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6화
“이야, 사 형제? 부모가 자식 농사에 꽤 힘썼나 보네. 하긴 너만 한 혈통을 가진 집안은 좀 힘을 내야 해.”
이프리트가 다시 끼어들었다.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 무엇인지 모를 감정으로 부담스럽게 반짝거렸다.
“넌 부모 중에 어느 쪽을 닮은 거야?”
“그, 글쎄. 아마 아버지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오, 아버지가 참 잘생겼나 보네. 자질도 부친 쪽이야?”
“그런 편이긴 해. ……근데 왜 이런 걸 물어?”
“그야 친해지려는 거지. 앞으로 자주 볼 텐데 서로 아는 게 많을수록 좋잖아.”
“자주 보다니?”
앞으로 자주 찾아올 거란 소린가. 생각만 해도 부담스러운데 이 말을 나보다 더 싫어할 것 같은 엘뤼엔이나 트로웰은 오히려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애당초 이프리트가 왜 여기 있는 걸까. 당시 엘뤼엔을 생각하면 당장 그를 봉인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럴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시간이 약이라지만 고작 이틀 사이에 용서할 리는 없을 텐데, 그 사이에 무슨 협의가 이뤄진 건지 모르겠다. 그 생각이 얼굴에도 드러났는지 트로엘이 빙긋 웃었다.
“원래 엘퀴네스는 불의 영역을 수몰하고 이프리트도 봉인할 작정이었어.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나서 노선을 바꾸기로 했어.”
“더 좋은 방법?”
고개를 돌리자 엘뤼엔과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어딘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원래 자주 그러는 편이긴 한데 오늘따라 유독 기분이 더 나빠 보였다. 그 시선이 날 노려본다고 생각되는 건 착각만이 아닐 거다. 덕분에 그가 손가락을 뻗는 순간엔 나도 모르게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손가락이 가리킨 건 내가 아닌 이프리트였다. 이어진 말은 다른 의미로 날벼락이었지만.
“앞으로 저건 네 종이다.”
“……어?”
“맘대로 부려 먹어라.”
“……어어?”
부려먹으라니. 설마 종이라는 게 내가 생각한 그 ‘종’이야?
황당해져서 돌아보니 이프리트가 담담하게 웃었다. 많은 걸 내려놓은 체념의 얼굴엔 진득한 해탈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됐으니 잘 부탁해, 도련님.”
“…….”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 시대의 정령계는 정말 정말 화목한 거였다.
* * *
이틀 사이 내가 옮겨진 곳은 아르논이라는 마을이었다. 숲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로, 여관이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인구가 적은 촌락이었다. 그래선지 건물 설비도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목조로 지어진 데다가 그마저도 낡아서 걸을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채 치우지 못한 거미줄이라든가 덧대다 만 판자까지. 구석구석 급하게 청소하고 보수한 흔적이 얼기설기 남아 있었다.
멈춰선 곳은 삼 호실이라 적힌 문 앞이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몇 차례 문을 두드린 후에도 한참 만에야 안쪽에서 기척이 났다. 이윽고 거친 이음새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초췌한 얼굴을 내밀었다. 아직 잠에서 덜 깼는지 퉁퉁 부은 눈을 한 크리스였다. 까치집처럼 뻗친 머리를 긁으며 온갖 인상을 찌푸리던 그는 다음 순간 나를 확인하고 눈을 마구 비볐다.
“어? 엘? 너 엘이야?”
“잘 잤어요, 크리스?”
경악하는 얼굴을 향해 나는 씩 웃어주었다. “뭐?”, “엘이라고?” 그 순간 안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낯익은 얼굴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다들 막 잠에서 깨어난 부스스한 모습이었다.
“세상에, 엘!”
“너 깨어난 거야?”
“괜찮으신 겁니까?”
경악하는 이들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다음 모두의 모습을 차분히 살폈다. 무사하다는 건 알았지만 멀쩡한 모습들을 눈으로 확인하니 안심이 됐다. 다시 웃어주자니 크리스가 나를 덥썩 끌어안고 울먹거렸다.
“이 무모하고 엄청난 녀석아! 진짜 이러기냐! 걱정했잖아! 도대체가 너란 녀석은……!”
“음, 알았으니 떨어져요.”
“싫어! 달라붙어 있을 거야! 이 기특한 녀석! 멋있는 녀석!”
욕을 하고 싶은 건지 칭찬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헤어질 때의 상황이 워낙 안 좋았던 탓인가. 아무래도 내가 이틀간 의식이 없었던 게 상당한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말려보라는 뜻으로 다른 일행을 돌아봤지만 별로 소용은 없었다. 오히려 그들까지 앞다투어 내게 달라붙었다.
덕분에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시끄럽다는 항의를 받고 방 안으로 들어온 후에야 진정한 그들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동안의 일을 알아서 신나게 떠들었다.
그날 하얀 얼음으로 뒤덮인 노예 상단은 그대로 궤멸했다고 한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건 천막 안에 있던 납치된 사람들과 마침 안에서 쉬고 있던 운 좋은 일부뿐. 그들 역시 모두 기절한 상태라 굳이 제압하고 말 것도 없었다.
풀려난 후 이런 상황을 파악한 크리스는 곧바로 마을을 찾아가 영주성에 통신을 보내 사태를 신고했다. 영주는 긴가민가하면서도 조사관을 보냈고, 이 모든 일이 사실로 확인되면서 곧바로 병사들이 파견됐다고 한다. 그 뒤로 납치된 이들은 모두 치료를 위해 옮겨졌고, 살아남은 상단 관계자는 생포된 채 끌려갔다는 결말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은 내 공헌이 되어 있었다.
“……누가 뭘 해요?”
“네가 한 일 맞잖아. 작은형님 말씀으로는 네가 전부 얼려놓고 쓰러졌다고 하던데. 아니야?”
“어, 음, 그런가 봐요.”
하긴 그 와중에 정령왕이 강림해서 다 쓸어버렸다고 할 순 없겠지. 게다가 난 그의 계약자이니 결과적으로는 내가 한 일이나 마찬가지이긴 했다. 머쓱해져서 긍정하니 모두의 눈이 부담스럽게 초롱초롱해졌다.
“밖으로 나왔다가 진짜 엄청 놀랐잖아. 그 많은 병사가 전부 얼음 동상이 되다니. 상급 정령사가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굉장한 줄 몰랐어.”
‘그야 상급 정령사의 실력이 아니니까요.’
차마 솔직하게 답할 수 없는 말을 삼키며 어색하게 웃었다. 여기에 정령사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건지 알 텐데, 이럴 땐 희소한 능력이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그보다 세공된 사람들은 다시 고쳐질 수 있는 거예요?”
“아, 그렇대. 좀 까다롭긴 해도 다행히 고쳐질 수는 있나 봐. 머리에 새겨둔 마법진을 제거하면 된다는 것 같아. 한동안 후유증은 남겠지만.”
“그래도 다행이네요.”
“응, 정말 다행이지.”
크리스가 쓰게 웃었다. 그의 시선이 뒤쪽 의자에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인형처럼 멍하니 앉아 있는 흑발의 남자는 다비안이었다. 그는 천막 안에 있지 않았는데도 화를 피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구석에 쓰러져 있는 걸 크리스가 발견하고 몰래 빼돌렸다고 했다.
크리스는 운이 좋았다고 여겼지만, 그게 단순한 운일 리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힐끗 옆으로 시선을 보내니 문에 기대어 서 있던 금발의 남자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누구 공로인지는 충분히 잘 알겠다.
“저기, 엘……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건데 저분은 누구야?”
때마침 델라가 조심스럽게 살피며 물어왔다. 그와 동시에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주목했다. 다들 진작 묻고 싶었던 걸 참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내가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금발의 남자, 이프리트가 빙긋 웃었다.
“아, 난 신경 쓰지 마. 그냥 쟤 그림자 같은 거야.”
“그, 그림자?”
“시종이기도 하고, 돌보미이기도 하고, 보호자이기도 하지. 뭐든 편한 쪽으로 생각하면 돼.”
“대체 무슨…….”
“앞으로 자주 볼 테니 잘 부탁해.”
발랄한 인사에 당황한 시선들이 다시금 내게 몰려들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심하려니 모든 게 다 귀찮아졌다. 결국 떠오르는 건 가장 간단한 답변뿐이었다.
“……그냥 무시하세요.”
사고는 이프리트가 쳤는데 왜 고통은 내가 받아야 하는가.
정령왕더러 인간의 종이 되라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심한 처사였다. 엘뤼엔이 의도한 바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 엄청난 지시를 그대로 따를 생각은 없었다. 같은 정령왕에게 이러는 건 좀 너무한 것 같다, 이건 진짜 아니다, 내가 부담스러워서 싫다, 구구절절 변명하며 극구 사양하니 엘뤼엔도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다른 대안을 만들기로 했다. 종에서 보부로, 호칭을 바꾸기로.
“대체 뭐가 다른 거야?”
어처구니없었지만 그때쯤엔 더는 항의할 수도 없었다. 이제 내가 깨어났으니 못다 한 수습을 하고 오겠다면서 트로웰과 같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뭐라고 거부하든 철회할 생각이 없다는 의지를 완곡하게 돌려 말한 셈이었다.
“도련님, 네가 아직 네 계약자를 모르는 모양인데. 걘 원래 보복은 무자비하게 하고 한번 결심한 건 잘 안 바꿔. 그냥 우리가 체념하는 게 더 빨라.”
망연자실해서 사라진 자리를 바라만 보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이프리트는 그저 태연하기만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건가 싶으니 보는 눈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잘 알면서 왜 자꾸 엘퀴네스와 싸워?”
“그야 난 불이고 걘 물이잖아. 반대 상성이라는 건 원래 그런 거야.”
“그런 것치곤 너무 혼자만 열 올리고 있지 않아?”
“아픈 부분 찌르는 거 아니다.”
곧바로 정색하는 걸 보니 본인도 알긴 아는 모양이다. 하긴 알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있긴 하지. 짠한 마음으로 바라보자 그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그냥 포기해. 이참에 서로 사이좋게나 지내자고.”
“인간의 뒤치다꺼리나 하게 됐는데 당신은 뭐가 그리 태연해?”
“뭐, 영역이 수몰되는 것보다는 난 이편이 더 좋은데? 이 상황 자체가 좀 재밌기도 하고.”
“이게 재밌다고?”
얼굴을 찌푸리는 나를 향해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어지는 말은 장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엘퀴네스는 말이지, 진짜 냉정한 녀석이야. 한번 결정한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관철해. 화나면 화날수록 차가워지는 성질인 건 딱 봐도 알지? 이거 진짜 그냥 하는 말 아냐. 걘 그냥 천성이 물보다 얼음에 더 가까워. 감정이란 게 있나 싶을 정도야.”
“계약자 앞에서 험담이야?”
“험담은 무슨, 사실을 말하는 거지. 트로웰도 그래. 그 녀석이 생긴 건 깜찍해도 절대 누굴 살뜰하게 챙기거나 하는 성격이 아니거든? 매정하기로는 엘퀴네스 둘째가라면 서러울 지경이야, 걔가. 그래서 난 내가 이번에 진짜 위험할 거라고 생각했어. 나름대로 각오도 단단히 했단 말이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데?”
“근데 오히려 평소보다도 평화롭게 지나갔어. 네가 쓰러져서 다 멈췄지 뭐야.”
대체 이 말의 결론이 뭔지 모르겠다. 그래서 덜 맞은 게 아쉽다는 소린가? 황당해서 바라보니 이프리트가 피식 웃었다.
“네 옆에 붙어있으면 재밌는 구경 많이 하게 될 것 같아.”
그 말을 들었을 때 오한이 인 건 기분 탓만은 아닐 거다. 분위기를 보니 아마 엘뤼엔의 지시가 없었어도 알아서 우리를 따라다녔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내 앞날이 더 피곤해졌다는 소리였다.
어쨌든 그는 사람들 앞에선 ‘릴’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로 했다. 그편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것도 있지만, 앞으로 자주 어울려야 하는 길드원들의 부담도 덜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보다도 효과가 너무 좋았다.
“푸하하! 그게 진짜야?”
“그렇다니까. 그때 내가 얼마나 황당했는지 알겠지? 걔넨 다 제정신이 아니야.”
“으하하, 배 아파. 릴, 너 말 너무 재밌게 하는 거 같아.”
“그런 말 많이 들어.”
길드원들은 순식간에 그와 친해졌다. 엘뤼엔이나 트로웰처럼 보고도 그냥 무시하거나, 좀 더 발전해봤자 서먹서먹한 인사 정도만 오가게 될 거란 내 짐작을 완전히 벗어난 궤도였다. 스스럼없이 말을 트고 화기애애하게 어울리는 모습이 마치 처음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 같았다. 그러고 보니 노예 상단에 잠복했을 때도 그들과 꽤 친해 보였었지. 그래서 더 외부자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정말 생각지 못한 재주를 가진 정령왕이었다.
이프리트는 쓸데없이 까다롭지도, 요구 사항이 많지도 않았다. 식사 시간에도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이건 나도 처음 알았는데, 음식물 분해에 어느 정도는 시간이 걸리는 다른 정령왕들과는 달리 그는 곧바로 태워버리면 돼서 큰 부담이 없단다. 솔직히 그건 좀 부러웠다. 하지만 그에게 본격적으로 호감을 느낀 건 의외의 섬세한 점을 발견했을 때였다.
“참, 도련님. 이거 받아.”
그가 던져준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잃어버린 파이어 버스터였다.
“앗, 내 검!”
“도련님 거 맞지? 창고에 못 들린 것 같길래 내가 잘 챙겨뒀어.”
솔직히 완전히 잊고 있었던 참이라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다행히 그는 파이어 버스터가 에고소드라는 걸 알아봐도 그 안에 실린 힘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이 검, 불 속성이네.”라고 재밌다는 듯이 말했을 뿐.
“그리고 이것도 받아.”
다음으로 그가 건네는 걸 봤을 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랑시가 내게 준 조개 화석 목걸이였기 때문이다. 아니, 저게 왜 이프리트한테 있지? 그제야 허둥지둥 가슴 부근을 더듬어봤지만 잡히는 감각이 전혀 없었다. 전혀 몰랐었는데 저것도 압수되었었던 모양이다.
“없어진 사실도 모르고 있을 줄 알았어. 장신구 종류는 마도구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전부 압수해. 팔찌랑 장갑은 안 벗겨져서 일단 그대로 두고 목걸이만 뺀 거야.”
“그, 그렇구나.”
눈에 보이는 건 다 그대로길래 검만 압수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안 빠져서 그냥 놔둔 거였구나. 팔찌로 장갑을 고정해둬서 천만다행이었다. 하마터면 마신의 문장을 들킬 뻔했다고 생각하니 식은땀이 흘렀다.
‘랑시한테는 미안한 일을 했네.’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 해도 사라진 걸 이제야 깨닫다니, 뭐라 할 말이 없는 실책이었다. 그대로 잃어버렸으면 정말 크게 상심했을 거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알아보고 되찾아준 이프리트가 다시 보였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목걸이의 형태가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과 조금 달랐다. 랑시가 준 목걸이 줄은 너무 짧아서 내가 임의로 가죽끈을 달아놨었는데, 그게 가는 사슬 줄로 바뀌어 있었다. 덕분에 기존보다 훨씬 더 세련되어 보였다. 의아해하는 걸 느꼈는지 이프리트가 그 이유를 설명했다.
“곱게 벗기기 귀찮았는지 끈을 강제로 끊어냈더라고. 그래서 내가 어울리는 거로 달아봤어. 강화마법에 잠금 마법도 걸린 거라 누가 강제로 벗기려고 해도 이제 떨어지지 않을 거야.”
“고,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