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435화 (435/608)

제435화

“오늘 기차 운행은 끝났어요. 조금 전에 떠난 열차가 막차예요.”

매정한 역무원의 답변에 나는 망연자실했다. 기차역에 들어설 때 느꼈던 설렘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어쩐지 역에 사람이 별로 없더라니, 설마 기차가 벌써 운행을 종료했을 줄이야. 시간은 이제 막 정오가 지난 시점이었다. 한국만큼의 편의를 기대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한두 대는 더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내가 너무 기대한 모양이다. 하지만 고난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그럼 다음 열차는 언젠데요?”

“어디 보자. 로함까지 가시는 거면 사흘 후에 오시면 되겠네요. 오전 8시에 한 대 있어요. 그걸 놓치면 이번엔 닷새를 기다리셔야 하고요.”

“헐, 무슨 배차 간격이 그렇게 길어요?”

“거참, 기차 처음 타보세요? 원래 장거리 열차는 다 그래요.”

“그, 그래요? 배가 그런 줄은 알고 있었는데, 기차는 안 그런 줄 알았어요.”

“어휴, 진짜 뭘 모르시는 분이네. 중간 지점인 오멜로 가는 열차는 내일도 있긴 해요. 하지만 거기서 로함까지 가시느니 여기서 다음 열차를 기다리시는 게 더 나을 겁니다.”

투덜거리며 설명을 마친 역무원은 다음엔 놓치지 말라며 휴대용 시간표까지 챙겨줬다. 매정하긴 한데 묘하게 친절한 사람이었다.

“어떡하지. 다음 열차가 너무 늦게 와.”

“일단 저자 말대로 하는 게 나을 거다.”

“저걸 타는 건 안 돼?”

기차역 근처엔 다른 운행 수단이 많았다. 말을 빌리는 것도 가능했고 마차도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축사로 보이는 건물이었다. 울타리 안에 안장을 채운 거대한 새들이 묶여있었다. 조금 전에 사람들이 그 새를 타고 날아오르는 걸 봤었다. 어떤 의미에선 기차보다 더 기대되는 운행 수단이었다. 그러나 엘뤼엔의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비조라면 별로 추천하지 않는다.”

“비조? 저 새를 비조라고 하는구나.”

“그래, 비조는 마차보다는 빠르지만 먼 거리는 이동하지 못한다. 계속 갈아타야 하는 데다가 밤엔 운행하지 않지. 단거리에는 적합하지만 지금 네 상황에선 시간만 더 잡아먹을 거다.”

“으음, 그렇겠네.”

여기서 세이크 제국으로 가려면 기차를 타고 로함이라는 항구 도시로 이동한 후, 거기서 배를 타야 한다. 그리고 로함까지는 기차로만 나흘을 잡아야 하는 거리였다. 깔끔하게 포기한 나는 다음 열차가 올 때까지 묵을 만한 숙박이나 알아보기로 했다. 다행히 엘뤼엔은 이런 부분에서 돈을 아끼는 편은 아니었다.

“특실.”

오히려 통이 매우 컸다. 그것도 너무 지나칠 정도로 컸다.

“아니, 손님. 이러시면 곤란한데요.”

짤랑짤랑, 난처한 음성이 흘러나올 때마다 같은 속도로 금화가 떨어져 내렸다. 특실이 다 차서 자리가 없다는 말에 엘뤼엔이 보여준 반응이었다. 주인이 곤란하다고 말하면 엘뤼엔은 묵묵히 쏟아내는 금화의 양을 더 늘리기만 했다. 일명 돈으로 밀어붙이기. 화려하게 반짝이는 금화의 향연에 여관 주인의 눈은 사시나무처럼 흔들렸다. 난색 하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주체하지 못하는 게 훤히 보였다.

“이래도 없다면 나가지.”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준비하겠습니다.”

결국 이 말도 안 되는 사치의 현장은 엘뤼엔의 승리로 끝났다. 기준치를 훌쩍 뛰어넘는 금화는 없는 방도 만들어냈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는 걸 온몸으로 증명한 그를 나는 황당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뭐지?”

“……아니, 아무것도 아냐.”

이제까지 그와 이런 식으로 여행을 다녀 본 적이 없다 보니 알지 못했던 일면인데, 엘뤼엔은 무조건 고급 여관에 특실만 썼다. 상황이 따라주지 않아 협소한 여관에 묵어야 할 때도 그중에서 가장 좋은 방만 택했다. 어딜 가도 최고급만 고집하던 라피스와 영혼의 단짝이 따로 없었다.

뭐, 그건 그럴 수 있다 치자. 넘치는 돈 원하는 곳에 쓰겠다는데 뭐라 할 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막 쓸 거면 대체 왜 내 금전 감각을 우려한 건지 모르겠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바로 그거다. 물론 본인이 쓰는 건 괜찮아도 남이 쓰는 건 아까울 순 있겠지만.

‘하긴, 신세 지는 걸 당연히 여기면 안 되지.’

계약자를 돕는 선을 정하는 건 정령왕의 재량. 그가 한 푼을 내주지 않아도 나는 할 말이 없는 처지다. 그런 주제에 이미 전반적인 의식주를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숙박이야 엘뤼엔 뜻대로 정하는 거니 내 책임이 없을지 몰라도 먹을 거나 입는 것에 돈을 쓰는 건 전부 나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불만을 품는 건 정말 염치가 없는 거였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편하게 융통할 수 있는 자금이 없는 건 불편하긴 했다. 지금이야 엘뤼엔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지만 나중엔 어떻게 나올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자립할 방법을 찾긴 해야 할 것 같았다.

때마침 근처에 있는 무리가 시선을 끈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식당을 겸하고 있는 여관 일 층은 여러 사람으로 가득했다. 그중 한 테이블에 무장한 자들이 떠들썩하게 웃으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정규 병사로는 보이지 않았고, 용병이나 그와 비슷한 계열의 종사자인듯했다.

그 모습을 보니 한동안 잊고 있던 직업군 하나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괜찮은 직업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으면서도 빠르게 돈을 벌 수 있는 고소득 직종.

‘헌터가 되자.’

* * *

“기각.”

헌터가 되어 돈을 벌겠다는 말에 돌아온 반응은 칼처럼 단호했다. 환영은 몰라도 반대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 기각이야? 나 계속 빌려 쓰고 있는 거잖아. 여기서 빚이 더 늘어가는 것도 무섭고, 내 돈벌이 정도는 하고 싶어.”

“네가 돈을 버는 방법도 결국은 정령술을 쓰는 것 아닌가? 지금 내게 신세 지는 거랑 뭐가 다르지?”

……어, 그게 그렇게 되나?

잠시 할 말을 잃었더니 엘뤼엔이 그것 보라는 표정을 짓는다. 왠지 시작부터 말려드는 기분이라 나는 서둘러 손을 저었다.

“아냐, 정령술 안 써도 몬스터는 잡을 수 있어. 힘으로도 바루스인가? 그 급은 될 거야. 뱀 꼬리 괴수라는 몬스터를 나뭇가지로만 잡았거든.”

“거창한 꿈을 꿨군.”

“아냐, 진짜야. 증명할 수도 있어. 지금 바로 몬스터 잡으러 가도 돼.”

믿어달라는 시선을 보내자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그가 손을 잡게 하더니 힘을 줘보라고 했다. 있는 힘껏 힘을 주니 살짝 찌푸린 얼굴에 어이없어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무술을 익혔나?”

“아니.”

“하긴, 그런 것치곤 굳은살이 없군. ……이게 타고난 힘이란 말이지. 뭐, 이제 와선 더 놀랄 것도 없나.”

중얼거린 엘뤼엔이 오랜만에 탐색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얼마간 쌓은 시간이 있어서인지 처음만큼 경계하는 시선은 아니었다. 비록 다음으로 이어진 말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지만.

“그래서? 힘이 강하니 정령술은 안 쓰겠다는 건가? 정령의 힘이 필요 없다? 그럼 넌 왜 정령사가 됐지?”

“어? 그런 뜻은 아닌데.”

“그런 뜻이다. 인간은 의식주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생물이고, 그에 있어 가장 필요한 건 돈이지.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돈을 버는 수단에 있어 정령사인 네가 정령술을 배제하겠다고 말했다. 결국 네게 정령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면 뭐지?”

“아니, 그치만…….”

정령술 쓰면 신세 지는 거라며!

입을 벙긋거리고 있으려니 엘뤼엔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할 말이 있나?”

“……아냐, 내가 잘못했어.”

결국 순순히 항복을 선언하는 내게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탄한 일정이 계속되니 네 처지를 잊은 모양이지.”

“아니, 그런 건…….”

“착각하지 마라. 자립이란 건 여건이 되는 녀석이 하는 거다. 지금 넌 내 통제 아래 있어야 하는 존재고. 내가 자애롭고 할 일이 없어서 널 지원하는 것 같나?”

현실을 일깨우는 말엔 어깨가 절로 움찔했다. 결국 빚을 지우는 것도 날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한 수단이라는 소리였다. 돈이 없으면 자유가 제한되고, 그만큼 의존할 수밖에 없으니까.

“이 계약이 유지되는 한 네가 자유로워질 일은 없다. 쓸데없는 일에 머리 굴리지 마라.”

“……알았어.”

그래도 조금은 친해진 줄 알았는데, 아직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섭섭한 마음이 생각을 휘저으려는 걸 억지로 눌러 참았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까,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엘뤼엔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하지만 헌터가 되겠다는 건 좋은 생각이다.”

“어?”

“네가 라미아스를 만나려면 적당한 신분이 있어야 할 테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라미아스라는 블루 드래곤은 지금 귀족으로 유희 중이었다. 그것도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대귀족의 일원이라고 했다. 자작 정도만 돼도 평민은 쉽게 만나기 힘든 거물이었다. 문전박대를 당하지 않으려면 자연스럽게 접촉할 수단을 만들어야 했다.

“고급 헌터 정도면 나쁘지 않겠지. 상위 몬스터의 부산물은 귀족 시장에서 특히 가치가 높으니 그걸 수단으로 삼으면 접점을 만들기도 쉬울 거다. 그 수상하기 짝이 없는 마신관의 신분을 내세우는 것보다는 훨씬 낫군. 나쁘지 않은 판단이다.”

장담하지만 엘뤼엔만큼 채찍과 당근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이도 없을 거다. 잠시간 가만히 바라보았더니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뭐지?”

“어, 으음. 아무것도 아냐. 그럼 헌터 해도 돼?”

“네 뜻대로 해라. 기사급의 완력에 상급 정령술까지 할 수 있으니 지금 그대로도 악시스 급은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거다.”

“악시스? 그게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이었나?”

“그래, 대륙 어디를 가도 대우받는 등급이지. 제일 높은 레기아 급이 되면 귀족이 초대하지 못해 안달하는 존재가 될 거다. 물론 정령왕의 계약자라는 걸 밝히면 등급 따위는 더는 의미가 없겠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바라보는 엘뤼엔의 시선이 의미심장해서 나는 살짝 긴장했다. 내가 어떻게 답하는지, 덫을 놓고 시험하는 눈이다. 당연히 이번엔 방심할 생각이 없었다.

“그건 밝히지 않을래. 괜히 골치만 아파질 것 같아.”

역시나 정답이었는지 건조하던 그의 입가에 짧은 웃음이 스쳤다.

“인간들이 재밌는 구경을 놓치겠군.”

“재밌는 구경?”

“미네르바와 계약한 인간이 마침 세이크 제국에 있지.”

설명은 그거로 충분했다. 그 한마디만 들어도 복잡한 상황들이 머릿속에 절로 그려졌으니까. 하나도 진귀한 정령왕의 계약자가 무려 두 명. 그런 두 사람이 한 장소에 모이는 거다. 얼마나 지대한 관심과 흥미가 쏠릴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매 순간 비교해대는 말이 쏟아지겠지. 같은 자리에 서기만 해도 온 사방에서 주목할 게 뻔했다. 그것도 국가 단위로.

“……역시 안 밝힐래.”

“너와 같은 존재를 만나보고 싶진 않나? 한 세대에 왕의 계약자가 둘이나 나오는 일은 지극히 드물다. 너희 정도면 상당히 각별한 인연이지.”

“아니. 별로 관심 없어, 그런 녀석.”

“왠지 유감이 서린 어투인데. 이미 만난 적이 있나?”

“만난 적은 없어.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

“하긴, 인간은 저와 비슷한 존재에게 호승심을 느낀다 들었지.”

“그런 거 아냐. 그 녀석은…….”

미네르바를 배신하는 놈이잖아.

나도 모르게 내뱉을 뻔한 말을 간신히 삼켰다. 오래전 스치듯 들었던 이야기지만 내 기억이 틀리진 않을 거다. 미네르바는 인간 계약자에게 배신당했다고 했다. 정확한 시점을 알지는 못하지만 대략 4천 년 전이라고 했으니 지금 이 시대일 확률이 높았다. 그것만으로 그 녀석은 기피할 대상이었다.

“하려던 말이 뭐지?”

“으음, 별거 아니었어. 아무튼 그런 녀석에게 호승심 같은 건 없어. 안 봐도 내가 더 잘난 게 뻔한데.”

인간으로선 대단하지만 정령왕인 나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근거 넘치는 자부심에 엘뤼엔은 피식 웃었다.

“자신만만하군.”

“당연한 거 아니야? 엘퀴네스를 소환한 인간 자체가 내가 처음이잖아. 희소성만으로 쳐도 내가 더 대단하다고.”

“뭐, 그렇다 치지.”

이번에도 엘뤼엔은 짧게 웃어넘겼다. 이 정도면 지금의 그치고는 상당한 호평이었다. 그래도 조금은 나를 인정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평가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누가 대단하다고?”

“…….”

폐부를 파고드는 잔인한 음성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차마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어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등지고 선 시청 건물이 신랄하게 비웃는 것만 같았다.

헌터가 되려면 국가 기관에서 시험을 치르고 자격증을 받아야 한다. 게다가 이 시험도 접수한 당일에 바로 치를 수 있었다. 그래서 아침이 되자마자 호기롭게 시험을 치르러 간 것까진 좋았다. 그러나 막상 접수하고 나니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예상치 못한 관문이었다.

‘이론 시험도 있다고 말을 해줬어야지.’

알고 보니 헌터 시험은 두 가지 과정으로 진행됐다. 모두 한날에 치러지지만 1차의 이론 시험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2차에서 실기를 볼 수 있는 구조였다. 그리고 나는 이 세계의 기본 지식이 아주아주 부족한 사람이었다. 실기 장소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불합격 통지서를 들고나오는 나를 보고 엘뤼엔이 지은 표정은 앞으로도 한동안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네가 상식이 부족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는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어이없어하는 그를 보는 건 또 처음이다. 여기 와서 엘뤼엔의 진귀한 표정은 다 보는 것 같았다.

“헌터 시험은 실기를 더 중시한다. 그래서 이론 시험은 아주 기본적인 문제밖에 없지. 굳이 시험지를 만들 필요도 없어서 구술로 진행할 정도다. ……그런데 왜 여기서 떨어지지?”

“하하하, 그러게?”

“제대로 대답한 게 있기는 한 건가?”

“열 문제에서 두 개 정도는?”

“들어가서 밥이나 먹어라.”

“……응.”

상심한 마음으로 여관에 돌아갔을 땐 내부가 술렁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종업원은 물론 손님들까지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어수선하다는 느낌이었다. 여관 주인은 경비대로 보이는 이들과 한창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뭔가를 조사하는 중인 듯, 묻고 답하는 식이었는데 왠지 모두가 그 모습만 주시하고 있었다. 우리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는데도 종업원 중 누구도 알아차리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살인 사건이요?”

경비대가 떠난 후에야 나는 허둥지둥 주문을 받으러 온 종업원에게 진상을 들을 수 있었다.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아 안 좋은 일이 생긴 거라 짐작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심각한 사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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