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441화 (441/608)

제441화

“왜, 자신 없어?”

“아, 아냐. 일단 해볼게. 그런데 저기, 기회를 하나 더 주면 안 돼?”

“기회?”

“내가 널 설득할 수 있게 해줘.”

지금 당장은 바뀌는 건지 아닌지 시험해볼 용기가 없다. 그러니 우선은 내가 알고 있던 대로 상황을 만들어야 했다. 조급한 마음으로 바라보자 트로웰이 미간을 찌푸렸다.

“날 설득한다니?”

“내가 보기엔 네가 인간을 없애려 하는 건 아직 마음에 드는 인간을 만나보지 못해서인 것 같거든. 한 번도 인간들과 어울리거나 교감해본 적 없지? 그들의 삶에 깊이 섞여본 적은 있었어?”

“내가 왜?”

“그것 봐, 없잖아. 물론 인간은 변하지. 끝까지 순수한 경우도 거의 없을 거야. 하지만 전부 나쁘게 퇴색하는 것만은 아니야. 트로웰, 네가 그걸 모를 리가 없어. 아직 실감하지 못해서 관심도 두지 않는 거야. 멀리서 보는 거랑 직접 경험하는 건 다르잖아. 막상 함께 지내다 보면 생각이 변할지도 몰라.”

“……혹시 같이 다니자는 말이야?”

“맞아. 전에 했던 부탁을 다시 하는 거야. 나와 함께 세상을 여행하자.”

“너…….”

“우린 분명히 좋은 친구가 될 거야. 믿어도 괜찮은 인간도 있다는 걸, 내가 증명할게.”

한동안 침묵이 흐르면서 주위가 조용해졌다. 트로웰은 아무런 말 없이 탐색하는 시선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입을 다문 그의 생각은 조금도 짐작할 수가 없어서 마음이 초조해졌다. 일 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기분으로 주먹을 꾹 움켜쥐고 있을 때였다. 마침내 트로웰의 입이 열렸다.

“그때 충분히 알아듣게 설명했던 것 같은데. 그런데도 여전히 나와 친해지려는 거야? 정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해보지 않고선 모르는 거잖아.”

“영특한 건지 어리석은 건지 모르겠네. 내가 너라면 차라리 계약자에게 도움을 청하겠어. 네가 얼마나 운이 좋은 행운아인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지금 정령왕 중에선 엘퀴네스가 제일 강해. 그라면 날 제압해서라도 못하게 할 수 있을걸.”

“아니, 그런 부탁은 하고 싶지 않아. 게다가 그래서는 네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 거잖아. 그런 건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 거야.”

“……뭐, 좋아. 무슨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안 되는 걸 되게 하려고 아등바등하는 꼴을 지켜보는 것도 나쁠 건 없지.”

이건 긍정적인 조짐일까? 바닥만 보고 있던 고개를 급히 치켜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트로웰이 피식 웃었다.

“너, 이름이 엘이라고 했던가?”

“아, 응! 맞아, 엘이야.”

“그래, 엘. 네가 그토록 바라는 기회를 줄게. 앞으로 3년간 너와 함께 해주지. 그동안 미네르바가 배신당하는 미래나 인간을 향한 내 생각, 어느 쪽이든 바꾸도록 해봐. 하나만 바꿀 수 있어도 네가 이긴 거로 할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는 감미로웠다. 한층 깊어져 짙은 색을 머금은 마력의 눈동자가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하지만 어느 것도 안 되면 널 제일 먼저 죽일 거야.”

……됐다.

꽉 막혔던 숨이 간신히 트였다. 분명 시벨리우스는 이때의 내가 무모한 도박을 했다고 타박했었다. 나부터 죽여달라 했다며, 목숨을 담보로 한 거래였다고 투덜거렸지. 내가 먼저 요청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비슷한 결과를 낸 셈이었다.

너무 안심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웃었던 것 같다. 잠시 멈칫한 트로웰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죽인다는 협박을 들었는데 기뻐하고 있는 거구나. 그의 시선으로 생각하니 내가 진짜 이상한 녀석으로 보일 것 같다. 그래도 기쁜 건 어쩔 수 없어서 실실거리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이 또한 출발선이었다.

* * *

“그래서 그때까진 같이 다니기로 했어.”

지난 과정을 듣는 얼굴은 내내 무표정했다. 깊은 눈매 속에 자리 잡은 물색의 눈동자가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잔잔한 빛을 발한다. 그와 같은 색의 머리칼이 흐르듯이 내려진 모습은 아름다움을 넘어 신비하기까지 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정령계에 간 이후로 정확히 일주일 만에 다시 보는 엘뤼엔이었다.

그간 나는 에펜 왕국의 국경을 넘어 무사히 제국 행 배를 탄 참이었다. 떠날 때 갑자기 사라졌던 그는 돌아오는 것도 갑작스럽기 그지없어서, 어느 순간 홀연히 눈앞에 나타나 나를 식겁하게 했다. 가만히 주위를 둘러본 후 이제부터 해명하라는 시선을 보낼 땐 살벌하다 못해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지만.

“……이건 원래 그랬다 치고.”

굳게 다물어진 그의 입술이 열린 건 모든 설명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이거라니, 이 시대의 아버지는 지시 대명사의 쓰임새를 다시 배울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물론 내가 입을 삐죽이든 말든 그의 눈길은 이미 나를 떠나 다른 곳에 닿아있었다. 단조롭게 꾸며진 선실 안, 소년의 모습을 한 주제에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술을 마시고 있던 트로웰이 시선을 느끼고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트로웰, 네가 왜 이런 장단에 어울리고 있는 거지?”

“재밌어 보여서.”

이어진 대답 역시 그 태도만큼이나 가볍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을 잠시간 노려보던 엘뤼엔이 서늘한 시선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어진 말엔 속이 절로 찔끔했다.

“날 얼마나 우습게 여기는지를 증명하고 싶었다면 성공이군.”

“아니, 절대 그런 건 아닌데.”

“이 계약이 끝나면 넌 어떻게 된다고 했지?”

“죽을 거라고…….”

“이런 일을 벌이면 내가 계약을 끝낼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나?”

“……끝낼 거야?”

“그 머릿속엔 염려라는 게 없냐고 묻는 거다.”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는 고요했지만, 그래서 더 음산했다. 아무래도 이번엔 진짜 화가 난 모양이다. 그야 내가 생각해도 좀 무모한 짓을 벌이긴 했지. 자극하지 말라며 친히 당부까지 해놨는데 도리어 있는 힘껏 일을 키워놓았으니 반항한 거라 여겨도 할 말이 없었다.

“뭐야, 그런 약속을 했어?”

차마 변명할 말이 없어서 어색한 웃음만 흘리고 있는데 트로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까이 다가오는 그를 보고 엘뤼엔이 얼굴을 찌푸렸다.

“계약을 끝내면 죽는다니. 그럼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말이잖아. 어떻게 양해를 구할지 고심하고 있었는데 이러면 오히려 내가 양해를 받아야겠는데?”

“……끼어들지 마라, 트로웰.”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겠어, 엘퀴네스. 이건 나와도 상관있는 일이라서.”

“그래서 나와 반목하겠다는 건가?”

“설마 그럴 리가. 서로 협조하자는 거야. 너와 한 약속만큼이나 나와의 약속도 무시할 수 없다는 거 알잖아. 같은 왕으로서 부디 존중해 줬으면 좋겠어. 말해두지만, 이런 상황을 만든 건 내가 아니야.”

엘뤼엔의 서슬푸른 시선이 다시금 내게 닿았다. 네, 그렇습니다. 제가 만들었죠. 이번에도 어색하게 웃었더니 그의 눈길이 더 흉흉해졌다. 이 순간에조차 꿋꿋하게 할 말을 하는 트로웰이 대단해 보일 정도였다.

“나와 약속한 기한을 채우기도 전에 얘가 먼저 죽어버리는 건 곤란해. 계약을 끝내고 싶어도 앞으로 3년은 참아줘.”

“그리고 네놈이 죽이는 걸 지켜보기나 하라는 건가?”

“네게도 그편이 더 낫지 않아? 끝을 경고했다는 건 언젠가는 계약을 파기할 생각이긴 하다는 거잖아. 한때 계약자였던 아이를 직접 죽이는 건 아무리 너라도 기분이 편하진 않을 것 같은데. 그 역할을 내게 넘기라는 것뿐이야. 이 정도면 오히려 상부상조하는 거 아닐까?”

……저기 다 좋은데, 듣는 내 기분도 생각해주지 않을래.

이게 무슨 식후 디저트를 고르는 일도 아니고. 아무리 인권의식이 부족한 정령왕들이라지만 사람 면전에서 네가 죽이니 내가 죽이니 하는 건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싶다. 제발 이런 주제로 상부상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특히 트로웰, 너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잖아? 아무리 과거라지만 내가 아는 모습이랑 이렇게 심하게 달라도 되는 거야? 게다가 왜 둘 다 당연히 내가 실패할 거라고 단정하는 건데? 트로웰을 설득하는 건 안 될 거라 여길 수 있다 쳐도 예지를 바꿀 수도 있는 거잖아! 물론 그건 안 바꿀 거지만!

‘아니, 잠깐만. 이렇게 말하니 진짜 꿈도 희망도 없는데?’

내가 생각하고도 뭔가 비참해서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래도 아직 틀어진 부분은 없으니까 괜찮겠지. 내가 일부러 상황을 바꾸지 않는 한 흐름이 달라지진 않을 거다. 그래, 이 내기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 인간은 멸종하지 않는다. 내가 있던 시대에 존재하던 수많은 인간이, 이사나와 알리사의 존재가 바로 그 증거였다. 기죽지 말자는 생각에 더 당당히 어깨를 폈다. 그런 나를 본 엘뤼엔이 싸늘하게 웃었다.

“좋을 대로 해라. 3년 정도는 기다려주지.”

선심 쓰는 듯한 말투였으나 사실상 수긍이었다. 트로웰이 생긋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잘됐네. 내 덕에 약속한 기한까진 안전해졌어.”

“……하하.”

아니, 오히려 더 위험해진 것 같은데요.

차마 솔직하게 답하진 못하고 타는 속을 삼켰다. 조금 전 스치는 눈빛을 보고 확실히 느꼈다. 지금까진 그냥 지켜만 보는 거였다면 이제 그의 마음속에 확실한 유예기간이 정해졌음을. 그러고 보니 인류 멸망을 막는다는 말까진 들었어도 그 뒤의 이야기는 못 들었지. 아무래도 3년 후에 걱정해야 할 건 트로웰이 아니라 엘뤼엔인지도 모르겠다.

여기로 와서는 왜 이렇게 되는 일들이 없는 것 같지. 하나가 풀리면 또 다른 하나가 꼬이고, 해결했다 싶으면 더 복잡해진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한 가지만은 분명해졌다. 그 안에 무조건 라피스를 찾아야 한다는 것. 자칫하면 행방을 찾기도 전에 내가 먼저 죽을지도 모르게 생겼다. 그것도 사랑하는 가족의 손에 맞이하는 죽음이라니, 그런 건 절대 사양이다.

혹시 그렇게 되면 일단 튀어야지. 정 안 되면 본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까지 각오해야겠다. 집을 떠올리니 갑자기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바로 눈앞에 엘뤼엔과 트로웰이 있는데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기분이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그러게 누가 혼자 놔두랬나. 애초에 엘뤼엔이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면 나와 트로웰의 만남이 그렇게 살벌하지도 않았을 거 아냐. 물론 그 덕분에 내가 알던 대로 상황이 진행된 거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아버지. 정령계는 왜 갔던 거야?”

문득 건넨 질문에 트로웰로부터 술잔을 강탈하고 있던 엘뤼엔이 미간을 찌푸렸다. 원래 심기가 불편한 상태이긴 했는데 기분이 더 나빠진 것 같았다. 의아해하려니 흥미로운 표정을 지은 트로웰이 물어왔다.

“아버지? 엘퀴네스를 아버지라고 불러?”

“어? 아, 미안. 또 실수했나 봐. 그냥 말버릇 같은 거야.”

“재밌는 말버릇이네. 자식이 생긴 기분이 어때, 엘퀴네스?”

“헛소리.”

돌아오는 반응은 차갑기 그지없어서, 그럴 줄 알고 있었으면서도 내심 기분이 상했다. 그래, 지금은 그게 헛소리 같겠지. 나중에 어디 두고 봅시다, 아버지. 잘못했다고 할 때까지 아저씨라고 불러버릴 거야.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도 겉으론 내색하지 않고 얌전히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빤히 주시하는 눈길에도 엘뤼엔은 묵묵히 술만 마셨다. 말해주지 않으려나 싶어서 시무룩해지려니 보다 못했는지 트로웰에게서 대답이 이어졌다. 그것도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교전이 있어서야.”

“어? 교전?”

“이프리트가 물의 영역을 쳤거든.”

누가 뭘 어떻게 해?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입이 절로 벌어졌다. 쳤다는 게 공격했다는 의미인 거 맞지? 정령왕들끼리 전쟁이 벌어졌다고?

“그게 무슨…….”

“둘이 사이가 좀 나빠. 그래도 전면전까지 갈 생각은 잘 안 하는 편인데 이번엔 이프리트가 웬일로 강하게 나왔어. 엘퀴네스가 영역을 비우는 일은 흔치 않으니 타격을 줄 절호의 기회라고 여긴 모양이야.”

“뒤에서 네놈이 부추겼겠지.”

황당해서 입만 벙긋거리는데 엘뤼엔이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트로웰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짙어지는가 싶더니, 그가 말없이 엘뤼엔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아까부터 사방에 진동하고 있던 달콤한 향기가 더 짙어졌다. 여담이지만,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이 향기는 트로웰이 직접 담그는 특제주에서만 풍긴다.

……이래서 술을 준비한 거였구나. 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트로웰이 뇌물을 바치는 현장을 지켜보았다. 아무래도 엘뤼엔이 사라진 사이에 그가 나타났던 게 단지 때를 잘 맞춘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생각보다 쫓아내는 데 오래 걸렸네. 이프리트가 단단히 작정하는 것 같더라니, 이번엔 너도 좀 고전했나 봐?”

“그럴 리가.”

“그러면?”

“불의 영역을 완전히 파괴하는 건 아무래도 시간이 걸리더군.”

침략을 물리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역습까지 가했다는 소리였다. 심지어 영역을 전부 파괴하다니, 그게 이론적으로 가능한 일이긴 한 건가?

“……이프리트는 한동안 보기 어렵겠구나.”

어딘가 초연해진 트로웰만큼이나 나 역시 자세가 공손해졌다. 과연 그 카노스를 놔두고 역대 가장 강한 엘퀴네스라는 평을 받는 존재다웠다. 괜히 이프리트가 나와 엘뤼엔을 비교해가며 타박했던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프리트는 이렇게 당하고도 엘뤼엔한테 반한 거야? 어떤 의미에선 그 녀석도 좀 굉장하네.’

싸우다 정드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쯤 되면 참사랑이라는 걸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어라, 가만있자. 그러고 보니 내가 아는 이프리트는 나이가 이천 살 조금 넘었다고 했던가. 그럼 이 시대는 아직 전대겠구나. 당연히 내가 아는 이프리트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보니 좀 얼떨떨했다. 그래도 엘뤼엔 때문에 고통받는다는 점에서 전체적인 평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만나보지도 못한 정령왕이 참 애잔하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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