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5화
“어? 저도 가요?”
“그럼 당연하지. 네가 길드 실권자잖아. 게다가 앞으로 얼굴 보고 지낼 동료들인데 서로 첫인사하는 자리에 없는 게 말이 되냐?”
“하긴 그렇네요. 지금이 몇 시죠?”
크리스는 대답 대신 로켓을 던져주었다. 색깔로 시간을 표현하는 로켓은 제국에서 가장 흔하게 쓰는 마법 시계였다.
이곳의 한 시량은 현대의 세 시간이다. 이 시대는 24시간을 세 시간씩으로 나눠서 총 8개의 시간대로 구별했다. 로켓에서 표현하는 색상도 8가지. 0시의 검은색을 기준으로 보라색, 남색, 파란색의 역순으로 이어지는 무지개색이었다. 이때 색깔은 시간이 지날수록 진해지는 구조인데, 그 짙기에 따라 세 조각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지금 로켓 안쪽은 초록색을 띠고 있었다. 녹색은 5시량의 단락을 표시하는 색이고 그중에서도 색이 조금 짙은 상태니 두 조각째. 대략 오후 1~2시쯤이라고 보면 됐다.
“으음, 한 시량에 될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7시량의 한 조각이 넘기 전에는 갈게요.”
“그래, 이따 보자!”
다시 던진 로켓을 가볍게 잡아챈 크리스가 부리나케 몸을 돌렸다. 또 구박받을까 싶었는지 자리를 피하는 발걸음이 아주 날랬다. 나는 그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한 달을 넘게 끌어온 일이 드디어 해결된다 싶으니 마음이 너무 가뿐했다. 옆에서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진.
“대단하네. 아직 물구나무서기와 오리걸음과 내려치기 오천 번에 찌르기 오천 번, 그 외에도 이것저것 기타 등등이 남았는데. 그걸 한 시량 한 조각 안에 다 끝낼 자신이 있나 봐.”
물론 당연히 못 끝낸다. 앞서 언급한 것만으로도 평소에 완수하는데 다섯 시간은 가뿐히 잡아먹는 분량이었다. 그보다 기타 등등은 또 뭐야. 아무래도 작정하고 괴롭힐 생각인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아하하, 그런 의미에서 오늘 수련은 좀 일찍 끝내면 안 될까, 트로웰? 부족한 만큼 내일 벌충할게.”
“훈련이란 게 한 번에 몰아서 한다고 효과를 보는 게 아닌데.”
“그, 그렇긴 하지. 그래도…….”
슬쩍 살핀 트로웰의 얼굴은 엄격했다. 가끔 오후 훈련을 생략할 때도 있으니 이번에도 형편을 봐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른 모양이다. 시간 안에 어떻게든 다 소화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별수 없이 한숨을 내쉰 다음 훈련을 이어갈 준비를 마쳤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트로웰이 물었다.
“그렇게 빠지고 싶어?”
“아니, 훈련을 하기 싫다는 게 아니야. 그래도 처음 만나는 자리인데 모두와 인사는 해야 하지 싶어서…….”
“흠, 좋아. 그렇게 간절하면 일찍 끝내줄까? 방법이 하나 있긴 해.”
“어? 정말?”
혹시 마음이 변한 건가? 반색하며 고개를 드니 트로웰이 내 쪽으로 무언가를 던졌다. 바닥에 툭 떨어진 것에 시선을 내리다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그건 천을 둘둘 감아둔 장검이었다. 내가 직접 감은 거라 뭔지 몰라볼 수가 없었다. 인간의 영혼으로 만들어진 정령검. 발견한 이후로 단 한 번도 입을 연 적이 없는 파이어 버스터였으니까.
“검 들어.”
“……어?”
“대련이야. 한 시량 동안 날 한 번이라도 이기면 오늘 훈련은 마치는 거로 할게.”
……그거 훈련을 안 끝내겠다는 소리 아니야? 그를 이기는 게 가능하기는 한 건지 확률을 헤아려보다 그대로 아련해졌다. 아니, 그보다 한 시량 동안이라니. 지금 이거 대련을 세 시간 동안 한다는 거 맞지?
“자, 잠깐만, 트로웰? 아니, 스승님? 형님!?”
머릿속에서 핏기가 가시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삼키며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친 트로웰이 생긋 웃었다.
“간다.”
악마의 미소였다.
* * *
“얀마, 어떻게 된 거야? 늦었잖아. 지금 벌써 8시량이 다 되어간다고.”
길드 사무실에 도착했을 땐 이미 온 사방이 캄캄했다. 문을 두드리자마자 날 듯이 튀어나온 크리스가 나를 확인하기 무섭게 잔소리를 퍼부을 만한 시간이었다.
“……그러게요. 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허무하게 중얼거리니 크리스의 어깨가 움찔했다. 내 상태가 범상치 않아 보이긴 한 모양이다.
“그…… 고생이 많았나 보네. 노파심에 물어보는 건데, 혹시 회복제 필요해?”
“아뇨, 괜찮아요. 치료하고 왔거든요.”
“그, 그래. 치료가 필요하긴 했었구나.”
“대련이란 게 좀 위험하더라고요. 검집으로 맞는 건데도 진짜 아프던데요.”
“……그야 그렇겠지.”
어색하게 웃은 크리스의 눈동자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세차게 흔들렸다. 다시금 형님의 인성에 대해 진지하게 논해보고 싶은 얼굴이었다. 솔직히 이번엔 좀 힘들긴 했다. 타박상이라면 나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 다양한 형태도 가능하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오죽하면 치료해주던 엘뤼엔이 드물게 트로웰에게 적당히 하라며 한마디 했을 정도였다. 트로웰도 과했단 걸 인정했다. 내가 생각보다 따라오는 속도가 빨라서 무심결에 힘이 더 들어갔다고.
그러니까, 이건 결국 내가 잘한다는 소리겠지? 나도 모르게 웃었는지 크리스가 황당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왜 히죽거려?”
“그냥요.”
이 시대에선 엘뤼엔이나 트로웰이나 칭찬에 엄청나게 인색해서 알아서 잘 받아먹어야 한다. 이 정도면 진짜 대놓고 칭찬한 거다. 그럴 때가 아니란 걸 아는데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어이없어하던 크리스도 곧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나 참, 지각한 주제에 신나기도 하겠다. 아무튼 어서 들어와. 다들 너만 기다리고 있었어.”
“다들이요? 아직 안 돌아갔어요? 그러고 보니 계약은 어떻게 됐어요?”
“빨리도 물어본다. 계약서는 다 작성했어. 그냥 돌아가도 된다고 했는데 이왕이면 너랑 인사하고 싶다고 그냥 기다린다고 하더라고.”
“……음, 제가 잘못했네요.”
“그걸 이제 알았냐?”
피식 웃은 크리스가 가볍게 내 등을 떠밀었다. 서둘러 안으로 들어서니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남자 둘에 여자 하나로 구성된 일행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제가 너무 늦었…….”
그러나 정중히 건네던 사과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기척을 느끼고 돌아보는 두 사람의 얼굴이 몹시 낯익었기 때문이었다. 낭패감에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시몬과 델라, 이 세계에 와서 처음 만났던 헌터들이었다.
“헉?”
“당신!”
두 사람도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경악이 서린 눈을 한계까지 부릅뜬 채였다. 아마 내 표정도 별반 다르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왔던 그대로 뒷걸음질을 쳐서 다시 나갈까 하다가 무의미한 시도라는 걸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 무구는 왜 개발되지 않는 걸까. 억지로 웃으려니 입가에서 경련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아하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당신이 왜 여기에……?”
그러게 말입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을까요. 그리고 당신들은 왜 여기에 있는 걸까요.
그러고 보니 이 사람들도 제도로 올라왔었지. 얼마 전에 마주치긴 했지만 설마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 싶어서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었다. 하고 많은 헌터들 중에서 우리 길드에 가입하겠다고 찾아온 게 하필이면 이 사람들이었다니. 대체 무슨 일이 이렇게 꼬이는 건지 모르겠다.
“어? 뭐야, 서로 아는 사이?”
상황을 알지 못하는 크리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시몬의 일행 쪽에 남은 한 사람도 당황한 기색으로 우리 쪽을 번갈아 바라보는 중이었다. 어떻게 설명할지 고심하다가 나는 일단 간단히 대답했다.
“아는 사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구요. 어쩌다 보니 예전에 잠시 만난 적이 있어요.”
“허어, 그래? 잠시 만났던 사람들을 여기서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굉장한 우연이네. 이런 걸 두고 인연이라고 하는 건가?”
물론 그 농담에 웃는 사람은 크리스 본인뿐이었다. 시몬과 델라의 얼굴은 오히려 더 굳어졌다. 두 사람은 잠시 시선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누가 나서서 이 상황을 해결할지 정하는 것 같았다. 짧은 협의를 마치고 입을 연 사람은 델라였다.
“엘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설마 싶긴 했어요. 그런데 정말 당신일 줄은 몰랐네요. 당신이 헌터라고요? 이 길드의 마스터?”
“음, 아뇨. 계약서에 사인할 때 보셨겠지만, 마스터는 크리스예요. 전 그냥 창단 멤버고요.”
“크리스의 말과는 조금 다르네요. 크리스는 당신에게 실권이 있는 것처럼 말했는데요.”
“뭐, 저한테 조금 더 결정권을 주기로 한 것뿐이에요. 그래도 마스터는 크리스예요.”
“……그래요. 그렇다고 하죠. 그럼 당신은 자문 역할인가요? 그런데 지금 인원이 전부 다섯 명인 거 아닌가요? 다섯 명 모두 헌터가 아니면 길드 설립이 안 될 텐데요? 크리스는 분명 세 명만 채워지면 된다고 했어요.”
“저 헌터 맞아요. 면허증도 있고요.”
못 믿겠으면 보여주겠다고 하니 델라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당신은 신관이잖아요? 어떻게 헌터가 될 수 있죠?”
“엥? 신관이라니?”
크리스가 황당해하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그래, 이렇게 흘러갈 줄 알았지. 나는 크리스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인 다음 다시금 깊은 한숨을 삼켰다.
“저 신관 아니에요.”
“무슨……. 신관이 아니라고요? 혹시 파문당한 건가요?”
“아뇨, 처음부터 신관인 적 없었어요.”
“거짓말! 마신의 문장이 있었잖소?”
이번에 반박한 건 시몬이었다.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더니 더는 가만히 지켜보기가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크리스의 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
“마신의 문장이요? 엘이 마신관이라고요?”
“그렇소! 분명 저이의 손등에 새겨진 마신의 문장을 봤소! 그런데 아니라고 해봤자 그걸 누가 믿……!”
항의하듯 말하던 시몬이 다음 순간 눈을 크게 떴다. 델라 역시 멈칫한 상태였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린 크리스가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는 이유를 짚었다.
“문장 없는데요?”
그렇다. 난 지금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이었고, 훤히 드러난 손등은 아무런 흔적 없이 말끔하기만 했다. 당황한 사람들을 보며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손 내밀어봐.”
조금 전 상황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이곳으로 오기 직전, 막 출발할 무렵이었다. 문을 열고 나서려는데 장갑이 떨어져 너덜거리는 걸 발견했다. 보존 마법을 걸어둬도 이전보다 조금 더 나을 뿐 고된 훈련엔 여전히 오래 버티지 못하는 편이었다. 할 수 없이 새 장갑을 꺼내려는데 트로웰이 불쑥 뜻밖의 요구를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내밀었더니 그가 그대로 붙잡고 내 손등에 무언가를 발랐다. 그러자 놀랍게도 문장이 사라졌다.
“헉? 이게 뭐야?”
“신관용 위장 크림. 일시적으로 신의 문장을 가릴 수 있어.”
“우와, 이런 게 있었구나.”
“드래곤들은 가끔 쓸데없어 보이지만 의외로 유용한 걸 발명하거든. 이것도 그중 하나지. 하지만 상급신의 문장은 오래 못 버텨. 특히 이건 마신의 문장이라 더 짧을 거야. 길어봤자 서너 시간 정도.”
아, 그래서 굳이 알려주진 않았던 건가. 효력이 그렇게나 짧다면 장갑이 훨씬 안전하긴 했다. 내심 아쉬운 마음을 삼키자니 다 이해한다는 듯 트로웰이 빙긋 웃었다. 마주친 황금색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크림의 효력이 떨어지기 전에 돌아와.”
그때까지만 해도 귀가 시간 때문에 발라준 거라고만 생각했다. 최근 크리스랑 만나기만 하면 놀다가 늦는 일이 잦았고, 트로웰이 그걸 매우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럴 줄 알고 조치해준 거였구나.’
다 좋은데 제발 이런 건 미리 설명 좀 해주면 좋겠다. 그래도 덕분에 이번에도 큰 위기를 넘겼다. 그가 아니었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지 생각하니 머릿속이 아찔했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문장이 있었는데?”
당연히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시몬과 델라는 크게 혼란스러워하는 중이었다. 꿔둔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던 나머지 한 사람도 나에 대해 알고 있긴 했는지 그 분위기에 편승해 있었다. 나는 살짝 심호흡한 다음 다시금 웃어 보였다. 모처럼 트로웰이 판을 깔아주었으니 알아서 잘 활용할 차례였다.
“지웠으니까요. 실은 그거 가짜였거든요.”
“가, 가짜?”
“가짜 문장이었다고요?”
“으아, 나도 좀 알아들읍시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두 사람이 얼빠진 얼굴이 된 순간, 크리스가 불만을 터트렸다. 모두가 알고 있는 상황을 자기만 모르는 게 몹시 갑갑한 듯했다. 그때부터 나는 지난 일들에 적당히 지어낸 이야기를 가미해 들려주었다. 밝힐 수 없는 사정으로 신관으로 위장할 일이 있었다고. 그런데 사고를 당해 잠시 기억을 잃었고, 하필 그 상태에서 시몬 일행을 만나게 됐다고 말이다.
“나중에 기억이 돌아오면서 제가 진짜 신관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도망친 거고요.”
“헐, 줄행랑칠 만도 했네. 신관 사칭은 최소 지하 감옥행이잖아.”
“네, 그렇죠. 그땐 그렇게 사라져서 죄송했어요.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어요.”
모든 설명을 마치고 나자 주위가 잠시간 조용해졌다. 시몬 일행은 처음보다는 꽤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너무 즉석에서 지어낸 이야기라 잘 될까 싶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변명이 통한 듯했다.
“설명은 이해했소. 대체 무슨 사연이었는지는 궁금하지만, 밝힐 수 없다고 하니 캐묻진 않겠소. 하지만 마신관이 아니라면 그때 에리나는 대체 어떻게 치료한 거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제게 있는 다른 힘의 도움을 받은 게 아닐까 싶어요.”
“다른 힘?”
나는 대답 대신 나이아스를 소환해 보였다. 의아해하던 사람들은 허공에서 작은 인어들이 나타나자 모두 숨을 크게 삼켰다.
“보다시피, 정령은 마계의 것과 상극의 존재거든요. 아마 약한 마수라서 제 기운에 영향을 받아 밀려난 걸지도 모르겠어요.”
“저, 정령사……?”
“제가 신관이 아니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죠?”
어깨를 으쓱이니 세 사람은 그대로 허탈한 얼굴이 됐다.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증명을 눈앞에 둔 탓에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