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1화
“연인이라고 했죠. 혼인도 할 생각이고요. 그럼 미네르바를 사랑한다는 거죠?”
“아, 그럼요. 물론 사랑합니다.”
“얼마나요?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미네르바가 널 사랑하는 만큼, 너도 그를 사랑해? 미네르바가 널 위해 뭘 내려놓았는지, 앞으로 뭘 더 포기할 수 있는지는 알고 있어? 그걸 알면서도 넌 그를 배신하는 거야?
“엘, 이건 너무 사적인 질문 같은데요. 제가 당신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건 맞습니다만, 이런 대화는 조금 너무 이르지 않나 싶은…….”
난처한 듯 찌푸리는 얼굴을 보니 조금 머리가 식었다. 그가 검술을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이라 아무래도 잠시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다. 숨을 깊게 들이쉬니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무례했네요.”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아인이 상당히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만은 보였다. 그를 알게 된 후로 가장 굳은 표정이었다.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퍼부어댔으니 내가 정말 이상해 보이겠지. 물론 그렇게 한 걸 후회하지는 않았다. 이걸로 아인이 내게 질렸다면 차라리 잘된 셈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인은 그저 조심스럽게 물어오기만 했다.
“아닙니다. 조금 놀라긴 했습니다만, 엘이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시겠죠. 실례지만, 혹시 뭔가 고민하시는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최근 정령술을 좀 더 발전시킬 방법을 고심하다 보니, 정령과 계약자의 관계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거든요.”
“아, 그런 거군요. 이해했습니다. 이미 상급 정령사이면서 더 발전할 방법을 찾는다니 대단합니다. 나이도 아직 어린데 이렇게 꾸준히 노력하고 있으니, 엘이라면 엘퀴네스를 소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건 이미 했다.
심지어 소환하지도 않은 트로웰과도 동행하는 중이었다. 그 정령왕들이 지금 날 지켜보고 있을 가능성만 없었다면, 너랑 여기에 올 일도 없었을 거라는 대꾸는 간신히 삼켰다. 당황스러운 상황은 바로 그다음에 이어졌다.
“미네르바를 한번 만나보시겠습니까?”
“네?”
“그분께 함부로 사람을 소개해드리진 않지만, 엘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요. 미네르바를 만나보면 지금 하시는 고민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습니까. 괜찮을 때를 알려주시면 제 저택으로 초대하겠습니다. 아니면 아예 오늘 만찬을 함께 하는 건 어떠십니까?”
“아, 아뇨, 괜찮아요. 그렇게 폐를 끼칠 생각은 없어요. 이건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 같네요. 그리고 미네르바를 만나기엔 아직 제 용기가 부족하고요.”
“그렇습니까.”
아인이 실망한 듯 표정을 흐렸다. 그러면서도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니, 내심은 내가 거절한 걸 좋게 보는 게 분명했다. 그걸 보니 조금은 그의 심리가 읽혔다. 누가 미네르바에게 관심을 보이는 걸 정말 싫어하는구나. 연인으로서 평범한 독점욕일 수 있겠지만, 왠지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럼 다음에라도 언제든 생각이 있으시면 말해주세요. 당신은 정말 괜찮으니까요.”
“말만이라도 고맙네요. 하지만 저랑 너무 친해지면 곤란해지지는 않겠어요? 특히 그쪽 길드 마스터가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은데요.”
“네? 그럴 리가요. 저희 마스터는 엘 님께 관심이 많으시던걸요.”
이건 또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대충 웃어넘기자고 한 말에 생각지 못한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릴 뻔한 걸 간신히 참고 바라보니 아인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입니다. 엘처럼 대단한 정령사가 소형 길드에 있는걸 안타까워하셨어요. 제게는 같은 정령사들끼리 잘 지내면 좋겠다고도 하시더군요.”
“아, 그래요…….”
“그러고 보니 마스터께 감사드려야겠네요. 그분이 아니면 오늘 엘과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못했을 테니까요.”
“그건 무슨 소리예요?”
“실은 오늘 방문한 의상실을 추천해주신 분이 바로 마스터거든요. 아, 생각해 보면 그분이 추천해준 곳을 방문할 때마다 엘을 만났던 것 같아요. 신기한 우연이네요. 그분이 우리의 인연을 이어주는 요정 같은 존재로 느껴집니다.”
“……아, 그래요.”
그 뻔한 상황을 두고도 그렇게 좋게 해석할 수 있다니.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굉장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덕분에 유독 아인과 자주 마주쳤던 이유를 드디어 알 수 있게 됐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숨기지 않고 삐뚜름하게 웃었다. 어차피 후드에 가려져 잘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그것만으로도 아인은 당황한 것 같았다. 뭔가 실수한 건지 고심하는 듯한 그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래도 여전히 불쾌감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동선을 겹칠 수 있게 조작했다는 건 결국 나를 조사했다는 뜻이었다. 정말 여러모로 사람을 자극하는 방법을 잘 아는 길드였다.
* * *
트로웰의 평에 의하면 내 외모는 분란이 되기 쉽다고 한다. 솔직히 그가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쓸데없이 눈에 띈다는 건 나도 인정하는 부분이긴 했다. 후드를 쓰지 않으면 일단 귀찮을 정도로 시선이 따라붙는 데다가 수상쩍게 말을 걸어오는 빈도수도 높아진다. 그래서 길드 활동을 시작한 후로는 밖에선 의식적으로 후드를 썼다. 나 혼자라면 몰라도 괜히 길드원들에게까지 피해가 갈까 싶어서였다. 현대에선 후드 차림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습관을 들이는 게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물론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게 불편하긴 하지만.
아인이 특이한 거지, 보통은 후드를 쓴 나를 한눈에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길드원 중에서도 크리스 정도나 정면에서 마주쳤을 때 알아보는 정도였다. 그나마도 긴가민가하다는 태도에 더 가까운 걸 보면 어지간해선 알아보기 어렵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래도 작정하고 조사하기로 마음먹으면 눈을 붙이는 정도는 어렵지 않긴 할 거다. 일단 늘 같은 외투에 같은 검과 배낭을 지니고 다니는 편이니까.
그래서 외투와 배낭부터 전혀 다른 거로 구매했다. 파이어 버스터도 손잡이까지 보이지 않도록 가린 것은 물론 매는 방식을 바꿨다. 평소 즐겨 다니던 장소를 피하고 동선 역시 전부 바꿨다. 그 결과, 그렇게 허다하게 마주치던 아인과 벌써 일주일이 넘도록 조금도 마주치지 않았다. 아무리 진혼 길드가 유능해도 새로 만든 경로를 단숨에 파악하긴 어려웠던 모양이다.
기존의 마주침이 우연일 가능성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아무리 세상에 기상천외한 일이 많이 일어난다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내 짐작이 사실이었다는 증거는 곧 드러났다.
“거기, 잠시만 멈춰보십시오!”
오늘치 길드 일정을 마치고 귀환하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러 세웠다. 여관 앞을 한창 서성이고 있던 무리였다. 원래 여관이라는 데가 다양한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입구 앞이 낯선 이들로 북적이는 건 흔한 광경이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방심한 면이 있었다. 무심코 돌아봤더니 가까이 다가온 이들이 나를 빤히 살폈다. 이어진 질문엔 기분이 절로 가라앉았다.
“정령사 엘, 맞습니까?”
“……무슨 일이죠?”
요즘 상황에서 여기까지 날 찾아올 만한 사람들이라면야 뻔했다. 딱히 부정하지 않고 용건을 묻자 남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저흰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입고 있던 망토를 살짝 젖혔다. 드러난 가슴 보호구 위에 검은 나비 문양이 돋을새김 된 것이 보였다. 모든 문장을 다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대륙을 오가며 활동하는 유명한 길드의 문장쯤 되면 나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진혼 길드였다.
숙소 정도는 파악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결국 직접 찾아왔구나. 그간 동선을 추적하지 못해 어지간히 안달이 난 모양이다.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찾아오셨는지……?”
“저희 마스터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난 싫은데요.”
“혹시 그러실지도 모른다 싶어서 제가 직접 왔지요.”
경쾌한 목소리가 끼어들더니 뒤쪽에 있던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젖힌 후드 속에서 눈에 익은 얼굴이 드러났다.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삼십 대의 남자. 이전에 봤던 진혼 길드의 마스터였다.
“소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주시지요.”
설마 길드 마스터가 직접 행차할 줄이야.
여기까진 나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은 내게 그가 빙긋 웃었다. 그 뻔뻔한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다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당장 여관 옮기자고 해야지.’
제도에 온 이후로 쭉 머물던 정든 숙소와 아무래도 작별할 때가 온 듯했다.
“먼저 이것부터 봐주십시오.”
시간을 내는 장소는 멀리 갈 것 없이 여관에서 운영하는 일 층 식당으로 정해졌다. 적당히 구석진 곳에 자리 잡자 맞은 편에 앉은 진혼의 마스터가 수상한 느낌이 폴폴 풍기는 가죽 가방을 내밀었다. 가방 안엔 제법 많은 분량의 서류가 들어 있었다. 꺼내지 않고 바라보니 어서 읽어보라는 듯 재촉하는 눈짓이 돌아왔다. 이걸 확인하지 않으면 용건이 끝나질 않을 게 뻔해서 할 수 없이 서류를 꺼내 훑어내렸다. 빼곡한 글자들은 길드 복지부터 시작해서 수당, 보유한 능력자, 그간 세운 업적과 정기 계약을 체결한 귀족 가문의 명단 등, 자기 길드에 대한 자화자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엘 님께 이적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
이어진 말에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진혼 길드는 이미 여명의 활 길드가 무너졌을 때 길드원들을 회유한 전적이 있었다. 진혼의 마스터가 내 앞에 나타날 때부터, 아니, 그전에 그가 내 뒷조사를 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익히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거절할게요.”
물론 대답 또한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진혼의 마스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당신도 대형 길드의 이점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저희 길드로 이적할 시 어떤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한눈에 알아보실 수 있게 정리해두었습니다. 지금 바로 결정하셔도 좋고, 차분히 생각을 해보신 후에 연락을 주셔도 됩니다.”
“이봐요.”
“여명에서 계약금은 얼마나 받으셨습니까? 저희 길드로 오시면 무조건 그 세 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수익 배분을 비롯한 추가 할당금도 여명에 비할 바가 아닐 겁니다. 물론 위약금도 전부 저희가 알아서 처리해드릴 테니, 그것도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 대체…….”
“당연하겠지만, 의뢰의 질이나 수준 또한 여명과는 비교할 수가 없을 겁니다. 악시스 급 헌터가 아르마 급 의뢰나 하러 다니다니, 솔직히 안 될 말이죠. 무릇 명검이란 그 가치에 걸맞은 일에 쓰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걸 네가 지적하는 건 아니지. 누구 때문에 내가 아르마 급 의뢰만 전전하는 건데. 양심이 얼어붙다 못해 소멸이라도 한 건가? 어이가 없어서 쏘아붙이려다 화내기도 귀찮아져서 그만두었다. 그 대신 가방에 서류를 다시 집어넣고 그쪽으로 밀어냈다.
“말했다시피 거절이에요. 조금도 관심 없으니 이건 도로 가져가세요.”
“그러지 마시고 자세히 읽어보시지요. 저희 길드에서도 상위 헌터분들에게만 드리는 조건입니다. 아마 어느 길드도 이런 조건을 제시하진 못할 겁니다. 엘 님의 장래를 위해서 굳이 지금 길드에 의리를 지키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관심 없다고 했죠.”
“아,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엘 님이 나오시면 그 길드는 최소 인원을 채우지 못해 곤란해지겠군요. 하지만 그게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약자는 도태되는 게 세상의 생리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지금까지 그들이 너무 과분한 분을 억지로 붙들고 있었던 거죠. 그들이 엘 님을 위한다면 더 큰 세상으로 보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쓸데없는 참견이네요. 그 길드원을 모은 건 나예요. 정확히 말하면 내가 그 사람들을 붙들고 있는 셈이죠. 그 사람들이 날 붙들고 있는 게 아니라요.”
“……정말 마음이 좋은 분이시군요.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습니까? 엘 님이 이적하시면 여명의 길드 쪽도 잘될 수 있도록 제가 편의를 봐 드리겠습니다.”
“그 말은?”
“다 아시면서 물으시는군요.”
진혼의 마스터가 은근하게 미소 지었다. 즉, 지금까지 여명의 길드에 가했던 은밀한 제재를 풀겠다는 소리였다.
“크리스에게 무슨 얘기를 들으셨는지는 짐작이 됩니다. 아마 대부분 맞기도 할 겁니다. 솔직히 제가 예전 여명의 활 길드를 싫어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건 어두운 집안사와 관계된 일이었습니다. 지금 여명 길드엔 유감이 없습니다. 크리스가 워낙 제게 날을 세우니 견제하고 있을 뿐이죠.”
“그런 것치곤 여전히 치졸한 방법을 쓰시는 것 같은데요.”
“하하, 엘 님께 이적을 제안한 건 순수하게 상급 정령사를 영입하고픈 마음입니다. 그런 소형 길드에 두기에 당신의 실력이 너무 아깝다고 여기는 건 진심이니까요.”
“…….”
“여전히 크리스가 제게 그러는 건 껄끄럽습니다. 하지만 엘 님이 저희 쪽으로 오신다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부분이죠. 엘 님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저희는 뛰어난 전력을 얻을 수 있어 좋고, 여명의 길드는 장래가 트이는 겁니다. 제가 보기엔 서로에게 가장 좋은 길인 것 같군요. 그들도 언제까지 아르마 급 의뢰만 전전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 그러니까 이번엔 길드와 길드원들의 장래를 걸고 날 역으로 협박해보시겠다? 하하 웃었더니 진혼의 마스터도 따라 웃었다. 기대감을 가득 드러낸 얼굴을 보니 김칫국을 한 사발 거하게 들이켜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에게 김칫국이고 떡이고 아무것도 내줄 생각이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거절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일로 볼 일은 없었으면 좋겠네요.”
“……이해를 전혀 못 하시는군요. 전 지금 엘 님께 호의를 베푸는 겁니다. 이 기회를 놓치시면 후회하시게 될 텐데요.”
후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시큐엘.”
코웃음 치는 시간도 아까워서 행동으로 보이기로 했다. 지금 이 자리에 가장 적격인 정령을 부르니 물줄기가 솟구치며 허공에서 거대한 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위에 있던 진혼의 호위들이 깜짝 놀라 검을 뽑으려 했을 땐 이미 얼음 화살들이 빼곡하게 그들을 겨눈 상태였다. 바로 눈앞에서 시리게 빛나는 화살에 경직된 사람들은 모두 두 손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