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477화 (477/608)

제477화

“별말씀을. 아, 근데 그 목걸이도 불 속성인 거 알아?”

이어진 말은 생각지 못한 거라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거 불 속성이라고 했어.”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드니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그가 다시 같은 말을 반복해줬다.

“들었어. 그런데 조개 화석인데 불 속성이라니?”

“뭐, 해양 생물 출신이라고 다 물 속성은 아니지. 그렇게 치면 화석이 된 지 더 오래됐으니 땅 속성이어야 하게? 어쨌든 그거 불 속성 맞아.”

“그렇구나. 몰랐어.”

“워낙 희미해서 잘 느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야. 어쨌든 내가 그 안에 화기를 더 넣어놨어. 이제 그걸로 불도 피울 수 있을 거야. 겨울엔 난로 대용으로도 쓸 수 있을 거고.”

와아…….

눈을 깜빡이니 그가 웃는 얼굴로 의아해했다.

“왜 그렇게 봐?”

“아니, 뭔가 굉장히…… 친절한 것 같아서.”

“난 원래 친절한데? 정령사한테는 특히 더 그래. 네가 불의 정령사였으면 아주 업고 다녔을걸?”

누가 봐도 농담조였지만 어쩌면 이 정령왕이라면 진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니 그가 아쉽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참 이상하단 말이야. 검도 그렇고, 목걸이도 그렇고, 축복의 힘도 그렇고. 이렇게 불이랑 인연이 깊은데 도련님은 왜 불의 정령사가 안 되고 물의 정령사가 됐지?”

그러게 말이야. 내가 왜 물의 정령사가 됐지.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생각했다. 이건 솔직히 엘뤼엔이 이해해줘야 한다. 나도 정말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받는 호의란 정말 달콤한 거였다.

해와 바람의 내기를 다룬 동화 속 이야기가 떠올랐다. 왜 해가 바람을 이겼는지 다시금 깨달은 기분이었다.

* * *

이후의 여정은 순탄했다. 루이사 숲에서 일어나는 미지의 현상이 사실은 노예 상단이 벌인 일이었다는 건 화제가 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신문사마다 이번 사건을 대서특필하며,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인면수심의 조직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영주는 이번 사건을 해결한 우리 길드를 높이 치하하고 본래 약속한 상금보다 더 넉넉한 포상을 내렸다. 돌아가는 길을 위해 비행선을 수배해주기도 했다. 덕분에 올 때는 열흘을 꼬박 채웠던 여정이 귀환 길엔 불과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아쉬운 점은 이번에 죽거나 체포된 이들 중에 상단주는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당연하겠지만, 그와 함께 사라진 왕세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견되지 않은 것엔 외각에서 주둔하고 있던 군대도 해당했다. 집계된 인원이 생각보다 적어서 은밀히 알아봤는데, 외각의 병력에 대한 건 아무도 알지 못했다.

혹시 유니콘들이 착각했던 건가 싶어 이프리트에게도 확인해 봤지만 군대가 존재한 건 맞았다. 아마도 문제가 생겼음을 파악한 순간 신속하게 달아난 것 같았다. 그만한 군대가 단숨에 사라질 수 있었던 것만 봐도 확실히 평범한 상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해선 굳이 알리지 않았다. 지금은 발설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크리스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국의 왕세자가 연관된 일이야. 지금 네가 말해봤자 증거가 없으니 괜히 골치만 아파질 거야. 왕세자 쪽에선 그냥 평범한 노예 상단인 줄 알았다고 발을 빼면 그만이니까.”

다른 이들이 자리를 비운 동안 진행된 짧은 회의였다. 모르던 정황을 알게 된 크리스는 심각한 얼굴을 하면서도 차분히 충고부터 했다. 당시에도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던 왕세자를 생각하면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하긴 그때도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몰아가긴 했어요.”

“그렇다니까. 오히려 너만 왕실 모욕죄로 얽힐 수 있어. 그럼 그냥 재수가 없어지는 정도가 아니야.”

“크리스는 어떻게 생각해요?”

“무조건 관련 있지.”

돌아온 대답엔 일말의 고민도 없었다. 그의 시선이 한쪽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는 다비안을 향했다. 유리처럼 텅 빈 눈을 한 친구를 지켜보는 그의 얼굴은 괴롭게 일그러져 있었다.

“다비안은 에펜 왕국의 왕실을 조사하고 있었어. 저 녀석, 왕세자에게 쫓기는 중에 널 만난 거라고 했지? 그 상황에서 실종된 녀석이 저 꼴로 나타났는데, 그 주인인 상단주와 왕세자가 아는 사이다? 이건 누가 봐도 확실하지.”

맞는 말이었다. 게다가 그 노예 상단은 왕세자와만 연관된 것도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됐다.

“진혼 길드 뒤에 에펜 왕국의 왕실이 있다는 말이네요.”

“그게 뭐든 평범한 후원은 아니고 말이야.”

이미 내게서 상황을 들어 알고 있는 크리스가 낮게 이를 갈았다. 왕실이나 귀족 가에서 한 길드를 후원하는 건 그리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불법 노예 상단과 관련된 길드 뒤에 다른 나라의 왕실이 존재한다면 그건 여러모로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반역.’

무심결에 생각했던 게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설령 진혼 길드 쪽에선 그런 의도까진 없었다고 해도 혐의를 피하긴 어려울 것이다. 이미 다른 왕실과 손잡고 제국민을 팔아넘긴 것부터가 반역 행위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덕분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인 이드리스는 이걸 알고 진혼에 들어간 건가?’

알아도 문제고 몰라도 문제다. 그래도 차라리 모르고 있기를 바랐다. 그가 반역에 가담하면 미네르바도 움직인다는 소린데, 그럼 진짜 일이 커진다. 난 진혼 길드가 잘되는 꼴도, 에펜 왕국의 왕세자가 승승장구하는 것도 볼 생각이 없으니까. 반드시 힘든 전쟁이 될 거다. 그런 게 아니라도 일단 미네르바가 이런 일에 휘말리는 게 싫었다.

“고발하려면 확증이 필요해. 다비안이 정신을 차리면 어느 정도는 해결되겠지. 이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섣불리 움직이지 마. 다들 너만 주시하고 있을 거야.”

신신당부하는 크리스에게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왜 일이 이렇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그냥 드래곤 하나 만나겠다고 시작한 일이 생각보다 너무 복잡해지고 있었다.

* * *

귀환 후 길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우리가 마키나 급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소식이 제도에 널리 알려진 덕분이었다. 사실상 미확정 등급이었던 데다가, 범죄 조직을 일망타진한 결말이다 보니 길드의 위세가 단숨에 급부상했다.

특히 나 혼자 거의 해결한 것으로 알려져서 그런지 물의 정령사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게 높아졌다. 무슨 소식이 어떻게 알려진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수만 대군을 얼음 동상으로 만들었다느니, 루이사 숲이 영원한 겨울이 됐다느니 하는 엉뚱한 소문까지 도는 모양이었다.

헛소문이 어떻게 돌건 간에 길드가 유명해진 건 좋은 일이었다. 협회에서도 더는 예전처럼 대놓고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됐다. 문제는 진위를 파악한답시고 시도 때도 없이 기자들이 들이닥친다는 거였다. 내가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니 억지로 외모를 확인하려고 습격하는 놈들도 많아졌다.

개중엔 거친 수법을 쓰는 자들도 꽤 있었지만 규정 때문에 강경하게 대처할 수도 없었다. 대륙 공통으로 군인이나 헌터는 민간인, 그중에서도 특히 언론인은 공격하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다. 덕분에 자꾸만 업무에 차질이 생기자 크리스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넌 한동안 휴가다.”

그가 비장한 얼굴로 내 어깨를 짚었다.

그렇게 뜻밖의 휴가가 시작됐다.

“보통 휴가라고 하면 쉬지 않아?”

이프리트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굳이 따라다닐 필요는 없다고 말했는데도 그는 내가 어딜 가든 붙어 다녔다. 지금도 내 일과를 말없이 지켜보던 중이었다. 마주한 얼굴은 황당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조금 의아해졌다.

“쉬고 있잖아?”

“음, 일단 묻겠는데. 넌 쉬는 걸 뭐라고 생각해?”

“일을 안 하는 거?”

“어, 그래. 물론 그것도 쉬는 거긴 하지. ……근데 보통 검술 훈련은 일에 포함하거든.”

그가 질린다는 듯이 내 손에 들린 검을 응시했다. 그 시선에 나 역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붕대로 휘감아둔 손잡이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하지만 이건 매일 해야 해. 트로웰이 하루도 거르면 안 된다고 했어. 아직 힘 조절이 잘 안 돼서 연습이 필요하기도 하고.”

“성실한 건 좋은데 말이야. 지겹지도 않냐.”

“어차피 딱히 할 것도 없는걸.”

지금은 축제가 열리는 계절도 아니고, 제도 구경이라면 달리기 훈련 때문에 매일 뛰어다니면서 지겨울 정도로 했다. 상점 거리도 장갑을 구하러 다니는 사이에 익숙해져서 더는 볼 게 없었다. 그런데 이프리트는 펄쩍 뛰었다.

“할 게 왜 없어? 인간만큼 쾌락에 집중하기 쉽게 되어 있는 생물이 어딨다고?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거나 가까운 곳에 여행을 가거나 하면 되잖아.”

“그런 건 자꾸 돈을 쓰게 된단 말이야. 내 돈도 아닌데.”

“뭐? 돈?”

“물론 이미 펑펑 쓰는 상황에서 이런 말 하면 좀 그렇긴 하지만. 이게 아무래도 신세 지는 쪽은 마음이 좀 그렇더라고. 그래서 최대한 필요한 일에만 쓰려고…….”

“하하, 이거 골 때리네. 아니 얘들은 대체 애를 어떻게 키우는 거야? 네 계약자 돈 많아! 아니, 나도 많아! 아주 마르고 닳도록 펑펑 써도 돼! 아니, 좀 써주라!”

“오, 지금 좀 설렜어.”

“그치? 그러니까 놀러 가자.”

“……같이?”

“그럼 당연히 같이 가야지? 왜, 혼자 가고 싶어?”

“아, 아니. 같이 가면 좋지.”

황급히 대답하니 붉은 눈동자에 햇빛 같은 웃음이 서렸다.

“좋아, 날 믿고 따라만 와. 내가 이 근방 맛집은 다 꿰뚫고 있다. 책임지고 맛있는 것만 먹여줄게.”

……와, 나 진짜 왜 불의 정령사 아니지.

이프리트는 사람을 홀리는 방법을 아는 게 분명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그와 함께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이프리트는 마치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란 사람처럼 제도의 모든 것에 다 훤했다. 그가 데려간 식당에 있는 건 대부분 처음 보는 음식뿐이었는데, 전부 다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맛있었다. 다음엔 어디를 갈지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들떴다. 평소랑 똑같은 거리를 걷고 있는데 목적이 다르다는 것만으로도 느낌이 전혀 달라서 신기했다. 지금 엘뤼엔이랑 트로웰은 영역을 복원하느라 한창 고생하고 있을 텐데, 이렇게 즐거워도 되는지 미안해질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엘퀴네스랑 트로웰이 너무 늦어지는 것 같아.”

“아, 며칠은 더 걸릴걸. 특히 엘퀴네스는 좀 걸릴 거야. 난 걔가 봉인을 그렇게 빨리 파괴한 게 더 놀라워. 진짜 비장의 한 수였는데.”

“상급신이랑 손잡았다고 들었는데 진짜야?”

“……정령왕도 가끔은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있는 거야.”

사실이구나. 상급신이라면 다 정령왕 출신일 텐데, 대체 어느 정신 나간 신이 그런 짓에 동참했는지 모르겠다. 그 역시 평소 엘퀴네스에게 쌓인 게 많은 이프리트 출신이었을까. 하지만 내가 아는 신 중에서 그런 짓을 할 만한 신이라면…….

“카노스밖에 없는데.”

“어? 마신 맞아.”

“…….”

이런 건 제발 맞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창 맛있게 먹고 있던 아이스크림에서 갑자기 아무런 맛이 나지 않았다. 이프리트는 재밌다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아무한테도 말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트로웰이나 엘퀴네스도 그 상급신이 누군지는 몰랐을 텐데. 마신의 문장을 가지고 있다더니, 위조가 아니구나?”

“어, 음, 위조 맞아. 그냥 개인적으로 마신의 성격을 좀 아는 것뿐이야. 그래서 그냥 짐작해 본 거고. 진짜 맞을 줄은 몰랐어.”

“에이, 신탁이라도 받은 줄 알았더니.”

이프리트가 아쉽다는 얼굴을 했다. 엘뤼엔은 내가 신관일 가능성만으로도 불쾌해했고 트로웰도 좋게 보는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그는 오히려 재밌어하는 것 같았다.

“……마신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잘 몰라. 그냥 정원에 놀러 온 천사랑 마주쳤는데 내가 씩씩거리는 걸 보더니 도와주고 싶다는 전언을 보내더라고. 그래서 손잡기로 했지.”

“그게 다야? 그 신이 왜 도와주고 싶다고 한 건데?”

“재밌어 보인다나. 이번 엘퀴네스가 역대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거 알아? 그래서 흥미를 갖고 있었나 봐. 자기 힘으로 물의 영역을 얼마나 봉쇄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고 하더라.”

……카노스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발상이긴 했다.

이때부터 여전했구나 싶다고 해야 할지, 별다른 의미는 없어 보이니 안심했다고 해야 할지, 참 이래저래 복잡한 마음이었다.

“아, 근데 이거 애들한텐 비밀로 해줄래? 하필 마신을 끌어들인 거 알면 엘퀴네스가 이번에야말로 날 봉인하려 들 거야.”

“나 엘퀴네스 계약잔데.”

“다음엔 뭐 먹으러 갈까? 고기? 매운 거 좋아해?”

“……노력은 해볼게.”

아무래도 난 생각보다 되게 쉬운 애인가 보다. 굳이 몰라도 되는 걸 확인한 기분에 내심 한탄하고 있으려니 이프리트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보기 싫은 애가 보이네.”

무슨 소린가 싶어서 돌아보자마자 단번에 상황을 이해했다. 저편에서 생각지 못한 얼굴이 보였다.

“엘 아닙니까? 엘 맞지요?”

놀란 표정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바로 아인 이드리스였다. 저 남자가 왜 이 가게에 들어온 걸까. 게다가 후드를 쓰고 있는 날 또 쉽게 알아봤다. 이번에야말로 입맛이 뚝 떨어졌다. 아이스크림을 더는 먹을 수가 없어 가만히 스푼을 내려놓으니 그걸 바라보는 이프리트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오랜만이네요.”

“정말 오랜만입니다. 여기서 당신을 뵙는군요. 길드 사무실에 찾아가도 뵐 수가 없어서 곤란했습니다.”

“절 찾으셨어요?”

“네, 안부가 궁금하기도 했고, 요즘 돌고 있는 소문에 관해 묻고 싶은 것도 있어서요.”

밝게 미소 지은 아인 이드리스가 내 옆의 의자에 앉으려 할 때였다.

“이봐.”

돌연 낮은 목소리가 그의 말을 가르고 끼어들었다.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프리트였다.

“얘 지금 일행 있는 거 안 보여?”

그제야 이프리트를 인식했는지 아인 이드리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인상을 흐리는 마도구를 차고 있긴 했지만, 아예 그의 존재 자체를 생각지 못한 듯 보였다.

“할 말이 있으면 나중에 해. 얜 지금 나랑 노느라 바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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