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8화
“어서 와.”
여관으로 돌아왔을 땐 피로가 발끝까지 내려앉은 상태였다. 힘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트로웰이 반갑게 맞이했다.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발을 까닥거리고 있는 그는 오늘따라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서 안 그래도 무겁던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다녀왔어.”
애써 기운차게 인사하니 엘뤼엔이 가만히 바라보다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응? 왜?”
외투를 벗다 말고 쪼르르 다가갔더니 그가 손을 뻗어 내 뺨을 쓸었다. 그러자 시원한 느낌이 들면서 화끈거리던 감각이 사라졌다. 아니, 사실은 화끈거리고 있었다는 것도 이제야 깨달았다. 전혀 몰랐는데 아마도 마수가 스치면서 다쳤던 모양이다. 그 사실을 지금 인지할 만큼, 내가 많이 긴장했었구나 싶었다.
“고, 고마워.”
“일급 마수를 상대로 스친 상처에서 그치다니, 괄목한 발전이긴 하군.”
다 봤구나.
근처에서 상황을 지켜봤던 건지, 아니면 정령의 눈을 쓴 건지는 모르겠다. 최근 내 일정이 비슷비슷해지면서부터는 지켜보는 일이 줄어들었는데 오늘은 웬일로 관심을 뒀나 보다. 하긴, 그럴 만한 사건이 일어난 날이긴 했다.
“만나본 소감이 어때?”
그리고 이 질문도 나올 줄 알았다. 귀가하는 내내 피하고 싶었던 순간이기도 했지만, 피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삼키고 싶은 기분을 참고 트로웰을 돌아보았다. 마주친 금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그가 누구에 관해 물어본 건지는 당연히 모를 수가 없었다.
“……음, 조금 놀랐어.”
“놀랐다고? 왜?”
“어, 뭐랄까. 뭔가 상상한 이미지랑 매우 다르다고 해야 하나. 아니, 다를 줄은 알았는데 짐작했던 것보다도 더 달랐다고 해야 하나.”
조금 전 봤던 남자의 모습이 눈앞에서 선명히 그려졌다. 그는 웃는 얼굴이 잘 어울리는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그 외모만큼이나 태도 역시 다정했다.
“다들 무사하십니까?”
아인 이드리스.
혜성처럼 등장한 미네르바의 계약자는 모든 상황을 마법처럼 간단히 해결했다. 그렇게 고약하던 마수가 두 상급 정령에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바람을 다루는 정령들 앞에선 짐승의 특이한 울음소리도 빛과 같은 속력도 무력했다. 결국 숨통을 틀어막힌 마수는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사방에서 뜨거운 환호성이 터져 나온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협회의 높은 사람들이 날 듯이 달려와 그의 주변을 에워쌌다. 그러나 아인 이드리스는 그들에게 응하는 대신 남은 상황을 수습하는 것에 더 집중했다. 그 덕분에 마수에게 삼켜졌던 사람이 구출됐다. 아직 살아 있는 걸 알아차린 아인 이드리스가 직접 배를 갈라 꺼내주었기 때문이었다. 질식사하기 직전, 정말 간발의 차였다.
“잘 버티셨습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울음을 터트리는 이를 다독이는 얼굴엔 안도감만이 가득했다. 마수의 체액으로 범벅이 된 더러워진 상태인데도 부축하는 손길이 거침없었다. 사람의 진심이야 알 길이 없다지만, 일부러 꾸며낸 태도로 보이진 않았다.
“생각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었어.”
도저히 그런 미래가 내정된 걸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한숨처럼 중얼거리니 트로웰의 표정이 묘해졌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꼈다면 네겐 잘 된 거 아니야? 더 적극적으로 미래를 막아볼 의욕이 들 거 아냐.”
그래, 바로 그래서 문제인 거다. 난 그 미래를 막을 생각이 없고, 막아서도 안 되는 처지니까. 다시금 한숨이 흘러나왔다. 차라리 척 보기에도 나쁜 놈이었으면 훗날 파멸을 하든 말든 신경 쓸 것도 없었을 텐데. 지금의 그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 안타까웠다. 아직 막을 기회가 있는데도 그냥 흘려버려야 한다는 걸 생각하니 양심이 따끔거릴 만큼.
“여하튼 잘해봐. 미네르바는 내 말을 듣지 않아. 아마 네 말도 마찬가지겠지. 그러니 그 계약자 쪽을 공략하는 게 더 나을 거야. 뭐, 네가 접근하기에도 같은 인간 쪽이 편할 거고.”
무엇보다 트로웰의 기대를 저버려야 한다는 게 가장 괴로웠다. 장난처럼 내기를 시작했지만 그가 이 미래를 막고자 하는 마음은 진심이다. 나는 트로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왜?”
“으음, 아무것도 아니야. 근데 트로웰이 직접 아인 이드리스에게 경고할 생각은 안 해봤어? 인간인 내 말보다 정령왕의 경고를 더 잘 듣지 않을까?”
그러자 트로웰이 생긋 웃었다.
“난 안 돼. 미네르바가 만나지 못하게 막고 있어.”
“어? 왜?”
“내가 그리 관대하지는 않아서 말이야. 그 얼굴만 봐도 화가 치밀어 오른다는 점이 문제지. 직접 만나면 죽일지도 모르거든.”
……과연 합리적인 이유였다. 어쩌다 트로웰이 이런 이미지가 됐을까. 처음 만났을 때, 그러니까 미래의 그를 떠올려 보다가 잠시 아련해졌다. 이럴 땐 새삼 과거의 그가 더 과격하긴 하구나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네 역할이 중요해. 부디 날 실망하게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미안, 트로웰. 난 기대에 보답할 수 없을 거야. 넌 결국 내게 실망하게 되겠지. 이래도 되는 건지 사실은 조금 겁이 나. 시벨리우스에게 들었던 말을 조합해 보면 그래도 일이 다 잘 풀리기는 하는 것 같은데, 아직은 잘 모르겠거든. 난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마음이 더 무거워졌지만 나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을 트로웰이 읽지 못한다는 게 이 순간만큼 다행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 * *
다음날부터는 어디를 가도 온통 아인 이드리스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신문사들은 저마다 일급 마수를 단숨에 물리친 정령사의 위용을 표제로 내걸고 호외를 뿌리기에 바빴다.
제도를 구한 영웅! 이 시대의 진정한 용사! 미네르바의 축복을 받은 바람의 수호자! 원래도 유명했던 이름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더욱 가치를 높여갔다. 그의 선행에 감동한 황제가 아인 이드리스를 위한 연회를 연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여기까진 워낙 당연해서 별다른 감상이 없었다. 생각지 못한 건 그 이름 옆에 따라붙는 또 하나의 명칭이었다.
<진혼 길드!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남자를 갖다!>
나는 떨떠름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며 눈앞의 글자를 노려보았다. 이 낯간지러운 제목은 조금 전 받은 호외에 떡하니 실린 것이었다. 가십 전문도 아니고,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저명한 신문사에서 발행한 호외였다. 다른 신문의 표제들도 거의 다 비슷했다.
<영웅이 택한 헌터 길드! 날개를 단 진혼 길드!>
<정령사 아인 이드리스! 진혼의 가족이 된다!>
<지금 세상이 주목하는 헌터 길드, 진혼! 마스터 테오 라덴의 독점 인터뷰! 아인 이드리스의 영입 과정과 그 비결을 단독 취재!>
“……진혼에서 새로 영입했다는 인재가 바로 그 녀석이었던 모양이야.”
크리스가 들고 있던 신문지를 와락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다른 일행이 보고 있던 신문들도 비슷한 처지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우리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우리 망했다는 소리 맞지.”
“차마 아니라고는 못 하겠다.”
“와나, 왜 정령사 중에서도 하필이면 그 녀석이야. 아니, 그 정령사도 하고 많은 길드 놔두고 왜 진혼에 들어가고 그래?”
모두의 탄식은 지당했다. 설마 아인 이드리스가 진혼에 들어갈 줄이야. 어쩐지 정령사라는 걸 직감할 때부터 왠지 싸하더라니, 이럴 줄 알고 그랬던 모양이다. 아무리 세상이 내 맘처럼 되지 않는다지만, 원수 같은 길드가 잘나가도 너무 잘나가니 씁쓸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결국 루손 백작가의 삼남이 잃어버렸다는 두더지를 찾아다 넘겨주고 나온 참이라 더욱 그랬다. 우리는 다시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 모두가 들떠있는데 오직 우리 길드만 우중충했다.
“그런데 아인 이드리스가 헌터였어요?”
“아니, 수렵 면허는 갖고 있지만 정식 헌터증은 없을걸. 그래서 자격증 발급을 위한 등급시험만 따로 치른다나 봐. 뭐, 그런 사람들이야 직업이 뭐든 무슨 상관이겠어. 어차피 시험만 치르면 다 합격할 텐데.”
“하긴 그렇네요.”
정령왕의 계약자가 떨어질 시험이면 그냥 아무도 붙지 못한다고 보면 된다. 모두의 앞에서 일급 마수를 농락하는 걸 보여주기까지 했으니 마다할 곳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보다 마수가 또 나타난 게 더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균열의 시기도 아닌데 또 마수가 나타났다. 하물며 점점 더 강한 마수가 나타나는 중이었다. 뭔가 원인이 있을 게 분명한데 아직도 그에 대한 조사는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다른 때라면 마신전이라도 비판했을 신문사들도 이번엔 아인 이드리스에게 집중하느라 그 부분은 등한시하는 중이었다. 덕분에 벌써 며칠째 그에 관해 제대로 다룬 기사 한 조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와, 본인 얘기하는 건 아나 보네.”
“네?”
“아인 이드리스, 나타났어.”
델라가 가리킨 방향은 우리가 막 벗어난 협회 쪽이었다. 시선을 돌리니 건물 앞에 무리 지어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 가장 앞에 얼마 전 보았던 흑발의 남자가 있었다. 아인 이드리스였다. 등급시험을 본다더니 그게 오늘이었던 모양이다.
“테오 놈.”
크리스가 이를 갈았다. 그는 아인 이드리스가 아닌 그 옆에 있는 갈색 머리칼의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진혼 길드의 마스터인 듯했다. 하긴 지금 아인 이드리스와 함께 헌터 협회를 방문할 만한 무리라면 진혼 길드밖에 없었다. 결과가 뻔한 등급시험에 전부 우르르 몰려온 건 좀 황당했지만.
호들갑을 떠는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협회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 나왔다.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굽신거리는 태도들이 마치 제국의 황제라도 맞이하는 듯했다.
“아주 극진하고 자빠졌네.”
시기심을 굳이 감추지 않은 크리스가 콧김을 세차게 내뿜었다. 피식 웃으며 다시 돌아설 때였다.
“여, 이게 누구야? 크리스 아냐?”
뒤쪽에서 경박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리스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조금 전 그가 노려봤던 갈색 머리 남자, 진혼 길드의 마스터가 우리 쪽을 알아보고 말을 걸어온 것이다. 당황한 우리가 머뭇거리는 동안 진혼의 마스터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곤 그때까지도 굳은 것처럼 가만히 서 있는 크리스의 어깨를 서슴없이 두드렸다.
“이야, 여기서 보다니 오랜만이네. 복귀했다는 말은 들었어. 못 보던 사이에 얼굴 많이 좋아졌는데?”
크리스의 눈매가 잔뜩 사나워졌다. 그가 인내심을 발휘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 그는 핏대가 오른 목을 가만히 문지르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갈 길 가라.”
“오랜만에 보는 건데 빡빡하긴. 그냥 인사한 것뿐이잖아.”
“너랑 내가 인사 같은 걸 나눌 사이냐?”
“뭐야, 아직도 삐쳐 있는 거야? 뒤끝이 긴 녀석인 줄은 알았다만 슬슬 피곤하지 않아?”
“그냥 가라고 했다.”
“라민이 그렇게 죽은 건 정말 나도 유감스럽게 여긴다니까 그러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
“이 새끼가 진짜!”
“크리스!”
“마스터!”
공기가 사납게 일면서, 한순간에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시몬이 재빨리 그를 뒤에서 붙잡지 않았다면 주먹질이 이어질 뻔한 상황이었다. 진혼의 마스터는 어느새 호위를 앞세우고 있었다. 서로 험악한 시선이 오가는 분위기 속에서, 그가 아주 무섭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었다.
“어휴, 요즘 얌전히 산다고 해서 웬일인가 했더니 역시 그 성질은 못 버렸네. 이제 좀 철이 들 때도 되지 않았어? 언제까지 말보다 주먹이 앞설 거야? 라민도 네 그 불같은 성격을 늘 걱정했지.”
“개새끼야! 그 더러운 입으로 라민 님 이름을 부르지 마! 감히 너 따위가 부를 이름 아냐!”
“정말 너무하네. 라민은 내 동생이기도 한데. 형이 동생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한단 말이야?”
“하! 누가 누구의 동생이고 누가 형이야? 이 미친 새끼가!”
“네가 아무리 그래도 사실은 사실이지.”
“닥쳐!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염려 마. 어차피 나도 너 오래 상대할 시간 없어. 그냥 아는 얼굴이 보이기에 인사 좀 한 것뿐이야. 알겠지만 요즘 우리 길드가 아주 바쁘거든. 정말 귀한 분을 모실 수 있게 돼서 말이야.”
그가 말하는 귀한 분이야 뻔했다. 시선을 받은 아인 이드리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알지 못해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차분히 상황을 살피는 표정이었다.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진혼의 마스터가 그런 그에게 바짝 다가가 살갑게 말을 걸었다.
“죄송합니다, 이드리스 님. 괜히 저 때문에 지체되었네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런데 저분들은…….”
“아아, 이드리스 님이 신경 쓸 만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냥 예전에 알던 사이라 반가워서 말을 걸었는데, 저쪽은 그렇지 않았나 보네요. 힘든 시기를 겪어서 좀 예민한 친굽니다.”
“그렇군요. 전에 뵌 적이 있습니다. 마수가 있던 현장에 저분들도 계셨습니다.”
“오, 그래요? 저들도 이드리스 님께 목숨을 구명 받은 사람들이었군요.”
진혼의 마스터가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우리를 돌아봤다. 크리스의 얼굴이 다시금 구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당황한 아인 이드리스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현장에 있던 분들이 잘 대응해주셨던 덕분에 피해가 크지 않았던걸요. 물론 저분들을 포함해서요. 누구의 공이라 할 것 없이 모두가 함께 이룬 결과입니다.”
“하하, 겸손하시긴. 그래도 이드리스 님이 아니었다면 그 위험한 마수를 무슨 수로 잡았겠습니까? 잘 버텨봤자 결국 하나둘씩 잡아먹히기나 했겠죠.”
한껏 추켜세우는 말에 진혼 길드원만이 아니라 협회 사람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진혼 길드원들은 한껏 의기양양한 상태였다. 깔보는 듯한 시선엔 본인들이 마수를 잡은 것도 아니면서 고마워하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게,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별로 길어지지 못했다. 아인 이드리스가 더 단호히 고개를 저었기 덕분이었다.
“……예?”
“제가 그날 역할을 했다면 토벌시간을 절약한 것뿐입니다. 제가 아니었어도 저분들 힘으로 충분히 상황을 수습하셨을 겁니다.”
다행히 그는 끝까지 겸양의 태도를 잃지 않으려는 듯했다. 강한 사람 특유의 자신감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우쭐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말투는 겸손하되 비굴하지 않았다. 첫인상에서 느꼈던 그대로, 역시 괜찮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