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7화
바로 눈앞에 선 모습에 나는 연신 눈만 깜빡였다. 세상에, 내가 지금 진짜 트로웰을 보고 있는 건가? 멀리서도 믿기지 않았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스크린 속의 존재가 튀어나와 있는 것만 같았다. 반응을 먼저 보인 건 남자 쪽이었다. 당연히 지나갈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가 뒤쪽으로 물러섰다. 하지만 트로웰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 시선은 처음부터 내게 고정된 채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그제야 남자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당황한 얼굴을 했다. 한동안 들여다보는 것처럼 가만히 바라보던 트로웰이 두 눈을 휘어 접더니 나른히 웃었다.
“안녕.”
“……아하하, 안녕.”
어색하게 웃으며 마주 인사를 건네자 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역시 다르네.”
“어?”
“아까부터 너 혼자 반응이 달랐거든. 내 외모에 흥미를 보이는 것도 아니고, 연주를 들으려는 것도 아니었지. 그런데도 날 계속 집요하게 살피고 있었어.”
“아, 그건…….”
“날 아는구나.”
저 짧은 한마디가 왜 이렇게 심장 떨리게 무서운지 모르겠다. 마른침을 삼키자 그가 나른하게 웃었다.
“이상하네. 어떻게 알지? 설명을 미리 들었다 해도 그 모습이 아닐 텐데.”
“으음…… 그냥 감으로?”
“그럼 내가 널 만나러 온 거라는 것도 알고 있겠네.”
정말 날 만나러 온 거였구나. 어느 정도는 그럴 거라 짐작하긴 했었다. 설마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열심히 굴리자 선명한 금안이 위험하게 반짝였다. 본래의 모습이었어도 심장이 철렁했을 텐데, 성인의 모습으로 저러니 위압감이 더 컸다.
“형씨, 예의가 없군. 이 애는 나와 대화 중이었어. 아무리 이종의 혼혈이라도 인간의 문화는 알고 있어야지.”
그때 넋 놓고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허둥거리며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는 여전히 트로웰을 다크 엘프로 오해하는 것 같았다. 이 분위기에 끼어들 생각을 하는 것만 봐도 눈치라곤 약에 쓸 데도 없는 사람이었다. 트로웰은 그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완벽한 무시였다.
“사실 조금 놀랐어. 이렇게 어릴 줄은 몰랐거든. 게다가 생김새도 마음에 들어. 인간에게서도 이런 외모가 나올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야.”
“어, 고, 고마워……?”
“응, 그래서 좀 곤란하네. 당장 어쩔 생각은 없었는데 너로 인해 파생할 문제가 벌써 여러 개 보였어. 대부분은 눈에 보이는 것에 너무 약하거든. 예외를 하나 인정하기 시작하면 다들 마음이 흐트러질 게 뻔하단 말이지. 생각보다 더 위험한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금 시선을 맞춰오는 것에 몸이 움찔 떨렸다. 얼굴은 웃고 있고, 말투도 부드럽다. 내가 알던 그의 모습과 같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방심하면 숨을 쉬는 것도 잊을 것 같아서 나는 억지로 정신을 다잡았다.
“이봐, 내 얘기 안 들려?”
눈치 없는 남자가 또 끼어들었다. 자신을 무시한 것에 화가 났는지 기세가 사나워진 상태였다. 이번엔 트로웰도 그를 돌아보았다. 힐끔 눈짓을 한번 한 것에 불과하긴 했지만.
“봐, 벌써 귀찮은 게 붙었잖아.”
“뭐? 지금 나한테 한 말이냐?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재차 가해진 무시에 화가 났는지 얼굴이 벌게진 남자가 트로웰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당장 멱살을 움켜쥘 듯 조급하고 거친 동작이었다. 그 순간 무언가 꿰뚫리는 소리와 함께 얼굴에 뜨거운 액체가 튀었다. 무심코 닦아내다 그 자리에서 잠시 숨을 멈췄다. 손바닥 한가득 붉은 피가 묻어나 있었다. 멍하니 돌아보자 뻣뻣하게 굳은 남자가 보였다. 그의 상체에 새겨진 붉은 선혈이 선명했다. 가슴과 복부에 조금 전까지 존재하지 않던 자상이 보였다. 그 사이로 새어 나온 핏물이 빠르게 번지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잠시간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본인조차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지 못한 듯 얼굴이 멍했다. 나는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 트로웰 쪽을 응시했다. 그는 언제 뽑아 든 건지 알 수 없는 검에서 피를 털어내고 있었다. 그것만 봐도 선혈의 정체를 알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남자가 울컥 피를 토해내더니 비틀거리며 무너졌다. 쓰러진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흥건히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으아악!” 그제야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 살인이다!”
“사람을 죽였어!”
주위는 곧 아수라장이 됐다. 빠르게 달아나는 사람들과 엉거주춤 무기를 빼 드는 사람까지, 저마다 가지각색의 반응이 나타났다. 그동안 나는 망연히 트로웰만 바라보았다. 사방이 혼란해진 상황에서도 그는 홀로 태연했다. 그저 무심한 얼굴로 쓰러진 남자의 이마에 검날을 가져다 댈 뿐이었다. 날이 스치는 자리에 붉은 빗금이 천천히 새겨졌다. 땅의 정령왕의 표식이기도 한 빗살 무늬였다. 이윽고 검집에 검을 집어넣은 그가 나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조금 전 웃었을 때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그 모습만 보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의외로 담력도 좋네. 덜덜 떨면서 주저앉을 줄 알았는데.”
“왜…….”
“왜 죽였는지 묻는 거야? 그냥 취미야.”
“사람을 죽이는 게, 취미라고?”
비슷한 경고를 이미 들었었다. 그래도 직접 그 입에서 듣는 말은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힘겹게 되물은 말에 그는 피식 웃었다. 조금 비틀린 미소였다.
“사람이 아니라 쓰레기지.”
“무슨…….”
“사람이라기엔 악취가 너무 역겹잖아. 난 이런 거 잘 못 참거든.”
중얼거린 트로웰이 이미 시신이 된 남자를 발로 밀었다. 그러자 그 몸에서 무언가가 굴러 나왔다. 그게 뭔지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남자가 계속 손에 쥐고 있던 정체 모를 나무통이었다.
“마취제야.”
저게 대체 뭔가 싶어 가만히 살피는데 뜻밖의 단어가 들려왔다. 당황해서 돌아보자 트로웰이 다시 웃었다.
“바닥의 버튼을 누르면 바늘이 튀어나오는 구조지. 그 바늘에 발린 마취제는 한 방울로 코끼리도 기절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해. 비록 다크 엘프한테는 안 통하지만.”
“그건…….”
“그거 알아? 지성체라 불리는 생물 중에서 동족의 아이를 강간하거나 죽이는 건 인간뿐이라는 거. 동족을 팔아 치우는 것도 인간뿐이지.”
아아, 그렇구나. 그래서.
머릿속이 차분해지면서 놀란 마음이 빠르게 진정됐다. 때마침 멀찍이서 달려오는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비대인 게 분명했다. 나는 얼른 트로웰의 팔을 붙잡았다.
“가자!”
“뭐?”
대답은 듣지 않고 무작정 잡아끌기부터 했던 것 같다. 다행히 트로웰은 별다른 저항 없이 내가 끌고 가는 대로 따라왔다. 복잡한 골목길로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한동안 추격전이 이어졌다. 더는 따라붙는 기척이 없다는 걸 느꼈을 땐 어딘지 모를 숲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었다.
“이제, 허억, 헉, 안 쫓아오는 것 같아.”
몇십 분을 쉬지 않고 달렸던 것 같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면서 나는 지친 몸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 나와 달리 너무도 멀쩡하기만 한 트로웰은 말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왜 날 데리고 도망친 거야?”
“경비대한테 잡히면 안 되잖아.”
“넌 내가 인간의 경비대 따위한테 잡힐 거라고 생각해?”
“아, 그건 그렇네.”
그러고 보니 혼자 도망치는 게 더 간단했겠구나. 내가 인간이 됐다고 무심결에 트로웰도 같은 처지라고 생각했다. 또 거하게 삽질을 한 셈이다. 이게 무슨 망신인가 싶어서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미안해, 나 때문에 트로웰까지 괜히 뛰었네.”
“애초에 네 쪽이 휘말린 거라는 건 알고 있어?”
“오히려 반대지. 트로웰이 날 구해준 거잖아.”
“뭐?”
“그 사람 나도 좀 이상했거든. 자꾸 가까이 달라붙으려는 게 수상해서 경계하고 있었는데 설마 마취제를 쓰려고 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어. 도와줘서 고마워. 갑자기 죽여서 놀란 건 맞는데, 솔직히 그런 놈이면 죽어도 싸지.”
“……정말 고맙다고 생각해?”
“그럼 정말이지. 아, 그동안 죽인 인간들도 혹시 다 그런 놈들인 거야? 그렇구나. 이제야 좀 이해가 됐어. 역시 사람 말은 들어봐야 한다니까.”
그럼 그렇지. 그냥 아무나 마구 죽이는 게 아니었다. 조금 더 과감하고 잔인한 방식이긴 해도 그 나름대로 정해둔 규칙이 있었던 거다. 낯설다고만 생각했던 그에게서 내가 아는 모습을 발견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기쁨을 숨기지 못한 탓일까. 입을 꾹 다문 트로웰이 다음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을 겪은 것처럼 무언가에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마음이 안 읽혀.”
“어?”
아무 생각 없이 되묻기 무섭게 흠칫했다. 나를 노려보는 시선이 날카로웠다. 굳어진 얼굴에 약간 화가 난 듯한, 진득한 경계의 표정이 떠올랐다.
“인간에게 내 힘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돼. 너 대체 정체가 뭐지?”
무슨 말인가 했더니 내 생각이 읽히지 않나 보다. 이건 이미 짐작했던 부분이라 별로 당황스럽진 않았다. 속마음을 들키면 당연히 내 정체도 드러날 텐데, 시벨리우스의 기억에서 난 트로웰과 어울렸는데도 주술이 풀리지 않았으니까. 어렴풋이 능력이 통하지 않았나 보나 싶었는데 역시 그게 맞았던 모양이다. 모종의 주술 보호 조치가 있는 건지, 그냥 내 혼이 정령왕이기 때문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설명할 수는 없고, 역시 이럴 때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겠지.
“난 엘이라고 해.”
“뭐?”
“엘. 그게 내 이름이야.”
이 땅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진실은 오직 이 이름 하나뿐.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대답도 이것밖에 없다. 트로웰은 조금 얼굴을 찌푸렸다. 흐트러진 눈빛에서 채 감추지 못한 당혹감이 그대로 보였다.
“난 이름을 물은 게 아니야.”
“별로 다르진 않아. 내겐 그 이름이 정체성이나 마찬가지거든.”
“회피하는 대답치곤 꽤 거창한데. 아니면 너도 자신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냥 마음대로 생각해. 어쨌든 이름을 알려주고 싶었어. 특히 트로웰이 꼭 알고 있으면 했어.”
“왜?”
왜냐면 내게 이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 바로 너니까.
말없이 웃기만 했더니 트로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잔뜩 좁혀진 미간만 봐도 이 상황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문득 엘뤼엔이 한 경고가 떠올랐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이런 행동이 그를 자극하는 거라 해도 어차피 난 멈출 수 없을 테니까.
그거 알아, 트로웰? 그 이름이 정체성인 건 이곳만이 아니야. 원래 내가 있던 장소에서도 그건 늘 마찬가지였어. 엘뤼엔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날 지탱해주었다면, 네게서 받은 이름은 나를 이 세계의 일원으로 완성했어.
그 이름을 받았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지금의 넌 조금도 모르겠지. 그걸 잃어버릴 뻔했을 때 느꼈던 슬프고 비참했던 기분도. 그래서 난 지금 이 순간이 더할 나위 없이 고맙기만 해. 내게 무엇보다 소중한 이 이름이 네게도 의미가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 처음부터 온전히 내게 주어진, 내 것이었다는 걸 확인하게 되어서.
“난 너와 친해지고 싶어.”
멈칫한 트로웰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싸늘한 비소를 지은 채로 나를 응시했다.
“나와 친해지고 싶다고? 인간인 네가?”
“그러면 안 될까? 우린 제법 가능성이 넘친다고 생각하는데.”
“가능성?”
“내가 궁금해서 보러 온 거잖아. 나도 너에 대해서 알고 싶어. 친해지면 서로에 대해 많은 걸 알 수 있을 거야. 같이 세상을 여행하지 않을래?”
“……엘퀴네스가 상냥한 계약자는 아닐 텐데. 이상할 정도로 겁이 없네.”
이어진 목소리는 부드럽고 나른했다. 덕분에 잠시 방심한 대가는 혹독하게 돌아왔다. 다음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느낌과 함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숨을 쉬는 게 힘들어져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트로웰이 정령왕의 기운을 개방한 거다.
“너 같은 애들은 잘 알아. 정령사 중에서 특히 많지. 정령과 계약했으니 자신이 선택받았다고 여기는 유형들. 이런 애들은 꼭 모든 정령이 자신을 사랑할 거라 착각한단 말이야.”
힘겹게 버티는 내게 그의 금안이 화려한 빛을 품었다.
“엘퀴네스가 말해주지 않았어? 내가 널 죽이지 않는 건 아직 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트로웰, 나는…….”
“그에게 감사하도록 해. 친해지고 싶다니, 내게 그런 건방진 말을 하고도 살아남은 인간은 지금 네가 유일하니까. 물론 그것도 그리 오래가진 않겠지만.”
“나는, 그게 아니라…….”
“난 인간을 믿지 않아. 너처럼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은 특히 더 그렇지.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도 수작 부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트로웰은 내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서늘한 음성을 마지막으로 그의 모습이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덕분에 질식할 것만 같던 공기도 같이 사라지면서 몸의 떨림이 간신히 멈췄다. 나는 그제야 깊은숨을 내쉴 수 있었다.
“잘 부탁한다더니.”
이럴 줄 알고 그런 거지, 트로웰.
까칠한 아버지에 이어 이번엔 까칠한 형인가. 무슨 놈의 가족 관계가 이렇게 꼬이는 건지 모르겠다. 헛웃음을 삼키다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