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444화 (444/608)

제444화

“그나저나 너야말로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표는?”

“구했어. 마침 오늘 저녁 출발하는 기차가 있었어.”

“정말이야? 와, 살았다.”

반가운 소식을 들은 미엘이 활짝 핀 얼굴로 안도했다. 에디스의 얼굴도 밝아졌다.

“당일표를 구하다니 운이 좋았네요.”

“네, 마침 딱 하나 남은 객실이었습니다. 다른 분이 먼저 도착했는데 제게 양보해주셨습니다.”

“그래요? 정말 고마운 분이시군요.”

그 말에 선뜻 수긍하면서 아이라는 조금 전 역에서 봤던 이를 떠올렸다. 소년? 아니면 소녀였을까. 입고 있는 허름한 차림을 무색게 하는 화려한 외모였다. 아이라는 태어나서 그렇게 아름다운 외모를 처음 보았다. 후드에 가려져 귀 모양까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엘프가 틀림없었다. 어쩌면 제사장 일족이라는 하이 엘프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엘프를 봤다는 사실에 들떴던 기분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가라앉았다.

‘엘프 일족도 요즘 행보가 이상하다고 들었는데. 혹시 관련된 건 아니겠지. 아니면 혹시 엘프가 아니라…….’

아니, 그것까진 억측일 거다. 아이라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의 정체가 뭐든 이번 일과 관련되어 있다면 남에게 표를 양보해줄 리가 없었다. 모든 일에 예민해지다 보니 지금은 조금만 마음에 걸려도 전부 의심으로 이어졌다. 이런 건 좋지 않았다.

“아이라?”

그 순간 들려온 음성에 아이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미엘이 자신을 걱정스럽게 응시하고 있었다. 밝은 갈색 눈동자에 평소와는 다른 불안이 보였다. 아이라는 억지로 웃음 지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보다 에디스 님, 시장하진 않으십니까? 뭐라도 드시겠습니까?”

“아뇨, 지금은 괜찮아요.”

에디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이라와 미엘 역시 입맛이 없었기 때문에 세 사람은 한동안 가만히 광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문득 에디스의 시선이 부두 쪽을 향했다. 그곳엔 그들이 타고 온 배가 아직 정박해 있는 상태였다. 선원들이 갑판 위를 분주히 오가며 한창 정비하고 있었다.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활기찬 모습이었으나 그걸 지켜보는 이들의 표정은 흐렸다.

“파벨 일행의 짐은 관공서로 보내진다고 했었죠.”

“……예, 에디스 님. 신분을 증명할 만한 건 하나도 없으니 아마 얼마간 보관되었다가 그대로 소각처분 될 겁니다.”

“그렇군요.”

내뱉는 숨이 한층 무거워졌다.

“난 아직도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들의 짐은 수습했어야 했던 게 아닐까요. 유품이잖아요. 하다못해 유족들에게는 전달해줘야…….”

“아뇨. 어쩔 수 없습니다, 에디스 님. 저희는 끝까지 관련이 없어야 합니다.”

“맞아요, 에디스 님. 처음부터 이런 일을 대비해 일부러 따로 행동했던 거잖아요.”

“하지만…….”

“그들은 육지에선 완벽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합니다. 그때 습격한 숫자가 전부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단호하게 못 박는 말에 에디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이라의 얼굴이 더욱 엄격해졌다.

“에디스 님도 아시잖습니까? 파벨은, 다른 둘도 그렇게 쉽게 방심할 녀석들이 아닙니다. 그들을 갑판으로 끌어낸 자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어쩌면 선원 중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관공서 직원 중에 있을지도 모르지요.”

에디스는 크게 숨을 삼켰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밝은 햇살에 잠시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 그들이 누리는 평화가 아슬아슬하고 위태롭기 짝이 없는 줄 위에 세워져 있는 것임을. 누군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릴 아주 얄팍한 평화였다. 에디스는 흐린 얼굴로 입술을 악물었다.

“……그렇죠. 맞아요.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어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에디스 님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부디 마음을 굳건히 다지십시오. 제국도 결코 안전지대는 아닙니다.”

어디에나 숨어들 수 있는 존재 앞에서 완벽하게 안전한 장소란 없었다. 어쩌면 지금 그들이 찾아가는 곳이 더 위험해지는 길일 수도 있었다. 새삼스러운 사실을 다시 상기한 에디스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저희를 도와주셨던 분은 괜찮으실까요? 따로 조사해보신다고 가신 후로 소식이 끊겨서 걱정이에요. 원래 일정대로라면 그분도 저희와 같은 배를 탔어야 했는데 말이에요. 안 타신 것 같았죠?”

“네, 하지만 탑승자 전원을 확인한 건 아니니 확실하진 않습니다. 저흰 거의 선실 안에서만 지냈으니까요. 단순히 마주치지 않았던 걸 수도 있습니다.”

“그런 거면 좋겠네요.”

이제 더는 희생자가 나오는 걸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에디스의 얼굴은 희망 없이 어둡기만 했다. 연두색 눈동자에 가득한 물기를 보며 아이라가 다짐하듯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에디스 님. 우리도 이렇게 마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습니다. 바로 그걸 위해 여기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온 거잖습니까.”

“알고 있어요. 잘 되겠죠, 아이라?”

“물론입니다. 이제 목적지가 코 앞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분들을 떠올려보십시오. 이 고난은 곧 끝납니다.”

아이라의 검은 눈동자가 새파란 불길을 품었다.

“그들이 누굴 건드린 건지, 반드시 깨달을 날이 올 겁니다.”

* * *

피이이이―

휘파람을 부는 듯한 소리가 울리며 시야가 급속도로 기울었다. 양쪽으로 쭉 뻗은 오색의 날개깃이 바람을 타고 하강을 시작했다. 까마득했던 지상이 빠르게 가까워지며, 장난감 같던 건물들이 덩치를 키워갔다.

“이제 곧 도착합니다!”

앞에서 고삐를 잡고 있던 비행사가 크게 외쳤다.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에 절반은 먹힌 소리였다. 피이이이― 그 말을 거드는 듯 다시금 긴 울음이 울려 퍼졌다. 이 순간에도 주변의 풍경이 빠른 속도로 스쳤다. 위에서는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까워 보였던 거리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멀어지더니 이제 어디쯤인지 확인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정류소 주위에 있던 사람들 몇몇이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이윽고 지상에 거의 다다른 몸체가 거대한 날개를 크게 펄럭이며 떨어지는 속력을 늦췄다. 쭉 뻗은 다리가 바닥에 완전히 착지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제 벨트를 푸셔도 됩니다.”

먼저 내려선 비행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수고했다는 듯 쓰다듬으니, 우리를 태우고 온 거대한 새가 눈꺼풀을 나른히 떴다. 머리는 닭과 흡사한 생김새지만 목에는 비늘이 덮여 있고, 등엔 사자 털 같은 갈기가 돋아 있다. 광택이 흐르는 날개는 화려한 오색을 지녔고, 꼬리 역시 공작새처럼 화려했다.

비행 몬스터를 개량하여 가축화했다는 비조는 이 세계의 훌륭한 운송수단이었고, 새를 탄다는 건 진귀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신기한 것도 시간이 지나면 식상해지기 마련이다. 하물며 반복하는 횟수가 잦다면 그 순간은 급속도로 더 빨리 찾아들 수밖에 없다.

“이제 한동안 비조는 안 탈 거야.”

안장에서 내리자마자 굳게 다짐하는 말을 들었는지 헬멧을 벗던 비행사가 피식 웃었다. 그야 매일같이 비조만 타는 사람이 보기엔 내 한탄이 엄살로 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질린 건 질린 거였다. 이것 또한 기차에서 느끼는 고뇌와 부합하는 내용이긴 한데, 사람이 고정된 한 자세로 버티는 건 정말 할 짓이 못 되는 것 같다. 육체가 어디까지 배길 수 있는지 시험당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아직 시련이 끝날 시기는 아니었다.

“중심부까지 마차를 타시겠습니까?”

뻐근한 몸을 주무르고 있자니 비조 정류소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마부가 다가와 물었다. 거절하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견디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에 갇혀 이동하는 건 이제 정말 싫었지만, 지금은 어서 도착해서 쉬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비용을 치르자 신이 난 마부가 직접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고개를 들고 눈앞을 확인했다. 꾸물꾸물하게 이어지는 숲길 너머, 아득히 먼 위쪽에 우뚝 선 왕성의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도착한 제도였다.

잔인한 예언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이뤄졌다. 열차는 가는 도중에 멈춰섰고, 울상이 된 기관사가 닷새 후에 구조대가 온다는 소식을 알렸다. 승객들은 아무것도 없는 산 한복판에 떨어졌다. 모든 것이 짜 맞춘 것처럼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그러나 트로웰이 모든 사실을 알려준 건 아니었다. 아니,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을 숨겼다. 그건 바로 이틀이면 탈 수 있다는 산길이라는 게 안전장치 하나 없는 위험천만한 벼랑길이라는 거였다. 심지어 폭도 좁은 데다가 끊어진 부분도 많아 없는 길을 만들어서 가야 할 정도였다.

‘어쩐지 아무도 산을 안 탄다 했지.’

닷새면 상당히 긴 시간이었다. 그걸 이틀까지 단축할 수 있다면 제법 솔깃해할 만도 한데 그 수많은 승객이 대부분 남아서 구조대를 기다리는 걸 택했다. 다음 역이 목적지인 이들 중에서 일정이 급한 사람 정도나 철길을 따라 걸어가기로 한 정도였다. 그 누구도 산을 타려는 이는 없었다. 그때 뭔가 이상하다는 걸 짐작했어야 했다. 다들 산을 타는 건 자살 행위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다.

그래도 거기까진 그럭저럭 감당할 만한 편이었다. 난 고소공포증도 없었고, 힘과 체력에도 자신 있었으니까. 진짜 문제는 본격적으로 벼랑을 타기 시작한 난 이후에 벌어졌다. 누구나 다 아는 일이겠지만, 인간의 삶엔 수많은 변수가 따르며 사소한 부분에서 큰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여벌 옷은 준비해도 신발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신발 밑창이 떨어졌다는 뜻이다.

처음엔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사나와 그렇게 장거리 여행을 해봤으면서도 여분의 신발을 잊다니, 다음부턴 좀 더 신경 쓰자는 반성 정도였다. 그런데 이 신발이란 게 의외로 걸음과 균형에 영향을 많이 주는 물품이었다. 헛발질이 잦아지고 미끄러지는 횟수가 몇 배로 늘었다. 무난한 바위 하나 딛고 서기도 쉽지 않다 보니 당연히 이동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추락할 뻔한 위기를 몇 번이나 모면해가며 갖은 삽질을 다 했으나 목적지에 도착한 건 사흘 후, 기차는 당연히 놓쳤다.

“너무 한심해서 오히려 아무런 말도 못 하겠네.”

“…….”

너덜너덜해진 채로 망연자실 서 있는 내게 트로웰이 건넨 독설은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옆에서 엘뤼엔이 차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던 모습도.

이후로는 정말 말도 못 할 고난과 역경의 시간이었다. 오지 않을 열차를 기다릴 수는 없으니 최대한 다른 방법으로 길을 단축할 방법을 모색했다. 일단 열차가 운행되는 지역까지만 가면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해서 지도부터 구매하고 경로를 잡았다.

하지만 초행자에겐 그 자체도 쉽지 않은 길이었다. 며칠이면 도착할 거리를 몇 날 며칠 헤매기도 하고, 지명을 착각해서 엉뚱한 장소에 도착하기도 하고, 어디에 어떤 운송수단이 있는지를 파악하지 못해서 더 오래 걸려 도착하기도 했다. 궂은 날씨에 발목이 잡히는 일도, 길을 알려준 사람이 잘못 가르쳐주는 경우도, 애초에 지도 자체가 틀리게 표기된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엔 그냥 열차를 포기하고 가는 게 더 나을 지경이 됐다.

공간이동이 되는 마나 게이트라든가, 제국의 자랑이라는 비행선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 귀족과 관료가 아니면 허가서를 받은 이만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표 자체가 전부 예약제인 데다가 신분증이 있어야 예매가 가능한 체계라 적당히 속여서 타는 것도 불가능했다.

‘망할 신분제 같으니.’

돈이 있어도 탈 수가 없다니, 이게 어디 될 말인가. 시설이 보편적이지 않다거나 수용 인원에 한계가 있어 제한이 필요했다는 거라면 어쩔 수 없다 여기기나 할 텐데, 그런 이유도 아니었다. 단지 특별한 계층이 점유해야 한다는 특권 의식 때문이었다.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는데 신분제 세상은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어쨌든 덕분에 내가 제도에 도착했을 땐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제대로 기차를 탔다면 늦어져도 일주일 만에 도착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그야말로 이가 갈릴 수밖에 없는 여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작 기다리던 순간을 맞이했는데도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곳에선 보지 못한 웅장한 건물들과 인파로 활기찬 거리가 펼쳐졌지만, 드디어 도착했다는 흔한 감동조차 없었다.

“그래도 너 치고는 빨리 도착했군.”

내가 느끼기에도 건조하기만 한 시선으로 가만히 둘러보고 있자니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난 고행의 나날, 경비를 대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어주지 않은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그 옆에선 마찬가지로 도움이 돼주긴커녕 오히려 약만 올린 트로웰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치사한 정령왕들은 내가 아무리 헤매고 있어도 그냥 내버려 뒀다. 나중에 가선 혼자 알아서 하라며 사라지고는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야 나타나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수많은 감정을 담아 가만히 바라보니 둘 다 뭐가 문제냐는 시선을 보내와서 더 울컥했다.

“이제 어쩔 생각이지?”

그래 봤자 화를 내는 것도 통하는 상대에게나 할 수 있는 행위다. 아무렇지 않게 돌아오는 질문에 분기탱천 끓어올랐던 전투력이 단숨에 파시식 식었다. 사실 둘이 나를 도와줘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지. 그래도 동행 자체를 그만두지는 않으니 그걸로 된 건지도 모르겠다.

“일단 부탁받은 것부터 해결할까 해. 여명의 활이라는 길드를 찾아봐야 할 것 같아.”

한숨을 내쉬며 대꾸하니 엘뤼엔은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트로웰도 재밌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얌전히 전해줄 생각인가?”

“그게 왜?”

“그걸 들고 가면 바로 라미아스를 만날 수 있을 거다.”

“어? 정말?”

“그럴 만한 정보니까.”

헉, 그렇구나. 하긴 전쟁은 누구나 관심을 가질 만한 고급 정보였다. 이 정도로 큰 건수라면 라미아스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할 명분이 되고도 남았다. 어디까지나 이 문서가 내 소유라면 말이지만.

“아니, 됐어. 그건 가로채는 거잖아. 애초에 그 사람이 이 정보를 누구한테 주려는 건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내 맘대로 넘기는 건 아닌 것 같아.”

그러자 엘뤼엔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양심이 있는 척을 하지?”

“……무슨 뜻이야?”

“어떻게든 라미아스를 만나야 하는 거 아니었나? 수단과 방법을 가릴 생각을 하는 걸 보면 그리 절박하진 않나 보군.”

“아, 아냐. 이래 봬도 엄청 절박하거든? 그냥 다른 사람의 사정도 모른 척할 수 없는 것뿐이지.”

“글쎄, 남의 사정을 염두에 둘 여유를 갖고도 절박하다고 할 수 있는 건가?”

“그야 절박하니까. 그 사람도 나랑 같은 기분일 거 아냐. 그걸 어떻게 무시해.”

그 말에 엘뤼엔이 이채 어린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 생각도 할 줄 알다니 어떻게 된 거냐는 표정이다. 트로웰 역시 묘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느릿하게 훑는 황금색 눈동자에 진심을 파악하려는 의도가 선명했다. 도대체 둘 다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솔직하지만 않은 거지 딱히 거짓말을 한 적은 별로 없는데 말이다.

“어쨌든 문서는 부탁받은 대로 처리할 거야. 솔직히 그런 수상한 내용에 별로 엮이고 싶지도 않고.”

“역시 양심 때문은 아니었군.”

“…….”

거참, 그냥 그렇다고 넘기면 될 것이지, 굳이 그렇게 저격할 일인가. 속으로 투덜거리다 슬슬 주위를 돌아보았다. 번화한 거리엔 없는 게 없이 가득했다. 내가 찾는 것도 그리 오래지 않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

“뭐지?”

손가락을 들어 한 장소를 가리켰다. 누가 봐도 여관으로 보이는 건물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보낸 두 정령왕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나는 환하게 웃었다.

“일단 잘래.”

당연한 말이겠지만, 인간은 삼시 세끼 식사를 하고, 간간이 쉬어야 하며, 충분한 잠을 자야 한다. 한 달이란 여정은 이런 기본적인 부분도 충족하기 힘든 시간이었다. 손톱만 한 인내심은 한계에 달한 지 오래였다. 해가 중천에 뜬 시각이라든가, 기분을 들뜨게 하는 화창한 날씨 같은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수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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