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2화
“네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사기꾼들이 노예로 전락하면 으레 그런 식으로 둘러댄다고 하던데 말이야.”
“누가 사기꾼이에요?”
“출신지가 에바스 에덴이라고 했었지.”
“…….”
순간 말문이 막혔다. 생각지 못한 허점을 찔린 기분이었다. 입을 다물자 왕세자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
“아무리 찾아봐도 대륙 어디에도 그런 지역은 없더군. 그러다 우연히 흥미로운 소식을 듣게 됐지. 정령계에 아름다운 천상정원이 존재하는데, 그 이름이 에바스 에덴이라던가.”
“…….”
“엘뤼엔이란 가문은 어디서 따온 가명이지?”
우리 아버지 이름에서 따왔다, 망할 놈아.
차마 그렇게 대꾸해주진 못하고 속으로 이를 갈았다. 설마 내 신상 조사를 했을 줄이야. 아니, 왕세자가 할 일이 그렇게도 없나? 고작해야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일 뿐인데 왜 그런 걸 일일이 조사하고 앉아 있어? 설마 당시 기차에 탄 모든 승객을 다 조사하진 않았을 거고, 그때 내 행동이 그렇게 수상했던 건가? 이등칸에 혼자 있던 게 그렇게까지 주목받을 일이야? 짧은 순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동안 왕세자는 나를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뚫어질 듯한 시선이 짜증 나서 마주 쏘아봤더니 엉뚱한 소리가 돌아왔다.
“역시 멀쩡하군.”
“……뭐요?”
“보통은 남녀불문하고 날 보면 얼굴을 붉히는데 말이야.”
미친.
기가 막혀서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저딴 말을 제정신으로 입에 담는 사람이 라피스 말고도 또 있긴 하구나. 라피스는 근거가 있기라도 하지, 눈앞의 이 남자는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다. 역시 세상은 넓고도 컸다. 절대 이런 거로 깨닫고 싶지는 않았지만.
내가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고 할 만큼 오래 산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걸까. 황당무계해하는 심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을 텐데도 왕세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오히려 더 재밌다는 듯이 내 반응을 주시하고 있었다.
“본인의 외모가 뛰어나서 타인의 외모엔 관심이 없는 건가?”
“아뇨, 그냥 그쪽의 외모가 흥미롭지 않은 것뿐이겠죠.”
“말투가 불손하다!”
근위대장이 엄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일부러 도발할 작정으로 대놓고 비웃었더니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미안하지만 알다시피 난 왕국민도 아니고, 여긴 제국 땅이라서요. 불법 사업장을 발견하고도 눈감아 주는 남의 나라 저하한테 별로 공손할 생각이 없네요.”
“감히!”
“그만. 됐다, 미올.”
왕세자가 다시 손을 들자 근위대장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뒤로 물러섰다.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본 상단주가 쩔쩔매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루시엘 님. 보셨다시피 너무 되바라진 녀석인지라…….”
“아니, 신경 쓰지 마라. 일단 이 아이는 내가 데려가도록 하지.”
이어진 말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처음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누가 누굴 데려가?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친 왕세자가 그 특유의 재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상단주도 놀랐는지 한 발짝 늦게 반응했다.
“네? 아, 아! 그, 그러시겠습니까? 저는 유니콘을 진상하려 했습니다만.”
“아, 그러고 보니 유니콘도 있었지. 이번에 셋이나 잡았다고 했나?”
짧게 고개를 끄덕인 왕세자가 건너편의 철장으로 눈길을 보냈다. 시선을 받은 유니콘들이 바짝 긴장했다. 아렐과 카리안이 서둘러 웰디의 앞으로 나서서 시야를 가리려 했지만 사슬로 묶인 상태라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그 모습에 흥미를 느낀 듯한 왕세자가 보란 듯이 웰디를 훑어내리자 모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귀한 암컷을 잡았군.”
“예, 보시다시피 미모도 상당히 곱습니다. 어차피 인간의 외모나 신체 능력은 아무리 대단해 봤자 한철이잖습니까? 그에 비해 유니콘은 영원에 가깝습니다. 희소성으로도 더 가치가 있을 겁니다.”
“아니, 그냥 이 아이로 하겠다.”
왕세자의 시선이 다시 내게 돌아왔다. 이미 마음의 결정을 완전히 굳힌 듯한 얼굴에선 집착마저 느껴졌다. 상단주도 그 의지를 읽었는지 두말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럼 세공을 한 후에 저하께 보내겠습니다.”
“지금 장인이 출타 중이라 들었는데. 얼마나 걸리지?”
“급히 연락을 넣은지라 곧 도착할 겁니다. 이틀만 기다려주시면…….”
이틀이라니. 며칠은 걸릴 거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이번 일 때문에 세공을 서두르기로 한 모양이다. 하지만 왕세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길군.” 짧은 중얼거림으로 상단주의 말을 단숨에 끊은 그가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일단 이대로 데려갈 테니 나중에 장인을 내게 보내도록 해라. 좀 더 이 상태를 지켜보고 싶기도 하거든. 세공하면 인형처럼 얌전해져서 재미가 없단 말이지.”
“예? 안 됩니다, 루시엘 님.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마나 봉인구를 차고 있으니 어차피 정령술은 쓰지 못할 거 아닌가.”
“실은 검술도 상당히 뛰어난 녀석입니다. 병사 오십을 상대할 때도 검만 썼습니다.”
“……그래? 의외군.”
왕세자가 새삼스럽다는 얼굴로 돌아봤다. 난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이뤄지는 인권 유린의 현장에 할 말을 잃는 중이라 반응할 의욕도 끌어올릴 수 없었다. 부디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기 전에 이 웃기지도 않는 희극이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정령 검사는 몹시 드물지. 지나치게 여유로운 이유가 그래서인가? 언제든 달아날 자신이 있는 모양이야.”
그러나 왕세자는 눈치가 없었다. 이만 사라졌으면 좋겠는데 계속 미적거리는 게, 아무래도 영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건 뭐지?”
맘대로 떠들라는 심정으로 무시하고 있자니 문득 시선을 돌린 왕세자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 시선은 내 발치에 엉망으로 구겨져 있는 옷을 향해 있었다. 그러자 근처에서 대기한 상태로 상황만 살피고 있던, 나와 실랑이했던 남자가 냉큼 굽신거리며 말했다.
“아, 이 녀석한테 입히려던 겁니다. 반항이 심해서 애먹던 중이었습니다.”
“반항이라. 아직 제 처지를 잘 모르는 건 확실하군.”
“예, 정말 되바라진 녀석입니다.”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면 되겠지.”
“아, 그건 그렇지요.”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남자가 아쉬운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싱거운 반응에 맥이 빠진 듯했다. 나 역시 찝찝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런 식으로 순순히 넘어갈 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왕세자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스킨도.”
불길한 기분을 느꼈을 땐 이미 무언가가 시작된 후였다. 눈을 크게 뜨자 시선을 맞춰온 왕세자가 나른하게 웃었다.
“델라스, 이네, 데테스토르.”
“……!”
한순간 저릿한 기운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차가운 손이 내부를 꿰뚫고 들어와 심장을 움켜쥔 것 같았다. 밀어내려 했지만 봉인구 때문에 정체된 마나는 내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말룸, 인테르쿠로, 이네, 알티스, 칼리고.”
온몸에 진득한 것들이 달라붙었다. 거미줄처럼 엉겨드는 감각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눈앞이 빠르게 흐려지면서 시야가 완전히 캄캄해졌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힘겨워서 목소리조차 나가지 않았다. 깊은 먹물 속에 잠겨 드는 것 같았다.
“지금 무슨 짓을……!”
철컹! 사슬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아렐의 목소리였던 걸 보니 유니콘들이 놀라서 몸을 크게 움직인 것 같았다. 그들이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귓속을 선명히 파고들었다. 어지간하면 반응을 보이지 않는 저들이 저러는 걸 보니 정말 크게 놀란 모양이다. 이해는 했다. 나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루, 루시엘 님. 지금 무엇을 하신 것인지?”
상단주 역시 놀란 목소리였다. 왕세자는 여상한 어조로 답했다.
“몸을 묶었다. 시술할 때 움직이면 곤란하니까.”
“시술이라니요?”
“내가 세공을 직접 해주지.”
“……예?”
“딱히 필요 없어서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하는 방법 정도는 알거든. 저리 세공을 원한다니 친히 나서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아, 아! 그러고 보니 루시엘 님께선 마법과 연금술에 조예가 깊으셨지요.”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상단주의 음성에 흥분이 서렸다.
‘……마법 좋아하시네.’
이게 어떻게 마법이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 헛소리엔 실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내가 라피스와 시벨리우스를 함께 겪어보지 않았다면 그런가 보다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기엔 나는 이미 둘의 차이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비슷해 보여도 마법은 구동하는 방식부터가 전혀 다르다. 게다가 예전에도 한번 이거랑 비슷한 고통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그때보단 훨씬 약하지만, 온몸을 오염시키는 것 같은 이 구역질 나는 기운이 달리 있을 리가 없었다.
‘이건 흑주술이잖아.’
입을 열 수만 있었다면 욕부터 퍼부었을 거다. 왕세자가 흑주술 따위를 쓰다니, 대체 에펜 왕국은 뭐하는 나라야? 양심이 없는 줄 알았더니 이건 그 정도가 아니었다. 흑주술은 어느 시대에서나 불법이다. 특히 신을 저주하는 의지를 밑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신계에서 가장 엄격히 금지하는 힘이기도 하다. 이게 문제가 뭐냐면 육체만이 아니라 혼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거다. 어지간해서는 절대 저항할 수가 없었다.
“자, 곧 편하게 해주마.”
왕세자의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편하다는 단어의 의미가 바뀌기라도 한 모양이다. 이윽고 심장을 움켜쥐는 것 같던 차가운 감각이 머릿속에도 스며들었다. 세공은 정석대로 하려나 했는데 역시 이번에도 흑주술이었다. 날 작정하고 망가트리려는 악의가 풀풀 느껴졌다.
“페라티오, 아플릭, 이네. 미니스테르.”
“안 돼! 당장 그만둬라, 인간! 네가……짓을……!”
“……해! 그건 금지된……!”
뜻을 알 수 없는 단어들이 머리에 새겨지는 듯이 웅웅 울렸다. 그 속에서 유니콘들이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드문드문 섞여 들려왔다. 구역질이 더 심해지면서 피비린내가 났다. 아마 코피를 흘리는 것 같았다. 혼은 버티는데 몸이 버티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좀 위험한데…….’
아무래도 마음의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간신히 의식을 집중해 손끝을 움직였다. 여기서 벗어날 방법은 알고 있었다. 언령을 주축으로 하는 주술은 기본적으로 신에 속하는 힘이고, 더 강한 신의 힘으로 깨트릴 수 있다. 완전히 사로잡히기 전에 그 힘을 불러올 수만 있다면 말이다. 다행히 나는 주술에 쉽게 먹힐 만큼 약하지 않았고, 마침 마신의 문장도 갖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카노스의 힘을 끌어올 순 있을 거다. 물론 그렇게 되면 그가 날 알아차리는 건 막을 수 없겠지만. 지금은 찬물 더운물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아무리 일이 꼬여도 지금 여기서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흠.”
“왜 그러십니까, 저하?”
“아니, 정령사라 그런가. 지금쯤이면 끝나야 하는데 이상할 정도로 잘 버티는군. 지금도 충분히 위험한 수준이긴 한데, 조금 더 강화해 봐야겠어.”
돌아가는 상황도 더는 고민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강해져도 버틸 순 있지만 몸은 분명 크게 망가질 거다. 할 수 없이 문장 쪽에 의식을 집중했다. 그렇게 여기서는 절대 부를 일 없을 거라 다짐했던 이름을 의식하려던 순간이었다.
“큭!”
“저하!”
별안간 뜨거운 것이 얼굴을 스치는가 싶더니 숨이 탁 트였다. 신음과 함께 사방에서 당황하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분위기가 단숨에 날카로워지며 병장기를 움직이는 소리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습격이다!”
“모두 저하를 보호하라!”
아마도 왕세자에게 무슨 변고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 증거로 주술이 끊겼는지 몸을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기분 나쁘던 감각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서 다시금 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그래도 다행히 예전처럼 진흙 같은 걸 토해내진 않고 헛구역질로만 그쳤다.
머리를 털고 힘겹게 고개를 들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시야가 조금씩 개였다. 눈을 깜빡이니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한 손을 부여잡은 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왕세자가 보였다. 그 손엔 시커먼 화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뭐지? 누가 도와준 건가?’
당황스러운 마음에 유니콘들 쪽을 돌아보니 그들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금 보니 공격이 있었는데 정작 공격한 이는 보이지 않았다. 사방에선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들 긴장을 늦추지 마라!”
검을 빼 든 정복의 기사들이 왕세자의 주위를 둘러싼 채 주위를 경계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다음 공격이 오지 않았다. 빠듯한 긴장감 속에서 주위가 고요해질 무렵이었다.
“다, 단주님.”
입구에 병사 하나가 나타났다. 창백한 얼굴을 한 그를 보고 상단주가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수상한 자를 찾았느냐?”
“그게…….”
병사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입을 벙긋거리던 그가 울컥 피를 토해냈다. 그의 가슴 부근에서 검이 튀어나와 있었다.
“무, 무슨…….”
상단주를 비롯한 모두가 주춤하는 동안 병사의 몸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도 그쪽에는 시선을 두지 않았다. 병사가 쓰러지면서 드러난 공간에 누군가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드를 깊숙이 눌러쓴 장신의 남자였다.
“누구냐!”
완전히 창백해진 상단주가 입술을 떨었다. 수상한 자가 저렇게 대놓고 서 있는데 바깥에서 달려오는 기척이 없었다. 최소한 근처에 있는 병력은 전부 해치웠다는 소리였다.
왕세자의 기사들 역시 굳은 얼굴로 더 꼼꼼히 그들의 주인을 감쌌다. 수상한 후드를 쓴 남자가 그런 그들을 가만히 돌아보다 나와 유니콘들이 있는 쪽을 응시했다. 다음 순간 그가 손에 쥔 무언가를 가볍게 입으로 불었다. 사방으로 종이 가루가 펄럭였다.
“킬리다.”
그 순간 떨어진 음성에 심장이 덜컥 울렸다.
“델라스, 풀루스, 아리고.”
“적(迹).”
나직한 음성이 이어지는 동안 종이 가루들은 하얀 나비 떼가 되어 빠르게 기사들 쪽으로 쏘아져 갔다. “으아악!” 무심코 쳐내려던 기사 중 한 명이 그대로 비명을 내질렀다. 나비가 달라붙어 그의 몸을 하얀 실로 휘감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거대한 고치가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이, 이게 뭐야!”
“저하를 보호하라!”
기겁한 기사들이 방패를 들이밀었다. 왕세자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는 이곳에 있는 인간 중, 누구보다 그 힘을 알아볼 수밖에 없는 이였다. 한눈에도 자신과 상극의 힘이라는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