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434화 (434/608)

제434화

“헉, 아까 그 아이예요! 정말 왔어요, 엘!”

“거봐, 내 말이 맞지? 앞으로 물이 필요할 땐 나이아스를 불러. 물의 정령이라 네가 필요한 만큼 물을 채워줄 거야.”

“헉, 정말요?”

“그럼 정말이지. 그렇다고 너무 자주 부르진 마. 지금도 나이아스를 부를 때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을 거야. 무리하면 몸이 아파질 수도 있어.”

“그, 그렇구나. 명심할게요, 엘.”

“아, 그리고 내가 정령 계약을 도왔다는 건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해줄래?”

그 말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랑시의 표정이 한껏 진지해졌다.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바짝 다가오더니 한껏 낮춘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이게 알려지면 엘이 곤란해지는 건가요?”

“음, 아마도?”

“그렇구나! 네, 알겠어요. 걱정 마세요, 엘. 절대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맹세해요.”

엄숙하게 선언하는 랑시의 표정은 몹시 비장했다. 아무래도 이 비밀에 내 목숨이 걸렸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그렇게 알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아 굳이 사실을 정정해주지는 않았다.

“고마워. 그럼 이제 정말 들어가. 날도 추운데 이러다 감기 걸리겠다.”

“네, 그럴게요. 근데요, 엘. 저,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음? 무슨 부탁?”

“저…… 엘이랑도 친구 하고 싶은데, 안 될까요?”

그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웃었다.

“난 이미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긴장하고 있던 랑시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잠시만요!” 다급히 말한 소녀가 허둥지둥 앞치마 주머니를 뒤지더니 곧 무언가를 내밀었다. 긴 가죽끈이 달린 작은 돌조각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냥 평범한 돌은 아니었다. 그 안에 조개가 깊이 박혀 있었으니까.

“오, 조개화석이네?”

“어릴 때 아빠가 주신 거예요. 숲에서 주우셨는데 여긴 바닷가도 아닌데 조개가 나왔다고 사람들이 다들 신기해했어요. 끈은 제가 직접 달았고요. 제 보물이에요.”

“그렇구나. 정말 신기하네. 그런데 이건 왜?”

“엘한테 드릴게요.”

“어? 나한테?”

“도움받은 게 너무 많은데 전 엘한테 드릴 만한 게 이거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의젓한 소녀는 뭐든 보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뭘 그런 걸 신경 써. 괜찮아. 마음만으로도 충분해.”

“아니에요. 꼭 드리고 싶어요.”

“하지만 이건 네 보물이잖아.”

“보물이니까 더욱이요. 엘이 간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린 친구잖아요? 전 나이아스를 볼 때마다 엘을 떠올릴게요. 엘은 이걸 보면서 절 생각해주세요.”

따뜻한 마음에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이런 말까지 들었는데 더는 거절할 수가 없어서 나는 조심스럽게 조개화석 목걸이를 받아들었다. 아마 이걸 가지고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 떠나기 전에 돌려주러 와야 할 거다. 다시 만날 기약을 잡는다고 생각하니 나쁘지 않았다.

“고마워. 소중히 간직할게.”

그 뒤로도 랑시는 몇 번이나 손을 흔들고 나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희미한 불씨마저 꺼지는 걸 확인한 후에야 나는 완전히 몸을 돌렸다. 내일 아침이면 내가 도망갔다는 걸 알고 난리가 나겠지. 그 과정에서 랑시가 도왔다는 걸 들킬 가능성이 컸다. 어린애한테 큰 책임을 떠넘긴 기분이라 찜찜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달랬다.

“음, 근데 나야말로 괜찮은 건가. 이거 아버지한테 들키면 혼날 것 같은데. 왠지 사고를 친 느낌이…….”

“그걸 지금 알다니 유감이군.”

“……!”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식겁해서 고개를 들자마자 절로 신음이 흘러나갔다. 언제 온 건지 엘뤼엔이 스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저승사자를 만난다면 이런 기분이겠지. 하필 배경도 컴컴해서 더 무섭다. 눈이 마주치니 날카로운 시선에 꿰뚫릴 것만 같다. 나는 억지로 마른 침을 삼켰다.

“어, 언제 왔어? 왔으면 기척이라도 내지.”

“방금 네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는 알고 있나?”

“아, 그게 말이지…….”

“평범한 꼬마를 정령사로 만들 수 있는 인간이라니. 정말 기가 막히는군.”

난 아무런 대답을 못 했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도 다 변명이고, 전부 거짓말이었다. 안 그래도 화가 난 그를 부채질하는 꼴이 될 게 뻔했다. 침묵을 택한 나를 그가 가만히 응시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전부 봐주는 건 아니다.”

“……아니, 난…….”

“네 기행은 흥미롭지만 이번은 정도가 지나치군. 넌 지금 왕의 영역을 침범했다. 내가 널 어떻게 할 것 같은가?”

“다신 안 그럴게.”

잽싸게 답하니 엘뤼엔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대로 살려두는 게 옳은지 가늠하는 시선이다. 그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만으로 손끝이 차가워졌다.

괜찮아, 아직 시벨리우스를 만나기 전이다. 언제 어떤 경로로 그와 만나게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함께 어울린 시절이 있다고 했다. 그 기억 속에서 나는 여전히 정령사였고, 엘뤼엔과도 함께 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를 만날 때까진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르든 무사하다는 소리였다.

“넘어가 주는 건 이번뿐이다.”

역시나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전신을 압박하던 기운이 사라졌다. 그제야 나는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예상대로 되었지만 기쁘진 않았다.

거참 살벌해서 못 살겠네. 까칠한 아버지랑 잘 해보려니 도통 어려운 게 아니다. 전대 엘퀴네스의 성격이야 익히 들어왔지만 직접 경험하는 건 기분이 전혀 달랐다. 이쯤 되니 그와 계약하겠답시고 수백 차례나 소환해댔다는 라피스가 위대해 보일 지경이었다. 분명 그때마다 온갖 구박에 험한 말과 더불어 모진 협박이란 협박은 넘치도록 들었을 텐데, 그 고고한 자존심에 그걸 어떻게 다 참았나 모르겠다. 나 같으면 치사해서라도 진작 때려치웠을 텐데.

아, 그래서 새장까지 준비하게 된 건가. 사람의 일은 한 치 앞도 모른다더니. 그때의 그에게 공감까지 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제 왜 그랬는지 절실히 알 것 같다. 그쯤에선 계약하겠단 생각보다는 엘뤼엔을 엿 먹이겠다는 의지가 더 강했을 거다. 분명히!

‘……그런데 정작 그걸 내가 당했지.’

얼마나 모진 집념으로 만들어낸 건지 깨부수느라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다. 생각해 보니 괜히 억울해져서 나는 엘뤼엔을 슬쩍 노려보았다.

“왜 그런 시선이지?”

“……아냐, 아무것도.”

아, 정말 너무 억울하다.

* * *

4천 년 전의 아크아돈은 인류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시대였다. 마법만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 기본적인 의식주를 비롯한 문화 수준이 전반적으로 크게 발달했다는 시대. 수많은 학자와 연구가들이 지금까지도 회자하고 있는 영광의 과거.

내가 그걸 제대로 실감한 건 도시에 도착하고 나서였다. 작은 마을은 그나마 비슷한 편이었는데, 성문을 지나자마자 이전과 비견할 수 없는 문화적 충격이 온몸을 덮쳤다. 문 하나를 두고 다른 세상으로 건너온 기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잘 정비된 건물들 너머로 내 시대에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체가 존재하고 있었다. 쭉 뻗은 철도와 그 위를 달리는 긴 몸체. 바로 기차였다.

세상에, 기차라니. 이런 것도 있는 세상이었어? 너무 놀라서 걷는 것도 잊고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으려니 엘뤼엔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뭐지?”

“기차가 있어.”

중얼거리듯 답한 말에 그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기차를 처음 보나?”

“음, 그런 셈이지?”

그러니까, 여기서는 말이다.

게다가 기차라곤 해도 내가 아는 형태랑은 달라서 감상이 색달랐다. 외견 자체는 19세기의 증기기관차랑 비슷한데 연기를 배출하는 기관이 보이지 않았다. 석탄이 아닌 다른 연료를 사용하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 놀라운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저거 뭐야? 통신 장치? 공중전화 같은 거야? 저게 보급되어 있다고?”

“가로등이 있네! 게다가 마도구잖아?”

“헐, 비행 몬스터? 저거 지금 사람이 타고 있는 거야? 저것도 이동 수단이야? 저걸 가축화했어?”

시선을 두는 곳마다 온통 감탄할 것 천지였다. 그 바람에 자꾸 걸음이 지체되자 엘뤼엔이 혀를 차며 강제로 내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알았으니 적당히 해라. 저런 것들에 놀랄 정도니 비행선을 보면 까무러치겠군.”

“비행선? 비행선도 있어?”

“네가 촌뜨기라는 건 잘 알았다고 했다.”

촌뜨기라니! 과거의 문명이 더 발전해서 놀란 거지 그거 자체가 신기한 건 아니거든! 내가 이래 봬도 지구 출신이야! 거긴 자동차에 비행기에 우주선도 있다고! 티브이랑 컴퓨터가 뭔지는 알아? 인터넷이란 건 들어나 봤냐고!

물론 억울한 감정은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할 말이 있냐고 묻는 듯한 엘뤼엔의 시선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으니까.

“……좀 더 구경하면 안 돼?”

씨알도 먹히지 않을 부탁은 당연히 그 자리에서 기각됐다. 아주 짧은 도시 관광이 꽃을 피우기도 전에 종료를 고하는 순간이었다.

영혼의 보석을 개인이 소유하는 건 금기다. 그러나 찾는 것 자체는 금기가 아니었다. 내 목적을 알자마자 염옥에 던져 넣을 것처럼 겁을 주던 엘뤼엔이 그 자리에서 계약을 끊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는 마음이 내킬 때까진 영혼의 보석을 찾는 것에 협조하기로 했다. 내가 그걸 찾아서 뭘 하려는지 궁금한 것 같았다.

문제는 그조차 보석의 행방을 알지는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어딘가에 있다는 건 확실하지만, 그 장소가 어딘지 누가 발견했는지 같은 관련 정보는 철저히 감춰져 있었다. 하긴 알려졌다면 이미 신계에 회수되었겠지. 나중에 안 거지만 영혼의 보석을 발견하는 자들은 대부분 신고하지 않는다고 한다. 존재 자체가 워낙 희귀하다 보니 수집 목적으로 암암리에 거래된다고. 일종의 장물이라는 소리였다.

“정령왕의 시야를 피해서 은폐하는 게 가능해?”

“혼이 깃든 물체가 영혼의 보석만 있는 건 아니니까. 작정하고 정교하게 감추면 구분이 쉽지는 않다. 그게 드래곤의 짓이라면 특히 더 그렇고.”

“한마디로 소유주가 드래곤 중에 있단 말이네.”

“말귀를 한 번에 알아들으니 다행이군.”

이 시대의 엘뤼엔은 같은 말을 더 기분 상하는 방식으로 하는 재주가 있다. 발끈해봤자 나만 손해니 그냥 흘려듣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도 혈압이 오르는 건 어쩔 수 없어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일단 드래곤을 만나봐야겠어.”

“설마 물어보면 대답해줄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기대는 안 해. 그래도 부딪쳐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잖아. 적을 이기려면 먼저 적을 알아야 한다는 말도 있고.”

“글쎄. 처음 들어보는 말이지만, 포부는 좋군.”

“어쨌든 보석이 드래곤한테 있다며. 그럼 하나씩 공략해볼래. 드래곤을 만나게 해줄 수 있어?”

엘뤼엔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들 일족의 유희 시즌이다. 수면기에 들어간 녀석들을 제외하면 전부 유희 중이지. 이 시기의 드래곤은 위급한 상황이 아닌 이상 자신만의 유희 원칙에 따라 움직인다. 내가 불러도 응하지 않을 거다.”

“음, 그럼 직접 찾아가지 뭐. 여기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드래곤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해?”

“가장 가까운 드래곤이라…….”

위치를 가늠하는 듯 엘뤼엔의 시선이 먼 전방을 향했다. 그러다 곧 얼굴을 찌푸렸다.

“……하필.”

“왜? 누군데?”

“지역을 옮기지. 드래곤이라면 다른 녀석도 있으니.”

“어차피 다 만나봐야 할 것 같은데? 보석이 누구한테 있는지 모르는 거잖아.”

“……그럼 그놈을 마지막으로 하는 게 좋겠군.”

“왜 굳이 멀리 돌아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며.”

“그 녀석을 만나도 제대로 된 대답은 듣지 못할 거다.”

“그건 다른 드래곤도 마찬가지 아냐?”

맹세하건대 절대 일부러 반박한 건 아니다. 나로선 그냥 당연히 드는 의문을 제시한 것뿐이었다. 본인도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는지 잠자코 입이 닫혔다. 그 대신 그는 눈빛으로 모든 말을 대신했다. 새파란 눈빛이 살기를 머금은 것처럼 흉흉해진 걸 보려니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엘뤼엔이 저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드문데. 누군지 몰라도 정말 만나기 싫은 모양이다.

“음, 그럼 그냥 마지막으로 할까?”

어색하게 웃으며 타협을 시도하자 잠시 노려보던 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싫은 걸 미뤄봤자 좋아지진 않겠지. 어차피 소문이 돌 테니 더 골치 아프게 나오기 전에 차라리 빨리 용건을 끝내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겠군.”

“대체 누군데 그래?”

“라미아스라는 녀석이다. 6천 년을 먹은 블루 드래곤이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라는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블루 일족의 라미아스, 전대 엘퀴네스의 소멸 이후 수면기에 들어갔다는 드래곤 일족의 장로가 바로 그런 이름이었다. 정화진의 주축 중 하나를 맡았던 오칼의 조부이기도 했다. 지금 이 시대에서라면 아마도…….

“계약자 아니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그, 그냥 찍은 거야. 블루 드래곤이라며. 블루 드래곤은 물 속성이잖아. 게다가 6천 살이나 먹었다면 정령왕과 계약했겠구나 싶었던 거지.”

“그런 건 알면서 왜 균열은 모르는 건지 정말 이상하군.”

“…….”

그런 식으로 자꾸 아무렇지 않게 핵심을 찌르지 말아 줄래. 적어도 사전에 신호 정도는 줬으면 좋겠다. 표정을 못 숨기겠잖아. 이래 봬도 나는 양심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다. 거짓말은 잘 못 한단 말이야.

어쨌든 그렇게 라피스를 찾는 여정의 첫 번째 목적지가 정해졌다. 라미아스가 유희 중인 나라, 세이크 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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