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460화 (460/608)

제460화

“일주일 전에 맞춤 장갑 주문하신 손님이시죠? 여기 주문하신 장갑 다섯 벌이에요. 손님께서 원하신 대로 만들어봤어요. 한번 착용해보세요.”

고개를 끄덕인 후 설레는 마음으로 건네받은 장갑을 착용했다.

문장을 가려주는 크림 덕분에 드디어 내 손에 딱 맞는 맞춤 장갑을 주문할 수 있게 됐다. 이왕 맞추는 거 소재와 모양까지 상세히 제시했는데, 다행히 설명한 그대로 완성된 것 같았다. 달라붙듯이 딱 맞는 착용감에 가슴 찡한 감동이 밀려들었다. 그간 기성품 중에서 맞는 장갑을 찾는 게 얼마나 고역이었던가. 이제 틈날 때마다 신상품을 찾아 상가를 샅샅이 뒤질 필요도, 맞지 않는 장갑이라도 감지덕지하며 구매할 필요도 없었다. 지난 처절한 시간이 떠오르니 눈물이 차올라 앞을 가리는 것 같았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다행이네요. 그러게 진작 맞추시라니까. 도안은 있으니까 이젠 언제든 필요하실 때 주문만 넣어 주세요.”

직원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는 내가 평소 장갑을 찾아 방황하는 걸 안타깝게 보던 사람 중 하나였다. 상가에 들를 때마다 맞춤 제작을 권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거절했더니 저렴하게 해주겠다며 흥정하기도 했었다. 아마도 내가 돈이 없어서 꺼리는 거라고 여긴 모양이다. 그러다 드디어 돈을 다 모아서 장갑을 맞추게 됐다고 생각한 건지 바라보는 얼굴에 대견하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을 하시길래 장갑이 이렇게 많이 필요하세요? 평소에도 자주 사러 오시는 편이었죠?”

“아, 검을 배우고 있거든요. 장갑을 끼고 훈련하다 보니 보존 마법을 걸어둬도 금방 망가지더라구요.”

“아하, 그러셨구나. 기사 지망생이신가 봐요. 보존 마법까지 걸었는데도 오래 가지 못할 정도면 정말 열심히 하시는 것 같네요. 맞아요, 맞아. 배우려면 이래야지. 제 동생도 훈련생인데 걘 항상 손이 깨끗하지 뭐예요? 대체 할 마음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그 비싼 수업료를 내주는 가족들 생각은 조금도 안 하고…….”

직원과 두런두런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아인의 존재감은 어느새 희미해졌다. 힐끗 돌아보니 그는 한창 다른 직원의 안내를 받는 중이었다. 상품 안내서를 보여주며 질문을 건네던 직원이 돌연 깜짝 놀라더니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후다닥 가게 안쪽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의상실 주인이 헐레벌떡 달려 나왔다. 아무래도 이제야 그가 ‘그’ 아인 이드리스라는 걸 알게 된 모양이었다.

“어서 오세요, 이드리스 님! 이 가게의 주인인 루아나입니다! 저희 같은 작은 의상실이 귀빈을 모실 수 있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그 한마디는 조용하고 평화롭던 가게에 세찬 풍랑을 일으켰다. 나와 대화 중이던 직원을 비롯한 모든 직원이 경악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혼비백산해진 현장을 보며 나는 안도했다. 애초에 옷을 맞추러 온 손님과 장갑을 사러 온 손님 사이엔 분명한 격차가 있다. 심지어 신분까지 다르게 보인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제 아인은 귀빈실이든 어디든 따로 안내될 거고, 나와는 머무는 장소가 분리될 거다. 여기서 적당히 작별하기만 하면 되는 아주 말끔한 결말이었다.

때마침 아인과 시선이 맞아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좋은 하루 보내요! 그리고 우리 이제 다시 보지 맙시다! 아니, 보더라도 아는 척하지 말아요!’라는 의미를 담뿍 담은 작별의 시선이었다. 그런데 아인은 그 의미를 잘못 해석했는지 생뚱맞은 화답을 보냈다.

“아, 엘! 괜찮으시다면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네?”

“제가 오늘 딱히 별다른 일정이 없어서요. 옷은 치수를 재기만 하면 되니 금방 끝날 겁니다.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저와 다과라도 나누지 않으시겠습니까? 근처에 괜찮은 가게가 있는데, 엘에게도 소개해드리고 싶네요.”

“아, 저는…….”

함께 다과라니, 큰일 날 소리를 하시네. 냉큼 거절하려는데 왠지 싸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 경험상, 갑자기 이런 기분이 드는 이유는 무조건 하나뿐이었다. 트로웰이나 엘뤼엔이 지켜보고 있는 거다.

“하하, 미치겠네, 진짜.”

“네?”

“아뇨, 마침 저도 다른 일정 없는데 정말 잘됐다고요. 다과 좋죠. 제가 달달한 거 좋아한다고 말씀드렸던가요? 갑시다, 가요.”

의아해하던 아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고맙습니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네에, 천천히 하세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천천히 하든 서두르든 다 무슨 의미란 말인가.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니 아인의 표정이 더 밝아졌다. 그가 치수를 재기 위해 자리를 비운 동안 나는 대기실 좌석으로 이동했다. 조금 전까지 편하게 대화했던 직원이 어색하게 굳어진 얼굴로 나를 안내했다. 아인과 잘 아는 사이로 보이니 겁을 먹은 게 분명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득한 허탈감이 우러나왔지만 그래 봤자 의미 없는 아우성이었다. 이제 될 대로 되라였다.

* * *

내키지 않은 시작과는 다르게 아인과 보내는 시간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일단 그가 데려간 곳이 정말 괜찮았다. 과자와 케이크를 비롯한 다양한 후식을 전문으로 하는 가게였는데, 주문한 메뉴마다 감탄이 나올 만큼 다 맛있었다. 그리고 의외로 대화의 합도 꽤 괜찮았다. 아인은 점잖은 화법을 사용하는 데다가 상대의 말을 경청하길 즐기는, 이른바 대화하기 편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공통 주제가 계속 이어져서 대화가 끊길 틈이 없다는 점이 한몫했다.

“와, 정말 소환자 곁에만 머뭅니까? 시큐엘은 듬직하군요. 진은 좋게 말하면 호기심이 많고, 나쁘게 말하면 산만하다고 해야 할까요. 제 주위를 벗어나 멀리까지 가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요? 아, 하긴 바람의 정령은 호기심이 많죠.”

“엘도 아시는군요. 이것저것 만지고 건드리는 걸 워낙 좋아합니다. 그래서 가끔 곤란한 일도 겪습니다. 무거운 걸 들면 갑자기 마나가 빠져나가서 깜짝 놀라게 되거든요.”

“아, 맞아요. 조금만 무게가 있어도 마나가 빠져나가더라고요. 솔직히 그런 사소한 행동에도 정령사의 마나가 필요한 줄은 몰랐어요. 저도 처음엔 익숙하지 않아서 좀 고생했어요. 갑자기 다리에서 힘이 풀려서 주저앉은 적도 있어요.”

“하하, 저도 그랬습니다. 정령사들은 다 비슷한 경험을 하나 봅니다.”

물 흐르듯이 편하게 이어지는 대화는 그가 누군지를 알면서도 즐겁기까지 했다. 솔직히 이렇게 잘 통할 줄은 몰라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미네르바를 배신할 예정만 없으면 정말 괜찮은 사람인데 말이야.’

물론 그 전제 때문에 결코 좋은 사람으로 여길 순 없겠지만 말이다. 다만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 마음이 정말 복잡했다.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가 없는 아인은 호감이 담뿍 담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층 밝은 톤으로 빛나는 푸른색 눈동자가 그의 들뜬 기분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정말 꿈만 같네요.”

“네? 뭐가요?”

“이렇게 비슷한 경험을 지닌 사람과 편하게 대화를 나눈다는 거 말입니다. 실은 오래전부터 정령사 친구가 있었으면 했거든요.”

“다른 정령사를 만나 본 게 제가 처음인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꽤 많은 정령사분들을 만나보긴 했습니다. 그때마다 친해지려 노력해봤는데 다들 절 너무 어려워하시더라구요.”

“그랬군요.”

“예, 그래서 엘이 절 편하게 대해주셔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아니, 내가 편하게 대했다고? 나 그동안 대놓고 거북해하고 꺼리지 않았어? 오늘이야 어쩔 수 없이 응했던 거지, 앞서 마주친 두 번만 해도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얼른 자리를 피하기에 바빴다. 그런데 그게 편하게 대한 거라고 느꼈다니. 대체 그동안 다들 어떻게 대했던 거야?

황당함에 입을 뻐끔거리다 그가 평범한 정령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했다. 정령왕이다, 정령왕. 보통 정령사들은 정령왕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한다. 그 계약자 역시 당연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내 딴엔 최대한 피해 다녔는데, 대체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더 심하게 했길래 어려워한다는 평까지 듣는 건지 궁금했다.

“보통 다른 정령사들은 어떤 식으로 대하는데요?”

“으음, 반응은 여러 가지이긴 합니다. 제 입으로 말씀드리긴 좀 민망하긴 합니다만, 말을 걸어 보려고만 하면 비명을 지르시거나 무릎을 꿇으시는 경우가 좀…….”

“……네?”

“감격해서 우는 사람도 있고. 옷자락이나 머리카락을 잘라가시려는 분도 있고. 여하튼 대체로 다들 숭배하듯이 바라보시는데…… 솔직히 그런 건 저도 좀 부담스럽다고 해야 할까요.”

아, 피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 좋아하는 쪽이었나.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아서 아련해졌다. 무릎 꿇거나 우는 반응이 보편적일 정도라니. 연예인 팬클럽 수준을 넘어 가히 신앙의 수준이다. 아니, 그보다 옷이나 머리카락까지 잘라가는 건 그냥 스토커 아닌가? 대체 무슨 짓들을 하는 거야?

“그거…… 확실히 부담스럽긴 하시겠네요.”

“네, 좋은 분들이라는 건 압니다만, 아무래도 그런 상황이다 보니 친해지기가 어렵더라고요.”

“정말 그렇겠어요.”

‘젠장, 실수했어. 뚱하게 대할 게 아니라 호들갑을 떨었어야 했는데!’

그럼 아인 쪽에서 먼저 기겁해서 나와 알아서 거리를 벌렸을 거다. 그런 줄도 모르고 피해 다니는 바람에 오히려 아인의 호감을 사는 꼴이 되다니! 심지어 오늘은 아예 작정하고 편하게 대화까지 했으니 앞으로도 거리를 벌리긴 글렀다.

“게다가 그거 아십니까? 엘이 지금까지 저와 얘기하면서 한 번도 미네르바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는 걸요.”

“어, 그랬나요?”

몰랐다는 듯이 묻긴 했지만 당연히 알고 있었다. 아인 쪽에서 먼저 말하면 몰라도 내 쪽에서는 절대로 언급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로선 민감한 화제를 먼저 꺼낼 이유가 조금도 없었으니까. 어디까지나 그가 아니라 내 심장과 정신세계의 안위를 위해서다. 그런데 아인은 그걸 배려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실은, 저와 미네르바는 연인 사이입니다.”

“아, 그래요.”

“오래도록 품어온 마음을 용기 내어 고백했는데 기적적으로 그분이 받아주셨죠. 앞으로 삼 년 안에 혼인하는 게 목표입니다. 어떤 식으로 청혼해야 미네르바가 기뻐할지 고민하는 중이고요. 결혼식은 미네르바에게 걸맞도록 최대한 성대하게, 많은 사람의 축복을 받으며 하고 싶어요. 혼인한 후에는 지금 사는 저택을 팔고 근사한 저택을 다시 마련할 겁니다. 미네르바는 한적한 시골보다는 도시를 더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또…….”

아니 별로 그런 것까지 알고 싶진 않아.

얼굴만 몇 번 마주쳤을 뿐, 제대로 대화해 본 건 오늘이 처음이다. 별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인생 계획을 의논할 참인가. 안 그렇게 생겨 가지곤 보기보다 푼수였다. 게다가 미네르바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도 기분이 상했다. 마치 그가 내 영역을 침범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어차피 틀어지는 사이라는 건 알지만, 엄한 놈이 내 가족을 채간다는 기분을 막기가 어려웠다. 그 심리가 무심코 겉으로도 드러난 모양이다. 자세가 불량해진 걸 깨닫고 얼른 똑바로 했을 땐 이미 아인이 빤히 응시한 후였다. 하지만 의외로 그는 별로 불쾌해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마음에 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 별로 관심이 없으시네요.”

“……하하.”

“지금까지 저와 친분을 다진 사람들은 미네르바가 목적인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아무리 점잖은 사람이라도 정령왕에 대해선 궁금해하더군요. 저와 만나면서 미네르바에게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은 사람은 엘이 처음입니다. 원래도 잘 지내고 싶었습니다만, 지금은 정말 친해지고 싶네요.”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고 싶은 기분을 참고 억지로 웃었다. 그걸 뭐라고 해석한 건지 아인 역시 따라 웃었다. 분위기만큼은 참으로 화기애애한 자리였다.

내일부턴 절대 혼자 다니지 말아야지. 그래, 그래야겠다. 아무리 아인이라도 내가 동료들과 함께 있으면 쉽게 말을 붙이지 못할 거다. 아니, 아예 길드 사무실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말까? 그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그런데 아까 전부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말입니다. 착용하신 그건 엘이 쓰시는 겁니까?”

속으로 여러 궁리를 하는 사이 아인이 물어왔다. 내 허리춤에 걸려있는 검집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정령사인 내가 검을 갖고 다니는 게 궁금한 모양이었다.

“네, 그럼요. 당연히 제가 쓰는 거죠.”

“그러고 보니 아까 얼핏 검을 배우신다고 들었는데. 그럼 엘은 검술도 할 줄 아시는 겁니까?”

“네에, 뭐. 아직 할 줄 안다고 말하기엔 한창 배우는 중이지만요.”

“그래도 굉장하네요. 정령 검사가 되시겠군요.”

“아인도 그렇지 않아요?”

“제가요? 하하, 전 검술은 할 줄 모릅니다. 날이 있는 건 과도도 다루지 못하는걸요.”

“네? 하지만…….”

반박하려다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뭔가 계속 위화감이 있다 했는데 그 이유를 지금에서야 알았다. 아인의 어디를 봐도 블레스터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미네르바가 아직 그에게 힘을 나눠주기 전인 모양이었다.

‘이게 뭐야.’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정령검은 그 자체로 강력한 무기다. 그중에서도 바람의 검 블레스터는 지상 최강의 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에도 없었고 이후로도 다시는 나오지 않을, 정령왕의 힘을 담은 유일 검. 난 당연히 미네르바가 연인의 강점을 돕기 위해 그 검을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넘치는 재능에 걸맞은 무기를 내린 것이라고. 그런데 아인은 검술은 전혀 모른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검을 만든 건 그 반대의 이유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검사가 아니니까, 오히려 못하는 사람도 다룰 수 있는 무기를 찾다 보니 블레스터를 만들게 된 거다.

하긴, 블레스터 정도면 주인이 몸치라도 직접 움직여 힘을 발휘해주겠지. 타자도 못 치는 어린애한테 인공 지능 기능이 탑재된 컴퓨터를 선물해준 셈이다. 끼어들면 안 된다. 안 된다는 건 아는데, 차마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미네르바를 어떻게 생각해요?”

“네? 미네르바 말입니까?”

아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바로 조금 전에 미네르바를 언급하지 않아서 좋다고 칭찬한 상대가 급작스러운 질문을 건네니 당황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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