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0화
“원래 이렇게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방심했습니다. 제가, 너무 방심한 나머지…….”
“뭐, 그럴 수도 있죠. 일단 당장은 움직이기 어려운 거죠? 계속 잡아두기엔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으니까 이대로 마무리 할게요.”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인 이드리스가 그 말에 다시 마물을 바라보았다. 그를 상대할 땐 딱딱하던 표면은 다시 흐느적거리는 원래 재질로 돌아와 있었다. 다만 누가 봐도 불씨로 보이는 것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중이었다. 물을 증발시키기 위해 열을 내는 것이다. 아무래도 상황에 맞춰 자신의 몸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 수증기가 일면서 놈을 가둬놓은 물이 빠르게 증발하고 있었다. 시큐엘이 잘 버티는 중이었지만 그만큼 마나가 기하급수적으로 빠져나갔다.
“이제 당신과 반대 상성이 되었군요. 아까 절 보셨겠지만, 시큐엘 혼자선 힘들 겁니다.”
“음, 시큐엘 혼자 할 게 아니라 괜찮아요.”
검을 들어 보였더니 아인 이드리스는 물론 근처에 있던 이들도 모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중엔 진혼의 마스터도 있었다.
“그런 검으로 뭘…….”
진혼의 마스터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그 순간 내가 내리뻗은 검날에 파란 기운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검기…….”
누군가의 얼빠진 목소리를 뒤로한 채 그대로 달려가 마물 위로 도약했다. 기다렸다는 듯 시큐엘이 마물을 가둔 물 일부를 거두어 표면이 드러나도록 했다. 그리곤 새로 생성한 물줄기를 얼음으로 만들어 그 위에 강렬하게 내리꽂았다. 하강한 내가 내리찍은 부분과 정확히 같은 지점이었다.
‘오러엔 상성이랄 게 없지. 반대 상성에 취약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일 거고.’
마물은 핵을 파괴하면 죽는다. 에너지가 뭉쳐진 부위는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 그곳을 목적으로 몸을 가르기 시작하니 곧 검 끝에 무언가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있는 힘껏 힘을 줘서 완전히 파고들자 파각 거리는 소리와 함께 깨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러자 크게 펄떡이던 마물이 곧 축 늘어졌다.
“어때?”
“죽었어.”
힐끔 살펴본 이프리트가 가볍게 판정을 내렸다. 그제야 완전히 마음이 놓였다. 안쪽 깊숙이 박힌 검을 뽑아낸 다음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거의 오물 속에 뛰어든 거나 마찬가지다 보니 온몸이 먹물이 묻은 것처럼 더러웠다.
혀를 차며 끈적거리는 액체를 털어내는데 성큼 다가온 시큐엘이 닦아내는 걸 도왔다. 검은색에 가까워졌던 머리칼이 깨끗한 물에 씻겨지면서 다시 원래의 금발로 돌아왔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기다가 뒤늦게 후드가 벗겨졌다는 걸 깨달았다. 도약하는 중에 뒤로 넘어간 모양이었다.
주위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마주친 얼굴마다 다들 할 말을 잃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선이 맞은 진혼의 마스터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입검……의 경지에 이른 검사일 줄은 몰랐군요.”
이어진 말엔 나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왔다.
“어느 쪽을 몰랐어요? 내가 검사라는 것? 아니면 입검의 경지라는 것?”
“……예?”
“몰랐다는 게 이상해서요. 수만 대군을 얼음으로 만들기 전에 내가 검 들고 날뛰었다는 말은 못 들었나 봐요. 난 오히려 당신이 그걸 더 잘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무, 무슨 말인지…….”
그래, 그렇게 또 모른 척을 해야겠지.
빙긋 웃으니 지켜보던 사람들의 얼굴이 더 경직됐다. 그대로 검을 들어 그의 바로 앞을 내리찍었다. 뻣뻣하게 얼어붙은 진혼의 마스터가 떨리는 눈동자만 굴려 아래를 확인했다. 발치 앞에 검에 꽂힌 마물의 촉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까 잡는 과정에서 일부가 튀어나온 듯했다.
“조심하세요. 위험하잖아요.”
낮게 속삭여주니 그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비틀었다. 어떻게든 억지로 웃으려는 얼굴이 가상할 정도였다. 그래 봤자 넌 수로 탐험 확정이다. 아주 신나는 경험을 하게 해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라. 진득한 의미를 담은 시선을 보낸 후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아인 이드리스가 보였다. 얼빠진 표정을 한 그를 보려니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차피 내가 애써도 틀기 어려울 만큼 강렬한 예지라면, 이 정도의 말은 괜찮겠지.
“당신은 좀 더 주변을 돌아보는 게 좋겠어요.”
“……예?”
“미네르바를 너무 걱정시키지 말라고요.”
아인 이드리스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한숨을 내쉰 후 고개를 드는데 멀찍이 군중 사이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망토와 후드로 외모를 가리고 있었지만 그 특유의 고아한 분위기를 몰라볼 수가 없었다. 틀림없는 미네르바였다.
시선이 맞았다고 느낀 순간 바로 피했다. 몸을 돌려 그 길로 현장을 빠져나왔다. 냉큼 뒤따라온 이프리트가 기분이 좋아지라고 사탕을 입 안에 넣어줬지만 심란한 마음은 나아지지 않았다.
* * *
“이 기특하고 굉장한 녀석아. 이번엔 또 무슨 엄청난 일을 벌인 거냐.”
다음날 조용한 찻집에서 따로 만난 크리스는 한 달은 못 잔 것처럼 퀭한 얼굴이었다. 어제 내가 마물을 잡는 바람에 길드 사무실로 기자들이 들이닥쳤다는 소식은 들었다. 새벽까지 내내 시달렸다더니 눈 밑이 온통 까맸다.
“욕할 거면 욕으로 해요 그냥.”
“욕이 나오는 건 맞는데 그게 감탄사인 상황이니까 그렇지.”
그가 들고 있던 신문들을 내 쪽으로 던졌다. 대충 시선을 내리니 일 면에 실린 표제와 관련 내용이 한눈에 읽혔다.
<여명의 정령사! 이번엔 대형 마물을 잡다!>
<물이 바람을 이기다!>
<압도적인 물의 활약! 미네르바의 계약자는 마물 앞에선 유명무실?>
<진혼 길드 초동 대처 방식에 시민들 불만 속출. 황실 균열 조사단 “이번에 등장한 마물은 대형급의 속성 변환 류. 유독 가스와 분진을 뿜을 수 있어. 바람을 쓴 건 큰 실책. 여명의 정령사가 없었다면 대광장 전체가 날아갔을 수도.”>
<눈앞에서 여명에 공헌을 빼앗긴 진혼 길드. 마스터 테오 “큰 피해 막은 것으로 충분. 길드 공헌보다 시민들의 안전이 먼저.”>
“충분하긴 개뿔. 테오 놈, 지금 속이 쓰려서 미칠 지경이겠지.”
크리스가 악마처럼 킬킬거렸다.
“넌 어떻게 된 녀석이 하필이면 활약해도 진혼 길드 앞마당에서 활약하고 그러냐, 너무 기특하게. 아, 쌤통이고 통쾌해서 미치겠다. 진심으로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아. 나 너무 기쁘고 설레서 어제 한숨도 못 잤잖아. 오늘 신문 다 모아두고 평생 보관할 거야. 아니, 아예 길드 가보로 삼을 거다.”
한숨도 못 잔 게 기자단 때문이 아니라 설레서 그랬던 거였나. 어쨌든 그는 미친 사람처럼 실실거리면서 신문들을 담아왔던 상자 안에 다시 소중히 쌓았다. 지난번 활약상을 담은 신문도 이미 전부 보관해 둔 것 같더니, 새로운 취미를 들인 모양이었다.
“참, 근데 너 어제 후드 벗었어? 네 정체에 대한 언급도 있더라?”
“무슨 언급요?”
그러자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크리스가 신문 하나를 펼쳐 보였다. 그냥 읽어보라고 주면 될 걸 굳이 왜 저렇게 보여주나 싶어서 의아해하던 건 눈에 들어오는 글자를 읽기 시작한 순간 그대로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정체가 밝혀진 신비로운 물의 정령사! 외모 또한 범상치 않았다?>
<비현실적이었다! 정령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여명 부활의 일등공신 정령사! 믿을 수 없을 만큼 찬란한 미모! 목격자들 입 모아 증언! “여신이 강림한 줄 알았다!”>
“……그거 당장 내놔요.”
“싫어. 이것도 보관할 거야.”
“크리스.”
“그렇게 무섭게 불러도 안 돼. 어차피 이미 제도엔 다 뿌려졌어. 나 하나 막는다고 될 게 아냐.”
“좋아요. 그거 신문사 어디에요?”
“헌터가 언론인 공격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참고로 언론사를 부숴도 안 돼.”
“……나라는 걸 모르게 하면 되잖아요.”
“그걸 모를 수가 있겠냐?”
쳇, 하고 혀를 차니 크리스가 냉큼 상자의 뚜껑을 닫고 품에 꼭 끌어안았다. 세상 모든 신문이 다 사라져도 이것만은 끝까지 사수하겠다는 기세였다. 그 모습이 자못 비장해서 차마 강제로 빼앗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인터넷은 없는 세상이라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한국이었다면 고작 신문 기사 정도로 끝나진 않았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그보다 내가 돌아가면 나에 대한 기억은 다 사라질 텐데, 이런 기록들은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이것도 전부 사라지는 거겠지? 나중에 크리스가 내가 이 신문들을 왜 갖고 있었나 의아해할 걸 생각하니 우스우면서도 조금 씁쓸해졌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희소식이 있어. 어제 네가 잡은 마물의 부속물 말인데. 다 우리 길드 소유로 인정됐어.”
“정말요?”
“원래 이런 건 잡은 사람이 임자인 구조잖아. 너 혼자 다 잡긴 했으니 진혼도 할 말이 없었겠지.”
확실히 희소식이었다. 마수만큼은 아니지만 마물도 제법 비싼 값에 팔리는 편이었다. 특히 핵은 파괴됐어도 나름대로 에너지를 지닌 부위라 없어서 못 파는 재료였다. 이번 건 대형이라 뭐든 부피가 커서 수익을 기대해 볼 만했다.
일전에 나타났던 마수 아퀼라는 진혼 길드의 소유로 인정됐었고, 어마어마한 값에 팔렸다고 들었다. 크리스가 이번 사건을 통쾌하게 여기는 지점엔 이 부분도 있었다. 눈앞에서 놓쳤다고 억울해했는데 그걸 고스란히 돌려준 셈이었다.
“벌써 여러 곳에서 접선이 오고 있어. 이거 진행하고 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굵직한 건으로 지명 의뢰도 들어올 것 같아.”
“그러면 좋겠어요.”
“당연히 되지. 대형 마물을 단독으로 잡는 정령사가 어디 흔해? 고고한 자존심 지키느라 까다롭게 구는 귀족 나으리들도 다들 관심은 갖고 있을걸? 적어도 네 얼굴엔 관심 있다. 어쩌면 네 얼굴 보겠다고 초대장 보낼지도 몰라.”
“……듣기만 해도 싫네요.”
“뭐, 나도 네가 그런 식의 관심에 휘말리는 건 반대지만 말이야. 일단 가면 인지도는 더 오를걸?”
“절대 안 가요.”
단호하게 답하니 크리스가 다시금 킬킬거렸다. 이후에는 한동안 잡담이 이어졌다. 그 역시 취재 요청에 시달리긴 마찬가지다 보니 서로 때를 맞추기가 쉽진 않았다. 못 보는 동안 쌓인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흘렀다.
“근데 마물은 또 왜 나타난 거래요? 정말 마신관이 한 거래요?”
“여전히 명확한 증거는 없는 모양이야. 이번엔 수상한 사람도 못 봤던 것 같고. 그래도 다들 확신하는 분위기지, 뭐.”
“크리스도 그렇게 생각해요?”
“글쎄, 아니라기엔 너무 깊이 연결된 것 같긴 하지. 일단 균열이라는 현상 자체가 마신관이 일으킬 수 있는 거긴 하잖아.”
마신의 신도인 크리스까지 이렇게 말할 정도면 다른 여론이야 뻔했다. 이거 나중에 제대로 규명이 되긴 하려나. 인어와의 상황도 급하겠지만 균열 문제도 더는 방치해선 안 될 것 같은데. 마신전이 언제까지 봉문을 고수할지 모르겠다.
“다비안은 어때요?”
“여전하지 뭐. 하지만 곧 세공을 제거하는 시술은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정말요? 생각보다 빠르네요. 음지로 알아봐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내가 그동안 여기저기서 주워 먹은 짬밥이 얼만데. 이 정도도 해결 못 했으면 지금까지 살아 있지도 못했지.”
농담조였지만 다분히 뼈가 실린 말이었다. 그가 지난 여명 길드의 수뇌부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래도 이쪽은 좀 진전이 있으려는 모양이다. 다비안의 의식이 깨어나면 물어볼 게 참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크리스를 위해서라도 그가 얼른 정신을 차렸으면 싶었다.
뜻밖의 상황과 마주친 건 크리스와 헤어지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마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맞은편 길에 지나가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
누군지는 바로 알아봤다. 긴 망토를 두르고 있었지만 한눈에 살피기에도 특정할 만한 부분들이 보였다. 훤칠한 체구라든가, 살짝 드러난 짙은 피부색도 그렇고. 허리에 찬 검도 전에 본 적이 있었다. 아이라가 분명했다.
아이라는 무언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빠른 걸음에서도 조급한 기색이 여실히 보였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설마 또 인어한테 쫓기고 있나?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 사라지는 뒷모습을 쫓아 걸음을 옮겼다. 아이라는 사람이 많은 대로변 위주로 다니고 있었다. 인파에 섞여드니 거리를 좁히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골목에서 나오고 있던 사람과 부딪칠 뻔하면서 걸음이 멈췄다.
“아, 죄송합니다!”
“아뇨, 제가 더…… 엘?”
다급히 사과하던 상대에게서 내 이름이 들렸다. 당황해서 고개를 들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밝은 갈색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 전체적으로 선이 부드러운 남자가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앗, 네브!”
“역시 엘 맞네요. 목소리 듣고 설마 했습니다.”
네브가 반가운 표정으로 웃었다. 그의 뒤쪽에선 또 다른 익숙한 얼굴들이 허둥지둥 뛰어오는 중이었다. 시몬과 델라였다.
“얌마, 네브! 혼자 빨리 가지 말고 같이 좀……!”
“두 분, 얼른 오세요. 여기서 엘을 만났습니다.”
“뭐? 엘이라고?”
“세상에, 엘!”
나를 알아본 두 사람이 황급히 달려오며 반가운 얼굴을 했다. 나 역시 모두가 반갑기는 마찬가지였다. 강제 휴가를 받은 이후로 벌써 한 달은 다 됐다. 크리스는 간간이 만났지만 그동안 다른 길드원들은 안부만 접하던 상황이었다.
“어제 활약한 거 다 들었다. 한동안 만나기 더 어려워지겠구나 했는데 여기서 다 마주치네. 어딜 가는 길이야?”
“아, 저는…….”
슬쩍 뒤쪽을 살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아이라는 이미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