의 얼굴에 앨빈은 이번에도 아무 말을 잇지 못했다. 속내를 들켜 두 뺨이 상기된 앨빈을 본 공작이 그럴 줄 알았다며 웃었다.
“……당장 떠오르는 건 아인 이드리스 정도군요. 제국에선 별다른 연고도 없고 이렇다 할 가문과 연결된 바도 없습니다.”
“아인 이드리스라……. 황실 연회에서 몇 번 봤었지. 애가 성격도 좋고 괜찮긴 하더라.”
공작이 흡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이미 점찍어둔 후보인 모양이었다. 앨빈은 아인 이드리스를 소공자라고 부르는 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귀찮은 걸 싫어하는 공작의 성격상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처음 마음먹은 대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긴, 그만큼 아인 이드리스가 대단하기도 했다. 정작 그가 공작가 후계자리에 관심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앨빈은 지금까지 세피온 공작이 마음먹어서 이루지 못한 일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명색이 후계자인데 너무 싱겁게 정해지는 것 같아 그는 다시금 머리를 굴렸다.
“아, 이번에 활약한 물의 정령사도 10대라고 들었습니다.”
“물의 정령사? 아아, 상급이랬나?”
“네. 게다가 입검의 경지에 이른 검사이기도 합니다. 어린 나이에 성취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인 이드리스보다 천재라고 생각됩니다.”
“흐음, 걔한테도 이번 연회 초대장 보냈던가?”
“네, 각하께서 최근 좋은 일로 신문 전면에 실린 사람에게는 전부 초대장을 보내라고 하셨기에.”
“그래, 그래. 잘했어.”
공작은 순순히 칭찬했다. 그러나 앨빈은 공작이 그 소년 정령사를 만나볼 일은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아인 이드리스를 언급할 때와는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로 심드렁한 태도였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거부감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본 적도 없는 물의 정령사에게 유감이 있을 리가 없을 텐데도.
“그럼 이만 나가 봐.”
“예.”
앨빈은 잠시간 머뭇거리다 곧 몸을 돌렸다. 조금 전 묘하게 가라앉은 것 같았던 공작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그런 걸 파고들 상황이 아니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쳇, 인간 주제에 물의 상급 정령사가 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지. 검도 잘 다루는 건 반칙 아냐? 그 정도쯤 되면 그가 관심 갖고 지켜보고 있을 거 아냐. 에이씽. 난 마법도 잘하고 검도 잘하고 이것저것 다 잘해도 관심 한 톨 못 받는구만. 서러워 죽겠네.”
곧 문을 닫고 나서는 그의 등 뒤에서 나직하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만 그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어 앨빈은 한참 동안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제도는 중심부인 황성을 기준으로 크게 여섯 개의 구역으로 구분된다. 빈민가가 밀집한 제6구역, 상가와 관공서, 주택 단지들로 이뤄진 제4, 5구역. 그보다 조금 더 고급스러운 주택가로 이뤄진 2, 3구역.
부유층과 귀족이 주로 거주하는 제1구역, 그중에서도 가장 땅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그레난 지구>는 거주 자격까지 심사하는 까다로운 지역이었다. 재산과 신분을 전부 갖춘 사람만 거주권을 살 수 있었고, 통행인조차 엄격하게 단속해서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철저한 그들만의 세상인 셈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일개 헌터들이 방문할 일이 거의 없는 곳이라는 소리다.
“확인했습니다. 통과하셔도 좋습니다.”
손쉽게 떨어지는 승인에 내심 복잡한 기분이 드는 건 아마 그 탓일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출발한 마차는 미끄러지듯이 도심 안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출입로를 지키는 경비대와 검문소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멀어졌다.
“정말 통과했네. 우리가 정말로 그레난에 들어왔어.”
옆에 앉아 있던 크리스가 얼떨떨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평소와는 달리 번듯한 남색 예복 차림을 한 그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원래도 체격이 훤칠한 편인데 그런 장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차림을 한 데다가, 늘 대충하고 다니는 머리와 턱을 깔끔하게 정돈하니 헌터라기 보다는 어디 잘 나가는 기사처럼 보였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정작 하는 행동은 기사와는 거리가 멀긴 했지만.
“으아, 어떡하지, 엘? 너무 긴장해서 토할 것 같아. 우리가 진짜 공작 가의 초대를 받았어!”
그가 다리를 달달 떨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까부터 얼굴이 창백하더니 이젠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 된 것 같았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예요. 초대장이 진짜란 건 처음부터 알았잖아요.”
“그치만 왠지 실감이 안 났는걸. 솔직히 입구에서 문전박대받아도 당황하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고. 아, 그렇군요. 역시 그럴 줄 알았죠. 뭔가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쪽팔린 티 내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할 만반의 준비까지 하고 있었단 말이야.”
“……이왕 준비하는 김에 통과할 때 전혀 안 놀라는 준비도 하지 그랬어요.”
“헉, 그렇네!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어! 난 왜 이렇게 멍청하지?”
……우리 길드, 마스터가 이렇게 소심해도 괜찮은 걸까.
연신 입술을 물어뜯는 크리스를 일별하고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상류층 중에서도 더 특별하다는 이들의 거주 구역인 만큼 화려한 경치를 예상했는데, 보이는 거라곤 온통 드높은 성벽뿐이었다. 외부에 철저히 가려진,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곳이라는 점이 전경마다 훤히 드러났다. 눈에 담을 수 있게 허락된 건 넓게 트인 대로뿐인 것 같았다. 그 길을 따라 수많은 마차의 행렬이 줄줄이 이어지는 중이었다. 나와 크리스가 탄 마차도 그중 하나였다.
이윽고 한참을 하염없이 달리던 마차가 한 성문에 접어들었다. 거대한 철문에 양각으로 박혀 있는 드래곤의 문양이 선명했다. 그 문양을 보자 무심코 숨이 흘러나왔다. 크리스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도 조금은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드디어 세피온 공작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