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5화
“엘, 이거 봐.”
활기찬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방긋 웃은 시벨리우스가 큼직한 솥을 내게 내밀었다. 덮여 있던 뚜껑을 여니 뜨거운 연기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안에 든 건 미색에 가까운 죽처럼 보였다. 무언가 첨가된 건지 노르스름한 층이 둘려 있었다.
“이게 웬 거야, 시벨?”
“콩 수프야. 버터에 볶은 양파를 삶은 콩이랑 우유와 함께 갈아서 보글보글 끓인 다음에 꿀을 넣어봤어. 한번 먹어봐.”
“와아!”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이게 웬 횡재지?
들뜨는 마음으로 그가 건네주는 숟가락을 받아들었다. 한가득 가득 떠서 삼키니 고소하면서 달큼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너무 맛있어!”
“그래? 다행이다.”
내 반응을 살피던 시벨리우스가 안도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거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그랬던가?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이렇게 맛있는 걸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싶었다.
“이거 내가 다 먹어도 돼?”
“그럼 물론이지. 부족하면 말해. 얼마든지 더 만들어줄게.”
세상에. 어쩜 이렇게 착한 녀석이 다 있지? 혹시 시벨리우스는 하늘이 나를 불쌍하게 여겨 내려준 천사인 게 아닐까. 감격하면서 먹기 시작하니 그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응시해왔다.
“그보다 엘, 그걸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는 거야?”
“어?”
어떻게 먹냐니. 먹을 수 있으니까 먹는 거 아닌가? 어리둥절해져서 바라보니 시벨리우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넌 인간이 아니잖아.”
퍼뜩 눈을 뜨니 환한 햇살이 파고들었다. 멍하니 눈꺼풀을 깜빡이다가 내가 침대 위에 누워있다는 걸 깨달았다.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시벨리우스는 어디로 간 거지? 잠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니 침대맡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트로웰이었다.
“잘 잤어?”
“어? 아…….”
그가 빙긋 웃으며 건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먹구름이 낀 것 같았던 머리가 맑아지면서 잊었던 현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꿈이었구나.’
오랜만에 실감 나는 꿈을 꿨다. 시벨리우스가 한 요리를 맛있게 먹는 꿈이라니, 정작 현실에서는 불가능했던 일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꿈다운 설정이었다. 먹는 꿈은 감기에 걸리는 거라는데,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
침침한 눈을 비비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관인 건 분명한데 어떤 과정으로 여기까지 들어와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관에 들어가 방을 달라 하고 계산을 마쳤던 게 내가 아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들어와 쓰러지긴 한 모양이다. 이제 보니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였다. 그나마 꿉꿉한 느낌은 없는 걸 보니 씻기는 했나 보다.
그런데 나 분명 낮에 잠들지 않았나? 왜 아직도 환한 거지? 꽤 개운한 기분이라 푹 잔 것 같은데, 생각보다 얼마 못 잔 건가? 당황해서 주위를 살피려니 빙긋 웃은 트로웰이 친절히 오늘 날짜를 알려주었다. 그 날짜는 내가 알던 날에서 이틀이나 지나 있었다. 적게 잔 게 아니라 너무 많이 잔 거였다.
“정말 세상 모르게 자더라.”
“아하하, 그런데 아버…… 엘퀴네스는?”
아까부터 주위를 둘러봐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내가 너무 오래 자서 화가 난 건가 덜컥 걱정이 드는데 갑자기 눈앞에 불쑥 무언가가 내밀어졌다. 그릇 안에 연녹색 빛깔을 띤 수프가 담겨 있었다. 뒤늦게 고소한 냄새가 파고들었다. 당황해서 올려다보니 그걸 내밀고 있는 엘뤼엔이 무심한 얼굴이 보였다.
“먹어라.”
“어?”
“콩으로 만든 수프다. 자면서 계속 이걸 찾더군. 시끄러워서 가져왔다.”
“……어?”
헐, 내가 설마 잠꼬대를 한 건가. 그것도 음식 이름까지 외쳐가며 정말 간절히 찾았던 모양이다. 하긴, 꿈이지만 정말 맛있기는 했다. 그래도 엘뤼엔이 이걸 가져다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라 어안이 벙벙하기만 했다. 혹시 아직도 꿈인 건 아니겠지?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으려니 엘뤼엔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안 먹을 건가?”
“아, 아니! 먹어! 먹을래!”
허둥지둥 대답한 후 두 손을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그릇을 받아드니 뜨거운 감각이 손바닥 한가득 느껴졌다. 꿈에선 느껴보지 못한 감각인 걸 보니 확실히 현실이 맞았다.
그가 건네주는 숟가락을 받아들고 천천히 한입을 삼켰다. 재료가 콩이라는 것만 같지 꿈에서 먹던 것과는 색도 모양도 다른 수프였다. 그런데 왠지 똑같은 맛이 나는 것 같았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실실 웃었다. 그러고 보니 콩 수프는 시벨리우스가 나와 이사나에게 제일 처음 만들어준 음식 중 하나였다. 내가 좋아하는 거라고 했었지. 그가 한 말이 맞았다. 오늘부터 콩 수프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될 것 같았다.
* * *
이 시대는 길드의 설립이 자유로운 편이었다. 그래서 같은 직업군 안에서도 수많은 길드가 존재했으며, 길드마다 서로 별개의 규칙을 두고 있었다. 자격증과 사무실을 보유한 5인 이상의 단체라면 누구든 등록 가능. 길드 구성원은 규모가 많든 적든 팀이 나뉘든 간에 상관없이 모두 한 공동체로 여겨졌다. 이를테면 샴페인 용병단이나 칵테일 용병단이 각자 독립된 간판을 걸고 활동한다는 느낌이었다.
대신 자격증 발급을 비롯한 전반적인 부분은 모두 시에서 관리했는데, 제국에선 정부의 공인을 받은 협회들이 이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언뜻 내 시대와 비슷한 듯 보이면서도 좀 더 유연하고 능률적인 형식 같았다.
헌터 역시 협회가 존재했다. 트로웰이나 엘뤼엔이 친절히 알려줄 리도 없고, 수소문하는 것보다는 협회에 가서 알아보는 게 가장 빠를 거란 생각에 나는 여독이 풀리자마자 모두를 끌고 길을 나섰다. 다행히 헤맬 필요도 없이, 마차 한 번 타는 걸로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재미없네. 이번엔 또 어떤 황당한 방식으로 즐겁게 해줄지 기대했는데.”
트로웰은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지난 여정 동안 내가 고생하던 모습이 어지간히 즐거웠던 모양이다.
“나도 내가 운 나쁜 거 알아.”
볼멘소리로 중얼거린 말에 그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아냐, 너 운은 좋아.”
“어? 그래?”
“당연하지. 애초에 운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엘퀴네스를 소환하겠어?”
“아, 하긴. 그건 그렇네.”
“그렇다니까. 단지 스스로 걷어차서 그렇지.”
……그게 결국 나쁘다는 거 아냐?
하고 싶은 말이 마구 올라왔지만, 얌전히 참았다. 모처럼 잘 풀리고 있는데 괜히 여기서 트로웰을 건드렸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굳이 스스로 걷어찬다는 말을 증명할 필요는 없지.
어쨌든 생각보다 편하게 도착한 헌터 협회 건물은 제법 크고 번듯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꽤 많은 사람이 보였다. 용무를 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엘뤼엔과 트로웰의 외모가 너무도 튀다 보니, 이제 어느 곳을 가도 익숙해진 일 중 하나였다. 무시하고 접수대로 다가가자 직원이 당황하며 맞이했다.
“여명의 활 길드요?”
“네, 길드 사무실이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내미는 용지를 작성하고 방문한 용건을 말하니, 직원이 조금 난처한 얼굴을 했다.
“실례지만 정말 여명의 활 길드를 찾으시는 게 맞나요?”
“네, 맞는데요.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뇨, 그게 아니라…….”
직원의 표정이 더더욱 난처해졌다. 근처에 있던 몇 사람이 시선을 보내왔다. 그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커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꽤 유명한 길드인 모양인데, 왠지 다들 반응이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이 길드 이름, 어디서 들어봤는데.’
설마 악명 높은 길드인 걸까? 시작이 순탄하다 싶었는데 느낌이 영 좋지 않았다. 이어진 결과는 예상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나빴다.
“……사라졌다고요?”
“예, 여명의 활 길드는 2년 전에 해체했습니다.”
“그럼 길드원들은…….”
“물론 다들 흩어졌습니다. 모두 제도를 떠났다고 알고 있습니다.”
“떠났어요? 전부?”
“네, 저희도 그 이상은 알려드릴 수가 없네요.”
곤란해하는 직원의 표정만큼이나 내 마음도 가라앉았다. 단숨에 찾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각오는 했지만 설마 길드가 아예 해체했을 줄이야. 가장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경우였다. 결국 나는 이렇다 할 소득 없이 협회를 나설 수밖에 없었다.
“어떡하지. 길드가 아예 없어졌을 줄은 몰랐어.”
“네겐 더 잘된 것 같은데? 봐, 역시 운이 좋잖아? 수신자가 없어졌으니 이제 그 문서는 네 거야. 부담 없이 라미아스한테 가져다줘도 되겠네.”
헉,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제법 솔깃한 말이긴 한데 발상의 전환을 이렇게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복잡한 기분에 얼굴을 찌푸릴 때였다.
“여명의 활을 왜 찾아?”
뒤쪽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돌아보니 헌터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조금 전 협회 안에서 우리 쪽을 힐끔거리던 사람 중 하나였다. 우리가 나오자마자 곧장 따라 나온 듯했다.
“아, 미안, 별 뜻은 없어. 그냥 오랜만에 그 이름을 들으니 반가워서 말 걸어 본 거야.”
“혹시 여명의 활 길드원이었어요?”
“그건 아니고. 가입 지망생이었지. 기껏 노력해서 헌터가 됐는데 길드가 사라져버리더라고. 그때 얼마나 허망했는지 몰라. 혹시 당신들도 가입 희망자야?”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데 왜 해체한 거예요?”
“길드 마스터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거든. 다음 마스터를 정하는 과정에 불협화음이 일더니만 결국 순식간에 무너지더라고. 대륙 7대 길드 중 하나의 몰락이라서 온 세상이 떠들썩했는데 그 유명한 사실을 모르다니, 어디 먼 외국에 있었나 봐?”
대륙 7대 길드!
그 말을 듣자 어디서 들어본 길드였는지 떠올랐다. 랑시의 어머니가 미혼일 때 소속되어 있었다는 길드가 바로 여명의 활이란 길드였다. 딱 한 번 스쳐 들었던 이름이라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하고 많은 길드 중에서 딱 두 번 들어본 이름이 같은 길드였을 줄이야. 이게 다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다.
“가입 희망자가 아니라면, 여명에서 누군가 찾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네, 크리스라는 사람을 만나야 해요.”
“크리스? 라케인 크리스?”
“정확한 이름은 몰라요. 그냥 크리스라고만 들었어요.”
“음, 여명의 활에 있던 크리스라면 한 명뿐이니 그 사람이 맞을 거야.”
“아는 사이예요?”
“그냥 팬이었어. 그쪽은 크리스를 잘 모르는 모양이네?”
고개를 끄덕이니 남자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예전엔 꽤 잘 나가는 헌터였어. 특히 궁수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지.”
“그렇군요. 여명의 활 길드원들은 다들 제도를 떠났다고 하던데. 혹시 그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들은 거 없으세요?”
질문하면서도 딱히 기대하고 물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크리스라면 아직 제도에 있긴 해.”
“네? 정말요?”
“음, 근데 만나지 않는 게 나을걸. 길드가 해체되고 나서 가장 많이 망가진 게 바로 그 사람이거든. 지금은 헌터 활동도 안 하고 있어. 이미 면허를 반납했다는 소문까지 돌던데.”
“그건 상관없어요.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어요?”
반색해서 물었더니 뒤쪽에서 피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트로웰이었다. “역시 스스로 걷어찬다니까.” 작은 목소리지만 중얼거리는 내용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내가 또 고생길로 향하는 직선 노선을 밟은 모양이다.
“으음, 기다려봐.”
난처한 표정을 짓던 남자가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더니 무언가를 메모했다. 건네준 걸 받아보니 간단한 설명이 첨부된 약도였다.
“여기로 가 봐.”
그러나 약도를 주면서도 남자는 꺼림칙한 표정이었다.
“주긴 했지만 역시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장소 자체도 안전한 곳은 아닌 데다가, 크리스 그 사람도 진짜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거든. 괜히 해코지할지도 몰라.”
연거푸 충고할 정도면 정말 상태가 나쁘긴 한 모양이다. 여기에 트로웰의 반응까지 겹치니 아무리 나라도 속 편하게 넘기기가 어려웠다. 억지로 웃는 입맛이 썼다.
“염두에 둘게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모르고 맞는 것보다 알고 맞는 매가 더 낫다는 말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거지.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싶다. 그럼 속 편하게 억울할 텐데 말이다.
* * *
남자가 적어준 약도엔 제5구역이라고 적혀 있었다. 알고 보니 제도에서 가장 후미지고 위험한 빈민가라는 듯했다. 운을 걷어찬 일정답게, 약도를 본 마부마다 승차를 거부해서 이동조차 쉽지 않았다. 결국 통상 요금의 두 배가 넘는 가격을 치르고 나서야 간신히 마차를 잡을 수 있었다. 그마저도 근처까지만 가는 거로 합의한 결과였다.
물어물어 도착한 곳은 허름한 술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왁자지껄 떠들고 있던 사람들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소란스럽던 공간이 한순간 고요해지며, 휘둥그렇게 뜬 시선이 우리 모습을 빤히 훑었다. 역시나 익숙한 반응이었지만 이번엔 느낌이 좀 더 불쾌했다.
“그거 알아? 빈민가엔 쓰레기도 그만큼 많이 모여.”
달라붙는 시선을 억지로 무시하며 안으로 들어서는데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트로웰의 황금색 눈동자가 위험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이곳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검을 꺼내 들기 직전에도 이런 눈빛을 했던 것 같은데. 그게 착각은 아니겠지?
“난 더러운 게 싫어.”
얼른 용건을 끝내야겠다.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바텐더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이곳에 크리스라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내 말에 약간 경계하는 표정을 짓던 바텐더가 엘뤼엔과 트로웰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엘뤼엔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 손끝에서 튀어 오른 무언가가 허공을 선회해서 바텐더의 손안에 들어갔다. 손바닥을 펴서 안을 확인한 바텐더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돈을 준 모양이다. 그냥 물어보기만 하면 안 되는 거였구나. 큰 깨달음을 얻고 있는데 바텐더가 눈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가게 안에서 가장 구석 쪽 테이블이었다. 아무것도 없어서 의아해하려니 그 옆에 작은 문이 보였다. 아마도 뒷문인 듯했다.
‘저 밖에 있다는 건가?’
고맙다는 의사를 표시한 후, 뒷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나가니 좁은 골목길이 나왔다. 한쪽은 쭉 이어지는 길이었고, 다른 한쪽은 쓰레기 더미로 막혀 있었다. 술과 오물이 섞인 듯한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지저분한 담벼락 앞에 웬 남자가 엎어져 있었다. 직감적으로 그가 내가 찾는 사람이라는 걸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