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456화 (456/608)

제456화

“정말 신관은 아니로군. 정령사라니…….”

“그러고 보니 기억이 없을 때도 정령이란 단어에 민감히 반응했었죠. 그게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정령사라서 그랬던 거군요.”

“흠흠, 엘은 그냥 정령사 정도가 아닙니다. 상급 정령사라구요.”

크리스가 거들먹거리며 끼어들었다. 누가 보면 본인이 정령사인 줄 알 정도로 기세등등한 얼굴이었다. 시몬 일행은 더욱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때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하던 델라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네, 질문하세요.”

“당신이 떠나고 난 뒤에 랑시가 정령사가 됐어요. 혹시 당신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아, 그러고 보니 그 문제가 있었지. 이곳에 와서 처음 만났던 소녀가 떠올랐다. 여러모로 도움을 준 게 고마워서 정령사가 될 수 있게 해줬던 것도. 혹시 나중에 문제가 될까 봐 내 얘기는 하지 말라고 당부해 뒀는데, 정작 내 쪽에서 단서를 던져준 꼴이니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다. 정황상으로나 시기적으로나 내가 관여했음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음, 랑시는 뭐라고 하던가요?”

“우연히 만난 사람이 정령과 계약할 수 있게 도와줬다고 했어요. 생김새는 끝까지 말하지 않고, 그저 소환주문을 알려줬다고만 하더군요.”

내색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자세한 계약 과정까진 알려지지 않았나 보다. 이 정도면 상황이 썩 나쁘진 않았다. 계약을 도운 것 자체보단 내가 쓴 방식이 정석이 아닌 게 더 문제였던 거니까. 당시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저질렀던― 매개체를 활용하지도 않았다거나, 손만 잡고 소환주문을 외우게 했다거나, 이런 것들 말이다.

그런 부분만 아니면 원래 정령사 쪽에서 상대의 자질을 알아보고 발굴하는 건 흔한 일이긴 했다. 아니, 사실 대부분의 정령사가 그런 식으로 정령 계약을 하게 되는 편이었다. 대충 적당히 둘러대도 될 것 같았다.

“랑시에게 타고난 자질이 있었어요. 전 그걸 알아보고 조금 도운 것뿐이에요.”

“……역시 그랬군요.”

델라의 호흡이 약하게 떨렸다. 시몬과 다른 일행도 얼굴이 상기된 채였다. 예상대로 내가 평범한 소녀를 정령사로 만들었다는 것까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왜 랑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겠어요. 신관이었다가 정령사였다가, 정말 여러 가지로 놀라게 하는군요.”

“이제 사실을 아셨으니, 신관 사칭죄로 신고하실 건가요?”

이쯤에서 해볼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크리스도 그제야 생각이 미쳤는지 표정이 굳어졌다. 그런데 정작 시몬과 델라는 싱거운 농담이라도 들은 듯이 실소를 흘렸다.

“신고라니 당치도 않군. 이래 봬도 염치가 뭔지는 알고 있소.”

“염치요?”

“당신에겐 벌써 몇 번이나 도움을 받았지. 에리나의 일만 해도 그렇고, 얼마 전 마수의 습격 때도.”

아, 그게 그렇게 되나. 둘 다 얼결에 벌어진 일이라 크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멋쩍은 기분을 느끼고 있으려니 시몬이 엷게 웃었다. 지금까지 본 얼굴 중에서 가장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변변히 고맙다는 말도 못했소. 지금이라도 감사 인사를 하고 싶소. 당신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요. 구해줘서 정말 고맙소. 그리고 생명의 은인을 신고하는 일은 없을 테니, 그런 염려는 넣어두시오.”

“그렇게 말해주셔서 제가 더 고맙네요. 그럼 우리 길드에 가입하겠다는 의사도 여전히 변함없으신 건가요? 혹시 계약서를 물리자고 하실 건 아니죠?”

“그런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소.”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서서히 힘이 풀렸다. 세 사람과 재회했을 때만 해도 눈앞이 캄캄했는데, 다행히 일이 쉽게 풀리려는 모양이었다.

“아, 그런데 한가지 확인해둘 건 있어요. 밝힐 수 없는 사정이라고 했지만 신관 사칭은 그리 가벼운 사안이 아니에요. 혹시 위험한 일에 연루되어 있나요? 만약 그런 게 있다면 대비할 수 있도록 귀띔이라도 해줬으면 해요.”

“아뇨! 그건 절대 아니에요. 그 일이 분란이 될 일은 없을 거예요. 이건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좋아요. 그럼 아무 문제 없네요.”

고개를 끄덕인 델라의 말을 끝으로 분위기가 한결 편해졌다. 그제야 우리는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고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름과 나이를 비롯한 대략적인 정보와 특기를 밝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세 사람은 모두 이십 대 중반으로 셋 다 칼리가 등급의 헌터였다. 시몬은 검을, 델라는 활을 주 무기로 사용하며, 헌터 활동을 시작한 지 올해로 삼 년 차라고 했다. 내내 존재감 없이 앉아 있던 다른 한 남자의 이름이 네브라는 것도, 그의 주 무기 역시 활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저와 네브는 에리나한테서 활을 배웠어요. 에리나는 우리가 이 길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고마운 사람이죠. 제도에 온 것도 에리나가 몸담았던 여명의 활 길드에 들어가고 싶어서였어요. 워낙 대단한 길드니 아무나 받아주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입단 시험이라도 치러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 길드 자체가 사라졌다더라고요.”

제도에서 떠들썩했던 소식은 머나먼 왕국의 시골 마을에까진 닿지 않았다. 정말 황당했다며 혀를 내두른 델라는 그때의 절망스러웠던 심정을 토로했다.

“한동안 얼마나 방황했는지 몰라요. 포기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갈까도 했는데 그러고 싶진 않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동명의 길드가 생긴다는 말을 들었어요. 혹시나 싶어 찾아보다가 크리스와 마주친 거예요.”

“음, 혹시 이쪽 사정은 다 들으셨나요? 인원만 봐도 아시다시피 우리 길드가 그리 평탄한 상황은 아니거든요.”

“물론 들었어요. 오히려 제대로 정한 것 같다 싶어요. 에리나에게 여명 길드는 고향과도 같은 장소예요. 그 길드를 재건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하고 싶어요.”

델라의 말에 시몬과 네브 역시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욕이 넘치는 눈빛들을 보니 마음이 뭉클해졌다. 인원만 채울 수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길드에 임하는 자세가 진지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것 같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해요.”

모두와 인사를 마친 후 크리스와 시선을 맞췄다. 씩 웃는 얼굴과는 달리 그의 눈시울이 붉었다. 일렁이는 눈동자에서 수많은 감정의 격동이 보였다.

나 역시 그만큼은 아닐지라도 감동하긴 마찬가지였다. 아까부터 심장이 너무 빠르게 두근거렸다. 긴 시간 기다렸던 염원의 순간이 마침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여명 길드의 출범이었다.

* * *

본격적으로 여름에 접어든 날씨는 매우 화창했다. 중서부 유럽과 비슷한 제도의 기후는 연교차가 크지 않아 어느 계절이든 살기 좋은 편이긴 했지만, 오늘은 그중에서도 유독 좋은 날이었다. 기분 좋게 흐르는 바람과 적당히 밝은 햇빛, 아침에 가볍게 뿌리고 지나간 비 덕분에 공기도 맑았다. 하늘이 시리도록 파랬다. 그 안을 무럭무럭 채우고 있는 새하얀 구름은 손을 뻗기만 해도 닿을 것 같았다.

―찾았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걸터앉은 담 위에서 풍경을 한껏 감상하고 있자니 주위를 한 바퀴 선회하고 온 나이아스들이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어차피 들을 수 있는 사람도 나밖에 없건만, 그냥 이러는 게 재밌는 모양이었다.

하긴 소환자에게 말로 상황을 전하는 게 신기하긴 하겠지. 처음엔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했는데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해졌다. 나이아스는 내가 그들의 말을 알아듣는 걸 유독 즐거워했다. 이번에도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니 빙그르르 회전하며 까르르 웃기 바빴다. 귀여운 녀석들이었다.

“천천히 이쪽으로 몰아줘.”

―응! 알겠어!

힘차게 대답한 나이아스들이 해맑은 얼굴로 튀어 올랐다. 아까는 사방으로 흩어졌던 이들이 이번엔 모두 한 방향으로 향했다. 저쪽이구나. 시선을 드니 남아있던 나이아스 하나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준비해요.”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일행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나는 한 손을 들어 보이며 나이아스들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벌어졌던 거리가 다시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아래 번개처럼 빠르게 달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바로 지금!”

“히압!”

신호가 떨어짐과 거의 동시에 크리스가 두 팔을 크게 움직였다. 그가 던진 그물이 활짝 펼쳐지면서 달리던 작은 몸 위를 덮쳤다. 흠칫 놀란 그림자가 재빨리 방향을 틀려 했지만 이미 사방이 막힌 후였다.

“잡았다!”

“성공이야!”

만일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모두가 몸을 일으키며 환호성을 질렀다.

“야옹.”

그물 속에서 버둥거리던 고양이가 불만스럽게 울었다.

* * *

“노란 줄무늬에 흰 양말. 왼쪽 귀의 상처. 전부 일치하는군요. 의뢰받은 고양이가 맞는 것 같습니다.”

꼼꼼하게 고양이를 살피던 헌터 협회 직원이 최종 확인을 내렸다. 대조를 끝낸 서류에 임무 완수를 증명하는 날인이 찍히자 긴장하며 지켜보고 있던 모두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여기 보수입니다. 약속한 기간보다 더 빨리 끝내주셔서 협회의 재량으로 조금 더 챙겨 넣었습니다.”

직원이 돈이 든 주머니를 건넸다. 뜻밖의 상여금까지 생긴 기분 좋은 순간이었으나 그걸 받아 챙기는 크리스의 표정은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이어진 직원의 말에 그의 눈이 다시 빛났다.

“요즘 여명 길드의 평이 아주 좋아요. 지금껏 어느 길드도 이렇게 빨리 의뢰를 완수한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요?”

“그럼요. 지금 이 녀석만 해도 두 달이 넘도록 아무도 붙잡지 못해서 얼마나 애먹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걸 세 시간 만에 해결하시다니, 솔직히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전의 의뢰도 비슷한 속도로 끝내셨죠? 덕분에 지명 의뢰가 쇄도하고 있어요. 아주 잘하고 있다는 증겁니다. 소형 길드가 지명 의뢰를 받는 일은 정말 흔치 않거든요.”

“그럼 이제 좀 더 어려운 의뢰도 받을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안 그래도 슬슬 보상이 더 큰 쪽을 권해드리려 했어요.”

정색할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직원은 선선히 대답했다. 뜻밖의 전개에 놀란 크리스가 밝은 얼굴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다른 일행들도 모두 얼굴이 상기되긴 마찬가지였다. 들뜬 우리를 보는 협회 직원도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다음 의뢰건을 보여드릴게요. 말씀드렸다시피 보상이 더 큰 의뢰입니다. 당연히 그만큼 더 까다롭고요.”

“오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네, 이번 의뢰는 이겁니다.”

크리스가 기대에 찬 얼굴로 의뢰서를 받았다. 그러나 그 표정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어디 보자. 이번에도 수색 의뢰긴 하네요. 이틀 전에 두더지가 우리에서 탈출해 사라졌습니다. 두더지를 찾아주세요……?”

한동안 글자를 읽어 내려가던 그가 어색하게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협회 직원은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저기, 여기서 말하는 두더지라는 게 혹시 괴물 두더지입니까?”

“아뇨, 아뇨. 내용을 자세히 보시면 아시겠지만 애완 두더지입니다. 루손 백작가의 셋째 도련님이 애지중지하던 아이인데, 잃어버리셔서 상심이 크다고 하시네요.”

“……그게 한 10라오 정도 되는 크기는 아니겠죠?”

“하하, 그럴 리가요. 1라오도 안되는 작고 귀여운 두더지예요.”

“그럼 등급은?”

“당연히 아르마죠. 그래도 이번엔 난도가 있어서 아르마의 중급입니다. 아무래도 두더지는 땅속에 살아서 더 찾기가 어려우니까요.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무 두더지나 잡아 오시는 건 안 됩니다. 등에 루손 백작가의 표식이 있는 두더지여야 합니다.”

“아, 그렇군요. 과연 난도가 있긴 하네요.”

“역시 그렇죠?”

크리스와 협회 직원이 서로를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지금 장난해!”

쩌렁쩌렁한 고함이 지붕을 꿰뚫은 건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였다.

“이제 좀 진정했어요?”

책상을 뒤엎으려는 걸 강제로 만류해서 데리고 나온 후에도 크리스는 한동안 씩씩거리는 걸 멈추지 못했다. 로비 구석에 앉아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던 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내가 너무 흥분했어.”

“뭘요.”

“젠장, 매번 이런 식이야. 계속 아르마 급 의뢰만 주는 게 말이 돼?”

다시 화가 치미는지 크리스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악문 입술 사이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울렸다. 그를 위로하는 일행들도 표정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다. 길드 등록을 마친 이후로 벌써 한 달이었다. 그동안 우리에게 들어온 의뢰는 죄다 잃어버린 애완동물을 찾거나, 짐을 운반한다거나 하는 등의 낮은 등급뿐이었다. 소형 길드가 처음부터 고급 의뢰를 맡기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한 달이 넘도록 최하 등급 의뢰만 주는 건 명백히 문제가 있었다.

하물며 우리는 악시스 급의 헌터를 두 명이나 보유한 길드였다. 악시스 급 헌터면 단독으로도 상당한 전력으로 여겨진다. 지금 협회의 행보는 호랑이 잡는 칼로 무나 썰고 있는 꼴이었다. 그러는 이유는 너무나도 명백해서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방해받을 건 예상은 하고 있었잖아요.”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그래도 직원을 탓해서 뭐하겠어요. 그 사람도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건데요. 진짜 문제는 윗선이죠.”

“제기랄, 진혼 이 자식들!”

다시금 이를 간 크리스가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그 소리가 제법 큰 탓에 근처에 있던 헌터들이 우리 쪽을 힐끔거렸다. 호기심이 가득 담긴 시선에 수군거림이 섞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