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9화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앉혀지고 나서야 나는 왜 엘뤼엔이 굳이 날 들어서(라기보다는 둘러맨 거지만) 옮겼는지 알 수 있었다. 팔만 다친 줄 알았더니 다리 쪽에도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마수의 발톱에 스쳤을 때 찢긴 게 옷자락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나마 뼈는 무사한 것 같긴 한데, 적어도 멀쩡히 걸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으…….”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더니, 조금 전까지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상처를 확인하고 나자 기다린 것처럼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이제야 긴장이 풀린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프기는 하나 보네. 너무 용감하길래 통증도 못 느끼는 줄 알았지.”
혀를 차는 트로웰의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분명 타박하는 말일 텐데 걱정하는 것처럼 들리는 걸 보니 내 콩깍지가 심하긴 한 모양이다. 그래도 다행히 통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상처에서 하얀 물거품이 일기 시작하더니 곧 다친 부위가 말끔해졌기 때문이다. 부러진 양팔도 멀쩡해졌다. 엘뤼엔이 치료술을 써준 것이다.
‘오, 이게 이런 느낌이구나.’
그동안 해주는 쪽이기만 해서 몰랐는데 받아 보니 굉장히 시원했다. 단순히 상처가 나은 것만이 아니라 전신이 가뿐해지고 힘이 솟는 것 같았다. 꼭 각성제라도 먹은 기분이었다. 신기해서 멀쩡해진 몸을 돌아보고 있는데 파각, 무언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엘뤼엔이 내 손목에 걸려 있던 마나 봉인 팔찌를 부순 소리였다. 와, 저걸 손가락만으로 잡아서 부수네. 내가 온 힘을 다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게 순식간에 두 동강 난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무척 복잡해졌다.
“아, 고마워, 아버……엘퀴네스.”
또 실수할 뻔한 호칭을 얼른 수습하자 나를 바라보는 엘뤼엔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뛰어든 거지?”
“어?”
“뛰어들기 전에 정령술을 못 쓴다는 사실을 먼저 자각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그대로 뛰어들었는지 묻는 거다.”
역시 다 지켜보고 있었구나. 차라리 대놓고 다닐 것이지, 대체 왜 자꾸 투명화 상태로 따라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이 정령왕들을 이렇게 둬도 괜찮은 건가. 뭐, 덕분에 적절한 시기에 도움을 받은 거긴 하지만.
“음, 내가 힘이 센 편이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을 줄 알았어.”
“그걸 네가 왜 막지?”
“눈앞에서 사람이 죽을 것 같은데 그럼 어떡해.”
“어차피 모르는 자 아닌가?”
“그게 무슨 상관이야. 상대가 누구든 도울 수 있으면 돕는 게 좋잖아.”
“그러다 네가 죽으면? 도움을 받은 자가 고마워할 것 같나?”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고 하는 게 아니야. 나는 그냥…….”
“그럼 눈앞에서 허망하게 계약자를 잃을 내 입장은? 그것도 상관이 없나?”
생각지도 못한 말에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꿀 먹은 것처럼 얌전히 입을 다무는 나를 엘뤼엔이 서늘하게 응시했다.
“인어 떼를 쫓아 바다에 들어갈 때도, 이번 일도. 늘 지나치게 겁이 없는 게 이상하다 싶었지. 단순히 담대한 것치곤 기묘한 위화감이 있었거든. 이제 보니 그냥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거였군.”
“어? 아니, 딱히 그렇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인간은 자신의 안전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면 아주 조금이라도 망설임을 비친다. 하지만 넌 그런 게 전혀 없더군.”
문득 이런 상황에 기시감이 들었다. 그 이유는 이미 알고 있다. 언젠가 라피스도 이와 비슷한 타박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 내가 지나치게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고 여겼지. 그래서 그는 날 믿지 못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감췄다.
“자살할 거면 다른 방식으로 해라. 넌 지금 네 알량한 만족감만 생각하느라 다른 이들을 전부 무시한 거다.”
“그, 그런 식으로 말할 건 없잖아. 나는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묻지. 넌 누군가가 널 위해 목숨을 버려도 괜찮을 텐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괜찮을 거냐고?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당연히 그럴 리 없잖아. 왜 이런 질문을 엘뤼엔이 하는 건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만은 이런 말을 하면 안 된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 위로 지나간 옛 장면이 덧입혀지기 시작했다. 나를 끌어안아 감싸던 손길, 내 얼굴 위로 쏟아지던 금발, 손바닥 가득 묻어나던 뜨끈하고 축축한 감촉, 한쪽 어깨를 덮어가던 무게감.
“무모한 아들 덕분에 별일을 다 해보는군.”
흐릿한 웃음기를 담은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 같다. 그의 몸에 붉은 피가 무서울 정도로 번져나가던 광경은 아마도 평생 잊을 수 없을 기억이었다. 심장이 무서울 만큼 빠르게 뛰었다. 잔상을 털어내기 위해 주먹을 아프도록 꾹 움켜쥐었다.
“그런 건 싫어…….”
“적어도 그 정도 생각은 할 줄 아니 다행이군.”
냉소적인 대꾸에 속이 울컥했다. 그 생각 없는 짓을 당신도 미래에 저질렀다고 말해주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물론 내 발등을 찧는 짓이라 속으로 생각하는 것에서 그쳤지만.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따져야 할 게 또 늘었다. 그래도 서럽거나 상심하는 마음까지는 들지는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아까부터 가슴 속이 간질거렸다. 그때 라피스가 내게 화를 냈던 이유를 알고 있으니까. 그건 날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그 태도는 뭐지?”
“내가 뭘?”
“눈이 아주 반짝반짝하군. 지금 반성을 하고 있기는 한 건가?”
이런, 내색하지 않으려 했는데 티가 난 모양이다. 뺨을 긁적였더니 엘뤼엔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어색하게 웃다가 그냥 솔직히 대답했다.
“음, 내가 걱정되긴 하는구나 싶어서.”
“걱정이 아니라 체면 문제다. 계약자가 개죽음당한다면 내 위신에도 해가 되니까.”
“이유가 뭐든. 염려한 건 맞잖아.”
어떤 이유라도 그가 날 신경 쓰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는 소리다. 게다가 그 답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는 게, 엘뤼엔은 내가 아는 한 가장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존재였다. 위신 따윈 염두에 두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의 권위가 흐려진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그 성격이 지금이라고 다를 리가.
그동안 조금은 친해진 걸까? 나도 모르게 히죽거렸는지 엘뤼엔의 얼굴이 더 찌푸려졌다. 여기서 날 볼 때마다 종종 짓는 표정이기도 한, 뭐 이런 게 다 있냐는 표정이다. 근처에서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트로웰도 그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다신 그런 무모한 짓 하지 마라. 네 힘이 평범한 인간치곤 강한 편이긴 하지만 이급 마수를 상대할 정도는 아니다.”
그게 이급 마수였구나. 어쩐지 너무 강하다 했다. 대체 왜 그런 게 도심 한복판에서 튀어나온 건지 모를 일이다. 뒤처리가 어찌 됐을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쯤 제도 전체가 발칵 뒤집혔을 건 분명했다.
“알았어. 나도 내가 무모했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진짜 오해하는 게 있는데, 난 정말 죽음을 무릅썼던 건 아니었어. 살 자신이 있었으니까 나선 거야.”
“그건 어디서 기인한 자신감이지?”
물론 시벨리우스를 아직 안 만났기 때문이다. 마수가 덮칠 땐 주마등이 보일 만큼 아찔하긴 했지만, 그래도 살아남을 거란 확신은 있었다. 역시 무사히 지나간 걸 보면 내 예상이 틀리지도 않았다. 당연히 곧이곧대로 이렇게 대답할 수는 없겠지만.
“어디긴. 아버지랑 트로웰이지.”
“……뭐?”
“삼 년간은 함께하기로 약속했잖아. 그럼 그전엔 죽지 않도록 날 지켜줄 거잖아. 내가 믿을 구석이 그거 말고 뭐가 있겠어?”
실제로 둘은 날 외면하지 못했다. 내 멋대로 벌이는 짓에 화가 났다면 어떻게 되든 그냥 내버려 둬도 될 텐데, 구해주고 치료까지 해줬으니까. 내 뻔뻔한 대답에 엘뤼엔과 트로웰이 다시금 황당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도 별다른 말 없이 넘어가는 걸 보면 본인들도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더는 나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포기했거나.
‘아차, 그러고 보니 파이어 버스터는 어떻게 됐으려나.’
사태가 완전히 진정되고 나니 그제야 잊고 있던 것들에 생각이 미쳤다. 팔이 부러진 걸 깨달았을 때 검도 같이 놓쳤다. 지금 현장에 가도 그대로 남아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사이에 누가 집어 갔으면 어쩌지? 혹시 이렇게 스치기만 하고 실제로 인연이 닿지는 않는 거려나. 어찌 됐든 일단 찾아보러 갈 생각으로 침대에서 내려섰다. 그러자 눈치도 빠른 엘뤼엔이 곧장 눈을 부라렸다.
“또 어딜 가려는 거냐?”
“어, 나 잠깐 잃어버린 게 있어서. 금방 다녀올게.”
“헛소리 마라. 넌 한동안 외출 금지다.”
“억? 외출 금지?”
“나가기만 하면 사고를 치니 얌전히 처박혀 있기나 해라.”
“아니, 그건 좀…….”
내 나이가 몇인데 외출 금지 처벌이 웬 말인가. 차라리 자금을 전부 회수하면 모를까, 설마 그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라서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이거 찾아?”
그런데 그때 눈앞에 불쑥 무언가가 내밀어졌다. 낡고 더러운 검집에 감싸진 한 자루의 검, 파이어 버스터였다. 검을 내밀고 있는 이는 트로웰이었다. 웬일로 그가 챙겨뒀던 모양이다. 당황해서 고개를 끄덕이니 그가 가볍게 던져주었다.
“고마워, 트로웰.”
“천만에. 그보다 묘한 기운이 느껴지던데. 그거 에고 소드인 거 알고 있던 거지?”
움찔해서 바라보자 트로웰이 오히려 의아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어?”
“검에 뭐라고 말 걸어보지 않았어? 그래서 알고 사려는 건 줄 알았는데.”
윽, 그것도 봤구나. 이제 진짜 아무도 없다고 편하게 행동하지 말아야겠다. 무슨 실시간 감시 체제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사생활이 전혀 보장되지 못하다니, 너무 척박한 삶 아닌가.
의외로 트로웰은 검 자체엔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 시대엔 있을 수 없는 정령검이 나타났으니 당연히 주시해야 할 텐데 그냥 조금 괜찮은 물건을 봤다는 것 이상으론 신경을 안 쓰는 태도였다. 그건 엘뤼엔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 다 파이어 버스터를 평범한 에고 소드라고만 생각하는 거다.
하긴, 특별하다고 여기기엔 기운이 지나치게 약하긴 했다. 원래의 파이어 버스터가 인간의 혼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정령검이라고 할 수 있었던 건 이그니스와 비견할 만큼 강렬한 화기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화기는커녕 마력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에고 소드라는 것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이렇게 미약한 기운을 느끼다니 과연 대단해. 유니콘이라도 알아보기 힘들 만큼 희미한데 말이야. 하지만 안됐네. 그건 아직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어. 그냥 보통의 검이랑 큰 차이 없을 거야.”
“어? 그게 무슨 소리야?”
“에고 소드는 만들어진 후엔 한동안 봉인된 채 의식이 잠들어 있어. 검신에 맞춰 자아가 적응하기 위한 기간이지. 게다가 그 검은 뭔가 큰 충격을 받기라도 한 건지 자기방어 상태인 것 같네. 그 더럽고 지저분한 생김새는 실제로 낡은 게 아니라 일종의 보호색이야.”
헉, 그렇구나.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됐다면 아직 이 세계에 온 지 얼마 안 된 상태인가 보다. 자기방어 상태가 된 건 아무래도 다른 시공간에 떨어진 탓이겠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더럽고 낡은 상태를 위장하다니, 솔직히 괜찮은 결정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다 고철로 팔리면 어쩌려고. 부러지거나 녹여지지도 않을 텐데 훗날 귀신 붙은 검으로 알려지기 딱 좋은 설정이다. 물론 혼이 서려 있으니 맞는 말이긴 하지만. 여하튼 이대로 들고 다니기도 좀 그러니 나중에 천이나 가죽 같은 걸 감아둘까 싶다. 아, 그래서 시벨리우스가 알아보지 못했던 건가.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 들었다.
“하지만 좀 이상하긴 하네. 원래 에고 소드란 게 평범한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지만, 이건 특히 더 그런 느낌이야. 이계의 것, 혹은 신이 직접 관여한 건가. 아니, 그런 것 치고도 좀, 뭔가 기묘한데…….”
막상 관심을 갖기 시작하니 이상한 점이 밟히는 걸까. 가만히 탐색하는 황금색 눈동자를 나는 조마조마하게 지켜보았다. 이게 미래에서 온 거라는 걸 그가 알게 되면 괜히 검에 아는 척했던 나까지 덜미를 잡힐 수 있었으니까. 다행히 트로웰은 미심쩍어하면서도 거기까진 짚어내지 못했다.
“이게 조금만 더 기운이 강했다면 이프리트가 만든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는걸.”
……거의 근접하긴 했지만. 최대한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더니 트로웰 역시 어깨를 으쓱였다.
“그만큼 제작자가 특별한 것 같다는 소리야. 어쨌든 그건 각성하려면 앞으로 최소 십 년은 더 지켜봐야겠어. 그때까진 에고 소드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다는 소리지. 주인을 지키기는커녕 이렇다 할 보조도 하지 못할 거야.”
“음, 괜찮아. 그래도 튼튼하긴 하잖아.”
“그야 그렇지만, 에고 소드의 기능이 없다면 네겐 딱히 소용없을 텐데? 호신용이 필요하다면 차라리 단검을 써. 날을 다룰 줄도 모르면서 함부로 장검을 쓰려다간 오히려 다치기나 할 테니까.”
“그럼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면 되지.”
“……나한테 하는 말이야?”
“응.”
고개를 끄덕이니 트로웰이 드물게 당황했다. 상당히 뜬금없는 부탁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내겐 전혀 뜬금없지 않았다. 이건 이미 정해져 있는 일이었으니까.
시벨리우스가 알려준 과거의 엘은 트로웰에게서 검술을 사사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부탁할 예정이었는데, 마침 적절한 기회가 찾아온 셈이었다. 사실 이번 일로 깨달은 바도 컸다. 타고난 힘이 있어 어느 정도는 자신감이 있었건만 정령술이 봉인된 나는 생각보다 너무 무력했다. 과거의 내가 왜 검을 배웠을까 내내 의문이었는데 여기서 그 해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내게 검술을 가르쳐 줘.”
“…왜 내게? 네 계약자한테나 부탁하지그래?”
“기각.”
떨떠름하게 이어진 그의 말은 곧장 가로막혔다. 트로웰이 어이없다는 시선을 보냈지만 엘뤼엔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 단호한 태도엔 귀찮은 일에 엮이기 싫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 아버지지만 내가 봐도 너무 얄미웠다. 웃고 있는 트로웰의 얼굴에 핏대가 서는 환각이 보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