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466화 (466/608)

제466화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아무리 대단한 녀석이라도 버티질 못해.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전부 잊고 굳이 궁금해하지도 않아. 오직 주인만 바라보는 순종적인 노예만 남게 되지. 여기선 그걸 세공이라고 불러.”

“정말 그딴 짓을 한다고? 너희 진짜 미쳤어?”

“미치지 않았으니까 하는 거야. 아무렴 그 정도 안전장치도 없이 이런 위험한 일을 할 수 있겠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맞아, 개소리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원래 이런 건 논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거든. 쓰레기들이잖아.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마.”

태연히 돌아온 대꾸에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기가 막혀 입만 벙긋거리는 나를 바라보는 얼굴은 몹시 즐거워 보였다. 역시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건 언제 하는 거야? 설마 내 일행들을 벌써 건드린 건 아니지?”

“흠, 일행한테 꿀 발라놨나? 아님 보호해주는 만큼 수당이라도 받기로 했어?”

“무슨 헛소리야?”

“자꾸 남 걱정부터 하는 게 신기해서. 아직은 여유가 있나 보지? 뭐, 일단 궁금해하니 대답은 해줄게. 원래는 잡자마자 곧바로 작업에 들어가는데 이번엔 일정이 밀렸어. 하필 지금 장인이 다른 곳에 가 있거든. 세공의 유일한 단점은 기술자가 너무 적다는 거지. 그쪽 작업도 꽤 밀려있는 상태라 며칠은 기다려야 한다더라고.”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소식이었다. 아직 너무 늦진 않았구나. 안도감에 깊이 속을 쓸어내리니 남자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조금 찜찜한 듯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에서 처음으로 이 상황을 껄끄럽게 여기는 게 느껴졌다. 그나마 양심이 전혀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어쨌든 장인이 돌아오면 상등품부터 작업을 시작할 거야. 그러니 그때까지 이 시간을 잘 즐기도록 해. 네가 너로 있을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 될 테니까.”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테니 헛꿈은 접으시지.”

“하하, 설마 여기서 달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바로 조금 전에 충고해주지 않았나? 쟤들이 왜 저렇게 되었는지.”

가볍게 웃은 남자가 턱짓으로 잠들어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너 쟤들이 그냥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지? 근데 원래는 저렇게 잡혀 있을 만한 애들이 아니거든. 타고난 신체 능력은 아마 너보다 더 좋을걸?”

“뭐?”

“여긴 최상등품만 들어오는 곳이라니까? 의외로 인간은 이 조건을 갖추기 쉽지 않아. 네가 굉장히 희귀한 경우지.”

“그 말은…….”

저 일행은 인간이 아니라는 소리인가? 굳이 자세히 살필 생각은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들 쪽에 다시 시선이 향했다. 두 명의 남자 중 한 명은 화사한 주황색의 머리칼이었고, 다른 쪽은 짙은 흑발이다. 유일한 여자 쪽은 분홍빛이 섞인 화려한 은발을 지니고 있었다. 모두 귀가 둥글었으며 피부는 하얀 편이었다.

셋 다 수려한 외모라는 점은 확실히 인정한다. 하지만 생김새는 영락없이 인간이었기 때문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종은 피부색이라든가, 귀 형태라든가, 하다못해 체형이라도 인간과 확연하게 다른 부분이 존재한다. 구분하기 힘들 만큼 똑같은 생김새를 지닌 건 마족이나 드래곤 정도일 텐데 둘 다 저렇게 잡혀 있을 만한 종족이 아니었다.

다른 자잘한 점들이야 그렇다 치고, 애초에 환각제나 마취도 안 통할 텐데 고작 노예 사냥꾼에게 세 명이나 잡힐 리가. 하물며 저항하다가 강제로 재워질 가능성은 더더욱 없다. 물론 일부러 당해줄 순 있겠지만, 그런 특이한 취향을 가진 존재가 라피스 말고 또 있다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외에 그나마 구분이 힘들다는 종족이라면…….

“인어?”

“에이, 인어는 몬스터잖아. 고급품이긴 하지만 여기 들어올 급은 아니지.”

“인어가 아니면…….”

“유니콘이야.”

<예전에 한번. 납치된 녀석들을 구하러 갔었어.>

익숙한 목소리가 약간의 엇박자로 겹쳐져 들렸다. 멈칫해 있으니 남자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런 표정이야?”

“……지금, 뭐라고 했어?”

“쟤들 유니콘이라고.”

<일족 아이들이 노예 사냥꾼한테 붙잡혔었거든.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인간인 것처럼 위장해서 들어갔었지.>

바짝 마른 목을 울려 간신히 숨을 삼켰다.

언제였을까. 지나간 풍경 속에 서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한창 거울을 들여다보는 그는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이었다. 이런 모습을 또 하게 될 줄은 몰랐다며 중얼거린 그가 나를 향해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흑발에 하얀 피부, 둥근 귀를 지닌 인간의 모습이었지만 그의 원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아는 그는 진주처럼 깨끗한 은발에 푸르스름한 피부를 지닌 엘프였다. 그러나 그 역시 온전한 본래의 모습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뚜렷한 선을 그은 직후, 한창 서로 아슬아슬한 줄을 타던 시기였던 것 같다. 겉으로는 잘 지냈으나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에 내심 씁쓸해지던 때이기도 했다. 무심결에 옛이야기를 꺼내던 그가 문득 내게 묘한 눈길을 보냈다. 짙푸른 눈동자가 수많은 감정을 드러낸 채 흔들렸다.

<거기서 널 처음 만났었는데.>

아, 그렇구나. 그게 지금이었구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거의 반사적으로 가슴께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춥지도 않은데 온몸이 떨리는 것 같았다. 울고 싶은 건지 웃고 싶은 건지, 지금 내 기분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쭉 기다렸는데, 기대도 했던 것 같은데, 마치 모든 걸 지금 처음 깨달은 것처럼 머릿속이 다 얼얼했다.

그래도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 것 같았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지금 이 순간을 위한 거였다는 걸.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 그게 의외로 길몽이었나 보다. 아직 잘하고 있는 거야. 그렇지?

눅진하게 달라붙던 불안감이 물러나고 그만큼 비워진 자리를 설렘이 채우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숨을 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시벨리우스를 만난다.

* * *

“너 지금 우는 거야?”

“아니거든.”

감동의 순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좋은 기분만 느끼고 싶어도 산통을 단숨에 깨는 질문이 다시금 눈앞의 현실을 일깨웠다.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니 남자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눈가가 빨간데?” 던지듯이 건넨 말에 몸이 절로 움찔했지만, 거울이 없으니 단순히 떠보는 건지 사실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대신 얼굴을 와락 구겼더니 그의 표정이 더 묘해졌다.

“계속 담담하던 녀석이 저 녀석들 정체에 유독 감정을 드러내니 수상한걸. 너 설마 유니콘 혼혈인 건 아니지?”

“아니야. 근데 저 사람들이 정말 유니콘이야? 확실해?”

“그렇다니까.”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인간처럼 생겼잖아.”

“유니콘 감별법이 있어.”

“감별법?”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근처의 상자를 뒤지더니 자루 하나를 꺼내왔다. 안에 들어 있는 건 정체불명의 황색 가루였다. 뭘 하려는 건가 싶어서 지켜보고 있자니 남자가 그걸 돌연 내 쪽으로 훅 불었다. 생각지 못하게 가루를 뒤집어쓴 탓에 나는 연신 재채기를 해야 했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흠, 역시 아무런 반응 없는데.”

“뭐?”

“이게 감별법이거든. 여기선 외모가 뛰어난 애들을 발견하면 일단 이거부터 해봐. 너한테도 이미 써봤었어. 여전히 전혀 반응이 없는 걸 보면 확실히 인간은 맞는데 말이야.”

“그런 이상한 방식이 감별법이라고?”

“볼래?”

손바닥 가득 새 가루를 채운 남자가 이번엔 잠들어 있는 세 사람의 얼굴 쪽으로 그걸 날려 보냈다. 또 무슨 해괴한 짓인가 싶어서 황당해하던 나는 다음으로 이어지는 광경에 그대로 숨을 멈췄다. 세 사람의 이마에 푸른 빛이 도는가 싶더니, 황금색의 긴 뿔이 돋아나는 게 아닌가!

“헐…….”

“신기하지?”

너무 놀라서 창살에 바짝 달라붙은 나를 향해 남자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뭘 어떻게 한 거야?”

“유니콘은 향에 민감한 편이거든. 그중에서도 유독 취약한 향이 있는데, 그걸 뒤집어쓰면 잠시간 무방비 상태가 되면서 이마에 뿔이 나타나. 간단한 원리를 이용한 방법이지.”

유니콘이 향에 민감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있다. 하지만 그건 진짜 향이 아니라 고유의 기운 같은 것을 향으로 인지하는 식이었다. 게다가 뿔을 드러내게 하는 향이라니, 그런 게 있다는 말은 지금 처음 들었다. 저렇게 쉽게 정체가 들킨다면 시벨리우스도 조심했을 텐데 지금까지 딱히 그런 부분을 신경 쓰는 걸 본 적은 없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세 사람의 이마에 돋아난 뿔 역시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 향이 대체 뭔데? 그 가루는 뭐로 만든 거야?”

“만드는 방법이 궁금한 거야? 재료만 있으면 별로 어렵진 않아. 우선 정화한 물망초를 루세프의 축복을 받은 성수에 담가서 일주일간 키워. 그걸 잘 말려서 빻기만 하면 돼.”

“……루세프?”

“정의의 신 루세프. 유니콘의 창조신이지.”

과연, 유니콘들이 그 향에 취약한 이유를 알 수밖에 없는 답변이었다. 창조신의 힘이 스며들어 있으니 당연히 약할 수밖에. 덕분에 기가 막혀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누구보다 친숙한 힘이라 오히려 잡히는 데 이용된다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를 만큼 참담한 기분이었다. 더불어 시벨리우스가 왜 이런 부분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는지도 이해했다. 현대에선 루세프의 신전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알아도 쓸 수 없는 방법이니 주의할 필요도 없었던 거다.

“그냥 성수만 쓰는 건 안 돼. 다른 화초를 쓰는 것도 안 되고. 반드시 물망초와 섞어야만 효과가 발휘해. 이건 꽃의 신 프라워스가 물망초에 부여한 효력 때문인데…….”

“아니, 그런 설명은 됐어.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궁금한 건 아니었어.”

“그래, 그럼. 또 물어볼 건 없어?”

“꼭 물어보면 다 대답해준다는 것 같네.”

“지금까지 그랬잖아? 이래 봬도 불친절했던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그랬다. 왜 이렇게 전부 순순하지? 찜찜한 기분으로 바라봤지만 남자는 태연하게 웃고만 있었다. 어차피 기억을 잃을 테니 알려줘도 상관없다는 건가. 나로선 굳이 사양할 건 없었다.

“그럼 더 물어볼게.”

“좋아, 뭔데?”

“내가 상급 정령사인 거 어떻게 알았어?”

그러자 눈꺼풀을 깜빡인 남자가 처음으로 약간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희가 나더러 상급 정령사라고 떠드는 거 똑똑히 들었어. 내가 다른 정령을 소환하기도 전에 막았잖아.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어?”

“음, 솔직히 그걸 물어볼 줄 몰랐네. 정신없는 중이라 못 알아차릴 줄 알았는데.”

“대답이나 해. 답해준다고 했잖아.”

남자가 머쓱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다행히 모르쇠 할 생각은 없는지 곧 입이 열렸다. 비록 이어진 설명은 선뜻 믿기 힘든 내용이었지만.

“이쪽은 네가 상급 정령사인 거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알았다고?”

“어디 그것만이겠어. 너희 길드에 악시스 급 헌터가 둘이라는 것도. 총인원이 다섯이라는 것도. 숲에 들어오는 시기도 전부 다 알았지.”

“그게 무슨…….”

“참고로 환각제를 풀 때 유도하는 환상도 전부 다르거든? 귀신 분장을 한 것도 너희한테 맞춘 거야.”

즉, 크리스가 귀신을 심하게 무서워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혼란하던 머릿속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생판 타인에 불과한 이들이 이 모든 걸 알아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진혼 길드야?”

남자가 빙긋 웃었다. 수많은 의미를 담은 시선만 봐도 굳이 다른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잠깐 멈췄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눈망울 부근이 빠듯할 만큼 얼굴 근육이 뻣뻣해졌다.

이 노예 상단의 배후에, 진혼 길드가 있다고?

“릴! 어이, 너희 중에 릴 본 사람 없어? 이 녀석 교대 시간인데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그때 바깥이 시끄러워졌다. 남자의 동료들이 그를 찾는 중인 것 같았다.

“아, 큰일이다. 여기 맘대로 들어온 거 걸리면 안 되는데.”

살짝 혀를 찬 남자가 낮게 중얼거렸다. 허락 없이 마음대로 들어온 거였냐. 하도 당당하게 죽치고 앉아 시간을 보내길래 단독 감시라도 맡은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황당해서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남자가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밖으로 나갈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오히려 창살 문을 열고는 내가 있는 안으로 들어섰다. 생각지 못한 행동에 당황해서 무심코 물러서자 그가 내 앞에 몸을 굽히고 앉았다.

“뭐, 뭐야.”

“잠깐 가만히 있어.”

악당 같은 대사와 함께 남자가 손을 뻗었다. 그대로 걷어 차버릴까 고심하는데 철컥거리는 소리가 울리더니 발목을 감싸고 있던 감각이 사라졌다. 시선을 내리자 덩그러니 늘어진 쇳덩이가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발목에 채워져 있던 사슬이 풀려 있었다.

“어?”

눈을 깜빡이는 동안 이번엔 손목에 채워져 있던 것이 떨어져 내렸다. 남자가 내게 직접 채웠던 마나 봉인 팔찌였다. 멍하니 바라보니 그가 손가락에 걸고 있는 열쇠를 빙글빙글 돌렸다.

“네 검은 바로 옆 창고에 있어. 그건 알아서 챙겨.”

“……지금 뭐하는 거야?”

이게 대체 무슨 뜻이지. 돌아가는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황스럽기만 해서 이럴 때 보일 적당한 반응도 떠오르지 않았다. 의도를 살피고만 있는 내게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난 사실 이쪽 사람 아니거든.”

“허?”

“그냥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잠깐 한편인 척하고 있는 것뿐이야. 여기 들어온 지도 얼마 안 됐고, 이런 더러운 일에 관여하고 싶지도 않아. 그대로 있자니 아무래도 양심에 걸려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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