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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474화 (474/608)

제474화

“……일단 여기를 벗어나죠. 시벨리우스 님, 퇴로는 만들어두셨습니까?”

“공간을 접어두긴 했어. 이 숲을 벗어날 수 있을 정도지만.”

“그건 좀 아슬아슬하군요. 더 먼 거리도 가능하신 거 아닙니까?”

“가능은 하지만, 그렇게 했으면 내가 지금보다 늦게 도착했을 거야. 너흴 구하는 걸 더 서두르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그것도 그렇군요. 하지만 이 근방은 다 놈들 수중입니다. 숲을 벗어나는 정도로는 추격이 금방 따라붙을 겁니다. 공간 이동 스크롤을 가져오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그것도 있어.”

아렐의 말에 시벨리우스가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내밀었다. 그런데 반색하며 받아든 카리안의 표정이 곧 흐려졌다.

“이건 마을 귀환 스크롤이군요. 그냥 평범한 이동 스크롤은 없으십니까?”

“장로가 그걸 가져가라고 했어.”

“그렇군요. 그래도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여분도 챙기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아까부터 들던 불편한 기분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호칭만 높였을 뿐, 다들 시벨리우스를 대하는 태도가 묘하게 고압적이었다. 마치 지도하는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뭐지, 시벨리우스의 나이가 가장 어린가? 하지만 신분이 높으면 나이는 상관없지 않나? 혹시 유니콘 세계에선 그런 위계가 없는 건가? 내가 모르는 세계의 일이다 보니 돌아가는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됐으니 아쉽지만 웰디 님, 저희 유람은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앗, 마을로 바로 귀환하는 거야? 그건 싫은데. 우리 별로 돌아보지도 못했잖아. 그냥 길로 나가면 안 돼?”

“안 됩니다. 지금은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그치만 할아버님이 어떻게 나오실지 알잖아. 이대로 돌아가면 앞으로 천 년간 외출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할 거야.”

“아마 그렇겠죠.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시벨리우스 님이 가져오신 스크롤이 그냥 이동 스크롤이었다면 좋았겠지만요.”

“아이참, 왜 하필 귀환 스크롤이에요. 시벨리우스 님은 너무 융통성이 없으세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대화는 아닌 것 같았다.

“저기요.”

정신을 차렸을 땐 나도 모르게 입을 열고 있었다. 그제야 내 존재를 상기한 듯 모두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딱히 나설 생각은 없었지만 이렇게 된 김에 할 말은 해야겠다. 마침 속도 다 진정된 참이라 몸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니 시선이 더 짙어졌다. 걸음을 옮겨 가까이 다가가자 흠칫 놀란 그들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신경 쓰지 않고 더 거침없이 다가가 시벨리우스의 옆에 멈춰 섰다.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은 아렐이 눈썹을 크게 찌푸렸다.

“지금 뭐하는 거지?”

“궁금한 게 있어서요. 여러분이 어떤 관계인지, 평소 어떤 식으로 지내는지 자세한 건 모르지만요. 이 사람이 여러분을 구하러 온 거 아닌가요?”

“보면 모르나?”

“역시 맞죠? 그럼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지 않아요?”

“……무슨…….”

“고맙다고 해야죠. 감사 인사가 먼저잖아요.”

생각지 못한 지적을 들었다고 여긴 걸까. 입을 다문 유니콘들이 얼굴을 굳혔다.

“아까부터 봤지만 아무도 그 인사는 안 하는 것 같아서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게 있으니까 그런가 보다 하긴 했는데요. 탓하는 것처럼 말하는 건 아무리 농담이라도 좀 지나치지 않나 싶네요.”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 우리 일에 끼어들지…….”

“네, 그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조차 아는 예의를 그쪽 분들은 잊고 있는 것 같아서 말해주는 겁니다.”

아렐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웰디와 카리안은 사색이 된 얼굴로 시벨리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기분을 살피는 듯한 모습을 보니 그들도 본의는 아니었나 보다. 아마 너무 편한 관계인 나머지 무심코 함부로 대하게 된 거겠지.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숨을 내쉰 후 옆에 서 있는 이를 올려다보았다.

“너 호구야? 왜 저런 취급을 하는데 아무 말도 안 해?”

얼음처럼 굳어 있던 시벨리우스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얘가 어디 가서 당하고 살 성격은 절대 아닌데, 지금은 왜 이렇게 맹하게만 있는 건지 모르겠다. 상급신한테도 막말하며 덤비던 패기는 다 어디로 간 거야? 괜히 속상한 마음에 그를 향해 거칠게 손을 내밀었다.

“난 엘이라고 해.”

“…….”

“넌 시벨리우스지?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굴하지 않았다. 반응하지 않는 그의 손을 억지로 잡아 반강제적인 악수를 나눴다. 시벨리우스는 움찔하면서도 거부하진 않았다. 다만 뻣뻣하게 굳은 얼굴이 조금 전보다 명백히 동요하고 있었다.

“아, 그렇지. 빵도 잘 먹었어. 내가 먹어본 빵 중에서 제일 맛있었어. 장담하는데, 넌 그 길로 가도 성공할 거야. 이런 재능은 아까워서라도 그만두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번에도 시벨리우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금 숨을 삼키긴 했지만 내가 기대했던 반응에 비하면 한참이나 미미했다. 어설프게 손을 빼내려는 걸 다시 꾹 움켜쥐니 시선이 흔들렸다. 파문이 이는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제도에 오면 여명이란 헌터 길드가 있어. 혹시 나중에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와. 아니, 그냥 용건 없이 놀러 와도 돼. 언제든 환영할게.”

“……아니, 나는…….”

“알았지? 꼭이야. 또 보자.”

눈동자가 다시금 흔들렸다. 아까보다 감정이 담긴 눈을 보니 한결 안심이 됐다. 굳이 이걸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고비를 넘긴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무사히 다음 기반을 마련했다는 기분이 든다. 친하게 지냈다고 했으니 그냥 헤어졌어도 어떻게든 다시 만나긴 할 텐데 뭐가 이리 찜찜한 건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트로웰이 내준 과제 때문에 역으로 미래를 바꿔선 안 된다는 생각이 너무 확고해진 모양이다.

“시벨리우스 님, 이만 가시죠.”

아렐이 서둘러 그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나와 급히 거리를 벌리는 게 마치 역병이라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거의 끌려가다시피 가던 그가 힐끔 나를 돌아보았다.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니 다시 빠르게 시선을 피하긴 했지만.

“다들 고생했어요. 잘 가요.”

마지막으로 건넨 작별 인사에 유니콘들이 몸을 움찔했다. 나를 돌아보는 얼굴들마다 찜찜한 표정이 가득했다. 곧 종이를 찢는 소리가 울리며 하얀 빛무리가 그들을 둘러쌌다. 아까 왕세자가 사라졌을 때와 같은 현상이라 다음 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그들의 모습이 곧 눈앞에서 사라졌다. 붙잡혀있던 시간에 비해 허무할 만큼 간단한 탈출이었다.

“그럼 이제 나도 나가볼까.”

혼자가 된 공간은 적막했다. 여기저기 시신이 널려 있는 처참한 꼴이라 더 그런 것 같았다. 얼마나 고요한지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게 그저 착각만은 아니었나 보다. 출구로 나갔는데도 여전히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혹시 몰라 손뼉을 쳐보자 곧바로 소리가 울렸다. 그런 걸 보면 내 귀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었다. 사실 조용한 이유는 그냥 둘러보기만 해도 분명했다. 그 어느 곳에서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알고 있던 모든 광경이 그대로인데 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색감도 묘하게 흐리고 탁한 게 마치 시간이 멈춘 무채색 공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잠시 멈칫했다가 시벨리우스가 환상진을 펼쳐놨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 영향인 모양이다.

여기서 벗어날 방법은 굳이 고민하지 않았다. 시벨리우스는 환상진이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라고도 했었다. 가만히 기다리기만 해도 알아서 깨진다는 소리였다. 그건 곧 눈앞에서 증명됐다. 다음 순간 풍경이 일렁이는 듯하더니 강한 파열음과 함께 무언가가 휙 걷혔다. 흐렸던 색감이 한순간에 선명해지며 바람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진법이 깨지면서 실체가 드러난 것 같았다.

문제는 그렇게 나타난 현실이 결코 낙원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수많은 병사가 진을 치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던 병사들이 곧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음, 이건 좀 곤란한데.

난처한 기분으로 생긋 웃은 것이 신호였다.

“잡아!”

완전히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순식간에 진형이 갖춰지며 머리 위에서 쇠 그물이 펼쳐졌다. 이 와중에도 나한테 접근하면 위험할 거라는 건 알아서 꼼수부터 쓰는 듯했다. 혀를 찬 후 재빠르게 사정권 밖으로 피하던 순간이었다.

콰과광!

“……!”

난데없이 요란한 소리가 터지더니 사방이 크게 진동했다. 생각지도 못한 사태에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다리가 균형을 잃었다. 넘어졌다는 걸 인지한 순간엔 내 미래가 좀 더 고단해졌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어 착잡했다.

‘마법인가?’

다행히 모두에게 예상치 못한 상황이긴 마찬가지였는지 바로 공격이 이어지진 않았다. 얼른 몸을 일으키려는데 문득 눈앞에 이상한 것이 스쳤다. 뭔가 하얀색의 작은 조각 같은 것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무심코 받아보니 손가락에 살짝 내려앉은 꽃 모양의 결정이 그대로 물이 되어 사라졌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정말 눈꽃 결정이었다. 눈앞에서 춤을 추는 차가운 입자들을 지켜보다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사방이 온통 희뿌연 색으로 변해 있었다.

지금, 한여름인데.

하얗게 된 건 풍경만이 아니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야 병사들이 공격할 순간을 놓친 게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이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게 덤벼들던 자세 그대로 전부 얼어붙어 있었으니까.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아프도록 파고드는 날 선 공기에 몸이 저절로 떨렸다. 내뱉는 숨마다 하얗게 일어나 시야를 가리는데 이 현상의 원인은 찾을 수 없었다. 조금 더 시선을 위로 들었다. 수북이 세워진 얼음 동상들 너머 높이 솟아오른 천막의 지붕이 보였다. 그 위 역시 성에로 덮여 본래의 색을 잃은 채였다. 그 하얀색 일색인 곳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아…….”

바람에 맡겨진 긴 머리칼이 새하얀 빛으로 흔들렸다. 눈동자 색 또한 시리도록 새하얬다. 그 손엔 얼음으로 된 창이 들려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낯선 색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누군지 몰라볼 수가 없는 이였다. 적어도 저렇게 생긴 이가, 저런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존재가 이 세상에 또 있을 리가 없었다.

“아버지…?”

무심코 중얼거린 말이 닿았을까. 섬뜩할 만큼 무감정한 시선이 내게 닿았다.

“그렇게 부르지 마라.”

표정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마른침을 삼키는 나를 내려다보며 그가 삐뚜름하게 웃었다. 얼어붙을 것같이 사나운 미소였다.

“지금 날 자극해서 좋을 게 없으니까.”

* * *

온도가 낮아지면 물은 얼음이 된다. 정령 역시 차가운 속성을 강하게 끌어내면 겉모습에도 영향이 미칠 수 있긴 했다. 하지만 대체로는 일부에 불과한 정도다. 저렇게 온전히 새하얗게 될 정도면 얼마나 끌어올렸다는 걸까.

분명한 건 지금의 엘뤼엔은 육체를 입고 있어도 정령에 더 가까운 상태라는 거다. 머리칼에서 새하얀 눈가루가 흩날리는 그는 누가 봐도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누군가가 그의 모습을 본다면 정령왕이라는 걸 바로 알아볼 것 같았다. 일단 여기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

서늘한 몸을 감싸 안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주변 말고도 먼 곳까지 얼음 동상들이 쭉 늘어져 있었다. 눈을 두는 곳마다 다 비슷한 광경이 이어졌다. 천막 안쪽까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바깥에 있던 자들은 전부 얼려진 게 분명했다.

‘크리스랑은 다들 괜찮은 건가.’

무사할 거란 생각은 들지만 기온이 너무 급작스럽게 변해서 걱정이 되긴 했다. 그때 엘뤼엔의 모습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후 다시 나타난 그는 누군가의 뒷덜미를 붙잡고 있었다. 질질 끌려 나오는 사람은 나도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바로 릴이었으니까. 다른 곳에 피해 있었는지 얼음 동상이 되는 걸 면하긴 했는데 그만 발각된 모양이다. 그는 곧 바닥에 강하게 패대기쳐졌다.

“큭!”

넘어진 릴이 허둥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엘뤼엔이 그를 향해 얼음 창을 들이민 것이 더 빨랐다. 창끝의 날카로운 부분이 금방이라도 틀어박힐 듯 그의 턱 끝을 겨냥했다. 아니, 실제로 찔러가고 있었다. 꿰뚫린 피부에서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나왔다.

“자, 잠깐만!”

다급하게 나서자 동작을 멈춘 엘뤼엔이 나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시선에 움찔하니 건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물러나. 너까지 다친다.”

“아, 아니, 그치만 그 사람은 죽이면 안 돼. 아군이야.”

“……아군?”

곧게 뻗은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아군 같은 소리.”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마치 씹어 발기는 듯했다. 세상에서 가장 참신한 헛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그야 정확히 말하면 아군까지는 아니지. 오히려 내가 여기서 겪은 모든 고생은 전부 그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도 도움받은 것도 있는데 여기서 무참히 죽게 할 순 없었다. 좀 더 이유를 만들자면 왠지 왕세자가 흑주술을 썼을 때 도와준 사람도 릴인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엘뤼엔을 굳이 화나게 하고 싶진 않지만, 아무래도 여기선 물러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놀라서 돌아보자 아는 얼굴이 보였다. 트로웰이었다.

“트로웰!”

“그냥 내버려 둬.”

“어? 하지만…….”

그사이 엘뤼엔이 다른 쪽으로 기어가는 릴을 기어코 창으로 내리찍었다. 비명을 내지른 그가 몸을 크게 퍼덕였지만 봐주지 않고 뒷목을 지그시 짓밟기까지 했다. 살벌한 광경에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큭, 자, 잠깐…… 잠깐만 기다려 주…….”

릴이 꺼져가는 음성으로 힘겹게 호소했지만 엘뤼엔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저렇게 기분 좋게 웃는 모습을 여기선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내가 알던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지만.

“벌써 앓는 소리를 하면 곤란하지. 좀 더 기뻐하지그래. 바란 대로 내가 화내주고 있잖아.”

“내가 언제…… 화내길 바랐다고 그래, 이 지랄 맞은 새끼야…… 악! 잠깐! 진짜 아파! 아프다고!”

“언행에 모순이 있군. 화내길 바란 게 아닌데 이런 짓을 했다고?”

“그야, 뭐, 너도 한 번쯤은 굴욕감이라는 게 뭔지 알면 좋을 것 같아서…… 악, 진짜 아프다니까!”

그런데 오가는 대화가 조금 이상했다. 그냥 듣기에도 전혀 모르는 사이에 오갈 내용이 아니었다. 뭐지? 지금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거지? 당황해서 트로웰을 돌아보니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잠자코 지켜보라는 듯이.

“삶이 지겨워서 돌아버릴 것 같나, 이프리트? 원하는 게 소멸이라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라. 그 정도 자비쯤은 베풀어 줄 테니까.”

그 순간 들려온 이름엔 잠시 시간이 멈추는 듯했다.

“……이프리트?”

멍하니 중얼거리니 바닥에서 몸부림치던 릴이 크게 흠칫했다. 엎드려 있어 얼굴이 가려져 있는데도 왠지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이프리트으?”

이프리트라니! 설마 내가 아는 그 이프리트?

저 남자가, 릴이, 불의 정령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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