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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453화 (453/608)

제453화

굵은 빗줄기가 창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예정에 없던 비는 갑작스러운 시작과는 다르게 좀처럼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가득 채운 먹구름 역시 오늘 안으로는 물러서지 않으려는 듯했다. 그러나 이 비는 멎음의 때 또한 정해진 바가 없었다. 아마도 불러들인 이만이 그 끝을 알고 있을 터였다.

테라스에 서서 고요한 눈길로 경치를 구경하던 이가 문득 바깥으로 팔을 뻗었다. 지붕 너머로 방치된 손이 쏟아지는 강우에 사납게 삼켜졌다. 손바닥 안에 고여 든 빗물이 넘쳐 흐르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그 물줄기는 아래로 떨어지는 대신 위쪽으로 튀어 올랐다. 구슬 같은 물방울들이 시리도록 하얀 피부 위에서 매끄럽게 굴렀다. 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옷자락이 펄럭였다. 그 술렁임을 타고 피부만큼이나 티끌 없이 새하얀 은발이 춤을 추듯 일렁거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날개가 달린 것 같은, 금방이라도 부유할 듯한 몽환적인 광경이었다. 그게 결코 비현실적인 상상이 아님을 알면서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지켜보는 이들의 표정이 모두 멍해졌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곳에서 그 진정한 정체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인의 형상을 한 기적, 실체화한 신의 축복. 세상에서 가장 고강한 무기이자 살아 있는 성물.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빛으로 빚어낸 것 같은, 그 지나친 아름다움조차 숭고한 힘의 증거였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이는 그 자체로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당연한 존재였다.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특유의 아슬아슬한 분위기 또한 모두를 매료하기에 충분했다.

그를 볼 때면 사람들은 벅차오르는 감동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꼈다. 특히 지금처럼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모습을 볼 때면 언제 떠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존재라는 점을 새삼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금세 마음을 추슬렀다. 그를 이 세상에 붙들어두는 이가 있다는 점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계셨군요, 미네르바.

때마침 들려온 목소리가 바로 그 특별한 은총을 누리고 있는 주인공이었다. 그가 나타나자 역시나 다른 세계 같았던 공기가 빠르게 흐트러졌다. 은발의 여인을 두르고 있던 아슬아슬한 느낌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겨우 얼굴을 펴고 미소를 지었다. 모두의 시선이 테라스의 유리문 너머에 서 있는 흑발의 남자를 향했다. 그를 돌아본 은발의 여인, 미네르바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렸다.

“아인.”

자신을 부르는 다정한 음성에 남자의 두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성큼 다가온 그가 미네르바를 뒤에서 끌어안고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다정한 애정 표현이 오가는 공간은 더욱 훈훈한 색으로 물들었다.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와 그의 계약자인 아인 이드리스. 세상을 온통 떠들썩하게 한 소문의 주인공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연인이기도 했다.

남자, 아인이 눈짓으로 주위의 사람을 물렸다. 연인의 시간을 방해할 생각이 없던 이들이 빠르게 자리를 떠나면서 테라스는 곧 둘만의 공간이 됐다. 지켜보는 시선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는 미네르바를 꼭 끌어안은 채 마음 놓고 칭얼거렸다.

“역시 당신과 같이 있을 때가 가장 좋아요. 온종일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고생이 많았다. 손님은 전부 돌아간 건가?”

“네, 오늘 일정은 끝입니다. 드디어 둘이서만 있을 수 있게 됐어요. 이제 더는 아무한테도 방해받지 않을 겁니다.”

투정 섞인 말투에 미네르바의 웃음이 짙어졌다. 어린아이의 응석을 달래는 듯한 태도에 아인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표정을 더 느슨히 풀었다.

“빗줄기가 제법 굵군요. 경치를 보고 계셨습니까?”

“그래, 꽤 재밌는 비구나.”

“재밌는 비요? 그러고 보니 갑자기 웬 비가 이렇게 내리는 겁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가 내릴 날씨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네 말대로다. 우리가 안배한 비는 아니지.”

모호한 답이었으나 오랜 시간 미네르바와 함께해 온 아인은 그 말이 품고 있는 뜻을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정령사가 한 일이군요.”

그것도 흔치 않은 고위 정령사였다. 이렇게 대단위 규모로 날씨를 바꿀 수 있는 건 정령사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인 그 자신이 정령사였기에 그 가치를 몰라볼 수가 없었다.

“누군지 알 것 같습니다. 최근에 악시스 급에 합격한 헌터가 정령사라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그자가 틀림없습니다.”

“그런가.”

“네, 제도에서 악시스에 합격할 정도면 상급 정령사라는 소리잖습니까. 헛소문일 수도 있다고 여겼는데 정말이었네요. 정령사라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알려진 게 없다고 하던데, 물의 정령사였군요.”

먹구름을 끌어와 비를 내리는 거라면 바람의 정령사도 할 수 있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 내리는 비엔 강풍이 섞이지 않았다. 아무런 전조 없이 얌전히 쏟아지는 장대비는 물의 정령만이 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미네르바는 감탄을 숨기지 못하는 아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가 궁금한가?”

“당연하지요. 정령사는 만나보기 어려운걸요. 게다가 물의 상급 정령사는 특히 귀하고요.”

“그 표현이 부족함이 없긴 하지.”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이 비를 내린 이가 누군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상급 정령사 정도가 아니라 왕의 계약자였다. 바람의 정령왕을 소환한 아인을 이은, 한 세대에서 일어난 두 번째 기적. 물의 왕을 소환한 최초의 인간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그의 계약자보다도 더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소년.

그러나 미네르바는 진실을 말해주는 대신 말을 삼켰다. 당사자도 아직 세상에 밝히지 않는 사실을 굳이 입에 담을 필요는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 소년과 함께하는 또 다른 정령왕을 떠올린 탓인지도 몰랐다.

―인간의 맹세란 덧없는 거야, 미네르바.

오래전 그에게 들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어느 날 불쑥 찾아온 그의 어린 동료는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늘 맑게 빛나던 황금색 눈동자는 평소의 빛을 잃고 음울한 색을 품었다.

언제부터인가 그가 편하게 웃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 아마도 자신이 인간에게 소환된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고, 미네르바는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 이유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는, 땅의 정령왕 트로웰은 인간을 싫어한다. 그래서 동료가 인간과 연인이 된 게 못마땅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날은 좋지 못한 것을 본 직후였으니 더욱 그러했을 터였다.

“미네르바?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인이 어색하게 묻는 것에 미네르바는 손을 들어 가만히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미네르바?”

“이렇게 보니 많이 자랐구나.”

당황하던 아인이 그 말에 부드럽게 웃었다. 얼굴을 쓰다듬던 손을 자신의 손으로 덮고 고개를 틀어 손바닥에 입술을 맞췄다.

“이제 어릴 때 얼굴은 거의 없지요? 그러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전 당신과 어엿한 연인으로 보이고 싶으니까요.”

“별걱정을 다하는구나.”

“하지만 지금도 꿈을 꾸는 것 같은걸요. 처음 보는 그 순간부터 마음에 담았던 분이 정말 제 연인이 되어줄 거라곤 생각지 못했으니까요. 아시잖습니까, 미네르바. 제게 당신의 존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적입니다.”

“끝이라…….”

“예, 제 시작이 그러했듯이, 끝을 함께하는 것도 오직 당신뿐입니다.”

―네 계약의 끝을 봤어.

다시금 지난 목소리가 속삭였다. 모든 시작엔 끝이 있다. 필멸자인 인간과의 인연에선 더욱 당연한 일이었다.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이미 각오하고 받아들인 사실을 새삼스레 여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트로웰이 말한 끝은 그런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자의 마음은 널 떠날 거야.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하기도 전에 감정의 단절이 먼저 일어날 것이란 경고. 믿을 수 없는 그 예지는 혼란스러웠고, 잔인했다. 특별한 인연이 닿은 이래 단 한 번도 그려본 적이 없던 미래였다.

―지금 널 향해 애끓는 그 감정은 영원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빠르게 식고 재처럼 허무하게 흩어질 거야. 꺼진 불씨는 새로운 연인을 향해 새로이 타오르겠지. 넌 그자를 사랑하고 아끼는 만큼 아파질 거야.

―그러니 그자에게 너무 깊은 마음을 허락하지 마.

이후로도 여러 번 그는 같은 내용을 경고해왔다. 거북한 기분을 내색한 후로는 직접 찾아오는 일은 그만두었지만 여전히 헤어지길 바란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에게 유감은 없다. 오히려 트로웰은 자신의 예지가 이뤄지지 않기를 바라는 쪽이었다. 그가 예언하는 이유는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게 하기 위함이다. 심술을 부리기만 할 작정이었다면 굳이 알려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건 분명 그만의 상냥함이었다. 다만 대비책에 있어 둘의 의견이 다르다는 점이 문제였다. 트로웰은 당장 계약을 끊고 헤어지는 걸 최선이라 여겼고, 미네르바는 다른 방식의 해결이 있을 거라 믿었다. 선뜻 멈추기엔 이미 마음이 깊어졌고, 함께한 추억이 너무 많았다. 처음부터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연정이란 감정을 알아버린 지금은 알지 못하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미네르바는 다시금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삼 년. 외면하는 동안에도 트로웰이 예지한 때는 착실히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그는 경고를 물리지 않았다.

‘이렇게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고작 그사이에 변해버린다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트로웰은 잔혹한 분풀이를 할지언정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 헤어지길 종용하는 것도 사감 없이 가장 평온하게 해결할 방안을 제시한 것일 터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타인의 의견일 뿐, 당사자의 의견은 아니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미네르바?”

“……아인, 물어볼 게 있다.”

“네, 말씀하십시오.”

웃으며 맞춰오는 시선엔 숨기지 못한 애정이 가득했다. 그 다정한 얼굴을 눈에 새길 것처럼 가만히 살피면서, 미네르바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떤 상인이 네게 귀한 꽃을 주었다. 화단에 심으면 해마다 꽃피울 수도 있지만, 그대로 시들어 죽을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지금 줄기를 잘라 보존 마법을 걸어 두면 예쁜 꽃 형태를 계속 즐길 수 있지. 너라면 그 꽃을 어떻게 하겠나?”

“음, 저라면 화단에 심을 것 같습니다.”

아인은 그리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선뜻 떨어진 대답에 미네르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심는다고?”

“꽃이 죽을지 안 죽을지는 알 수 없는 거니까요. 그런 염려 때문에 해마다 꽃피울 수 있는 미래를 포기한다는 게 아까울 것 같습니다. 보존 마법 상태가 아무리 좋아도 살아 있는 것보단 아름답지 않잖습니까. 그 대신 죽지 않도록 잘 관리하면 되지 않을까요?”

술렁이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눈동자의 파문도 조금씩 멎어 이내 차분해졌다. 아인이 그런 미네르바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혹시 부족한 대답이었습니까?”

“……아니, 마음에 든다.”

“다행입니다.”

안심하는 아인을 보고 미네르바는 씁쓸히 웃었다. 그의 순수한 연인은 지금 자신의 대답으로 인해 무엇이 결정된 건지 알지 못했다. 앞으로도 알리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고심이 많은 여린 연인을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감정이 변한다는 건 나와의 일에서 그럴 만한 나쁜 계기가 생긴다는 거겠지. 그러니 내가 조심하면 된다.’

미네르바는 차분히 생각을 정돈했다. 그러는 사이 귓가를 계속 간지럽혔던 경고는 완전히 흐려져 더는 떠오르지 않게 되었다. 때마침 집사가 다가와 식사 시간을 알려오면서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전환됐다.

“참, 그러고 보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미네르바. 저 결심을 굳혔습니다.”

테라스를 벗어나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아인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무엇에 대한 결심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인은 제국에 온 이후로 쭉 정착할 곳을 찾는 중이었다. 정령왕의 계약자인 그는 유명했고, 그의 능력을 탐내는 곳은 많았다. 지금까진 단기 계약 방식으로 필요한 곳마다 조금씩 힘을 보태주는 정도였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방황할 순 없었다. 여기저기 쏟아지는 제안서에 내내 고심하더니 드디어 마음을 정한 듯했다.

“오늘 온 곳인가?”

“네, 여러 곳을 검토해봤지만 역시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조건도 그렇지만 일해봤을 때의 능률도 가장 좋더군요. 그곳이라면 잘 지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

“사실 제일 마음에 드는 건 사람들입니다. 어딜 가도 저나 미네르바에게 쓸데없는 관심이 쏠리는데 거긴 그러지 않더라고요. 미네르바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가 좋다면 난 어디든 상관없다.”

정령인 그에겐 어차피 어느 곳이든 다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무엇이든 아인의 생각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그가 내리는 결정에 불만도 없었다. 그런데 평소라면 평범하게 기뻐할 아인이 이번엔 그저 짧게 웃었다.

“너무 제가 하고 싶은 대로만 놔두시는 거 아닙니까?”

“널 신뢰하기 때문이다.”

“음, 미네르바의 그런 부분에 많은 위안을 얻습니다만, 한 번쯤은 반대 의견도 듣고 싶은데 말이죠.”

“혹시 내가 실수한 건가?”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고마워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고마운 당신에게 제가 너무 부족한 사람인 것 같아서요. 미네르바, 당신을 은애하는 제 마음 알고 계시지요?”

“물론이다, 아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거면 됐습니다. 은애합니다, 미네르바. 당신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그렇게 깊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절절한 고백은 들을 때마다 마음을 충만하게 했다. 미네르바는 자신을 끌어안는 따스한 품을 마주 끌어안았다. 아인의 말대로였다. 꽃은 화단에 심어야 했다. 그 무엇도 살아 있는 순간보다 아름다울 리가 없었다.

불확실이란 얼마나 매력적인 단어인가. 피해 갈 수 있는 미래엔 아직 희망이 있었다. 그렇기에 미네르바는 이 소중한 순간을 도저히 제 손으로 놓을 수가 없었다. 그게 비록 자신을 염려하는 이를 슬프게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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