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459화 (459/608)

제459화

“그, 그렇군요.”

정작 당사자가 그렇게 나오니 할 말이 없었는지 진혼의 마스터가 어색하게 웃었다. 속이 뒤집혔을 게 분명한데 불쾌한 티를 내색하지도 못하는 게 아주 볼만했다. 아무래도 진혼 길드는 그들의 성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과분한 사람을 한 식구로 맞이한 모양이었다. 앞으로 마음고생을 어지간히 하겠다 싶으니 더는 이 상황이 불쾌하게만 여겨지지 않았다. 같은 생각을 한 건지 크리스도 어느새 완전히 진정해서 피식거리고 있었다.

“특히 상급 정령사라면 당연히 그 마수를 잡았겠죠.”

그래도 솔직히 이것까진 예상하지 못했다. 조금 움찔해서 고개를 들자 아인 이드리스와 곧장 시선이 맞았다. 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진혼의 마스터가 뜻밖이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상급 정령사요? 저 사람이 말입니까?”

“네, 아마 저분 맞을 겁니다. 그때도 후드를 쓰고 계셨죠?”

“…….”

“진을 한눈에 알아보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거든요. 그때의 모습이 인상 깊어서 조금 알아봤습니다. 물의 정령사라고 하더군요. 당신이 나이아스 무리를 이끌고 다니는 걸 봤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 바로 알았습니다. 최근에 악시스 급 헌터가 됐다는 물의 상급 정령사가 바로 당신이라는 걸요.”

아인 이드리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같은 정령사라는 점에서 유대감을 느끼는 건지,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친근한 표정이었다. 당연히 이런 그림을 그려봤을 리가 없는 진혼의 마스터는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데 나이아스라면 가장 하급 정령 아닙니까?”

“네, 물의 하급 정령 맞습니다.”

“그런데 저자가 상급 정령사라고요?”

“그럼요. 방금 저분이 나이아스 무리를 데리고 다녔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그게 무슨?”

“아, 모르시는군요. 여럿의 정령을 부를 수 있다는 건 많은 의미가 있답니다.”

빙긋 웃은 아인 이드리스가 간단히 정령 계약의 구조를 설명했다. 아무리 뛰어난 정령사라도 계약할 수 있는 정령은 한 속성에 단 하나뿐이라는 것. 다만 계약한 정령보다 등급이 낮은 정령은 계약하지 않아도 부를 수 있다는 것. 그 소환 숫자는 소환자의 역량에 달려있다는 것, 등등. 정령술에서 가장 기본적인 내용이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론 알려지지 않았는지 듣는 이들은 모두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 보통 한 번에 몇이나 소환할 수 있는 겁니까?”

“수련에 달려있습니다만, 대개 네다섯 정도가 한계입니다. 아무리 하급 정령이라도 무리 지을 만큼의 나이아스를 소환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상급 정령사가 아니라면 불가능합니다.”

동의를 구하는 듯, 아인 이드리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딱히 숨긴 적도 없었지만 냉큼 그렇다고 대답하기에도 머쓱한 기분이라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로 그냥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그에 진혼의 마스터가 묘한 표정으로 협회 쪽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듯한 시선이 닿자 협회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걸 보니 그간 나에 대해서 일부러 알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 그게…… 여명 길드 소속의 정령사라면, 악시스 등급이 맞습니다.”

“……그렇군요. 모르고 있었네요. 근래 그런 소문을 듣긴 했는데 별다른 말씀이 없으셔서 설마 했지 뭡니까.”

“굳이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시게 할 건 없다고…… 협회장님께서…….”

“잘 알겠습니다. 그렇게나 절 배려해주시는 줄도 모르고. 그동안 제가 너무 무심했네요. 조만간 협회장님을 찾아뵙고 같이 식사라도 해야겠군요.”

빙긋 웃는 얼굴에 협회 사람들의 얼굴은 거무죽죽해졌다. 그 모습을 진득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진혼의 마스터가 곧 나를 돌아보았다. 조금 화가 난 듯한, 그러면서도 흥미가 실린 눈동자가 불쾌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이렇게 정령사 동료를 만나니 반갑네요. 제도에 악시스 급 정령사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부터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아인 이드리스입니다.”

앞에 있어서 그의 표정을 보지 못한 아인 이드리스가 가까이 다가와 선뜻 악수를 청해왔다. 이 손을 잡아도 괜찮은 걸까. 나는 곧게 뻗어진 손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마주 잡았다.

“전 엘이에요.”

“그렇군요, 이름으로 불러도 됩니까?”

“네, 그러세요.”

“감사합니다, 엘. 저도 아인이라고 불러주세요. 같은 헌터이자 정령사로서 앞으로 잘 지냈으면 합니다.”

아니, 그쪽 뒤에 있는 남자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진혼의 마스터는 그야말로 그린 듯이 웃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얼굴이었다. 정령왕의 계약자니 그야말로 억 소리가 나는 계약금을 주고 모셨을 텐데, 원수 같은 우리랑 친분을 다지고 있으니 복장이 터질 만도 했다.

‘……그리고 나도 잘 지낼 생각이 없는데 어쩌지.’

사실 선선히 악수한 것도 어디선가 트로웰이 지켜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지, 다른 생각은 없었다. 사실은 이 상황이 그저 곤혹스럽기만 했다. 그래도 다행히 오래 이어지지는 않으려는지, 눈치를 보고 있던 협회 사람이 얼른 끼어들었다.

“저어, 이드리스 님. 시간이 다 되었으니 이만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죠, 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에, 잘 가세요.”

나도 다음에 보자고 말하기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명백한 온도 차를 느꼈을 법도 한데 사람 좋게 웃는 아인 이드리스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짧은 묵례를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무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우리를 향해 시근덕거리던 진혼 길드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에워싸면서, 서로의 거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마치 수상한 사람한테서 제 자식을 보호하는 듯한 태도에 크리스는 코웃음을 쳤다.

이후 그들이 우르르 협회 건물 안에 들어가는 것으로 모든 상황이 종료됐다. 언제부터였는지 근처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도 분주히 흩어졌다. 그리고 크리스는 품속에서 웬 자루를 꺼내더니 이상한 가루를 사방팔방 뿌리기 시작했다.

“윽, 지금 뭐하는 거예요, 크리스? 이게 뭐예요?”

“축복받은 밀가루. 정화의 신전에서 사둔 거야. 악귀를 쫓는 데 쓰인대. 불길한 일이 생길 때 뿌리면 괜찮다더라.”

일종의 소금 같은 건가.

성수도 아니고, 밀가루 같은 것에 축복을 내려서 정화한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다. 신전의 상술에 놀아난 것처럼 보이는 게 단지 기분 탓만은 아니겠지. 대체 왜 이런 걸 상비하고 다니는지는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우리가 질색하든 말든 크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밀가루를 마구 뿌려댔다. 특히 내게 유난히 더 많이 뿌렸다. 그의 기행은 밀가루를 피해 도망 다니던 우리가 결국 화를 낸 후에야(평소 조용한 편인 네브까지 대놓고 질색할 정도였다) 간신히 멈췄다.

“됐다! 이제 악귀가 떠났을 거야!”

“……제가 악귀가 되고 싶은 기분이네요.”

“젠장, 재수가 없으려니! 하필 여기서 그 치들이랑 마주칠 게 뭐냐. 그리고 걘 뭔데 친한 척이야?”

크리스는 계속 씩씩거리기 바빴다. 내가 중얼거린 소리를 모르는 척하려는 의도가 뻔했다. 그 애잔한 시도가 가상하다 보니 더 화내려던 의욕이 푸시시 식었다.

“같은 정령사라고 반가웠나 보죠, 뭐.”

“칫, 그래 봤자 너랑 속성도 다르잖아. 대체 무슨 꿍꿍이야?”

“꿍꿍이라고 할 정도로 성격이 음침해 보이진 않았던 것 같은데?”

“맞아, 사람들 앞에서 우리 편도 들어줬잖아.”

시몬과 델라가 끼어들어 건넨 말에 크리스의 표정이 불퉁해졌다. 그러면서도 차마 아니라고 하진 못하는 걸 보면 그 역시 양심을 저버리진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난 그 녀석 마음에 안 들어. 성격이며 능력이 다 좋으면 뭐해? 사람 보는 눈이 없는데. 그 능력이면 오라는 곳도 많았을 텐데 하고 많은 길드 중에서 왜 하필 진혼이야? 그 정령사 덕분에 테오 놈이 기세등등해질 걸 생각하니 열불 나.”

“아, 그건 나도 유감이긴 해. 레기아 등급이겠지?”

“그야 당연하지. 정령왕의 계약자잖아.”

“하, 정령왕이라니…….”

모두의 시선이 아련해지면서, 분위기가 잠시 숙연해졌다. 정신없는 틈에 그냥 넘어간 아인 이드리스의 위용을 새삼 실감한 듯했다. 그 정령왕의 계약자가 여기에도 있다는 걸 알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물론 알릴 생각은 없었지만.

“에이잇! 부러워하지 마!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역사를 만들어가면 되는 거야! 아, 그래, 엘! 너 승급 시험 치를 생각 없어? 아니, 시험 쳐라!”

“어? 네? 승급요?”

뭐야, 설마 크리스가 다 눈치챈 건가? 어떻게? 당황해서 돌아보니 크리스가 두 손으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코앞에서 비장하게 타오르는 눈동자에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출 때였다.

“물론 제도 말고 다른 지역에서 말이야!”

“……네?”

“내가 전에 말했지? 제도에서 악시스 등급을 딸 정도면 딴 지역에선 레기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지금이 바로 그걸 확인할 적기다! 당장 실행하자!”

“아니, 잠깐만, 크리스. 그건 좀…… 너무 꼼수 아니야?”

황당해서 입을 다문 나를 대신해서 델라가 비난하는 시선을 던졌다. 물론 크리스는 전혀 굴하지 않았다.

“뭐 어때! 어차피 기록으로 남는 건 등급이야! 실력 차가 있든 말든 같은 레기아인 게 중요한 거라고! 어때, 엘? 괜찮은 생각이지? 당장 차표 잡을까? 최대한 설비가 후진 구석으로 가보는 거야!”

“……나 참,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죠? 거기서 더 나가면 한동안 얼굴 안 볼 거예요.”

“크윽! 그치만 솔직히 난 좀 분하단 말이야! 아까 그 녀석도 그랬잖아. 자기가 안 나타났어도 네가 마수를 잡았을 거라고! 그럼 너도 그렇고 우리 길드의 명성도 확 올랐을 텐데! 그 녀석이 우리 앞길을 막은 기분이라고!”

“뭐, 잡기야 했겠죠. 그래도 피해는 더 컸을걸요. 크리스도 사상자가 나오는 건 바라지 않았을 거잖아요. 그 사람이 와줘서 빨리 수습된 걸 다행으로 여겨요.”

“그것도 맞지! 맞는 말이긴 하지만! 젠자앙, 진혼 놈드을!”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크리스를 일별하고 나는 다른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막장으로 가는 마스터를 안타까워하면서도 매우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나마 다섯 명 중에 한 사람만 비정상이라 다행이었다. 그 한 사람이 하필이면 길드 마스터인 건 조금 유감이지만.

“모두 수고하셨어요. 길드 마스터의 상태가 저러니 오늘 일정은 여기서 마무리해요.”

“그래, 엘. 네가 참 고생이 많다.”

“뭘요. 다들 마찬가지죠.”

우리는 잠시간 서로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아인 이드리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와 대화하는 동안엔 느끼지 못했던 유대감이 지금 이 순간엔 아주 무럭무럭 차올랐다.

“아니, 내가 뭐? 왜! 뭐!”

홀로 동의하지 못한 크리스만이 펄펄 날뛰었다.

* * *

이미 몇 번이나 말한 것 같지만 난 아인 이드리스와 엮일 생각이 없다. 그가 좋은 사람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의 인생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예정이고, 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마주치지 않는 것이다. 접점이 없으면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일이 벌어질 리가 없으니까.

다행히 아인 이드리스는 너무도 잘 알려진 정령왕의 계약자였다. 출신 왕국에선 백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제국에 온 후로도 황제가 제안한 작위만 여러 개. 이미 받은 훈장은 셀 수도 없다. 정기사의 자격을 지닌 데다가 레기아 등급의 헌터이기도 하며, 대륙 7대 길드로 불리는 대형 길드에도 들어갔다. 그 정도쯤 되면 눈코 뜰 새 없이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제도에 붙어있을 틈이 없다고 봐야 한다.

그에 비해 나는 아르마 등급의 의뢰만 전전하며 주야장천 제도에서 시간을 보내는 아주 한가한 헌터였다. 즉, 그와 나는 동선이 겹칠 일이 조금도 없다는 뜻이다.

“엘?”

……그런데 대체 왜 저 사람이 저기에 있는 걸까.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얼굴에 잠시 고개를 위로 들고 상점의 명패를 확인했다. <루아나 의상실> 반듯한 나무판에 멋들어진 필체가 화려한 문양과 함께 조각되어 있었다. 아무리 다시 봐도 제대로 들어온 게 맞았다.

“세상에, 여기서 또 뵙네요.”

“……네, 그러게요.”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게 벌써 세 번째던가요? 저희 참 잘 맞는 것 같네요.”

호감을 드러낸 채 반갑게 웃는 흑발의 남자, 아인 이드리스를 보고 있으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 말대로 이렇게 마주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어젠 찻집에서 마주쳤고 그제는 공원에서 마주쳤던가. 대체 왜 자꾸 엮이는 건지, 이상하게 가는 곳마다 동선이 겹쳤다. 원래도 겹쳤는데 그땐 내가 몰랐던 건지, 요즘 들어 우연이 유난히 겹치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엘은 뵐 때마다 후드를 쓰고 계시네요.”

“네에, 그런데도 용케 저란 걸 알아보시네요.”

“하하, 왠지 그냥 보면 알겠더라고요. 체형이나 키도 그렇고, 뭔가 엘에게서만 느껴지는 분위기 같은 게 있거든요.”

내 체형이랑 키가 어때서? 현대에선 나이 대의 평균 체격이었고, 여기서도 그렇게 다른 편은 아니다. 어리둥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아인 이드리스― 아인은 정확히 뭐라고 설명하기가 힘들다고만 했다. 그냥 감으로 때려 맞추는 모양이었다. 바람의 정령사니 사람에게 배어나는 기운 같은 것에도 민감한 건지도 모르겠다.

“옷 맞추러 오셨나 봐요.”

“네, 편하게 입을 외투가 몇 벌 필요해서요. 주변에서 이 의상실을 추천해주시길래 지금 막 와본 참입니다. 엘도……?”

“아, 저는 주문해둔 걸 찾으러 왔어요.”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의상실 직원이 눈치 빠르게 바구니를 들고 왔다. 그 안에는 같은 형태로 만들어진 손등용 장갑이 여러 벌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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