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1화
“……추적이 있어?”
“그랬으니 이 시간에 숨어있었겠지?”
하긴, 크게 다쳐서 찾아온 것만 봐도 절대 평범한 상황은 아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문서를 넘겨주기만 하는 거 아니었나?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옷을 벗기려는 데 핏물 때문에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대체 어디를 어떻게 다친 건지,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 같다. 이러다 과다 출혈로 죽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혈제라도 사둘걸. 하필 약 종류는 따로 준비해 둔 게 없어서 응급조치할 수단이 없었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싶으니 덜컥 겁이 났다.
“저기, 아버지. 이번만 좀 도와주면 안 돼? 크리스가 너무 위험한 것 같아. 이대로 두면 죽을지도 몰라.”
어쩔 수 없이 엘뤼엔에게 부탁해보았다. 거절당할 땐 당하더라도 지푸라기라도 잡아야겠단 심정이었다. 그러자 살짝 눈썹을 찌푸린 엘뤼엔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고마운 일이었지만 얼굴은 굳어졌다. 그가 웬일로 순순히 나설 만큼, 크리스의 상태가 정말 심각하다는 뜻이었으니까. 이윽고 엘뤼엔이 손을 뻗자 크리스의 숨소리가 편해졌다. 안도하고 있으려니 트로웰이 중얼거렸다.
“우리가 이상해진 건지, 이 녀석이 이상한 건지…….”
“어?”
“그냥 혼잣말이야. 그런데 용케 일어났네. 그대로 잠드는 줄 알았는데. 확실히 감각은 예민해.”
“혹시 내가 못 깨어났으면 어떻게 되는 거였어?”
“아침에 시신이 된 그를 발견했겠지.”
……이거 상이라며. 상이면 지키지 못해도 위험요소는 없어야 하는 거 아닌가. 게다가 지인의 목숨이 걸려있는 일인데 좀 더 자세히 알려줘도 되잖아. 아무리 나라도 이번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굳은 눈으로 바라봤더니 트로웰이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훈련은 쉴게.”
“……정말?”
“몸은 치유해도 정신적 피로는 쌓이니까. 가끔은 쉬는 편이 좋겠지.”
나도 참, 나도 모르게 알려주는 걸 너무 당연하게 여겼네. 사실 힌트를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지. 창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건 내가 선잠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가 언급하지도 않았다면 난 분명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푹 잠들었을 거다.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힌 태세전환이었지만, 돌이켜 봐도 그게 사실이긴 했다. 아니, 오히려 상을 준다는 명목으로 내가 미리 대처할 수 있도록 해준 게 더 그답지 않았다.
“……고마워.”
조심스럽게 건넨 말에 트로웰의 눈빛이 깊어졌다. 내가 말하는 부분이 어딘지 그는 곧바로 짚어낸 듯했다. 읽을 수 없는 시선이 한동안 나를 가만히 살폈다. 조금 괴로운 것 같기도 했고 화가 난 표정인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그 감정이 나를 향한 건 아닌 것 같았다.
다시금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 같았으나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나 역시 묻지 않은 채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여러 가지로 술렁이는 밤이었다.
* * *
크리스가 의식을 차린 건 아침이 된 후였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얼굴을 덮어가자 죽은 듯이 고요하던 몸이 드디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미간이 꿈틀거리더니 숨소리가 커지고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깊게 신음한 그가 찌푸린 얼굴로 눈을 뜨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던 검은 눈동자가 방황하듯 이동하다 나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흐리멍덩하던 시선에 초점이 잡히며 또렷해졌다.
“일어났어요?”
“……엘?”
“마침 깨우려 했는데 잘됐네요. 배고프진 않아요? 아침 식사 가져왔어요.”
나는 그가 확인할 수 있도록 탁자 위에 한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가리켰다. 소고기를 넣어 조리한 크림 버섯 수프, 훈제된 베이컨과 계란 스크램블, 구운 감자와 호밀빵. 여관 주방 문이 열리기 무섭게 재촉하다시피 주문해서 받아온 오늘의 조식이었다.
원래 나 혼자도 많이 먹는 편인데 이번엔 그의 몫까지 생각하느라 좀 넉넉하게 준비했더니 탁자가 넘쳐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군침이 도는 광경을 눈앞에 두고도 크리스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얼굴로 멀거니 눈을 깜박이기만 했다. 그러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다음 순간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빠르게 몸을 더듬는 얼굴엔 혼란이 가득했다.
“어라? 뭐지? 나 살았네?”
“깨닫는 게 참 빠르시네요.”
“헐, 말도 안 돼. 지금 며칠이야? 혹시 내가 엄청 오랜만에 깬 건가?”
“아뇨, 당일 아침이에요.”
“정말? 근데 왜 몸이 하나도 안 아프지? 나 좀 많이 다쳤는데?”
“그야 치료했으니까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가뿐한데. 대체 무슨 회복제를 쓴 거야? 이렇게 단숨에 깨끗이 나을 수가 있나? 헐, 예전에 있던 흉터들도 다 없어졌잖아?”
“알았으니 일단 식사부터 해요.”
먼저 탁자 앞에 자리를 잡으니 그제야 크리스도 호들갑을 멈췄다. 침대에서 내려와 주춤거리며 앉는 동안 그는 연신 소파 쪽을 힐끔거렸다. 그곳에 앉아있는 두 정령왕을 의식한 탓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뤼엔이나 트로웰은 그에겐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저분들은 같이 안 드시나?”
“네, 신경 쓰지 마세요. 아,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는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 두 사람 아니었으면 크리스는 지금쯤 명계 입구에 도달했을지도 모르거든요.”
“헉, 그, 그렇군. 저어, 큰 신세를 졌습니다. 고맙습니다.”
황급히 건네진 인사에 돌아오는 답변은 없었다. 그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짧은 시선을 한 번 보냈을 뿐이었다. 그 성의 없는 반응에 크리스는 머쓱한 얼굴을 했지만, 애초에 별반 기대하지 않았던 건지 금방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시작했다. 식기를 집은 그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수프부터 한 모금 삼켰다. 그리곤 묘한 표정을 지은 채 다시 식기를 내려놓았다.
“왜요? 입에 안 맞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뭔가 기분이 좀 이상해서.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서 밥을 먹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저도 오늘 아침을 크리스와 같이 먹게 될 줄은 몰랐네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으음, 미안. 많이 놀랐지.”
“놀란 건 사실이지만 사정이 궁금한 거지 사과를 들으려는 게 아니에요. 그냥 솔직히 말하세요. 내가 전해준 그 문서와 관계된 일이죠?”
“어?”
멈칫한 크리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설마 내가 이렇게 대놓고 정공법을 택할 줄은 몰랐는지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실은 나도 내용 봤거든요.”
“……그랬을지도 모른다 싶긴 했어. 너무 아무것도 묻지 않더라고.”
“그러니 그냥 편하게 말해도 돼요. 여기까지 와서 괜히 모른 척할 생각은 하지 말고요. 어차피 그 새벽에 날 찾아온 선에서 이미 끌어들인 거나 다름없다는 거 알죠?”
“……미안.”
“사과를 들으려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난 화난 게 아니라 크리스를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상황이나 제대로 설명하라는 시선을 보내자 크리스는 신음을 흘리며 얼굴을 긁적였다.
“크흠.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말하세요.”
“그렇게 가볍게 결정할 일은 아니야. 전부 다 알면 정말 곤란해질지도 몰라.”
“그건 내가 감당할 몫이고요.”
단호하게 답하니 그가 다시금 앓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 역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넘어갈 수 없다는 점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얼굴이 이내 자포자기하는 얼굴로 변했다.
“실은 말이지. 나 움브라 출신이야.”
“움브라?”
“음, 모르는구나. 세이크 황제의 직속 친위대야. 말이 좋아 친위대지, 호위 임무를 맡는 것처럼 표면에서 활동하는 일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본대는 그림자 군이지. 주로 감찰하고 잠입 수사하고, 필요하면 암살도 하는 조금 음침한 집단이라고 보면 돼. 황제의 비밀 병기 같은 거야.”
“상단에서 일했다는 건요?”
“그것도 맞아. 임무 중 일환이었지만. 거기서 하는 일이 대개 다 그런 식이야. 평범한 사람처럼 여기저기 섞여 살다가 필요한 작전에만 투입되는 거.”
“그럼 지금도요?”
“아냐, 지금은 그냥 평범한 헌터야. 믿어줘. 몇 년 하다 너무 성미에 안 맞아서 그냥 은퇴했어. 내가 거기 출신인 거 아는 사람도 없어. 지금 너한테 처음 말하는 거야.”
이어진 설명은 구구절절했다. 움브라는 직속 상관과 동기들 외엔 누가 동료인지도, 몇 명인지조차 정확히 알 수 없는 구조였다. 서로 암호명으로 부르는 데다가 작전에 함께 투입되지 않는 한 접촉하는 일도 거의 없기에 은퇴하면 그냥 완전히 남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그가 이미 지나간 과거를 털어놓는 이유는 간단했다. 다비안이 움브라였기 때문이었다.
“그 녀석은 나랑 동기야. 유일하게 서로 본명을 터놓은 사이였지. 내가 은퇴한 후에도 그 녀석과는 쭉 알고 지냈어. 그러다 몇 년 전에 녀석이 임무를 맡아 떠났는데, 그 이후로 얼마 안 가 소식이 끊겼고.”
이후의 일은 내가 아는 그대로였다. 연락이 끊긴 후로 크리스는 다비안이 죽은 줄로만 알고 지냈다. 친우의 죽음을 알아볼 수도, 애도할 수도 없던 그는 상실감을 잊기 위해 헌터 일에 매진했다. 그러다 모종의 사건으로 길드마저 해체되고, 실의에 가득 차 술독에 빠져 있던 중에 내가 그의 소식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정확히는 그가 반강제적으로 떠넘긴 임무였지만.
“죽은 줄 알았던 놈이 살아 있다는 걸 아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라. 녀석이 돌아와서 지금 내 꼴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겠나 싶고. 그게, 다비안이 조금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녀석이라서. 내가 나중에 잘돼서 도와주기로 약속했거든.”
어색하게 웃는 그에게 굳이 무슨 사연인지는 묻지 않았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기도 했으니까. 어쨌든 제게 문서를 맡긴 친우의 의도를 짐작한 크리스는 움브라의 대장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그가 알고 있던 접선 방식으로 연락을 시도했는데 다행히 답신이 돌아왔고, 장소와 시간 역시 순조롭게 정해졌다.
“그런데 접선 장소에 나온 건 대장이 아니었어.”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한눈에도 수상해 보이는 복면인이었다. 멀찍이서 모습을 확인한 크리스는 본능적으로 함정에 걸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발을 빼려 했을 땐 이미 기습을 당한 후였다. 뒷목에 강한 충격을 받아 의식을 잃었고, 깨어났을 땐 어두컴컴한 공간에 홀로 갇혀 있었다. 문서는 당연히 빼앗긴 상태였다.
처음 크리스는 당연히 고문관이 올 거라 생각했다. 그런 이유가 아니고서야 굳이 살려둘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를 납치한 상대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냥 그대로 가둬두기만 했다. 하루 두 번 문 밑으로만 말없이 식사가 배급되었을 뿐, 접근하거나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다 오늘 새벽, 돌연 무슨 일이 생겼는지 큰 소란이 일었고, 진동과 함께 문이 부서졌다. 일부러 부순 게 아니라 소란이 이는 과정에서 일어난 예기치 못한 사고로 보였다. 어쨌든 덕분에 크리스는 그 안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비록 곧바로 따라붙은 추격대로부터 치명상을 입긴 했지만, 악착같이 달려 마침내 따돌릴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도움을 청할 상대가 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고 했다.
“누가 납치했는지는 알겠어요?”
“모르겠어. 하지만 마신전이 관여한 것 같아.”
“……네?”
생각지도 못한 배후에 얼굴이 절로 굳었다.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인연인지, 또 마신전이었다.
“실은 그 문서에서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거든. 너도 내용물을 봤다고 했지? 안에 끼워져 있던 명단 기억해?”
“네, 기억해요.”
“거의 다 모르는 이름이긴 한데, 몇 이름은 낯익었어. 내가 마신의 신도라서 가끔 본관에 가서 공양하거든. 거기 계신 사제님들 이름과 같았어.”
즉, 그 정체 모를 명단이 마신관의 명단이라는 소리였다. 가장 별거 없어 보여서 신경도 쓰지 않았던 거라 조금 얼떨떨했다. 대체 왜 사제의 명단을 입수해둔 거지? 별다른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요즘 마신전의 분위기가 이상하다 보니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물론 동명이인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좀 찜찜하잖아? 그래서 접선하기 전에 마신전을 먼저 들러 봤거든. 그런데 문지기가 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게 막더라고. 그런 사제님들은 없다는 말만 반복하면서 말이야. 전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는 식이었어. 근데 난 분명 뵌 적이 있는 분들이거든.”
“그건, 조금 이상하네요.”
“그렇지? 수상하지? 그래도 뭐, 그 이상은 알아보지 않았어.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고, 너무 주제넘게 나선다 싶어서 그만뒀지.”
“그런데 왜 마신전을 배후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때 날 문전박대한 문지기의 체격이 접선 장소에 나와 있는 놈과 같았어.”
“……!”
“눈동자 색과 목소리도. 자세와 호흡하는 습관도 같았지. 일단 나도 움브라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은 잘 기억해. 분명히 동일인이야.”
이렇게까지 확신한다면 사실일 것이다. 나는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이미 식기에서 손을 뗀 지는 오래였다. 식어가는 음식이 아까웠지만 도저히 먹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엮여있는 건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호기심을 해소하고자 설명을 청한 건데, 오히려 들으면 들을수록 더 복잡한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크리스 역시 굳은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마신전에서 뭔가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 * *
껄끄럽게 자리 잡은 불안과는 달리 이후로 이어진 나날은 평온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은 그 새벽의 일이 꿈인 것처럼 평범하기만 했다. 몇 날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일이 없자, 몸을 사리던 크리스는 결국 참지 못하고 외출을 강행했다. 미행이 따라붙는지라도 확인할 작정이었는데 어떤 기척이나 흔적도 느낄 수 없었다. 대놓고 번화가를 쏘다니고 헌터 협회를 방문해봐도 마찬가지였다. 크리스의 신분은 이미 확인하고도 남았을 텐데 이렇다 할 조치를 하지 않는 게 조금 의외였다. 그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거라 여기더라도 감시 정도는 붙이기 마련일 텐데 말이다.
그게 아니면 뭔가 다른 사정이라도 있는 걸까. 탈출할 때 소란이 일었다고 했으니 내부에서 문제가 생긴 건 분명하다. 어쩌면 그 일을 수습하느라 크리스까지는 신경 쓰지 못하는 상태인 건지도 몰랐다. 사실 마신전이 지금 섣불리 움직일 처지도 아니긴 했다. 이번 마수 사건과 콴제르의 일로 인해 여론이 나쁘기도 했고, 황실과의 관계도 틀어졌기 때문이다. 속사정은 모르겠으나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서로 사이가 나쁜 걸 보면 한통속은 아닐 수도 있겠네요.”
“글쎄, 저 윗사람들 생각을 어디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눈 뜨고 뒤통수 맞는 게 일상인 세계이니.”
“그럼 문서는 어떻게 할 거예요? 분실했어도 그런 게 있었다는 정보는 전해줘야 하지 않아요?”
“아니, 다비안에겐 미안하지만 당장은 상황을 지켜보는 게 낫겠어. 접선 방식이 구식이라 유출 가능성이 있었다지만, 답신에 적힌 암호문 자체는 진짜였거든. 누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관여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몸을 사려야 할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크리스는 마신전 쪽의 동태를 꾸준히 살폈다. 그런 중에 그의 헌터 자격 재심사 일이 다가왔다. 그때쯤엔 이미 예전의 기량을 회복한 상태라고 들어서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는데 결과는 역시 통과였다. 드디어 길드를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가입 희망자가 아무도 없었다. 모집 공고를 올린 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흔한 문의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별거 없는 길드라도 일단 모집 공고가 올라오면 관심을 보이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점을 봤을 때,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미안, 나 때문이야.”
크리스는 깊은 책임감을 느꼈다. 미안해하는 그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크리스가 평판이 좋지 않다는 건 알아요. 그 정도는 염두에 두고 있었고요.”
“그냥 평판의 문제만은 아니야. 실은 좀 더 복잡한 사연이 있어.”
“혹시 여명의 활 길드 마스터가 갑자기 사망한 것과 관계된 일인가요?”
이것도 짐작해본 부분이긴 했다. 역시나 맞았는지 멈칫한 크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분은 사고로 돌아가신 게 아니었어. 살해당한 거지.”
“살해요? 누가요?”
“진혼이라는 길드의 마스터. 테오라는 놈인데, 우리 마스터의 이복형이었어.”
형이 범인이라고? 당황해서 바라보자 크리스는 쓰게 웃었다.
“첩의 자식인 마스터를 끔찍하게 싫어했지. 그런 주제에 토벌하다 위험해졌다면서 도와달라는 급보를 보내더라고. 사람 좋은 마스터가 외면하지 못하고 구하러 갔는데, 그대로 돌아오지 못했어. 정작 위험하다는 그놈은 멀쩡히 돌아왔고.”
대충 어떻게 된 건지 돌아간 상황을 알 것 같았다. 그냥 듣기만 한 나도 이렇게 뻔히 보이는 부분을 당시 길드원들이 몰랐을 리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가 갈린다는 듯, 크리스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누가 봐도 그놈이 판 함정인데, 물증이 전혀 없었어. 그리고 그 일에 대응하려 한 길드원은 거의 다 원인 모를 사고를 당해 죽거나 불구가 됐지. 멀쩡하게 남은 건 나 하나뿐이야. 덕분에 다들 진혼에 회유되거나 겁을 먹고 제도를 떠났어.”
“그랬군요.”
“그 악랄한 자식, 길드가 해체된 후에도 나한테도 계속 손 쓰려고 했어. 나중엔 나만이 아니라 나와 가까운 사람들까지 건드리더군.”
결국 지인들이 위험해지는 걸 볼 수 없던 크리스는 아무하고도 어울리지 않게 됐다. 그러자 나중엔 끄나풀을 동원해 접근해서 기습하려던 적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람을 믿을 수 없도록 그를 완전히 고립시킨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찾아갔을 때도 그런 이름을 언급하며 질색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