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452화 (452/608)

제452화

“아무튼 내가 놈한테 찍힌 걸 다 알아. 그래서 다들 놈의 눈치를 보는 거야.”

“진혼도 7대 길드예요?”

“맞아, 악명도로는 삼 위권 안에 거뜬히 들걸. 그 길드 마스터에 그 길드원이라, 진짜 쓰레기 집합소가 따로 없거든.”

그만하면 다들 몸을 사릴 만했다. 아무리 악시스 급이라도 크리스 하나만으로는 믿음직스럽지 못하겠지. 하다못해 내가 이번 콴제르 토벌에서 활약해서 이름을 알렸다면 그 때문에라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여러모로 아쉬운 일이었다.

“젠장, 딱 세 명만 있으면 되는데. 어떻게 그 세 명이 안 모이지? 이 년 정도면 멋모르는 신예도 많이 늘었을 테니 괜찮을 줄 알았는데.”

혹시 그 멋모르는 신예에 나도 포함되는 건가. 물끄러미 바라보니 분하다는 듯 중얼거린 그가 눈에 띄게 뜨끔한 얼굴로 웃었다. 숨기려 해봤자 동공에 지진이 일어나는 걸 분명히 봤다. 멋모르는 걸 넘어 아예 솔선수범해서 그의 이름으로 길드를 세우려 한쪽이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저기, 엘. 네 일행인 그 두 사람 말이야. 그분들은 헌터 일에는 관심 없대? 분위기만 봐도 심상치 않은 게, 상당한 실력자들인 것 같은데. 자격증 따서 그냥 인원만 맞춰주면…….”

“그러게요. 꽤 좋은 방법인 것 같죠. 안 그래도 물어봤다가 본전도 못 찾았어요.”

돌아온 건 정도껏 하라는 싸늘한 시선이었다. 아무리 나라도 그때는 좀 무서워서 더 부탁해볼 생각은 일찌감치 접었다. 크리스는 아쉽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둘에게 뭔가 부탁할 엄두가 안 난다는 사실은 공감하는 듯했다.

“형님들이 막내와는 다르게 다들 참 무서우시단 말이지. 하긴, 나라도 너 같은 동생 있으면 엄격해지겠다 싶다만. 워낙 겁이 없어야 말이지.”

“형님이요?”

“네 형님들 아냐? 그 검은 머리칼 분은 좀 어려 보이긴 하지만, 분위기나 태도를 봐선 척 봐도 너보다 연상이던데.”

“……우리가 가족으로 보여요?”

“어? 당연히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야?”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몽글몽글 굴러가는 느낌이었다. 뺨이 아프도록 당겨지려고 해서 간신히 눌러 참았다. 억지로 웃음을 참으려니 헛기침이 절로 뱉어졌다.

“흠흠, 아뇨, 가족 맞아요. 가족이에요. 근데 한눈에 맞추는 사람은 별로 없어서요.”

“그런가. 난 그냥 봐도 알겠던데. 적어도 사촌은 되어 보여. 타고난 듯한 분위기 같은 게 특히. 뭔가 같은 계열이란 느낌이랄까?”

“아깐 나랑 다르다면서요.”

“그건 성격을 말하는 거지. 너도 솔직히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느낌은 완전 똑같아. 접근하기 어려운 위압감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걸.”

그건 입만 열면 깬다는 소리인가.

어쨌든 닮았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은 좋았다. 전에도 들어보긴 했지만 이번엔 내가 먼저 가족이라고 밝히기도 전에 먼저 그렇게 봐준 거라 더 의미가 컸다.

“근데 넌 아까부터 대체 뭘 하는 거야?”

“수련하잖아요.”

힘겨운 대답과 함께 누워서 다리를 들어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하던 동작을 멈췄다. 드디어 지시받은 횟수를 다 채운 참이었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검 배운다더니 열심이구나. 하체 훈련이야? 몇 번씩 하는 거야?”

“삼십 번씩 다섯 번이요.”

“백오십 번? 생각보다 많진 않네.”

그래, 당신이 보기엔 많지가 않구나. 생긋 웃었더니 크리스가 영문 모를 얼굴로 따라 웃었다. 나는 그에게 두 손을 내밀어 보라고 한 다음, 그 위에 내 손을 온전히 내렸다.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내밀던 그가 내 손이 얹어지자마자 헉하고 큰 숨을 내쉬었다.

“뭐, 뭐야? 너 지금 뭘 차고 있는 거야?”

“무게 가중 장치요. 다리에도 같은 게 달렸어요. 최근에 더 무거운 거로 교체해서 적응하느라 수련 횟수 줄인 거고요.”

크리스의 얼굴이 삽시간에 거무죽죽해졌다. 새파랗게 질린 시선이 내 양팔과 발목을 어지러이 살폈다.

“……형님의 인성 괜찮으시냐?”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이야기하라는 말에 나는 그저 이번에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본의 아니게 트로웰을 오해하게 한 모양이었다.

* * *

콴제르는 마지막 날까지 조용히 지나갔다. 그때쯤 유명무실해진 마수 토벌대는 이미 완전히 해산하여 흩어진 후였다. 사실 암흑절 기간에조차 마신전이 봉문을 풀지 않은 시점에서 전부 정해진 결과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이번 암흑절은 하늘도 평범했다. 마신의 영향력이 전혀 미치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일부러 그런 거겠지? 그게 아니면…….’

슬쩍 장갑을 벗어 손등을 확인해보았다. 선명히 드러나는 문장을 보니 안도감이 차올랐다. 이게 있다는 건 카노스가 건재하다는 뜻이니까. 미래의 일이 지금 이 시대에 영향을 미칠 리가 없다는 건 알지만 암흑절이 그냥 지나가니 나도 모르게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하긴 진짜 문제가 생겼다면 이미 마신전 자체가 사라졌어야 했다. 역시 내가 걱정할 영역은 아니었다.

‘걱정할 건 내 쪽이지.’

벌써 여기 온 지 반년이 됐는데 라피스는커녕 영혼의 보석에 대한 단서도 찾지 못했다. 아직 길드도 만들지 못하고 있는 처지니 어느 세월에 이름을 알려서 라미아스와 접선을 시도해볼지 모르겠다. 그렇게 만나도 그에게 영혼의 보석이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매번 드래곤을 만날 때마다 이런 거추장스러운 상황극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장갑이 망가진 거야?”

그때 들려온 트로웰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문장을 확인한다고 벗어둔 채로 계속 멍하니 있었더니 장갑에 문제가 생긴 거로 오해한 모양이다. 아니, 근데 이제 다시 보니 많이 낡긴 했다. 산 지 얼마 안 된 건데 아무래도 훈련할 때도 계속 끼고 있다 보니 빨리 헤지는 것 같았다. 옷이나 신발도 사정은 비슷해서 멀쩡한 부분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요즘 크리스가 나를 볼 때마다 안부를 새삼 확인하더라니, 날이 갈수록 상태가 후줄근해져서 그랬나 보다.

“다른 건 몰라도 장갑은 쉽게 망가지지 않는 게 낫지 않아? 이번에 사는 건 공방에 가서 보존마법이라도 걸어. 인간 마법사의 실력으론 완벽하진 않겠지만, 헤지는 속도 정도는 늦출 수는 있을 테니까.”

“헉,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그러고 보니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여긴 마법 물품만 흔한 게 아니라 전문적으로 마법을 세공하고 부여해주는 곳도 있었다. 알면서도 찾아가 볼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조만간 훈련을 쉬는 날에 다녀와야지. 기대감을 품으며 고개를 끄덕이니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트로웰이 짧게 중얼거렸다.

“뭐, 상관없나. 만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기도 하고.”

“어?”

“그냥 혼잣말이야. 그 장갑은 오늘 바로 해결해.”

“오늘? 오후 훈련은?”

“쉴 거야.”

무심한 대꾸와 함께 그는 곧바로 사라져버렸다. 이거 장갑 사러 다녀오라고 휴식 준 거 맞지? 아무래도 그가 보기에도 상태가 많이 심각해 보였던 모양이다. 뭔가 중얼거렸던 걸 봐선 다른 목적도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보다 마법 세공은 비싸지 않으려나? 지금 내가 돈이 얼마나 있었지?

“아버지, 나…….”

고개를 돌려 말을 걸려 하기 무섭게 눈앞에 묵직한 자루가 툭 떨어졌다. 안을 열자 한가득 채워진 금화가 보였다.

“음, 고마워.”

이쯤 되니 솔직히 나도 좀 민망하다. 아마 정령왕의 돈을 이렇게 많이 써 본 계약자는 내가 처음이지 않을까. 쑥스러운 마음으로 인사하니 그는 피식 웃기만 했다. 이제 새삼 기막혀하지는 않을 정도로 내게 적응한 모양이다.

어쨌든 준비는 다 됐겠다, 나는 그 길로 상점가로 향했다. 전에 샀던 장갑과 최대한 비슷한 것을 고른 다음 마법 세공을 하는 공방을 찾아갔다. 설명을 들은 공방 주인은 보존마법에 강화 마법까지 추천하며 다른 물품들도 보여줬다. 세공 자체는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는데, 이것저것 추천하는 물건을 정신없이 구경하다 보니 공방에서 나왔을 땐 어느새 시간이 제법 지나 있었다. 본래 목적인 장갑 외에도 몇 가지 마도구를 더 고른 채였다. 평소 관심 갔던 이 시대의 시계랑, 달고 있으면 인상을 흐리게 한다는 브로치라든가, 머리카락 색을 변하게 한다는 반지 등등.

‘나 영업에 약하구나…….’

그나마 권하는 물건을 넋 놓고 다 사지 않은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어차피 돌아갈 때 가져갈 수도 없는 거, 물욕은 버려야 한다고 열심히 인내해봤지만 탐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다 필요한 것만 샀잖아? 솔직히 이 정도는 있어도 된다.

“으앗!”

“헉!”

골목을 끼고 모퉁이를 돌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기척을 미리 읽었기 때문에 당황하진 않았지만 상대가 넘어지려는 상황이라 일부러 피하지 않고 받아주었다. 두 팔에 와 닿는 감각과 함께 깊이 눌러쓴 후드 안에서 분홍색 머리칼이 쏟아졌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연두색 눈동자가 놀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아요?”

내게 거의 기대다시피 밀착한 소녀는 아무런 대답 없이 거친 숨만 내뱉었다. 부릅뜬 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부들부들 떠는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 시선이 내게서 떨어지지 않아서 당황스러웠다. 뭐지? 그냥 넘어지려는 걸 받아준 것밖에 없는데? 내가 뭘 했나?

“저기요?”

“흐, 으윽…… 아, 아이라!”

곧 두 눈을 질끈 감은 소녀가 비명처럼 외쳤다.

“에디스 님!”

그러자 화답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하늘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누군가가 지붕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내리치는 검을 피하며 물러서려니 내게서 떨어진 소녀가 얼른 그쪽으로 달려갔다.

“아이라!”

“에디스 님, 괜찮으십니까!”

바닥에 착지한 상대가 달려드는 소녀를 보호하듯이 끌어안았다. 나쁜 짓이라도 하다 보호자한테 걸린 것 같은 느낌이라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대체 내가 뭘 했다고? 황당하면서도 어이없는 마음으로 지켜보는데 왠지 나중에 나타난 사람의 모습이 꽤 낯익었다. 짙은 피부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장신의 여자. 예전에 항구의 기차역에서 만났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당신…….”

여자 역시 나를 알아보았는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어쨌든 이런 데서 다시 만날 줄 몰랐던 사람을 보니 반갑기는 했다.

“우리 구면이죠?”

그런데 다음 순간 무서울 정도로 여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어진 행동은 너무 급작스러워서 나도 미처 대비를 하지 못했다. 갑자기 뭔가를 던져서 무심결에 손으로 막았는데, 그게 확 터지더니 물벼락이 쏟아지는 게 아닌가.

“…….”

순식간에 흠뻑 젖은 상태가 됐다. 짧은 시간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대체 뭘 던졌는데 물이 쏟아지지? 이것도 마도구인가? 오, 신기……아니, 이게 아니라! 대체 왜 갑자기 이런 걸 던지는 건데? 물풍선이나 토마토를 던지는 것처럼 여기서도 그런 축제 같은 게 열린 건가? 아직 여름도 아닌데?

더 이해가 안 되는 점은 막상 내게 물벼락을 선사한 이들이 오히려 더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정확히는 처음엔 자신만만해하는 듯하다가 내가 가만히 서 있자 갈수록 혼란한 표정이 되어갔다. 척 봐도 원하는 반응을 얻지 못해 당황한 모습이다. 혹시 사람을 착각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말없이 바라보자 여자가 입을 벙긋거렸다. 그 모습을 보니 화낼 기력도 나지 않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왜 이러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저기,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착각을 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여자의 얼굴이 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핼쑥했다. 연두색 눈을 지닌 소녀도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이었다.

역시 사람을 착각했구나.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의 물기를 짜내려니 한달음에 다가온 두 사람이 수건을 건네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뇨, 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엔 이왕이면 제대로 확인하고 던지시는 게 좋겠네요.”

“네, 죄송합니다.”

그때였다.

왠지 피부에 싸늘한 소름이 돋았다. 얼굴을 굳히고 돌아보니 누군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봄이긴 하지만 아직 쌀쌀한 날씨를 생각하면 지나치게 얇은 차림을 한 여자였다. 그래서인가, 꽤 화사한 외모인데도 이상할 정도로 음산한 느낌을 풍겼다. 내 몸을 닦아주던 일행도 여자를 발견했는지 움찔해서 동작을 멈췄다.

“아, 아이라.”

“에디스 님.”

얼굴을 굳힌 두 사람이 서로를 보호하듯이 밀착했다.

‘뭐지? 왠지 분위기가…….’

이상한 기분에 경계심을 세우는데 귀신처럼 서 있던 여자가 생긋 웃더니 입술을 벙긋거렸다.

‘찾았다.’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입 모양을 통해 전달하려는 말이 분명히 보였다. 그러자 갑자기 주위에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사방의 골목부터 지붕 위까지, 여자와 비슷한 생김새를 지닌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었다.

“이게 뭐…….”

“주인이시여, 가호를 내리소서!”

그때 아이라라고 불렸던 여자가 한 손으로 수식 같은 것을 맺었다. 그러자 여자가 들고 있던 검에서 새카만 기운이 일기 시작했다.

‘검기? 아냐, 저건…….’

“뛰어요!”

그 순간 에디스라 불린 소녀가 내 팔을 붙잡고 달렸다.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볼 겨를이 없어서 일단 나도 같이 달렸다.

“그대로 뒤돌아보지 말고 광장까지 쭉 가세요!”

뒤편에서 아이라가 외치는 소리가 울리고, 곧이어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 이후에도 한참은 더 달렸던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간 더 달린 끝에 마침내 인파가 가득한 거리로 나왔다. 그러자 따라붙는 기척이 곧바로 사라졌다.

“더는 안 쫓아오는 것 같아요.”

주위를 살핀 후에 말하자 숨이 턱 끝까지 에디스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괜찮아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에디스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겨우 괜찮아졌던 얼굴이 다시 파랗게 질린 채였다. 그렇게 무서운 광경 속에 친구를 놔두고 왔으니 당연했다.

“아니, 죄송한 건 죄송한 건데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지금 누구한테 쫓기고 있는 거예요?”

“흑, 흐윽, 죄송해요.”

에디스는 우느라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떻게 달래야 하나 고심하는데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왔다. 푸근한 인상을 한 노인이었다.

“아가씨, 왜 그렇게 우시나? 무슨 일 있으시오?”

그러자 눈을 부릅뜬 에디스가 발작하듯이 물러섰다. 처음 나를 보면서 보였던 반응과 거의 비슷했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악문 에디스가 구명줄을 잡듯이 내게 바짝 달라붙었다.

“저리, 저리 가세요.”

“아니, 왜 우는지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 거요.”

“저리 가라고요!”

에디스가 소리치며 밀쳐내자 노인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서 앞으로 나섰다. 당황한 표정이 탐색하듯 나를 살폈다. 보통 평범한 사람이 상대를 이런 식으로 살피던가? 역시 뭔가 이상했다.

부들부들 떨던 에디스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작은 호각인데, 뭔가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저걸 불게 두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에 손으로 감쌌더니 에디스가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은 다음, 노인을 돌아보았다.

“제 일행에게 상관하지 마시고 그냥 가시는 게 좋겠네요.”

움찔한 노인이 다시금 나를 지긋이 노려보았다. 나 역시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예 대놓고 마주 살피기 시작하자 그 얼굴에 노골적인 당혹감이 드러났다.

“아, 아무튼 요즘 젊은이들은 친절을 베풀어도 고마운 줄을 모르고.”

씩씩거린 노인이 서둘러 몸을 돌렸다. 나는 그 모습이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제 간 것 같아요.”

그때까지도 에디스는 떨고 있었다. 나 때문에 불지 못한 호각을 아직도 손에 꼭 쥔 채였다. 그게 뭐냐고 물어봐도 괜찮은지 모르겠다. 망설이고 있는데 문득 에디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왜 그래요?”

“물을 찾아야 해요. 우물……아, 아니, 우물은 안 돼. 거기선 나올지도 몰라. 그러니까 깊이가 깊지 않은 샘 같은 거.”

“물?”

“아이라, 어떡하지. 어떡해요. 물이, 물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는데.”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던 걸 멈추고 숨을 삼켰다. 그건 아마 어떠한 예감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모습.

검은 기운.

물.

“시큐엘.”

내 부름에 따라 물보라가 일어나며 하늘에서 푸른 물의 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움찔한 에디스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무슨 일인가, 계약자여.

“이 일대에 비 좀 뿌려줄래? 다들 흠뻑 젖을 만큼.”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로군.

높이 떠오른 시큐엘이 하늘 위를 크게 선회했다. 그러자 빠른 속도로 먹구름이 차오르더니 한바탕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비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는 게 보였다.

“이거면 돼요?”

돌아보며 물으니 에디스가 크게 숨을 삼켰다. 동요하는 얼굴 속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때 뒤쪽에서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해서 돌아본 에디스의 얼굴이 단숨에 밝아졌다. 골목에서 나오고 있는 사람은 흠뻑 젖은 아이라였다. 조금 다치긴 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빠져나온 듯했다.

“아이라!”

“에디스 님, 무사하셨군요. 다행이었습니다. 갑자기 비가 내린 덕분에…….”

때마침 임무를 완수한 시큐엘이 내 곁에 사뿐히 내려섰다. 위엄 가득한 표정을 한 주제에 칭찬을 바라듯 머리를 비벼오는 행동은 귀엽기만 했다. 푸른 빛을 머금은 반투명한 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자니 눈을 휘둥그렇게 뜬 아이라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물의 정령사……?”

“맞아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니 두 사람이 숨을 크게 삼켰다.

“이번엔 내가 물을게요.”

곧바로 이은 말에 주위의 공기가 팽팽해졌다. 운을 떼는 게 미안해질 만큼 경계하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확인할 건 해야 했다.

“당신들, 마신관이에요?”

아니,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이 확실했다. 아이라의 검에 서렸던 검은 기운은 내가 잘 아는 것이었으니까. 마기와 비슷하면서도 그보다 조금 더 깊고, 본질에 가까운 어둠. 아득한 신성을 품은 섬뜩할 정도로 저릿한 기운. 그건 분명 카노스의 힘이었다.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 시대에서는 사라지고 없는, 그러나 이 시대엔 아직 존재하는 어느 종족의 이야기. 마신관의 힘을 탐해 그 피를 취함으로써 마신의 진노를 사 멸망에 이르렀다는 존재들.

그들 종족은 육지에 나오면 인간과 분간하지 못한다. 하지만 물에 젖으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고 했었다.

물고기의 하반신을 지닌, 인어의 모습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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