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1화
“왜 그래?”
“아뇨, 별거 아니에요. 전 크리스랑 만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어요. 다들 어디 다녀오는 길인가 봐요?”
“아, 무기점에 갔다 왔어. 네브가 지금 쓰는 활이 활대가 약하다면서 조금 더 좋은 거로 바꾸고 싶어 했거든. 요즘은 어떤 활이 나오는지 구경도 할 겸 다 같이 보러 갔지.”
“그렇구나. 마음에 드는 건 있었어요?”
“제도는 제도더라. 좋은 무기가 엄청 많더라구. 근데 하나같이 너무 비싸서 살 엄두가 안 나지 뭐야. 돈을 더 바짝 모아야겠어.”
“조만간 목돈이 생길 거니 기대해요. 어제 잡은 마물 부속물이 우리 길드 소유로 인정됐대요.”
“와, 정말? 근데 너 혼자 잡은 건데 길드 수익으로 나눠도 되겠어?”
“당연하죠. 원래 모든 수익은 나누기로 했잖아요.”
가볍게 답하니 그들은 모두 미안해하면서도 상기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제도의 물가는 비싸다. 최근 벌이가 괜찮아지긴 했지만 적자인 시절이 더 길었으니 다들 말은 안 했어도 형편이 좋았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화목한 대화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돌연 지진이 인 것처럼 땅이 진동하더니 비명이 터져 나왔다. 혼란해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혼비백산해서 뛰기 시작했다.
“마, 마수입니다! 마수가 나타났어요!”
곧 들려오는 소리엔 얼굴이 절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마수라니. 바로 어제 대형 마물이 나타났는데 고작 하루 만에 또 균열이 생겼다고? 당황한 길드원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사람들이 빠져나오고 있는 쪽을 응시했다.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조금 전 아이라가 사라진 방향이었다.
* * *
이번에 나타난 마수는 다행히 급수가 매우 낮은 소형 마수였다. 때마침 근처에 있던 헌터들이 빠르게 나서서 사살한 덕분에 사건 자체는 큰 피해 없이 가볍게 끝났다. 하지만 마물 출몰 이후로 너무 짧은 간격에 연이어진 출몰이다 보니 제도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경직되어 있었다.
그리고 난 나대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필 아이라가 사라진 방향에서 마수가 나타나다니. 이쯤에선 더는 마신전과의 연관성을 부정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그게 뭔가 조금 얼떨떨했다. 뒤통수를 맞은 것 같기도 하고, 괜히 지는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이거 진짜 마신관이 일부러 균열을 일으키는 거야?”
한번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트로웰에게도 물어봤지만 명확한 답변은 듣지 못했다. 그는 묘하다는 듯이 나를 보며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기만 했다.
“네가 깨달은 만큼 알게 되겠지.”
그러니까 그 깨달은 부분이 맞는지를 묻는 건데 긍정인지 부정인지를 모르겠다. 그 이상은 말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답을 듣기를 포기했다. 미래를 읽는 게 신비로운 건 맞지만 이프리트의 감상도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사실 마신관의 짓이든 아니든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긴 하다. 인어는 멸종되었고, 4천 년 후에도 마신의 교단은 건재했으니 알아서 잘 해결될 거다. 이 세계의 일원도 아닌 내가 깊이 관여할 필요가 없는, 지나친 오지랖이었다. 그런데도 왠지 기운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탁자에 턱을 괴고 시무룩해져 있으려니 이프리트가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문장을 이용하면 마신전에 쉽게 들어갈 수 있지 않아? 감쪽같아서 교황도 속일 수 있을 텐데?”
“그건 싫어…….”
“그럼 내가 염탐해 줄까?”
“진짜?”
“내가 최고라고 말해 주면.”
그러나 대답은 이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이프리트의 몸에 얼음 창이 꽂히더니, 그 모습이 빠르게 사그라졌기 때문이었다. 역소환이었다. 뜨악해져서 고개를 들자 곧바로 엘뤼엔의 살벌한 시선이 닿았다.
“최고가 되려면 일단 살아 있어야겠지.”
“……하하.”
아무래도 이 방법도 쓰면 안 될 모양이었다.
* * *
“젠장, 엘퀴네스 그 자식, 갈수록 까칠해지긴.”
반나절 만에 돌아온 이프리트는 온갖 음식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짜증이 날 땐 단 걸 잔뜩 먹어줘야 한다나. 정령왕도 이런 식의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다만 진짜 맛을 음미하는 건 아니라서 그런지 현실성이 좀 떨어지는 방식이긴 했다. 나는 눈앞에서 삼단 케이크가 통째로 사라지는 신기한 마술을 구경했다.
“경고도 없이 대뜸 역소환부터 시킬 건 뭐야. 지가 좀 강하다고 너무한 거 아니야? 역소환 되면 얼마나 힘든데. 자기는 한 번도 안 겪어봤다 이거지.”
“엘퀴네스는 역소환 한 번도 안 해봤어?”
“걜 봐라. 누구한테 당할 놈인가.”
음, 그건 그렇지. 악신한테 다쳤을 때도 날 구하려다 그런 거지, 그 혼자였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거다. 하지만 설마 이제까지 역소환의 경험조차 없었을 줄이야. 이 시점에서도 벌써 만 년 넘게 살지 않았나? 이쯤 되니 혹시 다쳐본 것 자체가 그때가 처음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숙연해졌다. 말없이 오렌지 주스를 들이켰더니 이프리트가 나를 빤히 응시했다.
“왜?”
“그냥 좀 웃겨서. 살다 보니 천하의 엘퀴네스가 계약 처음 해본 정령처럼 예민하게 구는 걸 다 보잖아.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이러다 곧 있으면 소멸까지 시키려고 하겠어, 아주.”
“음, 그치만 계약자가 다른 정령왕한테 최고라고 하면 기분 상하긴 하겠지.”
“모르는 소리. 그 녀석, 예전엔 계약자가 아예 대놓고 내가 더 좋다고 한 적도 있는데 그땐 눈 하나 깜짝 안 했어. 오히려 마음껏 좋아하라면서 그 자리에서 계약을 끊기나 한 놈이야.”
“헐, 그런 계약자가 있었다고?”
“애가 하도 무심하니까 관심 끌어보겠다고 벌인 질투 작전이었지. 처참하게 실패했지만.”
질투 작전이라니, 별일이 다 있었구나. 그건 또 어느 이상한 드래곤이었을까. 계약해달라고 수십 번씩 소환해댄 라피스도 그렇고, 가만 보면 엘뤼엔도 은근히 팔자가 박복하다. 만만하게 여겨질 성격은 절대 아닌데 조금 신기할 정도다. 너무 차가운 나머지 그 반작용으로 오히려 이상한 애들이 더 불타오르는 건가.
“그런 녀석이 이번엔 화낸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심지어 넌 아직 답하기도 전이었잖아.”
“처음은 그냥 넘어갔는데 두 번이 될 것 같으니까 짜증 난 건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황당해하는 얼굴로 웃음을 터트리는 이프리트를 보니 이게 아닌 모양이다. 가끔 엘뤼엔이 분노하는 지점을 잘 모르겠을 때가 있어서 확신은 안 하긴 했다. 현대의 아버지는 먼저 건들지만 않으면 괜찮았는데, 이 시대의 엘뤼엔은 젊어서(?) 그런지 감정 폭이 좀 크다.
오늘만 해도 부르기만 했을 뿐인데 싸늘하게 노려봤다. 용돈을 달라던 것도 아니고 같이 나가서 놀자고 귀찮게 조른 것도 아니고! 그냥 다녀온다는 인사만 하려던 건데! 생각하고 보니 괜히 억울해져서 입술이 절로 실룩거렸다.
그래도 나중엔 아버지와 아들이 되는 사이인데 여기선 웃는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미소를 빙자한 살기는 보긴 했지만 그걸 웃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을 뻔히 알면서 이프리트는 현실과 동떨어진 소리만 했다.
“역시 뭘 모르네, 도련님. 그럴 땐 귀여운 계약자를 독점하고 싶은 솔직한 마음이 드러난 거라고 자신 있게 대답해야지.”
“……다 그렇다 치고. 수식어부터 좀 잘못되지 않았어?”
“왜? 귀여운 거 맞아. 드래곤같이 시커먼 놈들이랑 비교해봐. 걔넨 수명도 긴 데다가 뭐든 다 너무 쉽고 간단해서 완전 게을러. 수십 년간 한 자리에서 미동조차 안 하는 애도 있을 정도야. 걔들이 인간들 틈에 섞여서 유람하는 게 괜히 그러는 게 아니야. 걔들도 걔들 삶이 재미가 없는 거지.”
“으음.”
“그에 비해 인간은 얼마나 반짝반짝하게 사는지. 풀 하나만 잘못 먹어도 죽을 만큼 약한 주제에 자극은 또 좋아해서 온갖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니잖아. 그냥 지켜만 봐도 재밌고 귀여워. 그런데 계약까지 해봐. 세상에서 가장 귀엽지. 엘퀴네스라고 다르진 않을걸?”
이건 그러니까, 인간이 하룻강아지 보고 귀엽게 여기는 그런 심리인 건가. 아무것도 몰랐다면 이 말에 혹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미 내가 현대의 아버지에 너무 익숙한 몸이었다. 엘뤼엔이 정말 다정해질 땐 어떤 표정을 짓는지, 눈빛이 얼마나 부드러워지는지 아플 정도로 잘 안다. 분명한 건 지금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거다. 시벨리우스가 회상하기론 우리 사이가 제법 괜찮았다는 것 같은데. 그 회상 속의 나는 대체 뭘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다.
“아, 근데 도련님. 드래곤 하니까 묻는 건데, 여기 온 이유가 드래곤을 만나려는 거라며? 그 드래곤이 누군지는 들었어?”
“응, 알아. 블루 드래곤 라미아스.”
“걔가 엘퀴네스랑 계약했다는 것도 알지? 걜 정말 만나려고? 별로 좋은 꼴은 못 볼 텐데.”
되묻는 이프리트는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덜컥 몸이 긴장했다. 그 드래곤이 라피스 과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경고까지 받을 정도인가. 엘뤼엔이 질색할 때 그냥 다른 지역부터 간다고 할 걸 그랬나 보다.
“성격이 그렇게 이상해?”
“좀 이상하긴 하지. 원래 드래곤이란 종족이 다 한 군데씩 정상이 아닌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더 별종이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도련님이 엘퀴네스 계약자라는 건 숨기는 게 좋을 거야. 걔가 엘퀴네스한테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 근데 얼굴도 제대로 못 보는 처지라 다른 엘퀴네스 계약자한테 별로 감정이 안 좋아.”
“왜 못 봐?”
“아까 말했던 그 계약자가 걔거든. 엘퀴네스한테 질투 작전 쓴답시고 내가 더 좋다고 했다가 계약 파기 당한 놈.”
“……헐?”
“그 뒤에 아주 울고불고 싹싹 빌어서 다시 계약하긴 했는데 단단히 찍혔어. 엘퀴네스는 걔 연락은 아예 받지도 않아. 그런 지가 벌써 오백 년은 됐을 거야. 그런데 너랑은 늘 같이 붙어 다니잖아. 걔가 그거 알면 눈 뒤집힐걸?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팔자가 박복한 건 오히려 나인가. 하늘을 한 번 바라봤다가 그대로 푹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와의 악연에 엮여서 고통받은 경험은 새장에 갇혀본 거로 충분했는데. 그걸로 끝이 아닐 수도 있다 생각하니 눈앞이 막막했다. 그런데 그 순간 생각지 못한 말이 들려왔다.
“아, 그리고 도련님이 궁금해하던 마신전 말인데. 오는 길에 가볍게 돌아봤어.”
“앗, 정말?”
“집중 기도 기간인지 계속 기도만 하고 있더라고. 분위기는 좀 안 좋아 보였고. 그 외에 별다른 정보를 얻을 건 없었어. 아, 뭔가를 찾는 것 같긴 했어.”
“뭐를? 사람? 물건?”
“그것도 정확히 지칭하진 않더라고. 일단 불의 정령들을 심어두고 오긴 했는데 얘들이 매일 기도만 하고 있으면 별로 알아낼 게 없을 거야. 큰 도움은 안 돼서 미안해, 도련님.”
“아냐, 아냐! 미안하긴! 알아봐 줘서 정말 고마워.”
이 문제로 역소환까지 당한 상황이라 부탁할 생각은 완전히 접은 참이었다. 그런데 설마 오는 길에 다녀와 줄 줄이야. 역시 이프리트는 친절하다. 마음 같아선 최고라고 말해 주고 싶은데, 그게 또 괜한 화가 될까 봐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게 안타까울 정도였다. 머뭇거리면서 눈치만 살피니 그가 다 알겠다는 얼굴로 웃으며 물었다.
“나만 한 보부가 없지?”
“……응.”
“그렇다니까. 엘퀴네스나 트로웰은 이렇게 쌓는 신뢰의 기쁨을 몰라서 문제야. 걔넨 날 좀 본받아야 해.”
이번엔 스스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너무 본심이 드러났는지 이프리트가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현대의 이프리트가 모든 걸 삼키고 태우는 열화의 불이라면, 이 시대의 이프리트는 태양 같은 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뜨겁고 밝은데 위험하지는 않아서 그 자체로 모두를 감싸는 빛이 되는. 그리고 그런 빛이 되기 위해 위험하지 않게 여겨질 거리를 스스로 유지하는 사람.
“보부 말고 친구 하면 안 돼?”
무심코 건넨 말에 그가 눈을 크게 떴다가 씩 웃었다. 기분 좋은 얼굴이라 마음이 놓였다.
“친구도 좋지.”
이후엔 식사를 마치고 거리로 나섰다. 마차를 타기 위해 이동하는데 문득 한 상점이 눈에 들어왔다. 가판대에 단검 종류부터 시작해서 여러 장비가 걸려 있는 걸 보니 무기 상점인 모양이었다. 일전에 만난 길드원들이 새 활을 사고 싶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자연스레 구경하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왜? 활도 배우려고?”
“아니, 길드원들이 무기를 바꾸고 싶어 해서 가격대 좀 보려는 것뿐이야. 근데 이런 덴 문외한이라 뭐가 좋은 건지도 모르겠어.”
“사람마다 맞는 무기가 다르지. 하지만 소재가 좋으면 어지간하면 다 괜찮아. 내가 좀 추천해줄까?”
이프리트와 잡담을 나누며 전시된 활을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손님, 그거 사실 겁니까?”
지켜보던 점원이 불쑥 말을 걸었다. 나한테 한 말이 아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쪽을 바라보았다가 조금 흠칫했다. 아인 이드리스가 보였기 때문이다. 저 사람을 또 우연히 만나다니. 진혼의 마스터가 관여하지 않아도 자꾸 마주치는 걸 보면 평소 동선이 겹치긴 하는 모양이다.
“아까부터 한참 보시던데. 고르기 곤란하시면 제가 적당한 걸 추천해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처럼 그냥 구경할 목적이었던 건지 구매할 생각까진 아니었던 듯했다. 뭘 보던 거였나 싶어 그가 서 있는 가판대로 시선을 보냈다. 진열된 무기는 각자 종류별로 분류되어 있었는데 그가 있는 곳은 대부분 장검 종류가 놓여 있는 곳이었다. ……검술에 관심이 생겼나? 왠지 기분이 묘해지려는데 아인 이드리스가 문득 이쪽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전 같았으면 곧바로 아는 척을 해왔을 그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인사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가 머쓱하게 내렸다.
‘못 알아봤나?’
하긴 오늘은 새로 마련한 후드를 쓰고 나온 참이었다. 그게 아니라도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몰라보는 게 정상이기도 하고. 그는 곧 자리를 떠나 빠르게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덕분에 인사를 나눌 시기는 완전히 놓쳤다. 솔직히 대화를 나눌 생각까진 없었으니 차라리 잘된 셈이었다.
“저 녀석은 왜 자꾸 마주치지?”
“그러게.”
혀를 차는 이프리트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가볍게 웃었다.
‘그보다 검이라…….’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가판대로 시선을 돌렸다. 아인 이드리스가 장검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걸 떠올리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에이, 설마. 뭔가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서 얼른 고개를 흔들어 털어냈다. 아무래도 너무 과민한 생각이었다.
* * *
사람의 일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예측불허의 연속이다.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리는가 하면, 기대한 적도 없는 성과를 얻는 일도 있다. 때때로 설마가 사람을 잡기도 한다.
말이 씨가 됐다. 만나자는 기별도 없이 불쑥 찾아온 크리스를 보는 순간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이었다. 며칠 만에 보는 그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얼굴이 더 창백해져 있었다. 굳이 첫새벽에 도둑처럼 찾아들지 않았더라도 중대한 용건이라는 걸 알 수밖에 없었다.
“엘, 어떡하지? 우리 큰일 났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진짜 왔어, 초대장.”
울상이 된 그가 카드가 한가득 담겨 있는 바구니를 내밀었다. 아무거나 집어 들고 펼쳐 보니 그 말대로 초대장이었다. 장황한 미사여구로 가득한 글귀는 연회에서 자리를 빛내주길 바란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수신자엔 크리스와 내 이름 둘 다 적혀 있었지만, 제도를 구한 영웅이 참석한다면 모두가 기뻐할 거라는 첨언이 있는 걸 보니 목적이 뻔했다. 그냥 날 불러놓고 구경하고 싶다는 소리였다.
“이거 거절해도 되는 거죠?”
“그쪽도 마음대로 보낸 거니까 그냥 무시해도 되긴 해. 좀 위세가 있는 가문도 기간 내에 답신을 보내기만 하면 괜찮아. 일단 원칙적으로는 그렇긴 한데…….”
“그런데요?”
“문제는 이거야.”
마른 침을 삼킨 크리스가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다른 카드를 내밀었다. 꽤 높은 가문에서 보낸 건지 겉봉에 찍힌 인장부터가 상당히 화려했다. 월계수로 감싸진 문양에 드래곤이 새겨진 형태도 그렇고, 푸른색 밀랍에 은은히 감도는 금빛도 심상치 않았다. ……이거 설마 진짜 금을 갈아 넣은 건 아니겠지?
“세피온 공작가야.”
“……누구요?”
“대귀족 세피온 공작가 말이야. 건국 공신이자 친황파 수장이면서 동부 최전선의 전쟁 영웅! 제국의 수호신! 제국에서 제일 큰 영지를 갖고 있는 데다가 보유 자산을 추정조차 할 수 없다고 알려진! 제국 5대 가문 중 하나인 그 세피온 공작가!”
아무래도 진짜 금가루가 맞는 모양이다. 이제야 귀신이라도 본 듯한 크리스의 얼굴이 이해가 됐다. 대귀족은 쉽게 움직이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특히 세피온 공작가면 제국의 실세라는 말이 있을 만큼, 어떤 의미에선 황실보다도 영향력이 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가문이었다. 일개 헌터한테 초대장을 보낼 가문은 절대 아니라는 소리다. 겉봉에 선명히 찍힌 가문의 인장만 아니었다면 나도 누가 사기 치는 게 아닐까 생각했을 거다.
“심지어 보내온 게 이것만이 아니야.”
“이것만이 아니면요?”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뒤 크리스는 곧 큰 상자들을 한 아름 안아 들고 돌아왔다. 눈이 아플 만큼 화려한 포장을 보려니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뚜껑을 열자 역시나 한눈에도 비싸 보이는 예복과 장신구들이 들어 있었다. 내가 당연히 초대에 응할 거라는 자신감을 드러낸 선물이었다. 그보다 더 시선이 가는 건 다른 부분이었지만.
“남성복이네요.”
현대 아크아돈에 비해 이 시대의 아크아돈은 성별에 따른 차림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정복으로 갈수록 세부적인 장식에서 다르게 표현하는 점들은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대칭 형식이다. 같은 바지 정장이라도 여성복은 양쪽 어깨를 다 덮는 형식의 망토를, 남성복은 한쪽만 덮는 망토를 쓴다. 단추 장식 역시 여성복은 양쪽으로 한다면, 남성복은 한쪽에만 다는 식이었다. 보통은 혼용하는 편이지만 성별을 구분하고 싶을 땐 그렇게 한다고 알고 있다. 그런 면에서 공작가에서 보내온, 망토며 단추며 한쪽에만 장식된 푸른색 계열의 예복은 명백한 남성복이었다.
내 성별을 혼동하는 건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외모는 알려졌지만 공개된 약력이 없다 보니 자기들 마음대로 추론했는데, 선입견 때문에 여성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자극적인 걸 좋아하는 신문사에서 여신이라는 표현을 전면에 박는 바람에 그 오해가 더 확산된 상황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보내온 게 버젓이 남성복이라는 건 시사하는 바가 컸다. 그만큼 공작가에서 내 정보를 파악했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굳이 입어보지 않아도 치수 역시 딱 맞을 게 분명했다.
“과연 세피온 공작가…….”
크리스 역시 감탄하면서도 질린 얼굴이었다. 하긴 대귀족쯤 되면 사람 하나 조사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겠지. 이미 숙소도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크리스를 통해 보냈을 가능성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