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0화
―너 지금 내가 보여?
안 돼, 엘. 대답하면 절대 안 돼.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시선은 나이아스에게 고정한 채 억지로 웃었다. 부디 정령과 노는 거로 보이길 간절히 바랄 따름이었다.
―내 목소리도 들리는 모양이고.
젠장, 역시 안 통한다.
목소리가 들리는 건 대체 어떻게 알았지? 설마 이제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건가? 아냐, 읽을 수 있다면 단지 물어보는 정도로 끝날 리가 없다. 그냥 떠보는 거겠지. 혀를 깨물고 싶은 기분으로 버티는데 다음 말이 이어졌다.
―심장 소리 빨라졌어.
“…….”
―계속 모른 척하면 다음엔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미안, 보여.”
감히 그 앞에서 빠져나갈 생각을 하다니, 내가 너무 큰 꿈을 품었던 모양이다. 빠르게 체념하고 고개를 들어 트로웰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이미 확신하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정작 내가 똑바로 시선을 맞춰오자 황당해하는 듯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더니 턱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음 순간 반투명하던 그의 모습이 완전히 뚜렷해졌다. 어차피 알아본 거 육체를 입기로 한 듯했다.
안 그래도 긴장되는 순간인데 존재감이 선명해지니 더 무섭다. 나이아스는 기겁하다 못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얼른 돌려보낸 후에 자세를 똑바로 하고 조심스럽게 트로웰의 기색을 살폈다. 싱긋 웃는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너 진짜 말도 안 되는 아이구나. 내 능력도 통하지 않는데 자연의 정령도 본단 말이지. 엘퀴네스도 이걸 알고 있어?”
“대충은…….”
“어쩐지 그 엘퀴네스가 왜 계속 인간에게 붙어있나 했지. 이건 확실히 그럴 만하네.”
“저기, 그치만 계속 보이는 건 아냐. 물의 기운에 의식을 집중할 때만…….”
“그게 별로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건 너도 알고 있지?”
“……응.”
잠자코 인정하니 그의 표정이 더 묘해졌다. 재밌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이없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의외로 불쾌해하는 반응은 없는 것 같아서 마음이 슬쩍 놓이려는데, 다음으로 그의 시선이 내 손 쪽에 닿는 걸 보고 다시 체념했다. 아니나 다를까, 별로 반갑지 않은 질문이 이어졌다.
“손등에 그건 뭐야? 기묘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이건 그냥 넘어가면 안 될까.”
“왜 헛된 시도를 하는 걸까. 내가 너라면 이럴 때 순순히 대답할 텐데.”
차라리 그냥 대놓고 협박했으면 좋겠다. 나는 한숨을 내쉰 다음 소매를 걷어 보였다. 돌아올 반응은 너무도 예상돼서 마음의 각오를 할 것도 없었다. 역시나 문장이 새겨진 손등이 드러나자 트로웰의 얼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마신의 문장?”
“가짜야.”
“마신의 기운이 서려 있는데?”
“……그래도 가짜야.”
트로웰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탐색하는 눈길이 지루할 정도로 오랫동안 내 얼굴을 훑었다. 여기서 시선을 피했다간 죽여달라고 외치는 꼴이었으므로 나는 최대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게 제법 효과가 있었던 걸까. 사람을 꿰뚫어 볼 듯한 황금색 눈동자에 잠시 이채가 어렸다.
“……엘퀴네스가 대체 뭐와 계약한 건지 모르겠네.”
그 말을 엘뤼엔도 똑같이 했다는 건 차마 알려주지 못했다. 조금 뜻밖이었던 건 그 뒤로 트로웰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계약한 엘뤼엔조차 죽일지 말지 고심하는 시선을 보냈는데, 그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깔끔하기만 했다. 물론 흥미진진해하는 표정이기는 했지만.
“마신, 마신이라……. 그래, 마신의 개입이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하지.”
더불어 뭔가 조금 오해를 하게 된 것 같다. 해명하는 게 좋을 것 같긴 한데,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가 없어서 그냥 얌전히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초조하게 눈만 굴리는 나를 흥미롭게 살피던 트로웰이 돌연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아까 재밌는 말을 하던데. 출신지가 에바스 에덴이라고?”
“어? 아, 그건…….”
“그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엘퀴네스가 말해줄 성격은 아닌데.”
“그냥, 우연히, 예전에 읽던 동화책에서…….”
“믿으라고 하는 말이야?”
역시 씨알도 안 먹힐 줄 알았다. 트로웰이 듣고 있는 줄 알았다면 절대 그런 식으로 대답하지 않았을 텐데. 한번 당해보라고 저지른 일에 도리어 내가 당한 기분이다. 깊은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미안해. 내가 좀 수상하지.”
“그래, 수상해.”
트로웰은 선뜻 긍정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수상하니 오히려 흥미가 드네. 왜 엘퀴네스가 널 안 죽였는지 알겠어. 좀 더 지켜보고 싶어졌거든.”
“아하하, 그렇다면 다행이네…….”
“왜 엘퀴네스를 소환했어?”
“어?”
“아쉬워서 하는 말이야. 너 정도면 다른 정령왕도 소환할 수 있었지 않아? 엘퀴네스 말고 나랑 계약했다면 더 좋았을걸. 인간은 싫지만, 너라면 나도 계약했을 것 같아. 적어도 3년간 지루할 틈은 없었을 텐데.”
와, 지금 이게 현실인 거 맞나? 기대하지도 않았던 말에 가슴이 크게 뛰었다. 그가 날 죽일 듯이 압박하던 게 불과 얼마 전 일이다. 그런데 이제 계약하지 못한 걸 아쉬워하다니,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진전이었다.
그런데 왜 굳이 3년이지? 구체적으로 햇수를 명시한 게 왠지 마음에 걸려서 조심스럽게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자 트로웰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확실히 감이 좋단 말이야. 볼수록 인간인 게 아까울 정도로. 하지만 못 알아듣는 게 너한테는 더 좋았을 텐데. 이러면 알려주고 싶어지잖아.”
“무슨 말인지…….”
“왜 3년인지 궁금해? 그 뒤엔 네가 죽기 때문이야.”
반사적으로 몸이 굳었다. 숨을 멈춘 채 가만히 응시하니 트로웰의 입가에 다정한 미소가 어렸다. 화려할수록 독이 있다는 말을 떠오르게 하는 미소였다.
“딱히 네게 유감이 있는 건 아니야. 정확히 말하면 너만 죽는 건 아니니 안심해. 그냥 이 세계에서 인간이 전부 사라지는 것뿐이니까.”
“……뭐?”
“3년 후에 인간종을 다 없앨 예정이거든. 완전한 멸종인데 예외를 둘 수는 없잖아.”
눈앞이 아찔해지는 내용이었지만 생각보다 놀라진 않았다. 이미 각오하고 있던 부분이라 그런지 그냥 올 게 왔다는 기분이었다. 그래, 어쩐지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 했지. 한차례 심호흡을 한 뒤 트로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선명한 금안 속에 자리 잡은 뚜렷한 증오심이 읽혔다.
아직 쉬운 방법밖에 모른다고 했던가. 엘뤼엔이 그를 향해 내렸던 평이 떠올랐다. 왜 그렇게 말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확실히 지금의 트로웰은 감정에 솔직했다. 내 시대의 그라면 이렇게 훤히 내심을 드러내지는 않았을 거다. 그게 아무리 만만한 상대 앞이라도. 그런 점에서는 차라리 더 상대하기 쉬운 편인 건지도 모른다. 뭐든 생각하기 나름이라더니, 그렇게 여기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왜 그때인지 물어봐도 돼?”
생각을 정리할 겸 건넨 질문에 트로웰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살짝 멈칫했다. 느릿하게 깜빡거리는 눈동자에 황당해하는 감정이 고스란히 비쳤다.
“그게 제일 궁금한 거야? 왜 없애는지 묻는 게 아니라?”
“네가 인간을 싫어하는 건 알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도 가능할 텐데, 굳이 기일을 정해둔 걸 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아서.”
“……역시 재밌네. 맞아, 난 인간을 싫어해. 하지만 싫어한다는 이유로 전부 멸하진 않아.”
“그럼…….”
“가장 표면적인 이유는 그 시기에 한 인간이 우리를 기만하기 때문이지. 다 같이 그 대가를 치르는 거야.”
“기만?”
“미네르바가 배신당하거든. 그의 계약자이자 연인인 인간 남자로부터.”
역시 그건 이 시대에서 일어나는 일이었구나.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것 같아서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굳어진 내 얼굴을 트로웰은 느긋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 주제넘은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어. 그러니 감히 미네르바를 배신할 생각도 하게 되는 거겠지. 지금도 내겐 그자가 저지를 작태가 선명히 보여. 미네르바를 경애하던 눈으로 감히 다른 여인을 바라보고, 미네르바에게 고백하던 입술로 다른 여인을 찬미하지. 미네르바가 저를 위해 준 힘으로 미네르바를 찌르고, 그를 한없는 절망으로 몰아가 끝내 모든 걸 파괴할 거야.”
듣기만 해도 시리는 말들에 가슴 속이 먹먹해졌다. 미풍처럼 늘 잔잔하던 미네르바의 모습이 떠올랐다. 똑같은 바람인데도 미네와는 달리 그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스러질 듯 아슬아슬한 느낌으로 남아 있다. 페르데스와는 또 다르다. 단지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라, 실제로 그가 절반의 힘밖에 지니지 않은 약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의 나머지 힘은 한 자루의 검에 봉인되어 다른 이를 위해 쓰였다. 미네르바가 그 자신의 의지로 직접 벌인 일이었다. 단지 한 인간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그만큼 사랑했던 연인에게 배신당했다는 이야기는 예전에 들었을 때도 충격이 컸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엔 그게 현실이었다. 그 아픈 순간들을 앞으로 미네르바가 겪는다고 생각하니 이미 알고 있는 일인데도 와 닿는 감정이 달랐다. 그 광경을 직접보고 있을 트로웰이 얼마나 참담한 심정일지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인간을 싫어하게 된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래도 전부 없앨 필요는 없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건넨 말에 트로웰은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반기는 태도였다.
“죽는 게 겁나긴 하나 보네. 하나 때문에 전부 죽는 건 불공평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도 맞아. 물론 그 남자는 정말 잘못했고 벌을 받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게 모든 인간의 잘못은 아니잖아. 연대책임을 지울 것까지는…….”
“아니, 이런 건 후속 조치라고 하는 거야.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려는 방비지. 인간의 근본은 쓰레기니까, 내버려 두면 또 같은 짓을 저지를 게 뻔하거든.”
그렇게 말한 후 웃음을 머금은 금안이 나를 향해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냈다.
“지금은 그자가 잘못했다고 여기는 너도 몇 년 후엔 엘퀴네스를 이용하려 들겠지. 주어진 것들을 당연시하고, 왕의 이름을 능멸하고도 그걸 인지조차 하지 못하면서. 이제 그런 꼴을 보는 건 더는 사양이야.”
“아니, 나는…….”
“넌 안 그럴 거라고? 그걸 어떻게 믿어?”
“난 절대 안 그래.”
“그렇게 확신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3년 후에 배신한다고 한 그자도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헌신적이고 달콤한 연인이거든.”
생각지 못한 말에 저절로 입이 닫혔다. 그렇구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이니까, 현재는 전혀 다른 모습일 수도 있는 거였다. 그래도 설마 헌신적인 연인이라니.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이 머리가 얼얼했다. 배신이라는 것 자체가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거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건데, 결과만 두고 무의식적으로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었을 거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그 안이한 부분을 트로웰이 지적하고 있었다.
“지금의 그는 누구보다 미네르바를 경애하고 사랑하지. 미네르바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생각해. 계약한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감정이 흐트러진 적이 없었어. 하지만 3년 후에 미네르바를 배신하고, 다른 연인을 만드는 것도 바로 그자야.”
“…….”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렇게 절절한 감정도 결국 사그라진다는 거야. 인간은 전부 변해. 순수한 시절은 고작 한때에 불과할 뿐, 모든 감정이 퇴색하고 일그러지지. 근본적으로는 그게 내가 인간을 멸하기로 한 진짜 이유이기도 해. 너희는 믿을 수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뭐라고 반박을 하긴 해야 할 것 같은데 머릿속이 잘 정리되지 않아 입만 연신 벙긋거렸다. 그걸 불만 표현으로 여겼는지 트로웰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표정이네.”
“그야…….”
“하긴, 죽는다는데 얌전히 받아들이기는 어렵겠지. 그럼 네가 한번 바꿔볼래?”
“……어?”
“다행스럽게도 내가 보는 미래는 유동적이야. 반드시 일어나는 절대 예지는 아니지. 노력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 바꿀 수 있어. 그 탓에 미네르바도 내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거지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은 씁쓸해 보였다. 무어라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전에 그가 나를 똑바로 응시해왔다. 다음 순간 이어지는 말에 나는 살짝 숨을 삼켰다.
“요컨대 핵심이 되는 사건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된다는 말이야. 그자가 미네르바를 배신하지 못하게 해봐. 그럼 인간을 멸하는 것도 그만둘게. 어때?”
아니, 그 미래는 막지 못한다. 내가 있던 시대에서 그건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트로웰을 설득해서 그를 중단하게 할 순 있어도, 배신 자체는 막지 못한다는 소리다. ……아니, 정말 그런가? 여기선 아직 일어나기 전의 일인데 섣불리 단정해도 되는 걸까?
거기까지 떠올리니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문제가 스쳤다. 이제까지 나는 모든 흐름이 정해진 대로 움직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과거에 대해 알고 있는 부분은 얼마 없지만, 그 얼마 안 되는 내용만큼은 똑같이 진행될 거라 여겼다. 적어도 방금 트로웰의 제안을 듣기 전까진 그랬다.
배신을 막으라니. 원래 내가 시벨리우스에게 들었던 이야기는 이런 식이 아니었다. 인간을 싫어한 트로웰이 전부 멸하려 했고, 그걸 알게 된 내가 설득할 시간을 달라 요청했다는 단순한 흐름이었다. 지금 같은 조건에 대해선 들어보지 못했다.
물론 시벨리우스도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던 건 아니라고 했으니 그저 거기까진 모르고 있었던 것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는 거라면? 내가 여기서 이 제안을 거절해도 내가 아는 대로 흘러간다고 보장할 수 있는 건가? 만약 지금 내 대답으로 흐름이 바뀐다면? 그럼 내가 있던 원래의 내 시대는 어떻게 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