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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475화 (475/608)

제475화

내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릴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뻣뻣하게 굳은 몸이 누가 봐도 일부러 외면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물론 엘뤼엔은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가 릴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더니 그의 목 부근에서 무언가를 잡아 강제로 뜯어냈다. 그러자 탁한 금발이 눈부신 금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타오르는 불꽃의 중심부와 같은 색이었다. 변화가 일기 시작한 건 그의 얼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꺼풀 덮여 있던 막을 걷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이목구비가 순식간에 선명해지며 입체적으로 변해 갔다.

정신을 차렸을 땐 우연히 마주쳐도 알아보지 못할 것 같은 흐릿한 인상의 남자는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한눈에도 화려한 남자가 남아 있었다. 분명 같은 얼굴인데 풍기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덕분에 너무 놀라면 목소리가 나가지 않는다는 것만 실감했다. 손짓으로만 요란하게 난리를 치고 있는 나를 향해 트로웰이 쓴웃음을 지었다.

“맞아, 쟤가 이프리트야.”

“……! …! ……!”

“놀란 거 알았으니까 그만 진정해.”

그동안 릴은, 아니, 알고 보니 이프리트라는 남자는 바닥에 다시 처박혔다. 지친 모습으로 주저앉은 그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기니, 머리칼의 밝기가 차분해지면서 붉은색에 더 가까워졌다. 내가 아는 이프리트와 같은 색이었다. 그 익숙한 머리 색을 보고나니 정말로 실감이 들었다. 정말이다. 정말 이프리트였다.

“엘퀴네스를 골탕 먹이려고 그 계약자인 널 괴롭힌 거야.”

“허…….”

기가 막혀서 죽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지금이 아닐까. 어쩐지 이런 노예 상단에서 놀기엔 말도 안 되는 실력이다 싶었다. 대체 뭐하는 인간인 건가 했는데 인간이 아니었을 줄이야.

“복수가 목적이라더니…….”

그게 엘뤼엔이었어?

기가 막혀 바라보니 그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욕설을 삼키는 얼굴엔 낭패감과 곤혹스러움, 죄책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뻔뻔하게 나올 줄 알았는데 그 점은 조금 의외였다.

“남의 계약자를 건드렸을 땐 그만한 각오도 했겠지.”

엘뤼엔이 그의 상체를 다시 발로 짓밟고 얼음 창을 겨눴다. 조금 누그러져 있던 이프리트의 눈매가 대번에 샐쭉해졌다.

“이게 어디 내 탓만이야?”

“네 탓이 아니면 뭐지?”

“젠장! 이 씹어먹을 새끼야! 네가 먼저 날 엿 먹였잖아! 네가 내 영역을 부수지만 않았으면 나도 이렇게까진 안 했……! 아악! 그만 때려!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다고! 으아악! 차라리 본계로 가서 때리든가!”

이후에는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솔직히 이걸 싸움이라고 불러도 될지도 잘 모르겠다. 엘뤼엔은 정말 야무지게 이프리트를 팼다. 비명을 내지를 만큼 고통을 가하면서도 역소환이 되지는 않을 정도로는 조절하는 게 가히 예술의 경지였다. 뭘 어떻게 한 건지 이프리트 쪽에서 도망치지도 못하게 만들어둔 것 같았다.

본계에서 받는 영향이 더 큰데도 굳이 여기서 괴롭히는 이유는 뻔했다. 이프리트만이 아니라 그의 계약자들까지 다치게 하려는 거다. 과연 괜히 나중에 형벌의 신이 된 게 아니었다.

“이번엔 정말 무사히 넘어가기 힘들겠는걸.”

트로웰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한숨처럼 이어졌다. 그에겐 이미 익숙한 광경인지 내심 지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예전에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땐 카노스가 이프리트의 위치에 있었다. 그때도 상당히 심하다 싶었는데 오늘 일을 겪으니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지금 이프리트에 비하면 당시 카노스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거였다. 설마 엘뤼엔이 봐줬을 리는 없고, 아무래도 카노스 쪽이 일부러 맞아줬던 모양이다.

‘……어쨌든 다 끝난 건가.’

몸에서 조금 힘을 빼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눈앞에서 한 사람이 처절하게 얻어맞고 있는데 이 모든 광경이 평화롭게 느껴진다니. 나도 조금 정상은 아닌 것 같다.

“어차피 저러다 곧 역소환 시킬 거야. 일단 나도 다시 정령계에 다녀올게. 결계가 풀리자마자 온 거라 아직 수습할 게 남아 있거든. 자세한 이야기는 다녀와서 해줄 테니 기다려.”

설명을 잇던 트로웰이 나를 돌아보았다. 다시 돌아가는구나. 하긴 이제 막 이프리트를 잡은 거라면 아직 정령계도 엉망이겠지. 그동안 나도 여기 상황이나 수습해야겠다.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뭔가 당황한 듯한 모습이었다.

“엘?”

왠지 그의 목소리가 멀어진 것 같았다.

분명 바로 옆에 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 * *

어느 순간 반짝 눈이 떠졌다.

처음엔 잠시 어리둥절했다. 내가 언제 눈을 감았지? 떴다는 건 감았다는 전제가 있기에 가능한 일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눈을 감은 기억이 없었다. 다음으로 느껴진 건 당혹감이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이 달라져 있었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보이던 얼음 동상들은 어디로 갔는지 전부 사라지고 그 대신 처음 보는 낯선 천장이 보였다. 내가 침대에 누워 있다는 건 그보다 조금 더 늦게 깨달았다.

“일어났군.”

당황해서 벌떡 몸을 일으키는데 아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엘뤼엔이 보였다. 그는 내 바로 옆에 있는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눈처럼 새하얗던 모습이 다시 본래의 물색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로 돌아온 채였다.

“어? 내가 왜…….”

“엘, 이제 정신 차린 거야?”

그때 문이 열리며 트로웰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엔 릴, 아니, 이프리트도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조금 전까지 얻어맞던 사람이 왜 저렇게 멀쩡하지? 엘뤼엔도 그를 힐끗 보기만 할 뿐 잠잠했다. 뭔가 시간이 지났다는 건 알겠는데, 이게 대체 무슨 현상인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너 기절했었어.”

“헉, 정말?”

“지금 이틀 만에 눈 뜬 거야.”

“……헉?”

내가 기절이라니. 게다가 그사이에 벌써 이틀이나 지났다고? 황당한 기분으로 이프리트를 바라보니 그가 움찔해서 시선을 피했다. 하긴 그러지 않고서야 이 모든 광경이 말이 안 되긴 했다. 아직 믿기진 않는데 내가 정말 기절했고, 그동안 다른 장소로 옮겨진 모양이다. 아니, 잠깐, 그럼 크리스랑 다른 사람들은? 설마 거기 그대로 남겨진 건가? 뒤늦게 미치는 생각들에 심장이 철렁했다. 그러자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트로웰의 말이 이어졌다.

“참고로 네 도움 안 되는 길드원들은 모두 무사해. 다들 같은 여관에 묵고 있으니 원하면 언제든 만날 수 있어. 상황 수습도 그들 쪽에 맡겼으니 신경 쓸 거 없고.”

“아, 그, 그래?”

어느 정도는 상황을 파악하고 찾아온 것 같더니, 역시 엘뤼엔이 천막 안쪽은 건드리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기절하자 트로웰은 바로 크리스를 찾아가 풀어주고 남은 일을 다 떠맡겼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 그는 한창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상황을 수습하는 중인 것 같았다. 뭔가 얼결에 해결된 것 같아 어안이 조금 벙벙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기절할 걸 그랬나 싶다.

“근데 내가 왜 기절했지?”

습격을 받은 것도 아니고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서 멍하니 중얼거리니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세 정령왕이 모두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라고 묻는 게 더 이상하네. 장기를 너무 많이 다쳤었어. 엘퀴네스의 치유력이 아니었으면 정상으로 살기 힘들었을걸?”

“헉, 정말?”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네 옆에 붙어있겠지? 네가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계획이 전부 다 바뀌었어. 보다시피 정령계로 돌아가는 것도 미뤘고.”

아, 그러고 보니 정령계로 돌아간다고 하던 참이었지. 그 뒤로 바로 의식을 잃었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본의 아니게 일부러 가지 못하도록 붙잡은 것 같아서 머쓱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

“……놀라긴 했지.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괜찮은 줄 알았거든.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했어. 흑주술에 당했는데 멀쩡할 리가.”

중얼거리듯이 말한 후 트로웰이 엄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참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니야. 필요한 도움은 받아야지. 내가 네 생각은 읽지 못한다는 거 잊었어?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먼저 알아주지 않아.”

“어? 아니야. 나 진짜 하나도 아무렇지 않았어. 너무 정신도 없고 그래서 몸이 안 좋은 것도 못 느꼈나 봐. 진짜 멀쩡했는데 왜 딱 그 시점에 쓰러졌는지 나도 이해가 안 될 정도야.”

“그야 안심해서 긴장의 끈이 풀린 거지.”

대답을 이은 건 트로웰이 아닌 다른 목소리였다. 시선을 돌리자 불쑥 끼어든 이프리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트로웰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뭘 아는 척이야, 이프리트.”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알거든! 솔직히 너희가 인간에 대해 뭘 알아. 잘 싸돌아다니지도 않고 부정적인 생각만 먼저 읽어내는 것들이. 인간에 대해서라면 내가 너희보다 더 잘 알걸? 얘넨 원래 이런 면이 있어. 정신력으로 무리해서 한계까지 버티다 안심할 수 있는 장소에 오면 갑자기 훅 끊기는 거지.”

“……그 현장 어디가 안심할 수 있는 장소였는데?”

“너희를 만났잖아.”

그 말에 트로웰이 입을 다물었다. 아, 확실히 둘을 만나고 나서 좀 안심하긴 했지. 그때 너무 마음을 내려놨나 보다. 혼자 고개를 끄덕였더니 왠지 트로웰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얼굴로 바라본 이프리트가 투덜거렸다.

“솔직히 잘 대해주지도 않던데. 대체 뭘 믿고 따르는 건지는 전혀 모르겠다만! 지금도 봐. 중상으로 기절해서 이틀 만에 깨어난 애한테 몸은 괜찮은지, 얼마나 아팠는지 묻는 게 아니라 훈계부터 하잖아. 엘퀴네스 저건 말을 해서 뭐해. 지 계약자가 고초에 시달리고 난 직후인 거 뻔히 알면서 마구 얼음이나 뿌려대는 놈인데. 약한 인간의 몸 생각은 하나도 안 하는 거지.”

“닥쳐.”

비록 이어진 엘뤼엔의 한마디에 바로 조용해졌지만. 별로 상대도 되지 않을 거면서 왜 시비를 거는 건지 모르겠다. 짠한 마음으로 바라보니 시선을 맞춘 그가 머쓱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이어진 말은 상당히 뜻밖이었다.

“음, 저기, 미안했다.”

“……어? 아니, 네?”

“미안하다고. 넌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말 그대로 그냥 휘말린 거잖아. 사과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왜 그런 표정이야?”

“아, 그게, 사과를 받을 줄은 몰라서. 아니, 서요?”

“그냥 편하게 말해. 뭘 새삼.”

“혹시 병 주고 약 준다는 말 알아?”

“……그렇다고 너무 편하게 하면 내가 좀 상처받거든?”

황당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린 이프리트가 쓰게 웃었다. 그제야 나는 그 모습을 천천히 살펴봤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역시 태양을 담아낸 듯이 찬란한 붉은 눈동자였다. 시원시원하게 잘생긴 이목구비와 반듯한 얼굴선. 일렁이는 듯한 홍염의 머리칼을 옆으로 타서 살짝 넘겼는데, 그게 잘 어울렸다. 트로웰이나 엘뤼엔이 아름다운 조각상 같은 분위기라면 그는 진한 피부에 건장한 체형을 지닌, 사나운 전사 같은 분위기였다. 내 시대의 이프리트 랑은 사뭇 다른 느낌이라 신기했다.

“그 외모를 대체 어떻게 감춘 거야?”

“이걸로.”

선뜻 대답한 이프리트가 뭔가를 내게 던져줬다. 받아보고 나니 작은 메달이 달린 목걸이였다. 마나가 느껴지는 걸 봐선 마도구의 한 종류인 듯했다.

“인상을 흐리게 해주는 마도구야. 머리 색은 원래도 조금 조절할 수 있는데, 그 상태에서 그걸 쓰면 그냥 평범한 금발처럼 보이게 위장할 수 있지.”

“아, 이거 알아. 나도 예전에 사본 적 있었어. 하지만 내가 샀던 건 별로 소용없었는데.”

외모를 가려준단 말에 거의 홀리듯이 샀던가. 그때 내가 산 건 브로치 형태였다. 기대감을 잔뜩 안고 달아봤지만 크리스가 뭐가 다른 거냐고 물었었다. 그래서 다음 날 바로 되팔았던 기억이 났다. 쓰린 추억에 아련해지려니 이프리트가 알 만하다는 듯이 웃었다.

“인간이 만든 거야 수준이 뻔하지. 그건 드래곤이 만든 거야. 그것도 레드 일족의 수장인 란타샤의 수작이지.”

란타샤? 란타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고개를 갸웃거리다 곧 그 사람이 누군지 떠올렸다.

“라피스 엄마…….”

“뭐?”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 드래곤이 계약자야?”

“맞아. 계약자가 그 녀석만은 아니지만.”

그렇구나. 라피스의 엄마가 레드 일족의 수장이었구나. 실제론 만나본 적도 없는 드래곤이지만 이렇게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새삼 사천 년의 세월을 실감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계약자는 자기가 만든 수작으로 당신이 이러고 다니는 거 알아?”

“아하하하.”

“이프리트가 이렇게 유치한 짓을 할 줄 몰랐어.”

“진짜 미안…….”

다시 사과하는 이프리트는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비 맞은 대형견 같은 그 모습을 보니 더 빈정거릴 수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또 이런 짓 안 한다고 하면 용서할게.”

“정말? 안 하지. 이제 다신 안 해. 솔직히 쟤 골탕 먹일 방법이 그거밖에 안 떠올라서 그랬던 거지, 나도 엄청 찜찜했어. 넌 왜 하필 성격도 엘퀴네스랑 다르게 순하고 그러냐. 더 마음 찔리게.”

“그래서 기껏 잡아두고 풀어준 거야? 흑주술 때 도와준 것도 당신이지?”

“으음, 아무래도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더라고.”

역시 그건 이프리트였구나. 엘퀴네스의 치유력을 생각하면 더 과감하게 굴어도 됐을 것 같은데 결단력이 부족하다고 해야 할지. 생김새는 네 정령왕 중에 가장 사납게 생겨선 보기보다 인정미가 있는 성격인 듯했다. 그가 정령왕이라는 이유로 뭐든 좋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속으로 혀를 차면서 일단 마도구부터 그에게 돌려줬다. 건네받은 이프리트는 한동안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왜?”

“아니,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처음부터 느꼈던 건데 역시 계속 밟힌단 말이지. 너 평소에 운 좋다는 말 많이 듣는 편이야?”

“음, 그렇긴 해. 난 잘 모르겠지만.”

“그래? 혹시 어릴 때 모르는 아저씨가 너한테 키스한 적 있어?”

“엥? 뭐?”

“갓난쟁이 때일지도 몰라. 부모나 주변인한테 뭐라도 전해 들은 말 없어?”

웬 소름 끼치는 소리인가 싶어서 얼굴을 찌푸리는데 그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빤히 살피던 그가 다음 순간 손을 뻗어 내 이마를 꾹 눌렀다. 방심했다가 얻어맞은 기분에 움찔했다. 아, 그렇구나. 축복의 키스. 현대의 이프리트가 걸어준 축복을 감지한 게 분명했다.

“하긴, 그럼 내가 기억을 했겠지. 화기를 타고나긴커녕 오히려 반대 속성인 데다가 축복의 표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봐도 나랑 관계가 없는 게 맞는데 말이야. 참 이상하게 신경 쓰이네. 아, 그래. 태양이나 불의 신전에 가서 공양한 적 있어? 혹은 부모 중에 그쪽 관계자가 있다든지?”

“으음, 모……까지는 아니고 누나가 좀…….”

“아, 역시?”

그제야 활짝 웃은 이프리트가 속 시원하다며 껄껄 웃었다. “그 누나가 널 위해 기도를 많이 하는 모양이네.” 알아서 생각하는 걸 보면 다행히 적당히 넘어간 모양이다. 내심 안도하는데, 트로웰이 의외라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누나가 있었어?”

“아, 으응, 있어. 형도 있고, 누나도 있고, 동생도 있고…….”

“……하긴, 가족이 없단 말은 안 했지.”

중얼거리는 트로웰의 표정은 어딘지 묘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새삼스러운 걸 살피는 듯했다. 여기서 그 형이 너라고 말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황당해할 게 분명하지만, 눈치가 빠른 그라면 뭔가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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