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9화
‘크리스.’
상태를 확인한 순간 안도의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아까 들렀던 천막에서처럼 이곳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별다른 구속 없이 얌전히 앉아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크리스만은 손과 발이 묶인 채 재갈까지 물려 있었다. 결박해두었다는 건 아직 세공을 당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가까이 다가서자 역시나 다른 이들과 달리 곧장 반응이 나타났다.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든 그가 나를 알아보고 숨을 크게 헐떡였다.
“안녕, 크리스? 꼴이 말이 아니네요.”
“으으읍! 으읍!”
“알았으니 잠깐 기다려요.”
단숨에 철창의 고리를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 그의 입을 채운 재갈부터 풀었다. 숨을 크게 터트린 크리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 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당연히 구해주러 왔죠.”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떻게 여길 돌아다니고 있냐고. 넌 그때 안 잡혔던 거야?”
“어땠을 것 같아요?”
웃으며 되물은 말에 크리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상황에 안 잡혔을 거라 생각하기엔 본인이 생각해도 염치가 없었나 보다.
“진짜 미안하다. 내가 정신만 바짝 차렸어도……. 귀신을 무서워하긴 하지만 원래 그렇게까지 정신을 놓지는 않는데, 그땐 이상할 정도로 진정할 수가 없었어.”
“약에 취한 탓도 있으니 어쩔 수 없죠. 환각제가 풀리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그런데 너 왜 검만 들고 있어? 정령은?”
“지금 정령 소환 안 돼요.”
“뭐? 그럼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온…….”
크리스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마침 내가 검으로 내리쳐서 그의 사슬을 끊었기 때문이었다. 할 말을 잃은 얼굴로 끊어진 사슬을 가만히 응시하던 그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설명하는 대신 아무것도 채워져 있지 않은 맨 손목을 들어 보였다. 그동안 함께한 시간이 헛되진 않았는지, 크리스는 곧바로 그 의미를 알아차린 듯했다. 황당하다는 시선을 보낸 그가 낮게 신음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더 복잡해졌다.
“무게 가중 장치라는 게 원래 이렇게까지 효과가 큰 거야?”
“저도 놀라는 중이에요. 그보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아니, 안 그래도 이 말부터 하려고 했어. 난 그냥 내버려 두고 가.”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 지금 다리에 감각이 없어. 아무래도 부러진 것 같아.”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급히 그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뭘 어떻게 한 건지 바지가 피로 얼룩덜룩했다. 불길한 느낌에 옷을 걷어보니 상체도 피멍이 가득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옮겨지는 도중에 정신을 차렸거든. 저항하다가 제압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잘못 맞은 모양이야.”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알 만했다. 부러진 다리는 세공한 후에 치료할 작정으로 그냥 내버려 둔 모양이다. 그런 와중에도 족쇄를 채워둔 게 참 지독했다.
“여기 있다!”
그때 입구 쪽에서 큰 소리가 울렸다. 병사 중 하나가 드디어 날 찾아낸 모양이었다. 그것을 신호로 사방에서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크리스가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서 가.”
“……그럴 생각이었으면 진작 그랬겠죠.”
시벨리우스는 어디쯤 있을까. 이왕이면 산뜻한 첫인상을 주고 싶었지만,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지. 한숨을 내쉰 후 몸을 일으켰다. 철창 밖으로 걸어나가 달려오는 이들을 맞이하려고 가만히 있으려니 크리스가 불안해하는 시선을 보내왔다.
“야 인마, 엘! 너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얼른 도망치라니까!”
“혼자선 안 가요. 어차피 다른 세 사람도 구해야 하고요.”
“멍청아! 무모한 짓 하지 마! 너 혼자서 뭘 어쩌겠다고! 지금 정령도 소환 안 된다며! 기껏 도망쳐놓고 다시 잡힐 거야?”
“누가 잡힌다고 그래요.”
병사들의 실력은 이미 대충 확인했다. 계속 도망 다녔던 건 가장 편해서라 그런 거지, 그게 최선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이 상황에서 뭐가 최선인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검을 고쳐 쥐는데 평소랑 쥐는 감각이 달랐다. 그러고 보니 이거 다른 병사한테서 뺏은 거였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창고에 들른다는 걸 깜빡했다. 어쨌거나 무기가 있으니 상관없지만.
“거기서 얌전히 기다려요.”
“엘!”
다급한 외침을 뒤로한 채 곧바로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갔다. 내려앉은 곳은 병사들이 몰려있는 한복판이었다. 이번에도 내가 그냥 도망칠 거라 여긴 걸까. 대치하고 있던 병사들은 갑자기 내가 뛰어든 것에 놀라 곧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벌써 몇 차례 같은 유형으로만 간 것 같은데 그때마다 매번 놀라니 참 발전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서로 쭉 견제만 했던 상황이라 내심 방심한 건지도 몰랐다. 그 대가는 곧 온몸으로 치러야 했다. 헛숨이 비명으로 이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커헉!”
“으아악!”
찌르고 베어가는 곳마다 붉은 피가 튀었다. 다가선 병사들이 덤벼들던 속도 그대로 우수수 쓰러져갔다. 일부는 검을 드는 것보다 쓰러지는 게 더 빨랐다. 사방을 메우고 있던 이들이 전부 바닥에 뻗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비명이 들리지 않았다. 호흡을 한 번 고르고 나서야 더는 눈앞을 방해하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입구 쪽에서 아직 들어오지 못한 이들만 창백한 얼굴로 주춤거리는 중이었다. 그들은 동료들이 모두 당했는데도 공격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들어오라는 뜻으로 고개를 까닥이니 히이익, 이상한 소리를 내며 더 뒤로 물러나기만 했다.
왠지 주위의 온도가 내려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뺨이 간지러워 손등으로 문지르자 붉은 피가 흥건하게 묻어났다. 혀를 차며 털어내고 있는데 뒤에서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크리스가 보였다. 어딘지 얼이 빠진 듯한 얼굴이었다. 왠지 머쓱한 기분에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이 사람들 생각보다 약하더라구요.”
그리고 나는 생각보다 더 강한 것 같다. 여기까지 와서 할 말은 아니었지만.
* * *
“인간의 급소가 전부 몇 개인지 알아?”
트로웰과의 대련은 늘 이론 교육과 함께 진행된다. 그는 빠른 속도로 일망타진하는 쾌검을 즐기는 편이었고, 그러기 위해 동작이 단순해도 확실히 타격을 주는 방식을 썼다. 단 한 곳을 쳐도 치명상이 될 만한 부분만 노린다는 소리다.
이 방식은 대련에서도 그대로 진행되어, 결코 봐주는 법이 없었다. 솔직히 말이 좋아 대련이지 내게는 목숨이 걸린 실전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대련 때마다 늘 다양한 방식으로 급소를 공격했고, 끝난 후에는 목각 인형을 세워두고 맞은 부분을 똑같이 쳐보라고 지시했다. 제대로 따라 하지 못하는 것 같으면 다시 처음부터 대련이 시작됐다.
덕분에 인간에게 급소가 얼마나 많은지, 어디를 어떻게 노려야 하는지는 뇌리에 확실히 주입됐다. 나 역시 대련 때마다 똑같이 활용해보려고 부단히 애를 쓰기도 했다. 근래 들어선 많이 좋아졌다는 평도 받았다. 정작 제대로 성공하는 건 가뭄에 콩 나는 수준으로 드물었지만. 그건 내 실력의 문제만이 아니라 상대가 너무 강한 탓도 있었다.
“인간을 상대할 땐 좀 더 쉬울 거야.”
트로웰도 그렇게 말하긴 했다. 지금도 어디 가서 쉽게 당하진 않을 수준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마 내 경우엔 결단력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될 거라고.
“결단력?”
“사람을 죽여본 적 있어?”
“…….”
“아니, 정확히는 죽일 수 있겠어?”
그가 뭘 말하려는 건지 알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해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찜찜하긴 하지만, 필요하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트로웰은 피식 웃었다.
“네 검술은 그렇지 않은데?”
“그, 그래?”
“넌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빼는 습관이 있어. 방어는 괜찮은데 공격할 때. 이 일격이 치명타가 된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 무심코 물러나더라. 주로 살의를 품어본 적이 없는 애송이들한테서 나타나는 현상이지.”
내가 그런다고? 생각지 못한 말에 당황스러웠다. 사람을 베지 못하는 건 예전부터 인지하고 있던 문제이긴 했다. 오히려 의식적으로 선을 넘지 않으려는 생각도 있었다. 그게 내가 사랑하는 걸 지키는 방법이라고 여겼으니까.
그렇다고 지금도 그러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그건 아니었다. 내가 일방적으로 정했던 마음의 선은 카류안, 악신을 가학적으로 공격했던 그 순간 이미 넘었다. 분노로 이성을 잃은 상태긴 했지만 그 시점에서 더는 예전 같을 순 없었다.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망설이지 않고 또 똑같이 할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생각과 행동이 따로 움직이는 기분이라 왠지 얼떨떨했다.
“무기란 건 결국 살상용이야. 네가 검을 들어야 할 때는 대부분 전시 상황일 거고. 공격이 최선의 방어가 되는 순간도 오겠지. 그럴 때 네가 상대를 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는 상당히 큰 차이가 될 거야.”
그래선지 트로웰의 친절한 조언도 그리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내게 필요한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마 트로웰도 지금 날 본다면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까.
‘거봐, 트로웰.’
툭툭, 아까부터 귓가에 규칙적인 소리가 닿았다. 검 끝에 고인 핏물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약간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시신이 널려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살아 있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두 번 다시 눈을 뜰 일은 없을 것이다. 저들을 그렇게 만든 건 나였다.
‘할 수 있다니까.’
달갑진 않지만 못 할 정도도 아니다. 딱 내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아니, 어떤 의미에선 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언제 사람을 해치는 걸 꺼린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시신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마음이 고요했다. 트로웰도 판단을 틀릴 때가 있는 모양이다.
“괴, 괴물…….”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보내니 멀찍이 있던 병사 하나가 움찔해서 물러섰다.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창을 겨누면서도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하는 채였다. 함께 했던 동료들이 내게 다가서는 족족 쓰러졌으니 엄두를 못 낼 만도 했다. 그 옆에서 넓게 포위망을 펼치고 있는 이들도 다들 비슷한 상태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 질렸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질린 건 내 쪽이었다. 떳떳하지 못한 직업상 병력을 갖춘 건 알겠는데 생각보다 병사의 수가 너무 많았다. 궁수에 창병, 조금 전부터는 마법사도 합세한 상태다. 이 정도면 군단 수준으로 봐도 흠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덕분에 어느 정도 돌파하고 나면 상황이 수월해질 거라는 기대는 고이 접어야 했다. 오히려 가면 갈수록 더 몰려오는 수가 늘어나는 것 같았다.
“엘, 이대론 끝이 없을 것 같아. 지금이라도 날 버리고 가.”
전세가 갈수록 험해지는 걸 느낀 건 나만이 아니었는지, 등 쪽에서 채근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딱히 운신할 방법이 없어 그냥 둘러업고 나온 크리스였다. 자기보다 작은 나한테 업혀있는 게 영 어색한지 그는 내내 쩔쩔매는 중이었다.
“잘 매달려 있기나 해요. 안 그래도 나보다 덩치 큰 사람 업고 뛰느라 균형 맞추기 힘들다고요.”
“그치만……그치만 이거 너무 창피하다고.”
“지금 체면 따질 때예요? 다른 사람들 만나면 싫다고 해도 넘길 거니까 그때까지만 참아요.”
“다들 어디에 있는지는 아는 거야?”
“그건 지금 찾아보고 있어요.”
“설마 일일이 다 돌아보려는 생각인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아무리 내가 무모해도 그렇게 시간 낭비를 할 생각은 없다. 바깥에 나와서 좋은 건 내가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거다. 예를 들어, 너무 멀리 있어서 부를 수 없었던 이들을 직접 만나러 갈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
―왕의 계약자!
때마침 하늘에서 반투명한 요정들이 날아들었다. 자연체의 실프들이었다. 반갑게 맞이하니 기다렸던 소식이 이어졌다.
―네가 말한 인상착의를 가진 인간 중 하나를 찾았어.
“정말?”
―응! 오른쪽 세 번째 천막에 네가 말한 것과 비슷한 남자가 있어. 이십 대로 보이는 나이에 밝은 갈색 머리고, 검은 눈동자야. 그리고 사슬에 묶여 있었어.
“맞는 것 같아. 고마워, 실프. 다른 사람도 계속 찾아줄래?”
―응응, 맡겨둬. 두 명을 더 찾으면 되지?
“맞아. 계약도 안 했는데 이런 부탁 해서 미안해.”
―괜찮아. 이런 거 너무 재밌어.
까르르 웃는 소리와 함께 실프들이 다시 훌쩍 멀어졌다. 역시 정령들에게 부탁해보길 잘했다. 같은 속성이 아니라 혹시 거절할까 봐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히 자연체의 정령들은 내가 자신들과 소통이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매우 즐거워했다. 물론 선뜻 부탁을 들어준 것엔 내가 정령왕의 계약자라는 점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겠지만.
“저쪽에 네브가 있나 봐요.”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지금 정령 소환 안 된다고 했잖아.”
“그런 방법이 있어요.”
대충 답을 얼버무리니 앓는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난 이제 네가 드래곤이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아.” 중얼거리는 목소리엔 진득한 체념이 담겨 있었다. 뭘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소리에 피식 웃음만 나왔다.
“드래곤이면 진작 공간이동 했겠죠.”
“아, 그건 그렇네.”
얼빠진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실프가 알려준 방향으로 돌진했다. 막아서는 이들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빠르게 타진했다. 그래도 날뛴 보람이 없지는 않은지 섣불리 덤벼드는 수는 확실히 줄었다.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그중 가장 끝에 있는 감옥에서 반가운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깥의 소란을 느꼈는지 창살에 달라붙어 있던 네브가 우리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네브!”
“엘! 크리스!”
곧바로 철창을 부수고 사슬을 끊어냈다. 풀려난 후에도 네브는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제가 꿈을 꾸는 건가요……?”
“차라리 전부 꿈인 게 더 나을지도요. 어디 다친 곳은요?”
“어, 없습니다.”
“잘됐네요. 그럼 크리스 좀 부탁해요.”
업고 있던 그를 떠넘겨주니 네브가 당황하며 얼른 부축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급히 살피는 표정이 심각했다.
“크리스, 어떻게 된 겁니까? 어딜 다친 거예요?”
“다리가 부러졌어.”
“세상에…….”
그사이 추격해온 병사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찼다. 앞으로 나가려니 무언가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반투명한 막이 형성됐다. 내가 돌진하지 못하도록 방어 마법을 건 모양이었다. 하나뿐인 입구를 틀어막고 막을 친 셈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우리는 구석에 갇힌 형세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